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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10. 25] 23. Systematische Theologie 2

















Einfuehrung in Systematische Theologie

25.10.2002.






1.



조직신학은 신앙을 위한 명백한 내용에 관한 학문적 접근이다. 동시에 조직신학은 여러 다양한 영역의 연구 성과들과 연결시켜서 조명해야 할 과제가 있다. 기독교의 신앙고백은 또한 다른 종교와 신앙고백이나 양태와 유리되거나 독자적이어서는 안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신학이나 선교신학에 대한 조직신학의 고려는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조직신학은 상호 대화를 적극적으로 나눌 필요가 있으며 여러 사회문화적 현상과 문제제기에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또한 조직신학은 현대적 상황에 대한 도전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며 그 도전에 자기 자신을 새롭게 개간할 필요가 있다.



2.



우리가 왜 이렇게 정교하게 잘 짜여진 신학을 형성해야 하느냐에 대한 물음을 가질 수 있다. 그 대답은 단호한 Ja 이다. 왜냐하면 결국, 신학은 그리스도교적인 인간을 성숙하고 양육하는 데 그 과제와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하느님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이 신학적이 될 수 있으려면, 최소한 다음과 같은 봉사의 과제와 필요성을 충족해야 한다. 신학의 과제는 신앙의 문제를 언어를 통하여 정식화 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화는 신앙 공동체의 영역과 더불어 나아가야 한다. 신학의 최소한의 전제는 공동체와 개인 모두를 성숙으로 인도할 수 있는 신념에 대한 견실함Überzeugungskonsistenz과 사태에 대한 견실함Sachkonsistenz을 동시에 갖고 있어야 한다.



3.



신학의 탐구 방법은 미시신학적 방법과 거시신학적 방법으로 나눌 수 있다. 미시신학이 작은 신학이고 거시신학이 큰 신학이라는 의미가 절대 아니다. 모든 신학은 그 탐구의 미시구조Mikrostruktur를 가지고 있다. 이 미시신학이 빠질 수 있는 위험은 환원주의Reduktionismus이다. 이 환원론은 특히 현대에 있어서 많은 위험스러움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서 오늘날 독일에서 자연과학과 의학에서 유전공학Genomforschung의 문제가 아주 첨예하게 논쟁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학문적인 차원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구체적인 사태를 추상적으로 혹은 단일하게 환원해버리는 환원주의의 문제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그저 단편적으로 자연과학의 차원 뿐만이 아니라 철학과 신학에서도 많은 문제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는 미시신학적 방법론이 필요하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큰 전망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신학적 민감성Sensibilität을 통하여 큰 안목과 전망을 놓지 않는 것이 신학이 가야 할 아주 중요한 방향인 것이다. 거시신학은 바로 이러한 면을 강조하는 또 다른 표현이다.



4.



슐라이어마허의 사상은 개인에 대한 깊은 관심에 있다. 물론 이 개인의 문제를 니체나 칸트도 다루었다. 이들 또한 개인의 자유와 도덕에 대한 접근이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개인은 표준화된 개인으로서 해석된다. 슐라이어마허가 관심을 갖는 개인은 철저하게 구체적인 개인이다. 즉 추상적이고 일반적이고 표준화된 개인이 아닌, 구체적이고 유일회한 개인das konkrete und einmalige Inviduum을 슐라이어마허는 집중한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 포스트모던한 시대에서 강조되는 연속성이 상실된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개인의 문제에 대한 강조도 아니다. 그의 관심은 철저한 개체성Die radikale Einmaligkeit으로서의 개인과 공동체의 형성Form der Gemeinschaft 사이의 관계를 타진하는 것이다. 즉 나라는 한 개체의 개체성Einmaligkeit이 어떻게 타인과의 사귐Geselligkeit으로 열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5.



그의 고민은 다음으로 계속 이어진다. 종교는 위에서 말한 개체적 인간einzelne Menschen의 영역과 전체성을 기반으로 한 무한한 그리고 성스러운 인간성heilige Menschheit 사이에 있는 그 것에 주목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영혼Seele이다. 영혼은 이 양자 사이에서 두 가지 본성을 갖고 있다. 영혼은 모든 세상의 것을 그 안으로 배우고 느끼고 품으려는 본성이다.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밖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밖으로 나아가려는 태도이다. 이러한 양면의 충동die beiden Trieben, 그리고 이를 고양하려는 신앙적 본성의 비밀을 파악하는 것이, 종교의 과제라고 그는 보고 있다. 이러한 인간 내면의 문제를 밝히려는 프로그램이 바로 슐라이어마허의 신앙론Glaubenslehre이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의 이 프로젝트는 철저하게 신이라는 초월적인 거점과의 관계를 철저하게 단절하고 그 개인의 내면 자체가 어떻게 문제시 되고 있는지를 해명하려는데 그 특징이 있다. 다른 한 편으로는 모든 형이상학적인 가설을 매개로 관련되고 해명되는 인간 내면의 논의 또한 분명히 거절한다. 그에게 있어서 형이상학적, 혹은 세계 저편의 문제는 일차적인 관심이 아니다. 그리고 도덕과 관련된 종교와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일단은 떼어내고 문제를 접근해 들어간다.



