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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4 (08:44) from 62.104.211.68' of 62.104.211.68' Article Number :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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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12. 14] 26. 창조성 1













1.

나를 흔드는 실존적인 관심은 결국 이것이다. 왜 새로움은 이 세상으로 출현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새로움은 이 세상으로 유입되는가? 그리고 그 새로움의 의미는 무엇인가? 화이트헤드의 창조성Creativity라는 개념에 대한 관심의 근원은 바로 위와 같은 소박한 질문에 기반한다. 새로움에 대한 질문은 워낙 광범위하다. 그러한 이유로 화이트헤드의 창조성이라는 개념으로 일단 물음의 초점을 정초하고 그에 집중하자. 그러나 저 또한 작은 주제가 아니다.

2.

일단 새로움이 무엇인가를 정의해보자. 새로움은 과거에 없던 것이 ‘새롭게’ 출현하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첫째, 전적인 없음의 세계에서의 새로움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새로움과 창조를 이 맥락에서 동등하게 이해한다면, 이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암시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가설에 입각하여 세계의 기원을 믿고 이해한다. 그렇다면 있음의 세계에서의 새로움은 전혀 의미가 없는지에 대한 물음을 시도해 본다. 새로움은 과거에 없는 것의 새로운 출현을 의미한다.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히 현재의 입장에서의 과거에 사태에 대한 기술이다. 이는 두 가지를 암시한다. 무와 존재에 대한 정의가 시(공)간 축을 따라 새롭게 기술될 수 있다는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구석기에는 컴퓨터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이미 오랜 시절 사라진 문명이 구가한 제의나 의식은 현재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하간의 이유로 그러한 특정한 제의나 의식의 존재 유무를 이미 알거나 확인할 수 없는 지경에 서 있는지 모른다.

3.

세계는 신에 의하여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주장, 그리고 이 세계의 새로움은 신에 의해 유입된다는 기독교적 가설은 기독교 신앙 안에 있는 지성에게는 별 어려움 없이 이해될 수 있으며, 많은 시간 동안 신앙적 현실적 유용성을 바탕으로 유지되어 왔다. 나 또한 이러한 가설에 적극적인 반기를 들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아래의 두 가지 질문은 여기에서 쉽게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하나는, 모든 세상의 새로움의 근원을 적극적으로 신에 두어야 하느냐의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존재에서 존재에로의 새로움을 우리가 말하려고자 한다면, 그 새로움은 어떠한 방식으로 파생되고 (신과 관련하여 더불어) 어떻게 현실에 유입되는가의 물음이다. 전자는 창조론과 신정론의 영역과 일정한 관계를 보여주는 물음이다. 후자는 현대과학철학에서 검토하고자 하는 새로움과 창조 이해와 관계된다.

4.

화이트헤드는 수학자이자 자연철학자였다. 후기에는 종교적 관심 또한 꾸준히 간직하였다. 만약 내 물음이 새로움에 대한 과학적 종교적 물음과 연결되어 있다면, 현재 관심하고 있는 화이트헤드의 사상체계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답은, 새로움과 창조성의 문제를 다루는 과학적 종교적 접근이 그의 형이상학을 통해서 어떻게 구상되는지에 대한 기술적 절차이다. 그렇다면 화이트헤드 초기의 자연철학과 후의 종교철학 전 저작을 통해서 새로움의 문제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발생적-지형적으로 이해하고 밝히는 작업이 중요하다. 또한 그의 형이상학 체계 내에서 엄연히 명시되고 있는 창조성 개념이 어떠한 위치와 의미를 점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5.

일단 새로움과 창조성에 관한 나의 문제제기의 뿌리를 해명하기 위하여 이와 관련한 물음을 일별해보자.

주요 질문

새로움은 무엇인가.
새로움은 없음로부터의 새로움인가 아니면 있음으로부터의 새로운 조직화인가.
자연이 새롭다면, 신은 새로움의 원천인가. 아니면 신과 자연의 새로움은 다른 범주인가.


주요 키워드

새로움, 창조, 신과 세계의 창조, 다자, 일자, 창조성, 신과 창조성의 범주적 관련



이러한 질문에 대한 효과적인 대답을 얻기 위해 여기에서는 화이트헤드의 창조성 개념을 채택하여 이해하고자 한다. 동기는 다음과 같다. 자연철학과 종교철학적 안목이 연계된 그의 형이상학을 통한 창조성 이해는 자연의 영역과 종교 신앙의 영역 이 양자 모두에 관계하는 새로움에 대한 물음에 그나마 통전적이고도 적절한 대답을 얻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개인적 작업은 그러므로 내 가설 채택의 믿음에 대한 검토작업의 일환으로서 다음과 같은 일련의 과정을 밟는다.

