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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11. 09] 11. 폭력(Die Gewalt)






오늘 슈베벨 교수의 에큐메니칼의
조망에서 본 현대신학 보어레중은
예상된 대로 빵꾸가 났다.
어느 먼곳 신학강연을 위하여
길을 나섰다고 한다.
대신에 예고된 대로 패르난도 엔스가
오늘 대타로 강의를 하였다.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사 논의에
기름칠을 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보인다.


엔스는 주로 폭력의 문제를 중심으로
프로 세미나를 개설하여 지도하고 있다.
WCC 폭력극복운동을 구상한
당사자이자 전문가이며
아직 잘 정리가 되지 않은
폭력문제를 신학화 하고자 하는
시도로 보인다.
한국 NCC에서도 폭력극복에 대한
주제로 특강이 꾸준히 열리고 있단다.


그런데 엔스에게 있어서
Vorlesung에서 강의를 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Vorlesung은 한 마디로 교수가 자신의
전공에 대한 깊은 이해와 드넓은 전망을 가지고
강의주제에 관련하여 학생들에게 교통정리를
해 주는 특징이 있다고 보여진다.

세미나는 책을 중심으로 서로간의
토론과 이해가 진행된다면,
Vorlesung은 교수의 연구성과를
직접 토해내며 그 방면의 다양한
성과들을 나름대로 엮어내어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주요한
요건이라 할 수 있다.

프로급의 교수에 있어서 Vorlesung은
특정주제를 그저 맛없이 읇조리는
것이 아니라, 한 권의 독자적인
해석이 담긴 책으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원고를
준비하여 그냥 읽는 것이다.
마치 새롭게 책이 나오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먼저
읽혀주고, 자신도 자신의 목소리를
귀를 통하여 들으면서
이전에 예감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자기점검하는 시간 또한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Vorlesung의 원고는
교수의 새로운 책의 주요한
내용으로 나중에 출판되기도 한다.

그 Vorlesung을 위하여
앤스는 강의실에 왔으며
오늘 변신을 하였다.

1910년 Edinburgh에서 최초로 열린
Weltmissionskonferenz에서부터
1998년 Harara에서 열린
Vollversammlungen Konferenz까지
에큐메니칼 운동의 주요한
역사와 흐름을 두시간동안
강의하고 설명하였다.

여기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수업에
많이 들어오는 것이 매우 특이하다.
목사재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인지
아니면 소일거리가 없는 노인들의
지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듣는 강의인지, 수업료는 따로
있는지, 수강증은 나중에 따로
받는 것인지 아는 바는 하나도 없으나
참 보기 좋은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저번학기 보프 강의 때도
어른들이 대단히 많았는데,
학기초에는 실라부스로 불리우는,
책으로 나온 강의개설자료를
아예 구입하여 그 책을 보고 상의하면서
무엇을 들을까 서로 고민하고 결단하는
분들도 보았다.

여하간 엔스는 강의를 잘 마쳤으며
옆에 같이 수업을 듣는 실바나와 나는
수업을 마치고 앤스의 강의가
이번주 화요일 먹은 케익도 아닌데
맛있는 케익을 먼저 시음하고
따봉! 하면서 엄지손가락을 내비친
시늉을 다시 반복하게 되었다.

현재 WCC 에큐메니칼 운동의 주제가
폭력Gewalt의 문제로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확산되고 있는데
오후에는 폭력의 문제로 논문을
썼던 한 분을 만나게 되어서
이런 저런 흥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폭력이란 무엇일까?

폭력은 자신의 뜻과 소망이
어떠한 외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좌절되거나
자신의 의지보다 더욱 큰
힘에 의하여 자신의 결단에
변경을 요구받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마음의 해상도를 한
100배 정도만 높혀본다면
어쩌면 세상은 폭력의 분진으로
가득찬 곳일런지도 모른다.
우리는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사회가 우리에게 주조한
폭력관념에 조율되어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폭력에 대한 감각은
생존하고자 하는 본능보다는
한수 아래의 영역일런지 모른다.
우리는 대부분 한 풀 꺾여서
흑백처리된 폭력에 대한
둔한 ASA 감도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폭력은 건강한 소통가 중단된
뒤틀린 상호거래 내지는
단절 위에 핀
포자일런지 모른다.