이렇게 종교 가운데 형이상학과 도덕이 묻어 있는 부분을 철저하게 제거하고 개인 그 자체의 문제를 신앙과 관련하여 그는 접근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형이상학적 도덕적 차원에서 해명되는 것은 종교와 신앙 자체의 고유한 영역eigenes Gebiet이 아니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에 있어서 인간 내면이 지니고 있는 종교와 신앙의 핵심적인 가치는 감정Gefühl과 경건함Frömmigkeit 이 둘로 이해된다. 인간은 종교를 통해서 무한한 우주와 자연을 전망하게 되면서 동시에 자기를 그 우주에 열게 된다. 종교는 개인 앞에 펼쳐진 무한성Unendlichkeit에 대한 의미Sinn와 향유Geschmack를 얻게 된다.



6.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매우 기이하리 만치 문제제기와 통찰이 풍부한 신학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려는 데 매우 큰 관심을 가졌고, 청교도적 경건성의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통해서 구체적인 개인의 중요성을 자각하였다. 그의 또 다른 관심은 공동체적 사귐과 연대이기도 했다. 물론 그는 어느 누구보다 구체적이며 유일한 개인의 문제를 일차적으로 밝히려고 노력했지만 말이다. 이 공동체적 사귐과 개인의 유일성을 가교할 수 있는 그 매개가 그에게 있어서는 감정이었고, 종교는 이 감정과 사귐의 형성이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종교가 해명해야 할 것은 개인이 형성하는 경험의 자취를 밝히는 것이다. 종교의 해명에 있어서는 초월적 경험이 중요한 경험이 된다. 그러나 일반인의 초월경험이 아니라, 구체적인 개인이 겪는 경험에 대한 해명이 되어야 한다. 경건의 경험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내 경건의 경험이지 일반적인 경험이 아니다. 바로 여기서 칸트의 초월의 문제나 도덕철학의 문제에 거리를 두는 슐라이어마허의 자리가 드러난다. 아무리 풍부한 우주가 어떤 개인에게 열렸다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 우주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철저한 개인성에 기반한 영혼은 무한성과 우주에 대한 욕망을 품고 있다. 우주의 전체성에 대한 경험과 자각을 통해서 개인의 삶의 의미를 헤아리는 것이 영혼의 가장 중요한 소망이다. 이렇기 때문에 개인적 관심은 그저 개별적인 차원에서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 관심으로서 확장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철저하게 나와 우주(Ich und Universum)라는 보편적 추상적 일대 일의 관계는 배제된다. 여기에서 표현되는 나라는 자리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개인의 특성과 개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기존철학과 신학에서 가져왔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특성이 배제된 나(ich)에 대한 입장은 철저하게 배격된다. 동일한 우주라 하더라도 모든 개인에게 각자의 특성에 따라 다르게 관계되고 정향된다. 이러한 개별적인 인간 태도에 근거해서 개인은 그 개성을 발견하고 세계 안에서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며 그것을 실현한다. 이 바탕 위에서 그 개인은 좋음과 싫음이라는 감각이 출현하며 이를 매개로 더욱 큰 전망을 여는 것이다.



7.