첫째, 작업자의 화이트헤드에 대한 이해와 오해를 비판적 검토 없이 기술하고자 노력한다.
둘째, 화이트헤드의 창조성에 대한 가설을 비판적 검토 없이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셋째, 이러한 검토 작업이 효과적으로 진행이 된다면, 이후에는 작업자의 화이트헤드의 오해와 이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동시에 화이트헤드의 창조성에 대한 가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넷째, 이러한 검토 작업이 효과적으로 진행이 되지 않는다면, 작업자의 개인적 물음의 형식과 내용 및 절차에 대한 수정의 단계를 밟는다.




6.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창조와 창조성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화이트헤드는 자연철학자로서 자연에 대한 관심을 지대하게 가졌다. 그에 있어서 자연은 죽어 있는 사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기술된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에게 있어서의 심각한 문제제기는 자연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이해이다. 자연에 대한 이해는 과학과 철학 및 여러 문화적 형태로 문명 안에서 전개된다. 그 가운데에서 살아 있는 자연에 대한 이해와 기술은 인간의 관념을 통하여 표현되는데, 이 관념의 근본적 형식을 주조한 논리학이 실체 속성의 논리학을 근간으로 이루어졌다. 즉 자연에 대한 이해와 기술의 재료로서 활용되는 인간의 관념과 언어, 그리고 그 기반인 논리학이 근본적으로 살아있는 자연에 적합하지 않음을 화이트헤드는 직시하였다. 여기에는 논리학의 깊은 면과 그의 한계를 통찰한 화이트헤드의 경험이 바탕에 깔려 있다. 화이트헤드가 구체적으로 비판한 논리학은 동시에 언어의 주술구조에 대한 비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속성 개념, 그리고 보편자 개별자 관념이 연루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주술구조에 기반한 언어는 신뢰할 수 없는 불신의 대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속성 개념은 관계개념으로 바뀌어야 할 대상이며, 보편자 개별자는 존재의 상대성 개념으로 교체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화이트헤드는 일단 인간관념이 동원하는 여러 도구 자체가 생성하는 자연의 영역을 파악할 수 없는 불치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에 적합한 관념과 언어를 그 방식대로 새롭게 구축하고 가공한다. 자연철학에 있어서는 상대성 이론을, 논리학에서는 집합논리학을, 형이상학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경험과 현실을 바탕으로 한 논리 일관적, 내적 정합적, 현실 적합적인 가설의 구축을 시도한다. 특히 그의 여러 방면의 성과와 경험을 총체적으로 집대성한 과정과 실재에서는 4부 연장의 이론을 통하여 기하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새롭게 형이상학적 사변을 전개해 나아간다.

주요 내용을 열거하면, 4부 연장의 이론 제2장 연장적 결합 장에서는, 연장적 결합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방식으로 규정하고 그에 기반하여 새로운 기하학을 구성해 나아간다. 그는 모든 물리적 존재는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그의 기하학을 구성한다. 우선 그는 연장의 이론에서 연장적 결합의 여러 관계 방식을 예시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영역을 추출해 낸다. 이후 이 영역의 추상적 집합을 군으로 만들어서 기하학적 요소를 다시 추출해 낸다. 즉 여기에서 이 기하학적 요소인 점, 선, 면을 새롭게 정의한다. 이렇게 물리적 영역을 바탕으로 기하학적 요소를 끄집어 내며 제3장 평탄한 장소에서는, 영역들의 일반적 도식에 난형의 추상적 집합이 수렴해 가는 장소는 다 평탄하다는 조건을 매개로 평탄함을 도입함으로서 이 세계의 차원성을 해명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4차원 시공연속체를 이 난형과 관련하여 과감하게 연결 시킨다. 물론 이 난형은 근본적으로 사물로부터 발견되는 절차를 밟고 있기에 화이트헤드의 기하학은 유클리트적인 출발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의 영역으로부터 추상된 기하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특성을 지닌 기하학적 구성과 그를 바탕으로 한 형이상학적 구상은 다른 출발점을 지니고 있다. 제4장 변형에서는 구체적인 사물이 영역을 가짐으로서 기하학적 형식을 지니고 있고, 이러한 기하학적 형식을 통한 영역의 표현이 변형임을 기술하고 있다. 즉 변형은 평탄한 장소로 끌어들이는 일종의 왜곡을 의미한다. 이렇게 화이트헤드는 우리의 자연과 시공간을 구체적인 영역을 바탕으로 추출된 난형과 관련시켜 기하학적으로 이해하는 최초의 시도를 가하고 있다.

