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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10. 24] 22. Dogmatik 2









Dogmatik

24.10.2002.





1.

신과 신앙Gott und Glaube

오늘은 신앙의 문제와 관련하여 루터의 신앙교리문답Katechismus를 논의하고자 한다. 이 카테히스무스에 있어서 신앙의 문제는 그저 지적인 수용에 관한 배움과 학습Aneignung의 문제가 아니라 Learning by Heart의 문제로 접근된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고자 하는 것인가의 문제, 우리는 하나님에게 무엇을 선물받는 것인가annehmen의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바,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의지Wille Gottes는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하나는 율법Gesetz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Evangelium과 신앙Glaube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복음과 신앙을 통해서 율법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즉 은혜와 신앙을 통해서 율법은 실현되고 완성된다.

2.

마음은 인간의 중심이다. 우리의 의지는 마음에 속하며, 이성은 우리의 의지에 속한다. 우리는 또한 의지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인간의 자유는 인간 실존에 속해 있다. 인간은 그의 권한 하에 있는 것Unter uns에 대해서는 선택하고 결단해야 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우리는 아침에 식사를 할 때에도 그 선택과 결단의 과정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권한을 넘어 존재하는 것Über uns에 대해 인간은 절대 자유 할 수 없으며 순명 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다. 이렇게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자유와 우리가 추구할 수 없는 자유, 즉 하나님의 의지 사이에 인간의 실존은 놓여 있다. 인간은 그의 의지로 선택하고 결단한다. 그러나 결국은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에 속한 영역이다.

바로 인간의 의지와 이성으로 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지평인, 마음의 형성에 있어서 신앙은 관여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신앙의 형성은 바로 인간의 마음, 심장Herz의 형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이와 관련한 인간의 마음은 결코 자율적이거나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다. 멜랑히톤은 1521년에 개신교 교의학Evangelische Dogmatik을 기술하였다. 여기에서 인간은 그가 근본적으로 방향을 잡고 정향 하려는 그 의지가 얼마나 무능력한지inkompetent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만약 사랑을 경험한다면 이성적 기능이 얼마나 유한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이곳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저곳에서부터 사랑하자는 것, 이러한 의지와 계획이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지는지를 사랑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안다. 여기에서 끝! 이라고 단호하게 자신을 사랑 앞에서 제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인간에게 얼마나 있다는 말인가. 어쩌면 우리 안에 우리 심장이 속한 게 아니라, 우리 심장에 우리가 속해 있다. 바로 이러한 영역이 또한 신앙의 영역이기도 하다.

어거스틴 또한 이러한 문제를 아주 날카롭게 보았으며 그의 인간론에서 고민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 또한 이러한 어쩔 수 없는 감정이 중심으로 정향된 존재로 이해된다. 즉 우리의 마음이라 하는 것은, 사물과 인간을 포함한, 더욱 더 고귀한 가치에 대한 최종적인 신뢰를 간절히 원하며, 우리의 진정한 삶은 훨씬 무질서한 그 흔들림을 갖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인간은 이렇게 무조건적인 신뢰를 간절히 찾고 있으며, 그 하나님이 주신 신뢰와 하나님과의 신앙을 종국적으로는 희망하고 있는 존재이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신앙의 동물이다. 즉 이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와 신앙의 문제가 인간의 본성에 깊이 있음을 의미한다.

3.

루터의 관심은 이것이다. 즉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태도는, ›나는 너에게 온전한 신뢰가 될 것이다‹임을 강조하고 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서 신앙은 경험적인 요소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을 잘 알고 있다. 이는 다른 신을 찾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른 신을 찾아 나서고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근거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이 인간에게 더욱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과 바람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은, ›나는 너에게 나를 건네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에게 모든 수고를 하겠다는 뜻이다. 끝없는 도움과 권면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엄마Mama의 모습을 띄고 다가온다. 이는 종교의 한 형식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최종적인 결론은 인간을 온전히 세우게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다른 인간은 지옥일 수도 있다. 이 인간의 모든 충돌과 갈등의 와중에 신은 그를 드러낸다. 신을 통해서 우리는 이 시대와 더불어 관계적 인간을 형성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어떻게 우리는 진정 인간적 삶의 근거를 형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단서를 마련할 수 있다.

4.

신의 인간에 대한 관계는 계시Offenbarung의 개념으로 표현된다. 이 계시는 인간적 이성의 능동성으로 획득할 수 없는 영역이다. 우리는 계시신학과 다른 자리에 있는 부정신학을 알고 있다. 이 부정신학은 신 인식의 불확실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가지고 있다. 루터도 많은 이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였다. 계시는 하나님의 건네어 주심이다Geben Gottes. 이것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이야기와는 다른 차원이다. 계시는 하나님 자신의 현재화이며, 인간의 신앙과 관계하는 대상인 것이다. 이는 그를 인간에게 수여한다vergeben는 의미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우리에게(우리를 향해) 달려온다는 것을uns bedrängt 의미한다.