그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있었다. 무한성과 죽음의 광활한 우주 안에서 인간은 어떻게 계속 성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였다. 이 성장에 대한 고민은 윤리의 문제를 끌어들인다. 그에게 있어서 다른 한 편으로 윤리는 모든 학문적 전망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슐라이어마허의 신앙론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시 독일의 루터교와 개혁교 교의학적 전통을 새롭게 묶어내고자 시도하려는, 연합의 도그마의 의미도 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슐라이어마허 해석자는 이 신앙론의 문제제기가 상당히 혁신적인 사상innovative Denken을 신학적으로 담고 있다고 이후에 강조한다. 즉 당시 교회보다 영화관이 더 붐비기 시작한 독일의 종교문화적 분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공동체와 사회의 형식을 개진하기 위한 의도가 거기에 있다고 지적한다. 다른 한 편으로는 당시 신학사조를 적지 않게 지배했던 칸트전통에 기반한 칸트적 신학보다 훨씬 혁신적인 면모를 갖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에 있어서 신앙론은 철저하게 철학적 이론적 사유와 연관시키지 않았으며 분명한 단절을 가하였다. 이는 일반적 추상적 개념에 대한 형성과 논의에 대한 관심보다 그가 철저하게 교회의 문제를 고민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그는 당대의 격한 쟁론의 틈Sendschreiben an Lücke에 서 있었다. 그는 철저하게 교회에 집중하고자 하였다. 철학적 추상적 논의는 단지 추상 사유의 하이어라키만 제공할 뿐이며 이는 반 프로테스탄트적이라고 그는 판단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신학은 분명히 철학이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어떻게 구체적인 개인의 자의식이 기독교적 공동체적인 감정과 그 차원으로 연결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일반적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였다. 물론 그는 교회공동체에서 어떠한 윤리적 요소 또한 잠정적으로 끌어내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일차적인 목표는 아니었다. 슐라이머마허에 있어서 교회는 다음과 같다 : 교회는 경건성과 관련하여 자유로운 인간의 행위를 통하여 형성되고 존속하는, 매우 분명하고 그 경계를 지닌 공동체이다. Die Kirche ist eine bestimmte und begrenzte Gemeinschaft, in Beziehung auf die Frömmigkeit, die durch freie menschlich Handlungen entsteht und fortbesteht. 교회는 개인적인 자유를 근거로 해서 우리라는 공동체로 연결된다. 그는 교회를 일단 윤리와는 별개로, 혹은 윤리를 너머서, 교회의 문제를 경건성의 문제를 통하여 고민하였다.



8.



슐라이어마허의 경건성의 문제를 살펴보자. 이 경건성Frömmigkeit은 앎Wissen과 행위Tun 사이의에 존재하는 가치이다. 여기에서 본격적으로 개인의 영혼이 어떻게 경건성을 얻게 되고 신을 만나는지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핵심적인 구상이 드러난다. 인간은 종속성Abhängigkeit과 자율적행위Selbsttätigkeit 사이에 존재한다. 우리는 공기에, 자연에, 인간관계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우리자신은 또한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판단하고 행위한다. 이 두 측면에 인간 영혼은 놓여 있다. 이 임없는 상호교환의 행위Wechselspiel에 영혼은 존재한다.



이 종속성과 자율성은 우리를 끊임없이 긴장하게 하며, 여기에서 우리는 어떠한 절대순수의 감정을 얻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경건성이 출현하며 이 경건성은 우리의 의식을 절대순수의 감정으로 이끌고 가는 중요한 동력이 된다. 그러나 이 절대순수의 감정은 우리를 종속하는 하부단위의 종속성과는 다른 의미이다. 이 경건을 통하여 종속과 자율의 끊임없는 행위가 순수한 절대감정을 낳고 어떠한 방향성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모든 상승을 가져오게 하고 출현하게 하는 것, 그 출처Das Woher가 바로 슐라이허마허에 있어서 신이다. 이렇게 인간이 내면에 갖고 있는 고양된(될) 의식을 그는 교회에 관하여 바라보고 해명하고 있다.



그는 위에서 말했듯이 철저한 개인의 문제를 아주 중요한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개인의 여러 개별적 위상을 바탕으로 정초하면서 이를 어떻게 교회적 공동체로 연결되느냐가 그의 중요한 관심이었다. 교회 공동체는 그 기원과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에 있어서 교회는 다름 아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그 경건성을 따르는 이들의 모임이다. 즉 이 경건성을 그의 기원으로 하는 신앙공동체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이 개체적 차원이 상실되지 않으며 교회의 정체성을 보전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기독교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개인적인 존재의 방식이 그 기초와 원리로 기여하면서 그와 더분 교회 일반적 지평으로의 넘어감Übergang이다. 즉 절대의존과 절대순수의 감정이 더욱 고양된 상태로 전개되어감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이라는 의식을 통하여 개별자는 약동성을 얻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 의식은 절대 일반화 될 수 있는 의식이 아니다. 우리의 감정에 개입하고 모든 이들의 각자 특성과 개성에 덧입혀지는 의식이다. 여기에 긴장이 있다(cf. Fantastische Einmaligkeit vs Gemeinschaft). 즉 교회가 개인의 개체적 차원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즉 철저하게 구체적인 개인이 어떤 방식으로든 규격화된 일반화의 과정을 피하면서, 상호 사귐이 가능할 수 있는 공동체적 조건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느냐가 우리의 중요한 관심이 된다.



