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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03. 06] 16. 폴 리꾀르의 해석의 갈등 (Text)



Paul Ricoeur, Le Conflit des Interpretations








Paul Ricoeur (1913 - )







폴 리꾀르, 양명수 역, 해석의 갈등, 아카넷, 2001









16. 상징이란 직접 의미, 일차 의미 또는 문자 의미가 흘러넘쳐 다른 의미, 곧 간접 의미, 이차 의미 또는 상징 의미를 낳는 의미구조를 가리킨다. 이때 이차 의미는 반드시 일차 의미를 거쳐 생긴다. 그와 같은 이중 의미 표현을 다루는 것이 해석학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17. 우주 상징은 사물에 뿌리를 박고 있고, 꿈의 상징은 성교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시의 상징은 느낌을 주는 영상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서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이 다르지만, 이 세 가지 상징 유형은 하나같이 그 출현을 언어 요소에 두고 있다. 말하는 사람 이전에 상징은 없다. 상징의 힘은 더 깊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말이다. 우주와 욕망과 상상력이 표현되는 곳은 언어다. 세상을 다시 취해서 세상이 성스런 무엇이 드러난 것이 되게 하는 데는 언제나 언어가 필요하다. 꿈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말을 통해 언어의 차원으로 나오지 않으면 꿈은 닫힌 채로 갖혀 있다.

18. 정신분석학은 자기가 찾는 것만을 찾을 수 있다. 그가 찾는 것은 꿈과, 신경증, 예술, 도덕, 종교 속에 들어 있는 표상과 정서의 <경제>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가장 원초적 욕망에 속한 표상과 정서를 담고 있는 표현들만 뒤지고 다닌다.

21. 모든 해석학은, 분명하게 드러나든 그렇지 않든, 결국 남의 이해를 거친 자기 이해다.

22. 장 나베르Jean Nabert의 말에 따르자면, 반성은 우리 존재의 표시인 작품이나 행위들을 비판함으로써 우리 존재를 소유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반성은 비판이다. 이때 비판이란 칸트처럼 앎과 의무를 자리매김한다는 뜻은 아니다. 삶이 담긴 문서를 풀어내는 작업을 거친다는 점에서 비판이다. 그처럼 문서를 풀어내는 작업을 거쳐서만 <코기토>를 포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성은 비판이다. 반성이란 존재하려는 우리의 욕망과 노력을 증언하는 작품들을 통해서 존재하려는 우리의 욕망과 노력을 잡아내는 것이다.

23. 그러므로 반성은 두 겹의 문을 거쳐 이룩된다. 삶을 말하는 문서를 통해서만 실존이 확인된다는 것이 첫번째 문이다. 의식은 먼저 허위의식이므로 늘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는 비판을 통해 이해를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 두번째 문이다.

28. 정신분석학은 주체의 고고학에서, 정신현상학은 목적론에서 그리고 종교현상학은 거룩한 상징을 통해서 그 점을 말하고 있다.

34. 내 작업가설은 이렇다. 나는 앞에서 상징을 겹뜻의 힘이라고 정의했는데, 뜻의 시간이 바로 그 상징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다. 상징은 어떤 뜻을 통해 어떤 뜻을 낳는다. 상징속에서 1차 의미라 할 수 있는 문자 의미 또는 물리적 의미가, 2차 의미 곧 영적 의미 또는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의미를 낳는다. 나중 것들은 그처럼 간접으로밖에는 생겨날 수 없다. 상징은 생각을 불러 일으키고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상징은 말하고 있는 것 이상을 말하고, 끊임없이 말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뜻의 넘침과 시간 사이에 아주 근본적인 관계가 있음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그 관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38. 랑그에는 차이만 있다. (일반언어학강의, 166쪽)

45. 언어는 또한 문화의 조건이다. 문화는 언어와 비슷한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문화나 언어나 상반되고 상응하는 논리 관계를 통하여 무엇을 뜻한다. 그래서 언어를 여러 구조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바탕으로 볼 수 있다. 때로는 더 복잡하지만 결국 언어와 구조 형태가 같으며 그러면서 여러 각도에서 문화를 이루는 것들을 언어가 받아들이는 것이다.

56. 전통은 오래 가고 다른 구조 속에서 되살아나는데, 그렇다면 전통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다각도의 내용 형성이지 구조의 재생이 아니다.

67. 상징은 뜻이 없어도 안 되지만, 너무 많아도 안 된다. 겹뜻, 곧 다의polysemie가 상징의 법칙이다. <불은 태우고, 밝히고, 깨끗하게 하고, 태우고, 열정을 낳고, 없앤다. 그러나 성령의 힘을 가리키기도 한다. 전체가 통일되어 있지 않으면 가치들이 서로 떨어져 나가고 겹뜻은 사라진다. 중세 상징학자들이 관심을 둔 것은 바로 그 <신비한 결합>이다.