20세기의 신학적 논의는 하나님 또한 우리를 위해서 세계에서 고난 받을 수 있음을 문제 삼는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세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세계와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과 악의 끈질긴 경합의 세상 안에서 그를 치유하기 위하여 희망을 갖고 우리를 향해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악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한 치유, 치료, 해방Heilung이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다. Ratio essendi의 방향에서는 성부Gott 성자Christus 성령Geist의 순서로 전개된다. 그러나 ratio cognoessendi의 방향에서는 성령, 성자, 성부의 순서로 전개된다. 이 신앙의 인식 또한 이러한 과정을 밟는다.(cf. verbum externum vs testimonium interenum) 단지 나의 경험과 나의 경험이 강조되는 신 시대의 문화는 더욱 더 명백한 확실성unmittelbare Evidenz을 요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계시, 부정의 방법, 신앙의 인식은 더욱 더 숙고해야 할 대상들이다.

5.

Quid sit deus? 하나님은 누구인가? 다음의 문장, X가 구원을 성취하셨다X schafft Heil. 여기에서 이 X는 끊임없이 시대 가운데서 달리 이름을 얻는다. 시대 시대마다 새롭게 이름을 얻었다. 성서가 기록된 역사적 조건에서는 이 X를 야훼라 한다. 이 하느님의 특징은 개인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 역사적 내재이다. 그러나 수직적 내재가 결국은 수평적 현재화를 유인한다. 개인에게 역사하시고 결국은 곤궁의 상황에 처한 백성과 민족을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창조 안에서, 그리고 창조를 통하여 반응하신다Gott reagiert in der Schöpfung und durch die Schöpfung. 하느님의 정체성은 너, 너희들, 백성들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바로 X에 대체된 이름이라 함은 그 자리에 처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자기표현의 산물인 것이다. 하느님의 정체성은 그 자신에 대한 그들을 향한 보장Garantie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구약과 신약을 통한 하느님의 자기정체성의 전개를 논의할 수 있고,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통한 자기정체성의 전개를 이후 계속 논의할 수 있다.

6.

강의를 듣는 종일,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할 가을 어느 날 한국의 한 선생님의 강의 시간과 몇 년 전에 로흐만의 뜨거운 문장을 읽었을 때의 그 벅찬 감격이 다시 가슴을 타고 올랐다. 오랜 시간 동안 여전히 우리의 문제로서 가슴에 품고 가는 신앙, 계시, 은혜, 선과 악이라는 주제들에 대한 독일 교수의 신학적 고뇌가 서려있고 그러한 깊이를 가진 울림이 있기 때문에 나도 같이 공명한다는 인상을 가졌다. 강의 시간에 이러한 정서의 감동을 느낀다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군다나 남의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강의에 이런 감동을 느낀다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게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가 품고 있는 힘일런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을 했다. 사유와 언어를 넘어서는 고뇌를 품고 있는 한 선생의 마음이 나에게 느껴진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그만큼 하느님의 문제와 신앙의 문제는 우주에 엄연히 존재하는 신과 진리에 관련한 밀도 깊은 가치들이기에 그 자체가 주는 견고한 혹은 격정적인 정서와 감동을 동반한다. 악이 무엇인가? 악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라는 실재론적인 고민과 이론적 협상의 울타리에서 머뭇거리던 때가 있었으며 지금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다. 그러나 신학은 이러한 문제제기를 부분적으로 안고 있으면서, 더욱 더 근본적인 인간과 세상을 육박해 들어가는 논의의자 학문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악을 해명하는 것이 악을 치유하는 것에 필요할 수 있을 지언정, 충분조건의 모든 구성요소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과 신학은 유사하지만 이런 의미에서 훨씬 거리가 먼 두 갈래의 만날 수 없는 길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악은 존재한다.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 악으로 인해 인간은 끊임없이 고통 당하고, 또 그 악의 먹이가 되어 다른 이들을 고통의 구렁텅이에 몰아 넣는다. 물론 기독교는 도덕의 종교가 아니다. 신학은 도덕철학이 아니다. 그러나 도덕감은 신학(도)이 가져야 할 중요한 감각일 것이다. 신학이라는 학문의 기원과 도덕감의 함수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수반하는지 잠시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악에 대해서 말 하는 것은 도덕감 없어도 가능하다. 그러나 악을 고민하는 자는 이미 도덕감의 정서를 수준을 품고 있을 때 가능한 행위이다. 신학은 해명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치유해야 한다. 이럼으로 신학은 종교철학이 아닐 수 있다. 신학은 어떤 의미에서 당위의 학문이 되어야 한다. 물론 그 당위는 보편적이며 조화로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의 진지한 논리와 신학의 당위는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루터의 고민을 통해서, 그리고 그 선생의 고민을 통해서 마음으로 전달받게 되었다. 위의 메모는 – 그 육박해 오는 느낌과 강의에 비해서는 - 싸질러진 똥이다. 강의실에서 형성된 선생과 제자 사이에 팽팽한 정신의 현이 떠나고, 생생한 언어와 기억이 아스라이 떠나고, 그저 바싹 잉크 마른 채 겨우 남아 있는 몇 줄의 흔적일 뿐이다. 외국어강의라 집중하면서 메모하기는 더욱 힘들다. 그러나 모든 것이 망각 저편으로 모든 게 사라지기 보다는, 저 메마른 똥이라도 어루만지면서 지금 이 순간의 감동을 후일 회상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여기에 메모를 옮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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