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tersemester 2004/05를 맞이하여 학교는 다시 활기찼고, 3개월간 잠잠했던 기숙사는 새로운 청춘의 기운이 감돈다. 겨우 몇 개월 전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치루고 의대에 입학한 샬로테부터, 이제 기숙사 생활 5학기에 접어든 한국에서 온 전 모군까지, 다양한 세대와 문화의 공존을 시작한 날이다.
하이델베르크 에큐메니칼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울고 웃고 푸닥거리 하며 살았던 4학기 덕분에, 이제는 공동체 경험보다는 조용한 내면의 교양을 위한 시간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 푸닥거리의 아지트를 뒤로 하고 다리 건너 2년전에 착지한 이 신학기숙사는 그나마 여유가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일주일에 두번 예배와, 한번 명사와의 좌담, 그리고 그 시간 이후 빠에서 와인을 하고 춤을 춘다. 오늘은 바로 그 날이다.
이곳의 친구들 알고 보면 참 구수하고 아기자기하며 촌스럽다. 1년전인가 찌라시 분위기의 기숙사 친구들 정보가 담겨 있는 종이잡지를 만들더니, 다시 시대에 뒤떨어지는 만행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흑백복사의 노동이나 금전거래 이런 것 다 번거로우니 한번 PDF로 만들어보는 것은 어떠한지 개인적으로 제안을 하였다. 투표 끝에 이번 잡지는 종이복사에서 PDF로 만들자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공계 친구들이 몇몇 있어서 PDF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4년 전에 같이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였던 친구 나탈리가 이번 학기에는 이 기숙사에서 준목 인턴과정을 참여하기 위하여 같이 산다. 참 반갑고 기쁘다. 날씨가 찌뿌둥하거나 마음이 답답할 때 같이 생맥주라도 같이 한 잔 할 수 있는 오래된 친구가 가까이 있으니 참 좋다.
이번 학기는 나에게 매우 중요한 학기이며 여러 과제가 앞에 있다. 짬을 내어 연말에 Tabea 집을 방문하여 잘 알려진 뉴렌베르그 크리스마스 마켓을 탐방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숙제이다.
빈궁한 나의 세월은 쌓이지만 새 학기는 끊임없이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이 있으면 또 끝이 있을 것이다. 이번 학기는 모험보다는 치열함의 학문적 저변 확대를 꿈꾼다. 학문의 과제를 인격의 수양과 결부시켜 자기 검열하는 태도 또한 잠시 멀리 할 필요도 있다. 그러한 태도로 학문을 하는 것은 적어도 지금 이 시점에서는 과욕이다. 음악이 선사하는 영혼의 이완이 감각의 이완으로까지 퍼져버릴 수 있음을 경계한다. 그러므로 음악에 대한 어떠한 적대감을 고취해야 할 때이기도 하다.
태곳적부터 자연이 인간에게 허락한 하루가 24시간이라 한다. 그 시간을 내 삶에 대지에 충일하고 치열하게 안착시켜 본 경험이 별로 없다. 내 밖의 것들에 기생하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내 생은, 그러므로 더더욱 유죄다. 그래서 이 학기의 과제는 단 하루라도 충만한 희열의 시간을 내 삶에서 체험해보는 것이다. 아, 하나 더 있다.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벤야민을 앞으로 조금씩 만나야 할 때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격정적으로 사는 것,
지치도록 일하고 노력하고 열기 있게 생활하고,
많이 사랑하고, 아무튼 뜨겁게 사는 것,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