더 나아가서 폭력의 젖줄이 되는
뒤틀린 실체에 대한 무감각을
강요하거나 은폐하는 경우는
더욱 고상하게 진행된
폭력의 또 다른 모습일런지 모른다.

나는 폭력극복운동에 관련해서도
이 운동이 현상적으로 폭력과
소외가 상대적으로 몰린
지구의 남반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향한
캠페인으로만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그간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지구 남반부와 북반부 사이의
여러 현격한 격차와 갈등과
소외, 그리고 역사가 보여주는
소극적인 혹은 적극적인 착취의 현실을
간과한체, 그로 인하여 부수적으로
야기되는 물리적 폭력에 대한 극복을
지향한다 한다면 이는 대단히 수상한
치정일런지도 모른다.

폭력의 극복은
휴전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폭력이 일어나는 근본적 배경을
직시하고 없애는 것이
진정한 극복의 의미라 생각한다.


또 하나의 궁금증도 들었다.
폭력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하느냐의 문제이다.

특히 폭력은 원초적으로
양자(Two Body)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거나 합의를 이루기 어려울때
드러나는 모종의 파산선고의 한 양식이다.
만약 이 폭력이 그저 한 존재(One Body)의
정체성에서 출현한 표현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주 물리적인 예를 들어서
폭력배가 어느 어두컴컴한 골목을
지키고 있다가 거기를 지나치는
시민과 학생을 구타를 하였다 치자.
거기에 지나치다 구타를 당한
사람은 시민이든 학생이든
당사자의 신분과는 관계 없이
어떤 경우이든 일어날 수 있는
폭력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대단히 물리적인 예이기에
폭력성을 지닌 한 존재의 독자적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사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더욱 일반화된 폭력이나
특히 정신화된 폭력의 양상을
헤아려본다면
폭력은 어떠한 개별적인 인자의
정체성이 그대로 드러난 사태라고만
말할 수 없는 다른 측면이
개입되어 있을 수 있다.

일단은 가장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한 사건을 헤아려보자.

몇년 전 연대 앞의 공중전화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었다.
요는 전화를 오래 하는 한 사람과
전화를 기다리는 뒷 사람 사이의
긴장이 살인사건으로까지 이어진
경우이다.

현실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는
살해자는 살해 하였으며
피살자는 피살 당하였다.
그러나 전화를 기다리는 뒷 사람이
화를 내지 않았다면,
혹은 그저 웃음만
내비쳤다는 가정을 가지고
우리는 여기서 조금은 공허한
사유실험을 해보는 것이다.

결국 살인으로까지 이루어졌던
현실적 가해자의 폭력성을 무색하게
할 만큼 그 전화를 기다리는 뒷 사람의
웃음이 효과를 보았을런지는
현실적으로 계량적으로
어느 누구도
예측하거나 확인하기에
이 둘은 현재
너무 먼 길을 가버렸다.

실례는 언제나 어떠한
가정이나 추측을 완전히
보증하거나 만족시킬 수는 없다.
이 예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생각할 거리로
우리가 잡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모든 폭력은 일단 양자 사이에서
빚어나는 문제이고 그렇기 때문에
주체의 장field에서 그저 잠재화
되어 있는 운명의 것들도
관계의 장field이 어떠한
패턴으로 형성되느냐에 따라서
폭력의 가능태가 재현될 수 있거나
혹은 그저 가능태로만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정작 표현을 해놓고 보니,
양자론을 바탕으로 한
사건 이해를 염두해본다면
그저 둘 사이의 관계의 장에 따라
가능성이 현실화 되거나
가능성이 그저 가능성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도식의 근저에는 대단히
고전적인 발상이 얽혀져
있다는 인상을 지울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Two Body)의
관계성 안에서 폭력 출현의 문제를
고려하는 것은 그저 어느 일자의
속성으로서 폭력을 규정하고
그저 현실화로서 이해하는 것보다는
더욱 중요한 맥락들을 많이
포함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이렇게 폭력의 출현은 양자의 공간 관계론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몫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 이 양자의 시간 관계론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만약 공간-관계론적인 맥락이
presentational immediacy의 차원이라면
시간-관계론적인 맥락은 causal efficacy의
차원이라고 보여진다.

