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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09 (07:43) from 62.104.211.66' of 62.104.211.66' Article Number :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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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11. 08] 25. 알파벳과 상형문자










1.

같은 기숙사에 사는, 심리학을 전공하는 친구가 방문했다. 그가 나에게 노크를 한 이유는 이것이다. 언어적 연상과 관련하여 독일어와 중국어의 차이와 그 근거를 밝히는 논문 가운데 몇몇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 때문이었다. 그 논문의 요는 이것이다. 상형문자와 알파벳문자의 특성이 어떤 방식으로 각자 독특하게 심리적 연상을 일으키는지를 언급하였다. 알파벳문화에 젖어있는 서양인의 눈에서는 상형문자, 특히 한자어를 중심으로 한 그림문자[Piktogramm]의 언어적 기능과 그 용법이 비교적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나무 목(木)과 독일어 Baum의 차이를 들어서 내가 아는 한 설명해 주었다. 언뜻 본 그 논문에서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한자는 알파벳을 바탕으로 한 독일어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주어진 문자에서 그 뜻을 연상하기가 쉽다는 특징을 지적하였다. 사실 문자를 모르는 원시인이 독일어 Baum을 하루 종일 수 백번 눈으로 뜯어 보아도 나무모양새는 발견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심리적 연상을 통하여 그 단어의 뜻이 나무라는 결론에 거의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2.

지금은 고전이 되었지만, 나는 소쉬르가 생각났다. 소쉬르의 언어이론은 알파벳 문화권의 산물이면서 오히려 그 한계에 머무른 가설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언어를 개념과 청각영상의 결합으로 이해하였다. 즉 언어는 소리의 차이를 매개로 개념과 연결되는 사태라는 점이다. 그러나 오늘 내가 경험한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서 이 소리의 차이, 즉 청각영상의 문맥을 시각영상으로 교체한다면 무엇이 문제가 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영상 자체가 시각적이다. 이런 면에서 소쉬르가 청각에 영상을 결합한 이유를 적극적으로 배려해 볼 때, 언어는 본성적으로 이미지가 아니라 소리와 친화력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구 고전해석학에서 이미지(글)보다 말이 더 언어적이라는 주장은 이 지점에서 내통한다. 그러나 이 지점이 순수해 보이지 않았다. 즉 서구 언어의 기본적인 운용은, 즉 어떤 한 단어의 뜻을 이미지와 결합 시켜 재현할 수 없는, 불치의 알파벳 튀밥들을 근거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이 언어인지를 근본적으로 물어야 하고, 또 그 언어의 재현의 방식에 있어서 수십 여 개의 알파벳 튀밥과 수백 수천 여 개의 상형의 부적들, 이 양자가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점검해야 할 것이다.


3.

이제 다시 개인적인 관심의 문제로 돌아와보자. 결국은 [그림문자]와 [글자문자] 사이의 기능적 차이의 문제이다. 그리고 도대체 언어는 그림과 글자 사이에 어느 것과 더 친화력을 지니는지의 문제이다. 또한 언어는 인간 영혼의 어떤 송과선을 거쳐 복잡다단하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그림문자는 이미지를 매개로 한 언어세계의 구축이다. 구체적인 이미지일수록 그 언어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은 수월할 수 있다. 사물에서 이미지의 형태를 뽑아내 글자와 문자를 가공한다. 물론 사물에서 몰핌을 추출하는 방식 또한 문화에 따라 각자 다를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사물에서 추출해낸 이미지 자체가 이미 사물의 영역에 완전히 객관적으로 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특정한 문화가 사물을 개성적으로 이미지화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의 강조점은 이미지와 문자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이다. 또한 그 글자와 문자가 담고 있는 뜻과 이미지 사이의 연관성이다. 보이는 사물에서 문자를 추출해내는 과정은 어렵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이지 않은 추상적 대상에 대해서 어떻게 이미지를 매개로, 문자의 형태와 뜻을 구현해 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등장한다. 이런 방법이 가능하겠다. 이미 추출된 기본적인 구체적 그림 문자들을 풍부하게 조합, 변용 하여 추상적인 뜻을 구현하는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 대상이든 추상적 대상이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와 뜻의 긴밀한 결합의 연장선에서 언어는 운용된다는 점일 것이다.


4.

분명 알파벳 문자는 다르다. 즉 수십 여 개의 알파벳 튀밥들을 무한히 조합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구체적이고 추상적인 대상을 담아내고 표현한다. 독일어 논문을 읽다 보면, 눈으로 긁고 지나가는 문장에서 흐릿하게 뜻이 출현한다. 그 문장은 분명 몇몇 단어들의 결합이다. 그리고 그 단어를 더 분절하면 겨우 수십 여 개의 알파벳의 무한 조합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나는 알파벳 튀밥들의 조합에서 뜻을 느끼는 것이다. 눈으로 알파벳들을 지나가는 과정이 워낙 빨라서 그 알파벳이 뜻으로 흐릿하게 느끼는 것이지 가장 기본적인 과정은 몇 십여 개의 규약 된 기호들을 내가 읽어 내려가는 것이다. 그것은 규약이자 약속이다. 나무를 보고 독일 원시인들은 분명 [바움; Baum]이라는 특정한 소리와 연결시키려 노력했을 것이고, 이 [바움]이라는 특정한 소리와 나무라는 실재를 연결시키는 정당성은 상호 문화적 규약과 약속 이외에는 더 이상의 근거가 없는 것이다. 즉 서로 문화적 약속만 달리 했다면, 복부를 뜻하는 [바우흐; Bauch]라는 소리가 저 푸른 나무를 부르는 단어로 얼마든지 지칭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바움]이라는 소리와 실재하는 나무를 연결시키는 근거는 뜻을 공유하려는 구성원 사이의 약속이며, [바움]라는 발음이 주는 청각적 개성에 기인한 것이다.


