인간을 무시하는 제도, 개인을 밟아버리는 체제, 생명성을 외면하는 힘과 권력, 그러한 것들이 똘똘 뭉친 로마제국의 잔학과 무자비를 이기지 못해 예수는 십자가 처형을 당한다. 그는 고통스러워 하였다. 육체적으로.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더욱 괴롭게 고통스러워 하였다.
예수는 하늘을 향해 그리고 아버지를 향해 몸부림친다. 그의 하나님을 향한 최후의 진술은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요!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누가복음 23:34)이다.
예수의 저 한 마디는 어디에서 발견할 수 없는 매우 특수한 진술이다. 왜냐하면 세상 권력의 보편성 앞에서 예수는 직접 그 권력의 자명함을 근본에서부터 무화시켰기 때문이다. 힘과 권력과 온통 사악함으로 둘러싸인 어두운 세상 가운데 로마제국도, 그리고 인간도 그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만이 그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것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예수의 진술의 특수성이다. 너무 특수하기에 현실적으로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하고 예수는 현실의 역사에서 퇴각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저 주장의 보편성이다. 예수의 감각은 현실적 세상 속에서는 전혀 파악되고 감지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소리는 세상 가운데에서는 그저 허망한 헛소리이며, 그의 행동은 십자가의 죽음을 불러일으킬 만큼 도발적인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행은 세상에 겁을 주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현존하는 세상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처형당하고 세상으로부터 사라졌다.
그러나 예수의 내면적 감각은 세상에서 잡히지 않는 보편성에 의거한 감각이었다. 세상에서 잡히지 않으나 세상을 근본에서부터 본 것이다. 그것은 특수한 주장이나 하나님의 감각이다. 하나님의 보편성을 가지고 세상이 하는 일에 대해서 <모른다>라고 말하였다. 아, 세상은 예수의 생각과 삶을 특수하게 생각하였지만, 예수에게 있어서 세상은 너무나 특수한 곳이다. 그곳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소망이 사라진 어둠의 현실일 뿐이다. 예수에 의하면 세상은 세상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하나를 배운다. 모든 현실주의는 자신의 자리가 세상의 무대에서 특수하게 인증되는 것을 두려워한 이들의 태도일 수 있음을. 오히려 나와 우리의 생각이 현실에서 어떻게 인지된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집중보다는 자신의 감각과 인격을 거룩한 영의 빛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키워내야 할 과제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현실의 분노와 퇴출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영의 민감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세상의 아들이냐 하나님의 아들이냐의 문제는 우리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궁극적인 질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