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은 아주 우연히 삶에 찾아든다. 책을 보다 지쳐버린 두 눈은 리모콘의 도움으로 또 다른 세상을 향한 창인 텔레비젼의 커튼을 열었다. 이리저리 20여개가 넘는 방송의 내용을 한꺼번에 모니터할 수 있는 정보나 열정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내가 물리적으로 텔레비전과의 휴식의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시간, 그 순간의 모든 방송을 ARD부터 프랑스 방송까지 빠르게 스캔하는 짓이다.
그마저도 기력이 없을 때에는 ARD나 ZDF 그리고 뉴스채널인 N-TV를 찾는다. 그나마 기력이 남았던 오늘은 방송들을 검색하는 과정에 아주 낯익은 얼굴이 PHOENIX에 스쳐 지나갔다. PHOENIX는 전문 문화-정치채널로서 문화 다큐멘타리나 정치 토론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을 중계한다. 루터의 얼굴을 그 채널에서 순간 발견하였으며, 다른 방송들을 검색하지 않아도 될 충분한 흥미로움이 머리에서 반짝였다. 거기에는 요즘 독일에서 상영중인 영화 루터의 장면, 그리고 직접 화면으로 담은 역사의 현장, 또한 루터의 역으로 당시의 상황을 구현한 극이 재현되었다. 난 몇 년 전 보았던 에트프르트의 어거스틴 수도원과, 라틴어 성서를 번역했다는 루터스투베, 그리고 95개조 반박문이 붙여졌던 교회의 정문을 다시 생생하게 보고 경험하였다. 나는 천천히 루터의 삶이 생생하게 그려진 그 다큐멘터리를 아주 인상적으로 응시하였으며, 역사와 시간을 가로질러 루터의 여정을 헤아릴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경험하였다. 짧지 않은 시간 내가 접한 정보와 인상, 그리고 루터의 정신은 내가 쉽사리 소화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변주와 깊이로서 파격적이면서 집중적으로 전달되었다. 행운의 기운이 다 가시기 전, 몇 시간 후에 나는 다시 아도르노를 다룬 다큐멘타리를 보았다.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그리고 벤야민이 고민하였던 추운 근대의 계절을 아주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거기엔 목소리와 얼굴이 있었으며, 시대에 대한 생생한 고민의 흔적이 영상으로 담겨져 있었다. 기술시대에 이루어지고 있는 예술개념의 변화를 고민한 벤야민, 모든 사물과 사회의 본질을 근대의 개념의 빛에 비추어서 그 의미를 해석하는 아도르노, 또한 그들이 스쳐 지나갔던 흑백 무성의 미국 영상이 생생한 의미의 활력과 집중을 통하여 나에게 전달되었다. 이야기란 내용을 기억 속에 유지시키는 것이라면, 영상이란 몸이 없는 사상을 오늘의 우리에게 생생하게 감각의 차원에까지 스며들게 하는 형태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잘 정련된 영상을 통하여, 오래전에 희미하게 존재하였던 정신의 운동을 아주 구체적으로 교감하게 된다. 그것은 참 행복하고 의미있는 경험이다. 도서관은 사물적으로 존재하고, 우리는 도서관의 책을 의지적으로 읽는다. 진정한 영상은 정신의 의지적인 행위에 연루된 우연적 오독과 비전문적 해석을 지양하게 한다. 물론 거기에는 수많은 문헌과 자료, 전문적 해석이 겸비되어야 함은 마땅하다. 나는 며칠전에 ZDF에서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6편으로 나누어서 방영하는 초심리학PSI에 관한 다큐멘타리 또한 아주 인상적으로 보았다. 다양한 주제의 고급 다큐멘타리를 참으로 잘 만든다.
이러한 여러 경험을 바탕으로 난 이곳에서 만난 몇몇의 다큐멘타리 방송에 대한 강렬하고 행복한 인상과 그 고마움을 지울래야 지울 수 없게 되었다. 거기에는 주제에 관한 문헌적 철저성과 전문가들의 다양한 포진, 그리고 시청자들의 사상에 대한 깊은 관심과 섬세한 취향이 한 몫을 할 것이다. 다큐멘타리는 근본적으로 회색 빛의 멜랑콜리이다. 왜냐하면 다큐멘타리에 있어서 나리이터의 목소리와 시선은, 전달하고자 하는 초점의 뒤에 철저하게 숨어야 하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치 잡티가 묻어있지 않은, 정적 가운데에 드러나는 순백의 메시지 재현일 수록 그 다큐멘타리의 감동은 더욱 크며 성공적이라 생각한다. 소멸되어가는 것들에 대한 재현, 하지만 그 재현의 과정에서는 몸을 철저하게 숨기는 듯한 나레이터의 나지막한 작업, 그러나 결국 그 작자의 재현작업을 통하여 우리가 그 사상을 접할 수 있는 새 시공간이 탄생된다. 근본적으로 미디어와 시청자는 비대칭적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문화적 시공간을 창조시킨 그들에게 베푸는 감사함과 나의 호의가 그들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든 내게 허용된 사상적 발현의 공간들을 구체화하는 노력이 그들에 대한 감사의 징표가 될 것이다. 루터와 아도르노, 그들에게는 어떤 동질성과 공통점이 존재한다. 어떤 이유로 아직 구체적으로 심화시키지 못했던 종교적, 사회적 <근대성>Modernität에 대한 고민을 더욱 핵심적으로 접근하고 나의 사상적 육질로 체화하는 것은, 오늘 다가온 행운에 대한 나의 예의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