그는 모든 존재는 결합관계로 존재하고 그 구체적인 영역을 갖고 있다는 가설에서 기하학을 추출해 내고 그를 근거하여 형이상학을 구상해 내었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고도의 추상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추상성의 근저에는 구체적인 기하학적 구상과 자연에 대한 효과적인 이해를 위한 여러 장치들이 이미 포진되어 있다. 바로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여러 기술적 복안의 궁극적인 의도나 요점은, 우주는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한다는 것, 그리고 자연은 창조적 사태의 또 다른 모습임을 인간 지성이 갖고 있는 도구를 새롭게 매개하여 구출하려는 데 있다고 판단된다. 그는 자연의 생생함에 비해 인간 지성의 도구가 너무 둔탁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새롭게 언어적 조율과 결합을 통하여 자연과 우주의 생생함을 구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의 초기저작인 자연의 개념(1929)에는 자연의 추이와 존재의 창조적 힘을 등가적으로 표현한 구절이 엿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적 새로움이 출현하는 자연 앞에 인간 지성이 경외로움과 신비로움으로 대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토로하고 있다.  즉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자연은 지성을 통하여 물리적이나 인과적으로 온전히 판단 불가능한 사태이다. 자연에 대한 파악에 있어서 두 가지 난점은 즉 인류의 도구가 그 자연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 걸맞지 않으며, 자연은 이해의 도구의 발전 가능성의 영역 저편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는 주객도식의 가벼운 이해와는 전혀 다른 문제제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의 합리성을 공공성과 사사성을 매개하는 자연안의 고양된 산물로 보기 때문에 합리성을 동원하여 끊임없는 이해의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다.

우선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창조와 창조성은 추상적으로 형성된 관념이나 범주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자연의 기본적인 특징으로서 이해된다. 자연은 그 자체로 창조적이며 생성적이다. 인식은 그 자연에 대한 인식이지만, 자연 그 자체와는 다른 인식이다. 그러나 인식이라는 도구와 또한 자연적이며 내용 또한 여하한 자연에 관한 내용이다. 도구는 자연에 적합한 기술방식을 향해 새롭게 채택해야 하며 자연에 관한 내용 또한 끊임없이 검토되어야 하는 비판적 요소가 된다.

내적 구성에 대한 비판

질문은,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창조와 창조성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였다. 그러나 그 질문의 답을 구성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구를 화이트헤드는 교정하였으며 그 이유는 바로 자연의 창조성을 인간의 도구가 결코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후기 저작에서 보여지는 범주적 분화와는 달리 초기저작에서 자연은 창조적 힘으로 원초적이며 분명하게 서술된다. 그러나 자연 앞의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이라는 정서는, 화이트헤드의 전 체계가 보여주는 합리성에 대한 신뢰와 모험적 요소를 고려해 볼 때, 언제나 그렇게 남겨두어야만 하는 결정적 요소는 아니라고 구성하였다. 질문은 창조성에 대한 물음이었으나 자연의 창조성과 자연을 이해하는 도구의 결함을 구성하였다. 즉 창조성은 개인적으로 두 가지와 매개되어 있다는 믿음을 노출시켰다. 하나는 자연의 영역이며, 다른 하나는 창조성과 대비되는 이해의 도구의 영역이다. 이를 바탕으로 구성에 대한 결론을 내리면, 창조성은 자연의 창조성이다. 그러나 지성적 도구는 자연의 창조성을 포착해 내기 어려운 난점을 갖고 있다. 이럼으로 처음 던진 질문은 다시 다음과 같이 수정된다. : 자연은 창조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그리고 그 창조적 자연을 이해하는 도구는 얼마나 효율적인가?



7. 그렇다면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창조적 자연은 어떻게 형이상학적으로 자리를 얻게 되는가?