73. 그런데 기술이나 목표에서 해석학은 다양하지만 그 기초 조건은 모두 같다. 내가 볼 때 해석학 수준의 특징은 거기에 있다. 우리가 여기서 보려는 것은 바로 그 기초 조건이다. 그것은 상징이 언어 밖의 현실 세계를 표현하는 장이라는 점이다. 그 기초 조건은 해석학이 아닌 다른 수준과 비교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해석학에는 폐쇄된 기호 세계는 없다. 언어학은 자기 만족의 세계 안에서 움직이고, 뜻 안의 내부 관계만 있다. 퍼스의 표현을 빌리면, 언어학은 기호들끼리의 상호 해석 관계만 있다. 그러나 해석학에서는 기호의 세계가 밖으로 활짝 열려 있다.

74. 그리하여 상징은 텍스트에서 무엇을 드러내는 수준에서 볼 때, 언어가 자기와 다른 것을 향해 터져 나가는 것이다. 내가 <개방>이라고 부른 것이 그것이다. 터져 나감은 말함이다. 그리고 말함은 지시다. 그러한 겹뜻의 구조는 해석학들에서 모두 같다. 다만 개방의 형태가 다르고, 가리키는 것이 다를 뿐이다. 해석학의 강점과 약점이 거기에 있다. 약점은 언어를 붙들지만 동시에 그 언어가 언어를 빠져나가기 때문에, 해석학이 취하는 언어를 과학적으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 닫힌 기표 세계에서만 과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약점도 모두 거기서 나오는데, 특별히 해석학을 여러 철학들의 싸움터 속에 내맡기는 약점이 있다. 그러나 약점이 강점이다. 언어가 자신을 빠져나가고 우리를 빠져나가는 그 지점이 바로 언어가 자기에게 돌아오는 지점이고, 언어가 <말dire>이 되는 지점이다. 가리키고 숨기는 관계를 정신분석학의 방식으로 이해하든 아니면 종교현상학의 방식으로 이해하든(오늘날에는 두 가지를 함게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발견하고> 드러내고 밝히는 힘으로서 언어는 제 역할을 하고, 제 모습을 찾는다. 그 때 언어는 자신이 <말>하는 것 앞에서 <침묵>한다.

85. 그러므로 상징을 생각할 수 있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상징을 구성하는 것을 가지고 말할 수도 있고, 상징이 뜻하는 것을 가지고 말할 수도 있다.

92. 언어의 첫번째 의도는 무엇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는 데 있으며, 그런 의도도 배제된다. 그 의도를,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즉시 이해한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게서 언어는 무엇인가를 노린다. 더 정확히 말하면 두 가지를 노린다. 하나는 관념이고(무언가를 말함), 나머지 하나는 실제로 가리키는 것(무엇에 대해)이다. 그 운동에서 언어는 두 가지 문턱을 넘는다. 관념의 뜻이라는 문턱과, 그것 너머로 가리킴이라는 문턱이다. 두 개의 문턱을 넘으면서, 다시 말해 초월 운동을 일으키면서 언어는 <뜻한다>. 언어는 현실에 손을 대고, 거기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다. 메이예Meillet에 따르면, 우리는 언어에서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내재와 초월이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내재 구조와 드러내는 차원을 고려해야 한다. 드러내는 차원에서 언어의 의미 교화가 현실의 자국에 제공된다.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해야 폐쇄된 기호 세계와 언어의 첫째 기능이 균형을 잡는다. 첫째 기능이란 말하는 데 있다. 닫힌 기호 세계와 달리, 말하는 기능은 열려 있다.

93. 말하는 사람에게 언어는 대상이 아니라 매개체다. 언어를 거쳐, 언어를 수단으로 삼아 우리는 우리를 표현하고 사물을 표현한다. 말한다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무엇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폐쇄된 기호 세계를 넘어서는 행위다. 말한다는 것은, 언어가 기호이기를 넘어서서 자신이 가리키고 겨냥하는 것으로 가능 행위다. 언어는 사라지기를 바란다. 대상으로서는 죽기를 바란다.

93. 문학은 언어의 소명이 말함에 있음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142. 환상의 핵심은 삶의 지속에 있다. 사람은 이해하고 느낄 뿐만 아니라 타고난 나르시시즘 때문에 늘 위안이 필요하며 그런 점에서 삶은 견디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런 가운데서 삶을 지탱하는 것이 환상이다. 그런데 문명은 사람의 욕망을 바꾸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자연의 막강한 파괴력에서 사람을 보호하는 일도 한다. 그처럼 존재를 위협하는 힘에 대한 싸움이 시작되지 않았거나 성공하지 못했거나 실패했을 때, 문명이 사용하는 또 다른 방식이 환상이다. 두려움을 몰아내고 잔인한 운명을 달래고 문명의 고통을 보상받기 위해 문명은 신을 만들어 낸다.

