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초에는 정말 바쁘다.
나는 즐겁게 일을 한다.
손에 잡은 일들이 모두 잘돼서 떠난다.
순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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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제 린저, 생의 한가운데 中 1933년 11월 30일의 일기이다.
70년 전에도 분명 가을은 있었겠지. 그리고 학기초의 바쁜 기운들도 있었겠고. 그러나 2004년 나의 가을과 나의 학기초는 많이 다르다. 생각보다 복잡하게 여러 일과 느낌들이 마음 안에 엮어지고 자행된다. 며칠전 실미도를 보았다. 그리고 Fahrenheit 911을 두 번이나 보았다. 중국 드넓은 광야 벌판에서 구르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친구와 이야기를 자주 하였다. 그리고 행정수도 이전 위헌 뉴스를 접해 들었다. 또 어제는 독일의 대통령선거방송을 늦은 밤까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거기에 나온 전문가는 오늘의 미국을 기독교 르네상스가 가장 화려하게 발현되는 시대로 규정하였다. 부시에 대한 기독교인의 지지와, 부시의 기독교적 선악관념에 오던 잠이 확 깨어버렸다.
첫째, 구조에 희생되는 개인에 대한 고려이다. 구조의 극단적 추상태는 국가이다. 국가에 의해 희생되는 개인을 어떻게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웃긴 것은 거의 많은 경우 국가에 의한 개인의 희생은 확연히 존재한다. 단지 개인과 사회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는 있을 지언정 말이다. 개인은 국가나 구조가 설정한 프래임 안에서 미시적으로 개체적이며 제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많은 경우 오늘날의 자명한 현실같다. 내가 주목하게 되는 그 구조의 성질은 한국의 반공주의와 자본주의, 미국에 있어서는 네오콘과 보이지 않는 수많은 권력의 검은 손들, 그리고 미국의 저번에 깔린 근본적 기독교 보수주의이다.
둘째, 그 구조가 어떻든 그 구조를 움직이는 핵심 인자의 욕망이 구조의 제어력을 과잉할 때의 문제이다. 이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중국 친구에 있어서 데모크라시라는 시스템은 선험적이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서구의 한 역사적인 모델일 뿐이다! - 민주주의를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해석학적 독창성이 난 너무나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그 친구의 입장에 반기를 여러모로 가하기 이전에, 나는 질문을 하였다. 그렇다면 정말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 라는 미명 하에 전개되는 개인의 욕망을 얼마나 주목하고 있었는가? 미국 민주주의 피라미드에 당당하게 서 있는 부시는 얼마나 교묘하게 국민과 시스템을 발라먹고 있는가? 민주주의라는 시스템 자체가 여하한의 궁극적 행복을 줄 수 없음을 나는 너무나도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다.
셋째, 권력과 기독교이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적 신념이 개인의 삶의 실존적 스케일에서부터 구조적 스케일에까지 어떻게 운용되는지를 자각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신념은 대단히 실존적일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대단히 우주적일 수가 있다. 실존적인 영역에 충족되는 기독교적 신념이라 할 지라도 그 영역을 넘어가버리면 오히려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개인적 영역의 기독교적 신념에 대한 진정성과 진실함이 담보된다고 하여서, 그것이 구조적인 영역에까지 무한 적용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념이 실존의 영역과 구조적인 영역에 어떻게 운용되고 어떠한 동력으로 기여될 지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기준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아주 전통적이며 고리타분한 논의가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의 질문들이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논의를 넘어선 메타적인 수위이며, 더 깊이 보자면 개체들의 기독교적 신념이 어떻게 시스템에서 의미를 발휘하고 영향을 미치며 시스템을 구동시키는가의 문제이다.
기독교적 신념이 실존적인 영역으로 고착되었다는 판단이 들 때(이러한 판단을 안에서부터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고려해야 할 점은 자신의 기독교적 신념이 얼마나 진정하며 신앙적 원천위에 서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이러한 의식적인 판단에서 분명한 선이 보이지 않으면, 신념의 기저에 혹시 어떠한 개인에 연루된 욕망이 작동하는지를 직시해야 하는 점일 것이다. 신념이 욕망의 배다른 모습인지를 봐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 민족을 자신의 힘으로 파괴한 전쟁의 전범 부시를 재선시킨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와 근본주의 세력, 그리고 그를 지도자로 세운 지독하게도 이기적인 미국시민의 의식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기독교라는 문화가 도대체 인류의 역사에 어떠한 일들을 진행시키고 있는가. 역사는 길쌈하면서 모든 경험을 자신으로 내재화한다. 동시에 역사는 내재화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을 완성시키거나 파괴시킨다. 내가 고민하는 것은 무소불위의 미국이 역사의 뒤안길로 힘없이 사라질 수도 있음에 대한 염려와 기대이기도 하지만, 그 허망한 제국을 오랬동안 지탱해왔다던 기독교라는 신념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다. 그리고 그러한 권력적이고 정치적인 구조의 그늘에서 잠시 피고 지는 들풀과 같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언제라도 그의 위험스러운 욕망 때문에 대한민국도 이라크처럼 단숨에 날라갈 수도 있다는, '약자'로서의 불안함 같은 것이다.
나는 자신의 욕망과의 싸움에 이미 진 부시의 재선을 이라크에서 죽어간 수많은 영혼들을 생각하며 분노한다. 그리고 역사의 단죄를 받아도 부족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미국시민의, 국가애를 빙자한 이기적인 태도에 대해 분노한다. 그는 대통령의 이름을 다시 얻었지만, 하느님은 그리고 알라는 그 살인자들의 이름을 결코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