자연은 창조적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은 본성적으로 창조적이다. 창조적이라 함은 새롭게 존재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머물러 있는 존재는 우주의 한 켜에 불과한 지속적 단위일 뿐이며 존재들은 끊임없이 미래로 밀려나고 과거에서 유입되어 들어온다. 사실 우주의 한 켜에 불과하다는 소극적인 표현을 사용했지만, 사실상 우주는 그게 전부이다. 인간의 감각은 지금 현재 존재하는 우주의 한 켜만을 만날 뿐이다. 그 무대는 자연 저편으로부터 시간과 공간을 끌어들여 출현하는 한 사건과 그 사건의 동시적 연쇄체인 한 켜일 뿐이다. 그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우주의 전부이다. 화이트헤드는 바로 이러한 구체적인 현재적 사건을 바탕으로 거기에서 추상화의 작업에 몰두해 들어간다. 즉 동시적 세계의 사건들과 그 사건을 몰고 온 과거로부터의 발생과정들을 사태들을 현재에서부터 역추론해 낸다. 여기에서 잠시 현실적 존재의 추상성에 대하여 언급하자. 위에서 말한 바로 그 구체적인 현재적 사태가 현실적 존재이며 모든 형이상학적 기술은 현실적 존재에 대한 설명의 기술로 전개된다. 현실적 존재는 화이트헤드의 사변에서는 구체적이며 이 구체적 개념에 대한 설명항으로서 그 이외의 범주는 추상적으로 기술된다. 그러나 사변 자체가 추상화의 절차를 밟고 있기 때문에 역으로 현실적 존재가 궁극적으로 가장 추상적인 존재로서의 지위를 점한다.

문맥을 따라 개인적 논의를 이어가자면 역설적으로 현실적 존재는 죽은 사태들이다. 물론 그 죽은 사태를 완성된 사태, 실현된 사태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완성된 사태는 거의 우리의 인식으로도 감지하지 못하고 사변적으로만 추상할 수 있는, 현실적 존재의 생성과 종결의 한 에포크일 뿐, 현실적 존재는 그의 새로운 현실적 존재로 끊임없이 생성된다. 현실적 존재는 굳어진 사태이지만 그 현실적 존재의 배후에서 밀려나오는 그의 새로운 존재의 생성이 순식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존재의 동일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거의 무시하여도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현실적 존재 내부에 대한 분석을 이미 감행해 들어가면 이미 현실적 존재의 완결된 에포크 내부에 있어 자연을 넘어서는 시공에 대한 분석이기 때문에 무시공적이며, 현실적 존재들 사이의 분석을 감행해 들어가면 다른 위상의 시공간과 연계된 현실적 존재들을 비교하기 때문에 동일 시공적이지 않다. 현실적 존재의 내용적 동일성은 이미 파기된다. 물론 현실적 존재는 연속적이다. 그러나 그 연속성의 가능성 또한 분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더 이상 배후로 들어갈 수 없는 우주의 근본적인 요소로서의 현실적 존재의 특징이 제시된다. 우리는 현실적 존재를 본다. 그러나 현실적 존재는 내부적으로도 자연의 시공간 저편에 있고, 현실적 존재들 사이의 연쇄적 관계를 볼 때도 전혀 다른 시공간 저편에 있다. 단지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에 대한 직관적 표현은, 실재는 표면적으로 소멸하였다는 것이고, 또한 저 실재 배후에 끊임없는 생성의 요소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죽은 것과 살아 들어오는 이 양자적 사태를 더욱 보편적인 맥락으로 연결시키는 표현이 [실재는 과정]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사건화되며 시공에 출현한 한 현실적 존재만을 만날 뿐이다. 그것은 피조물이고 단지 연장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추상적으로 그 현실적 존재를 문제 삼아 그 현실적 존재의 과거-미래적 연속성을 검토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찌보면 피조물에 대한 분석의 수위가 한층 추상화된 작업이다. 현실적 존재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현실적 변화의 변수를 현실적 존재라는 추상적 동일성에 묶어 둠으로써 생성과 소멸의 구체적 사태와 변화들을 일단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현실적 존재의 형태를 이해하는 태도에서 현실적 존재는 그 피조물의 원자화된 자리를 갖고 있다는 표현으로 시사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시공을 점유하고 있는 그 원자화된 존재는 단 하나이다. 이 현실적 존재들의 점을 기하학적으로 연장하는 우주의 연대적 자리들을 연장적 연속체로 화이트헤드는 구상하였다. 연장적 연속체는 현실적 존재들의 자리들이 연대적 가능성으로 결합된 현실적 존재의 총체적 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연장적 연속체도 현실적 존재에서 한층 추상된 개념이다. 단지 현실적 존재의 연대적 시공의 장을 확보하기 위한 사변의 산물이다. 또한 현재의 우주가 감지할 수 없는 과거적 무한성과 미래적 무한성의 그 양자를 양쪽으로 잇대고 있는 시공연속체의 구체적인 장이다.

