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밤의 시내 돌바닥들은 축축히 비에 젖었으며 노란 조명에 의해 물기가 반사되었다. 밤 8시 30분에 상영되는 요즘 독일의 뜨거운 감자 몰락 Der Untergang을 보았다. 코발트 빛 영화의 정조는 종일 침울하였고, 이상스럽게도 1년 전에 본 Das Experiment가 연상 되었다. 그리고 몇몇 인물들은 그 영화에서 본 얼굴들이었다. 알고 보니 그 감독이 그 감독이라 한다. 영화는 히틀러가 자살하기 전 10일 동안 그와 간부들이 기거하였던 베를린 벙커의 시간을 담았으며, 나름대로의 사실적인 고증과 기록을 바탕으로 제작된 듯 하였다.
독일은 여전히 깊은 정신적인 질환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히틀러라는 역사적인 경험은 단지 60년 이전 밖에 안된 그 조상들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역사는 어떠한 픽션보다 더 잔혹했고 적나라했던 사실들이다. 20세기 유럽을 휘몰았던 그 죽음의 마성을 후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인가. 그러므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본능적인 역사적 사죄와 반성이다. 헤아려보면, 인류에 가한 잔혹한 상처들이 반세기 동안 온전히 아물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영화에서 히틀러는 인간적인 면모를 잠시 보여주지만, 그로 인해 히틀러가 일으켰던 잔혹한 희생들을 대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가오는 소련군의 점령 앞에서도 나치즘의 몰락 보다는 자살을 선택하는 벙커에서의 괴벨스와 처 막다, 그리고 막다가 입에 구겨 넣어버린 독에 의해 죽어가는 어린 자식들의 모습은 매우 처절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왜 당시 독일이 어떠한 정신적이고도 역사적 기원 속에서 이렇게 잔혹한 나치즘을 잉태했는지를 더 깊이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속에서 보여지는 이들의 엄격한 조직주의적 태도, 그리고 논변과 주장에서는 끝을 보고자 하는 냉혹하리만치 건조하고 직설적인 자기주장들, 또한 사회적 문화적 학문적 시스템의 구현과 보완을 위해 끊임없는 진화를 시도하는 태도들이 오늘은 문득 수상해 보였다.
히틀러는 몰락하였다. 독일민족은 반성하였으며, 그것은 지금도 지속된다. 하지만 그 반성이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마감시한은 어느 누구도 쉽게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그 벙커에서의 긴박했던 운명들을 같이 나누었던 이들의 역사적인 바이오그라피가 자막으로 흩뿌려진다. 전후 뉴런베르크 법정에서의 심판들로 인해 몇몇은 오랜 감옥살이를 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죽음으로 쓸쓸한 종말을 맞이하였다. 친일파 청산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히틀러 제국의 욕망은 결국 5천만명의 인명들과 6백만명 유대인의 희생과 함께 아스라히 몰락하였다. 여전히 독일과 유럽의 야만, 희생, 상처, 흔적은 아물어지지 않았다. 아직도 이는 진저리 치는 현재형이다. 나는 작년 아우슈비츠를 갔을 때 포로들이 남기고 간 엄청난 스케일의 안경과 구두를 보면서 흐느꼈던 독일 친구가 떠올랐다. 그들은 오늘 영화관에서도 흐느꼈으며 자막이 다 올라갈 때까지 침묵을 지켰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나 또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의도치 않게 일부 옹호하였던 옛 글이 떠올랐으며, 이는 혹시 깃털처럼 가벼운 견해는 아니었던가 하는 반성을 돌아오는 길목에서 하게 되었다.
* 이 메모를 남긴 후 잡지 슈피겔을 둘러보니, 일부이지만 히틀러의 인간적인 면을 어떻게 접근할 수 있냐는 불평의 논평을 이 영화에게 가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렇게 인간적으로 부각되었다는 인상을 받지는 않았다. 스파게티를 먹는 히틀러는 인간적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는 한 독재자의 외소함과 안쓰러움 같은 것이었다. 히틀러에 대한 외소함과 안쓰러움이라는 정서적인 이해 뒤편으로 히틀러의 역사적인 과오가 숨어버린다는 염려가 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모든 인간들의 마음에는 저러한 히틀러와 같은 마성적 본능이 있을 수 있다는 낭만적인 일반화로도 확대되지 않았다. 오히려 추상적인 히틀러라는 이름이 구체적인 역사와 영상의 옷을 입고 부활되고 있다는 면에서 실감이 났으며, 조금은 끔찍했다. 점심을 먹으며 스테파니, 그리고 디안나와 함께 어제 본 영화 이야기를 조금 나누었다. 디안나와 스테파니는 자신들이 어렸을 적 학교에서 역사시간에 히틀러의 만행에 대해서 상당히 자세하게 배웠다고 한다. 스테파니는 그 영화를 아주 충격적으로 보았다고 한다. 물론 그 친구가 히틀러의 만행을 역사시간에서 배웠었음에도 말이다. 눈에 뻔한 패전을 앞두고도 승리욕에 불타 무고한 국민과 군인들을 포화의 현장에서 퇴각시키지 않은 히틀러를 영화에서 아주 실감나게 묘사하였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독일의 전후 책임과 반성이 언제까지일 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쉽게 단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그 반성은 언제까지가 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내가 물어보니, 최소한 다음 세대에까지는 가야하지 않겠느냐고 스테파니는 말한다. 자신의 세대에서도 과거의 역사를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하면서, 최소한 자신은 다음 세대에게 과거의 역사에 대한 교육과 반성을 강조하고 싶다고 말을 한다. 참 쉽지 않은 문제인 것은 분명하다. 가해자였던 히틀러와 독일도, 그리고 피해자였던 수많은 독일국민과 주변의 나라들도, 그리고 오늘을 더불어 살고 있는 우리들도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