즉 폭력의 출현은 양자의 동시적 결합과 긴장의
문제가 아니라 양자의 특성과 정체성을
구현하게 하는 과거에 대한 문제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것이며
한 개인의 역사를 떠받치는
그 사회가 주조한 관념과
이데올로기를 문제 삼는 것이다.


요즘에는, 아내도 많이 맞지만,
남편도 많이 맞는다고 한다.

어느날 저녁 식탁의 한 풍경이다.
늦게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아내에 의하여 매를 맞아서
잘못하여 실명을 한다.
이유는 아내가 차려준 밥을
남편이 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이 폭력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인가.
이 폭력은 아내의 바램 - 남편의
즐거운 식사 - 이 충족되지 못하여
일어난 사태일까.

만약 남편이 회사의 여러 부담스러운
과제를 머리속에서 지워내지 못하였기에
그랬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바삐 사는 한국사회의 모든
스트레스를 마음에 품고 산
전형적인 한국직장인의 원형적인
모습은 아니었을까.
혹시 아내는 밥을 먹지 않은 이유를 넘어
남편에 대한 원초적 불만을
이전부터 품고 있지는 않았을까.


일단 남편과 아내라는 가족구성원 사이의
폭력이라고 보기에는 대단히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폭력과 혐의가 닿아있다.

어쩌면 사회가 그 개인에게 주는
폭력은 대단히 구조적이기에
역설적으로 대단히 은밀한 방식일런지 모른다.
베이트슨은 이러한 방식을 contingent system으로
지적한 바가 있다.

달은 그저 달이 아니다.

그 힘은 사실 우리가 너무 구조적이며
광범위하게 작용하기에 우리는 그 힘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달은 그저 달이 아니고
지구의 모든 물과 바다를 일정한
방향으로 밀고 끄는
엄청난 힘과 에너지이자
가장 중요한 요인인 것이다.


구조적으로 기능하는 폭력성은
사회 전반에 걸쳐 진행하기에
존재의 field로서 대부분 형성되며 수행된다.
그러나 존재의 field가 일정한 패턴화를 거쳐
초점focus으로 형성될 때에는 분명하게
인지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심리적 개념으로는 무의식과 의식이며
형이상학의 용어로는 causal efficacy와
presentational immediacy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어떤 의미에서
주체는 주체 이상이다.


주체가 타자에 거는 폭력은
주체와 타자 사이의
송수신 오류 메시지를
은근히 꿈꾸고 살아온,
주체의 깊이에 침잠해 있는
용기 없는 폭력성의 출현이다.

세상은 애시당초 주체에게는
대단히 낮설기도 한
자신의 모태와 같다.
세상이 건네는 은밀한 폭력 앞에
주체는 애써 눈을 감아버리거나
혹은 그저 타협하고 살아간다.

세상과 사회가 간직하고 있는
공고한 폭력성 앞에 개인은
대단히 무기력하게 방치되거나
수동적으로 암기를 요구받곤 한다.
동시에 기억상실을 요구받곤 한다.

어떤 의미에서 순수한 개인에
기반한 폭력이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최소한 둘 사이의 엇갈림
혹은 둘이 얽혀 있는
복잡다단한 관계와 사회의
대리전을 이 연약한 주체들은
수동적으로 재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체는
어찌보면
귀신이다.







요점.

독일대학의 Vorlesung,
패르난도 엔스의 변신,
WCC의 폭력극복 운동,
폭력의 관계론





폭력의 관계론에
직면한 주체의 아르키미데스점을
제대로 이끌어내지못한 것 같다.
시간 또한 오래 되었다.

더 이어나가고자 하였던
폭력과 메저키즘,
그리고 성스러움은
다음에 헤아려 봐야겠다.





Kevin Kern - Le Jard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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