존재 그 자체는 새로움이 아닐 수 있다. 죽은 피조물이다. 그러나 그 생성의 과정의 입장에서 보면 그 피조물은 새로움의 산물일 수 있다. 왜냐하면 물리적으로 출현하였다는 것은 결국 생성의 과정을 거쳐 실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새로움의 사태로서 시공에 출현한 저 사태이며, 저 사태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 말을 하지 않는 현실적 사태이다. 우리가 자연을 창조적이라 말할 수 있는 연결고리는 바로 저 출현한 물리적 사태의 배후에는 드러난 사태에 대한 파악으로는 결코 해명될 수 없는 여분의 정신적 혹은 초월적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신은 인간 정신이 아니고 초월은 세계을 넘어서는 초월이 아니다. 화이트헤드는 저 출현하는 경험의 방울들의 여러 행적과 경로를 설명하기 위하여 수 십 여개의 개념과 범주를 동원한다. 왜냐하면 그의 관심은 현재 존재하는 이 생성의 우주를 내재적으로 설명하려는 형이상학적 과제에 있었기 때문이다. 수 십 여개의 개념과 추상적 범주를 동원하여 구체적인 현실적 존재의 사태를 전 우주의 영역과 관계하여 설명한다. 크게 보면 범주의 구성요소는 개별적으로 모두 47개이며 이 범주는 근본적으로 4조의 큰 범주로 묶여진다. 여기에서 3조 44개의 범주 요소의 지탱이 되는 범주가 궁극자의 범주이다. 다시 말해서 궁극자의 범주는 범주의 범주이며, 다른 범주와는 달리 궁극자의 범주의 범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 의미한다. 결국 궁극자의 범주는 화이트헤드 사변이 궁극적으로 잇대고 있는 궁극적인 범주이며 어떠한 하위범주의 모순이나 기능도 궁극자의 범주를 통하여 개방적으로 지양해 내어야 하는 범주이다. 바로 그 궁극자의 범주의 내용은 다many와 일one과 창조성creativity이다.

존재하는 것들, 그리고 설명될 수 있는 것들, 그리고 범주를 통해서 제약될 수 있는 것들이라는 3조의 범주는 궁극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설명되지 않지만, 제약되지 않지만 직관에 호소하는 다자 일자 창조성에 의해 그 근거를 확보한다는 것이다. 존재하고 설명하고 제약시킬 수 있는 자연의 모든 영역을 다 범주적으로 해명하여도 결국은 그 해명의 영역이 닿지 못하는 이 우주의 궁극적 사태라고 하는 것은 다자와 일자와 창조성이라는, 자연에서 발견 불가능한 실재이다. 분석의 빛이 닿지 않는 우리 우주의 궁극의 자리에 화이트헤드는 다자, 일자, 창조성이 있다고 직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창조적 자연은 형이상학적으로 이중적 지위를 얻게 된다. 하나는 형이상학의 분석의 대상 자체가 창조적 자연이다. 사물의 원자적 출현 자체가 창조성을 머금은 물리적 팽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주는 언제나 현재이지만 존재는 새롭게 팽창한다. 그러나 존재는 그 단 하나의 유일한 시공의 연장적 점에 서 있기 때문에 이 팽창의 이미지는 그 점에 존재가 과거에 누적되었고 앞으로 누적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화이트헤드는 바로 존재와 설명과 제약의 범주라는 3조 44개의 범주요소로 이 생성하는 원초적 우주를 내재적으로 기술한다. 그러나 결국 이 내재적 범주의 기저에 또한 궁극적으로는 다자 일자 창조성이라는 범주라는 보편적 특성과 무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에 있어 창조성의 다른 지위는 바로 현실적 존재가 구현하는 현재의 시공적 우주에 밀려 들어오면서 실현되지만 내재적으로 분석되지 않는 창조성의 영역을 궁극적으로 정초하는 데 있다.

내적 구성에 대한 비판

창조성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에서 어떠한 지위를 차지하는 질문에 대하여 실현된 물리적 우주의 켜에 대한 기술을 시도하였다. 그 시공적 사태의 배후에 대한 해명이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의 작업이며, 출현한 요소의 분석만으로는 출현하는 영역에 대한 분석이 불가능하기에 그 영역을 과정과 생성이라는 관념으로 대치한다. 그래서 실재는 과정이다. 그의 형이상학적 사변은 실재를 끊임없이 밀어내는 창조-과정적 우주에 대한 내재적 분석이며 3가지 범주를 동원한다. 이 내재적 분석의 범주적 근거가 되는 우주의 보편적 실재는 다자 일자 창조성이라는 궁극자의 범주이며 이는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의 궁극적 기반으로 기능한다.



2002. 12. 14. 오전 12시 45분에,


















































Oystein Sevag l Tojo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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