166. 자아가 리비도를 대상에 투자하지 않고 자기에 쏟으려는 것이 나르시시즘이다. 그러기에 정신분석의 가르침은 타격이 되고 자아의 리비도에 상처를 주는 것이다.

173. 정신분석학이 현대인에게 제시하는 의식화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르시시즘에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189.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무시간적zeitlos>으로 본 것은 아주 훌륭한 통찰이다. 시간 안으로 들어와 의식이 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나는 고고학archeologie이라 부른다. 충동과 나르시시즘의 고고학이고, 그것을 넓히면, 에로스와 타나토스라고 하는 두 거인 전쟁의 고고학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고고학 개념은 반성개념임을 알아야 한다. 고고학은 주체의 고고학이다.

209. 그러나 정신분석학이 사람에게 부여하는 능력은 단 하나이다. 욕망의 방향을 새롭게 잡는 것, 새롭게 사랑하는 능력이다. 이 말이 너무 진부하게 느껴지므로 조심스럽게 다른 표현을 쓰자. 새롭게 즐길 수 있는 힘이다.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사랑하고 즐기는 문제다. 사랑하고 즐기는 능력이 리비도와 금지에 의해 파괴된 채로 있다.

211, 그래서 정신분석은 어떤 윤리 규범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결의론에 대해서도 특별한 이야기가 없다. 일부러 그런다는 것을 나는 안다. 정신분석의 임무는 좀더 밑바탕의 물음을 제기하는 데 있다. 우리의 욕망은 자유로운가 아니면 얽매여 있는가? 말하고 즐기는 능력을 다시 찾으라, 그러면 나머지는 더해지리라. <사랑하라 그리고 [사랑을 가지고] 마음대로 하라>는 어거스틴의 말과 똑같지 않은가? 당신의 사랑이 젊음을 되찾으면 의지도 정의를 지닐 것이다. 법이 아닌 은총에 의해서.

233. 진짜 행위, 완전하게 이루어진 행위, 곧 의식의 인과관계가 뚜렷한 행위는 없다. 우리는 그런 행위를 하지 못한다. 우리의 결정은 모두 그처럼 완전하고 구체적인 행위에 미치지 못한다. 우리 행위가 덜 된 행위임을 우리의 노력이 증명한다.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행위의 부족함을 뜻한다. 완전히 이루어진 행위는 피로와 고통도 없고 노력도 필요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꼭 들어맞지 않는다.

250. <현존재>의 주체 물음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실존을 다시 들고 나오는 것이 <현존재>의 주체물음에 대한 응답이다. 그 때 <나는 존재한다>의 해석학은 죽음에 직면한 유한한 자기 통합의 해석학에서 결정을 이룬다.

251. 낱말은 개방된 존재에 이름을 붙여 손에 넣는다. 그런 식으로 말은 노네인noein 또는 생각Denken을 표현한다. 생각에는 거두어 수용함과 구획 짓는 폭력이 섞여 있다. 결국 <이름붙임>은 언어를 지닌 사람이 차지하는 자리와 역할을 보여준다. 여기서 존재는 언어로 나아가고, 말하는 유일한 존재가 탄생한다. 이름짓기는 존재의 개방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언어의 한계 속에 갇힘을 보여준다. 하이데거는 <재건한다>거나 <지킨다>는 말로 그 점을 설명한다. <지킴> 속에서 사람은 이미 폭력을 저지르고 감추기 시작한다. 여기서 사람이 존재를 이성으로 따져 지배하는 것, 예를 들어 논리과학이 가능해진다. 그러한 가능성의 기원은 언어에 있다. 언어는 존재를 낱말 속에 가두려고 한다. 모으는 짓 – 그 짓이 바로 <로고스>다 – 에는 구획지음이 들어 있다. 거기서 존재는 나타남에 묶인다. 낱말의 폭력이 그것이다. 여기서 이해해야 할 것은, 은폐에는 나타남의 한 측면이라는 점이다. 은폐에서 우리의 환상이 생긴다. 우리 사람이 언어를 <부릴 수 있다>는 환상이다. 그런 식으로 <현존재>는 언어의 창시자가 된다.

253. 그런데 그 모든 코기토가 나온 까닭은 소크라테스 이래로 똑같다. 주체 없이 진리를 세우려는 시도에 대항하는 것이다. 소피스타 경험주의자나 굳어 버린 이데아론 같은 것들에 맞서서 나온 것이다. 그런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반성철학이 나서면서 늘 똑 같은 모습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몰아낼 적과 동거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254, [정신분석학은] 그리하여 의식 차원을 뒤로 미루는 것이 작업의 시작이다. 의식<으로> 환원하지 않고 의식<을> 환원한다. 그런 점에서 현상학과 반대다. 의식의 <체험>을 서술할 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항상 그런 전제를 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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