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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6 (10:18) from 62.104.211.64' of 62.104.211.64' Article Number :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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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12. 16] 27. 창조성 2




















8.

화이트헤드는 자연을 본성적으로 창조적 사태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자연의 창조성과 그 자연에 대한 인식에는 난점이 존재한다. 이러한 난점을 직시하고 그는 새로운 구상을 통해서 조화롭게 융화하려 노력하였다. 이 노력은 자연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인식 방법의 구체적인 확보와, 이를 통하여 자연의 실상을 온전히 구제하려는 양가적 동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자연이 창조적이라는 사실은 그의 형이상학을 동원하여 얻어내고자 하는 궁극적 직관적 통찰이지, 형이상학 내부의 모든 기술이 자연의 창조성에 대한 설명에 집중되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즉,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이 창조성이라는 문제제기를 어떻게 접근해 들어가고 어떻게 내부적으로 설명하는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관찰자의 특정한 입장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화이트헤드가 자연을 창조적 사태로 이해하였다는 주장은, 관찰자의 특정한 주목이자 태도에 관련된 해석이기도 하다.

자연은 창조적이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창조적 자연에 대한 구성적 해명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므로 현실적 존재의 내적 합생이나 외적 이행에 대한 기술 자체가 창조적인 사태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인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가 형이상학 체계내적으로 창조적 자연을 설명한다 하더라도 이 체계가 궁극적으로 근거하는 기반이 창조성에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에 있어 창조적 자연을 기반으로 한 창조성의 지위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9.

그렇다면 창조적 자연의 근간이 되는 창조성이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그 의미는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이러한 의미를 해명하기 위하여 이 이중성에 대한 구분을 시도해보자.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의 체계내적인 지위로서의 창조성을 거칠게 도식화하면, 현실적 존재의 합생과 이행에 개입하는 창조성과, 현실적 존재의 궁극적 기반으로서의 창조성의 문제로 일별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새롭게 출현하는 자연(들)의 발생과정과 연루된 창조성과, 저 자연의 궁극적 근거로서의 창조성 사이의 양극적 특성이다. 편의적으로, 각 현실적 존재의 생성에 개별적으로 연관된 요소적 창조성과 현실적 존재들의 범주를 지탱하는 범주적 창조성으로 구분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소적 창조성은 어떠한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것일까. 말하자면, 독자적인 현실적 존재의 합생과 이행과정에 독특하게 개입하는 창조성의 개별적 성격에 대한 해명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난점이 존재할 것 같다. 즉 각각의 현실적 존재는 철저하게 원자화된, 상대적 독립성을 지닌 완결된 세계이다. 거기에는 특정한 과거와 특정한 주체적 지향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현실적 존재의 생성에 개입하는 창조성은 특별한 다자적 성격을 지니지 않아도 각 현실적 존재는 자신의 개별적 특성을 기반으로 하여 실현해 나아갈 수 있다. 즉 여기에서의 문제는, 철저하게 다자적이고 개별적이며 독립적인 현실적 존재들은 공통기반으로서의 창조성을 근간으로 하여 실현되는가 아니면, 각자의 현실적 존재의 특성과 유착된 창조성을 근간으로 하여 실현되는가의 문제이며, 관찰자의 판단에 의하면, 창조성은 그 자체로 공통기반을 제공하며 그 공통의 특성을 분유하면서도 각각의 현실적 존재는 그의 개체적 실현을 이루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범주적 창조성이라는 구분이 유의미 해질 수 있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즉 창조성은 분명하게 3조의 범주들의 궁극적 범주로서 요청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형이상학적 범주와 그러한 기술이 궁극적으로 기능하기 위한 요소로서 창조성은 요청된다는 점이다. 이는, 창조성이 단지 현실적 존재의 생성의 과정에 개입되는 요소일 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추진력과 추동력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3조의 범주가 내적인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우주를 설명하는 중요한 형이상학적 기술이라 하더라도, 그 범주가 궁극적으로 창조성을 기반하지 않는다면, 그 기술이 보여주는 우주는 정태적인 우주에 머무를 뿐이며, 그것은 우주의 한 계기에 대한 잠정적인 서술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성은 우주의 새로움의 근거가 되는, 가능태로서의 지위를 범주적으로 차지하고 있다.  우주의 백터적인 성격에 대한 형이상학적 진술의 요소들는 3조의 범주이지만, 그 백터적 성격의 기반은 궁극자의 범주를 통해서 확보된다.