9.



몇 가지 단상을 남겨봐야겠다. 신학연구에 있어서 신학사적인 접근방식이 주는 문제를 아주 실감하였다. 정통주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신자유주의, 이런 방식으로 각자 역사적 조건과 문화적 환경 가운데 잉태한 독특한 신학적 주장을 신학사적인 접근을 매개로 어느 한 관점을 통해서 묶어내려 시도하는 작업이 문제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신정통주의는 자유주의를 극복했기 때문에 신정통주의가 좋다 이야기 할 수 있는 근거와 가능성은, 당대의 신정통주의의 팻말 아래 모였고 나름대로 자유주의의 대안을 성실하게 표명한 그 일련의 신학그룹 안에서만 유효한 것일는지 모른다. 신학사적인 접근 방식을 통하여 각기 유용한 의미를 차지했던, 그리고 역사적 한계를 갖고 있던 다양한 신학의 개성을 빠른 시간 내에, 도식적으로,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그 도식에 걸려 넘어가면 절대 안될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독일의 신정통주의가 자유주의를 넘어섰다는 이해를 가지고, 우리에게도 신정통주의가 자유주의보다 더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쉽게 확보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자유주의는 경험의 대상이 아니었을 뿐더러, 더군다나 자유주의의 신학적 기원을 마련한 독일과 유럽에서도 그 자유주의가 여전히 쉽게 깨지지 않고 독자적인 목소리와, 유용성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한 그룹이었던 리츨의 손자는 여전히 지금도 살아서 그의 학문을 다양한 방식으로 지금껏 이어나아가고 있다. 신학사적인 도식은 의미가 있어서 우리가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잠정적인 유용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는 조금 더 복잡한 문제를 내포하는 것 같다. 즉 어떤 신학체계의 외적인 상호 비평과 그 신학체계 간의 통시적 검토가 얼마나 유용성을 지닐 수 있느냐의 회의의 문제와, 신학의 이론성 자체와 역사적 조건-현실 사이의 정합성이 그 신학적 정당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긍정의 문제도 끌고 들어온다.





10.



슐라이허마허는 클레어몬트에서 슐라이허마허를 전공한 박성민 박사님으로부터 학부시절 철학과 강의를 통해서 잠시 접했으며, 철학적 해석학을 통해서 맥락을 잠시 이해했으며, 대학원에서 슐라이허마허의 종교론이라는 책으로 세미나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일단 슐라이허마허는 그의 철학적 해석학이라는 학문적 업적 자체만 보아도 큰 세계임이 분명하다. 동시에 그는 신앙과 감정과 개인의 문제를 당시 실증주의가 풍미했던 객관주의적 과학주의적 사조와 풍토에 단단히 맞서서 새롭게 구제하였으며, 내면의 중요성을 종교의 지평에 새롭게 심어놓았다. 확실히 독일의 조상이기 때문에 심지어 외국어로 듣는다는 제약이 있더라도 슐라이어마허에 대한 이해는 생생했으며 그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를 적게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그의 감정에 대한 고양의 프로세스와 신적인 차원의 여러 단계에 대한 논의는, 오늘 학생들 또한 질문을 많이 던진 대목이기도 하지만, 사실 쉽지 않아 보이는 면이 있다. 그만큼 슐라이허마허가 그 자신의 독특한 안목과 분석을 바탕으로 오늘 표현된 내용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과 의미를 품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교수는 이 감정의 상승과정을 위상Stufe으로 표현하였다. 느낌에 대한 분석을 몇 가지 위상으로 분할하고 분석한 백두의 느낌에 대한 분석과 슐라이어마허의 감정의 위상을 체계내적으로 상호 연관시켜서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슐라이허마허의 감정의 분석이 심리학적 차원으로 머무르지 않는다면 분명 거기에서는 표현하는 언어와 조건의 차이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원리가 서로 묻어 있으리라는 짐작이 들었기 때문이다.



11.