5.

그렇다면 우리가 문자를 해독하면서 뜻을 얻게 되는 과정에서 이미지와 대상의 결합이라는 특성과, 소리 차이와 대상의 결합이라는 특성은 상식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주는 것일까. 이미지와 대상을 결합하는 언어적 행위는 우선 언어적 연상의 과정을 영상적으로 물들인다. 그렇다면, 뜻을 얻게 되는 과정에서 많은 절차가 논리보다는 직관과 감각의 영역에 연루되어 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영상은 시간성을 기반하지 않는다. 만약 이미지와 대상이 연결되는 언어가 경제성을 띄는 지점이 여기에 있으리라 보여진다. 상당히 직접적인 영상을 매개로 연상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뜻을 추출하는 절차가 효율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주역의 64괘가 한 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몇의 난점이 있다. 우선 알파벳 튀밥들보다 훨씬 많은 기초적인 단위의 영상적 글자 패턴을 무수한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세종대왕이 이 지점을 많이 고민하지 않았을까 하는 판단이 든다. 수백 수천의 상형문자를 기초체력으로 운용되는 언어는 그 자체가 독특한 희귀성을 지니지만, 백성의 언어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자어에서 알파벳 언어의 특징을 조화롭게 결탁한 지점이 바로 한국어의 자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영상은 공간적이다. 그러나 뜻의 획득에 있어서 사변적 지속 - 어쩌면 이는 대단한 낭비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 을 매개 하지 않기 위해서는, 각자 특정한 영상의 공간들을 확보해야 한다는 난점이 있다. 존재하는 사물과 가치는 이미지로 건너가 직관을 통하여 뜻으로 육화 된다. 언어가 감각, 직관과 연결되어 있다면, 뜻에 대한 이해는 직관적 감각적 특성을 띄게 될 것이다. 혹여 소리의 차이보다는 이미지의 차이가 중요한 한자문화권의 언어적 기초는 자연스럽게 특유한 동양적 심성과 철학,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세계관 및 태도를 육성시켜 왔는지도 모른다.


6.

알파벳을 기반으로 한 언어행위는 일단 문화적 언어적 약속을 바탕으로 하여 단어를 야기한다. 이 약속은 기본적으로 소리의 차이를 근거로 하지만, 영상을 그리 중요한 매개로 하지 않는, 개념화로 직접 전이된다. 이런 의미에서 알파벳 문명권의 서양 언어의 출현은 직관과 감각보다는 상호 규약을 기반으로 한 개념화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단어의 기원은 자연에서 자연적으로 추출된 면과는 달리, 자연에서 문화/문명적으로 추출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자연과 문화는 양자의 가치를 논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물론 사물에서 이미지를 추출하는 과정 또한 규약적이고 문화적이다. 그러나 자연의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매개하여 추출하는 과정과, 자연을 소리의 차이를 매개하여 개념화 하는 과정은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미지는 그와 분리될 수 없는 자연으로부터 지대한 방식으로 추출되지만, 개념화의 형성에 있어서 소리의 차이는 지배적이지 않고 잠정적인 가교의 역할을 기여하기 때문이다. 이는 알파벳 언어의 출현이 이미 상형의 언어보다 후기에 이루어졌고 추상적 개념을 추구하려는 이성의 기능이 비교적 견실하게 진행되는 시점을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7.

글자에 구체적 그림이 묻어 있다는 사실과, 추상적 개념이 묻어 있다는 사실의 차이는 생각보다 더 큰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사실 근대에 들어서 그 많은 언어를 매개로 한 시끄러운 주장에 문명이 휘달리다가 정작 그간 물음의 영역에 한번도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았던 물음, 언어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 들어간 듯 하다. 마음과 영혼의 핵심에 육박해 들어갈 수 있는 키워드가 물론 언어의 길 하나만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과 영혼에 기꺼이 질료로 수용되어왔던 언어가 그렇게 그저 수동적 도구로서 활용된다는 상식에서 벗어나서, 해석학과 분석철학의 매스를 가지고 언어 그 자체의 자기해명을 시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이 해석학과 분석철학 또한 알파벳 언어를 운용으로 한 문화적 자기해석이기 때문에, 독특한 한자문화권에서 출현한 언어에 대한 고유한 이해에 결정적으로 매칭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본다. 더군다나 자연적 이미지와 언어의 상호 친화력을 기반으로 한 문명의 출현이 어떻게 그 문명권의 가치관과 심성과 존재양식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밝히는 작업은 적지 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한자문화권의 언어와 그 존재양식에 대해서 전혀 감을 느끼지 못하는 독일 친구의 난감한 얼굴은, 그만큼 우리가 같은 시대에 살지만 전혀 상이한 고유한 문화와 의식을 직조해 나아가고 있으며 그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였다.


8.

두 눈과 두 귀, 공간과 시간, 침묵과 말, 직관과 논리, 그리고 그 사이의 조화와 균열. 그렇다, 어쩌면 우리는 본다. 그들은 듣는다. 이 차이에 대한 분명한 답은 없다. 그리고 차이의 해명이 시급한 우리의 소망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리를 더 가까이 보려 하고 그들이 진리를 더 생생히 들으려 하는 도상에 서 있다면, 이는 아주 작은 차이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그 무엇이 잘 보이지 않는 도상이기에 차이에 관심과 열정을 갖아야 할 충분한 이유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Oystein Sevag l Tojo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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