한국은 정서와 감정이 상당히 풍부한 민족성을 지니고 있다. 독일도 물론 정서와 감정이라는 것이 있긴 하지만, 워낙 합리주의적 태도가 밑바닥에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공고하게 스며있기 때문에 한국과 쉽게 비교할 수 없는 면이 있다. 대학원에서 슐라이허마허의 종교론을 읽으면서 세칭 이 감정의 신학이, 감정과 정서로 인해 여러 많은 문제를 갖고 있는 한국의 교회와 신학에 어떠한 역할과 의미를 던져줄 수 있을 지에 대한 물음을 갖곤 하였다. 이러한 우리의 고유한 정과 감정의 민족성을 바탕으로 한국 교회 부흥의 역사를 세계사에서 새롭게 쓴 면이 있고,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분열의 역사도 세계사에 새롭게 기여한 양가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인 긍정적 부정적 판단이나 가치가 갖고 있는 편협한 도식성과 피상성을 조금 더 깊이 인지한다면, 감정이냐 이성이냐 하는 문제, 그리고 양자 가운데 무엇이 중요하다고 선택하고 선호하는 문제는 사실 대단히 위험스러운 태도라 여겨진다. 언제 우리가 감정의 문제를 뿌리 끝까지 헤아려본 적이 있었는가.



물론 슐라이어마허의 입장에 돌아가보면, 인간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지만 상대적으로 평가 절하 되었던 감정의 문제를 새롭게 문제화 하였고, 이를 매개로 당시의 교회공동체를 새롭게 복원하려는 이념적 동기가 있음을 쉽게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의 문제가 우리 한국교회를 살려 왔고 감정의 문제로 인해 우리 한국교회가 걸려 넘어지는 형국이라면 감정과 정서와 인간의 신앙, 그리고 내면의 종교성의 문제를 아주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검토하고 고려하는 문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백년 전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는 가치가 있기 때문에 고전이 가능한 것이다.



12.



지금의 시대를 포스트모던 시대라 한다. 포스트모던은 그간 이성의 감옥에 갇혀 있던 감성과 감정의 실체가 더욱 시대적 조명을 받고 전면에 등장하는 시대 문화적 표현의 하나일는지 모른다. 절대 과학정신과 최고의 기술로 인간이 품고 있는 근본적인 고민과 그 뿌리에 대한 해명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과학시대에 있어서 새로운 교회의 존재방식이나, 정보통신시대에 있어서 새로운 교회공동체 소통의 가능성을 고민하고 염두하는 것은 주요하나 아주 본질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 고민의 가장 근원은, 인간이 인간에게 주체가 아니라 객체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있다. 인간은 인간에게 미지수이며, 고민의 대상이며, 여전히 암흑이다. 우리가 얼마나 우리로부터 자유로웠나. 우리는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존재일는지 모른다. 이러한,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 이끄는 심층의 논리와 근거를 해명하고 그 뿌리를 밝힐 때 우리는 조금이나마 우리의 미래를 새롭게 열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미지의 영역을 갖고 살아가는 인간에 있어서 이 감정과 감성의 문제도 아주 작게나마 우리에게 이해될 뿐이다.



그렇다고 슐라이허마허의 도식이 우리시대의 감정의 문제를 해명하는 확증의 키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는 그만큼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안목과 전망을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슐라이허마허가 감정의 문제를 그가 갖고 있는 시대적 코드와 언어로 어떻게 요리했느냐를 형태적으로 밝히는 것이며,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맥락에서 새롭게 그 감정의 문제를 접근해야 할 과제가 있다는 것이다. 신비주의나, 열정적 복음주의, 그리고 심지어 여전히 우리의 지분을 단단히 차지하고 있는 근본주의의 교회적 신학적 실체를 검토하고자 할 때 이 감정과 연결되지 않은 고려가 어떻게 가능할 지 의문을 갖기 때문이다.



13.  



슐라이허마허는 유한적 주체와 무한적 신적 대상 사이의 형식적 대응관계라는 전통적인 태도와는 달리 이 유한적 주체를 구체적인 다자적 개별적 주체로 이해하였다. 여기에서 이런 다자적 주체와 일자적 대상 사이의 관계를 고려하기 때문에 분명히 개별자 사이의 의사소통의 문제와 그들을 묶는 개별자와 관계하는 보편적 원리를 추출하는 데에 고심을 하였을 것으로 본다. 만약 이러한 다양한 개별자의 영역에 대한 고려가 레디칼하게 전개되다면 그들 각자가 품는 무한적 대상(신)의 모습은 구체적 개별자의 다자성에 의하여 깨어진 유리조각에 불과할 수도 있으리라 보여진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신의 정체성 자체가 새롭게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아니면 깨어진 신의 편린과 온전한 신의 통일성을 다시 연결하는 매개가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가 강조점을 둔 감정에 대한 여러 생각들 또한 중요한 문제라 여겨지니까, 이후 따로 생각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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