내적 구성에 대한 비판

구분되어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화이트헤드의 창조성 이해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을 창조성 개념을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접근의 차이. 창조성의 이중적 지위는 현실적 존재의 생성의 근거로서의 창조성, 즉 요소적 창조성과, 3조의 형이상학적 범주의 근거로서의 창조성, 즉 범주적 창조성이다. 요소적 창조성의 논의에서, 불치의 독자적인 현실적 존재는 공통의 창조성을 기반으로 하여도 그 독자성을 실현할 수 있으며, 범주적 창조성의 논의에서의 창조성은, 3조의 형이상학적 진술을 통하여서 확보될 수 없는 우주의 백터적 성격을 제공하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요소적 창조성과 범주적 창조성은 양립 가능한 구분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즉 이 구분은 창조성의 양극적 특징으로서 서로 모순적이지 않은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 물음이 사이비 물음 여부인지 대한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또한 범주적 창조성에 관하여, 창조성은 다자, 일자와 더불어 존재하는 요소이므로 이후의 논의에서는 다자, 일자, 창조성의 내적 관계를 문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


10.

궁극자의 범주는 다자, 일자, 창조성을 구성요소로 하고 있다. 우주는 창조성으로 인한 다에서 일로의 진행이다. 그리고 이 다에서 일로의 전진이 사물의 본성이다. 다는 사물의 다가 아니고 일은 정수의 1이 아니다. 이는 사물의 성격과 관련한 관념이다. 이러한 다자, 일자, 창조성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관찰자의 개인적인 물음은 다음과 같다. 다자와 일자는 어떠한 특정한 범주적 구분 - 화이트헤드의 4조의 범주와는 다른 의미에서 - 을 통하여 구별되는가. 우리는 위에서 다자와 일자는 숫자적 사물이 아님을 명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와 일과 창조성에 관한 관찰자적 물음을 더욱 구체화하기 위하여 사물과 관련한 예를 부득이하게나마 사용하고자 한다.

종이와 잉크라는 다자적 요소들은 글자라는 일자적 특성의 새로움을 도입한다. 글자와 글자라는 다자적 요소들은 단어, 단어들의 요소는 문장, 문장들의 요소는 의미의 새로움을 도입한다. 관찰자는 이 예를 통하여 여기에서 세 가지 질문을 가한다. 첫째, 다자적 요소들로 지칭된 계열들과 일자의 요소로 지칭된 계열은 동일한가 동일하지 않은가의 물음이다. 예를 끌고 들어오면 종이와 잉크의 위상은 이미 다른 계열로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일자의 요소로 도입되면서 등장하는 새로움이 진정한 새로움인가의 물음이다. 말하자면 이미 (인식자와의 관계에서) 종이와 잉크의 연접을 통한 글자가 출현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글자라는 범주는 전혀 새롭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다자와 일자를 보고 있는 인식자 없이 창조성은 어떻게 도입될 수 있는가의 물음이다. 즉 종이와 잉크와 단어라는 관념은 인식자의 전제를 갖고 설명된다. 그러나 인식자 없이 어떻게 다자와 일자와 창조성이라는 ‘관념’이 서로 관계-의미를 형성할 수 있느냐의 물음이다. 첫째 물음은 다자와 일자 사이의 내적 관계의 물음이고, 둘째 물음은 범주론의 문제이며, 셋째 물음은 존재론으로서의 궁극자의 범주는 어떤 방식으로 인식론과 접맥 되는가의 문제이다.





2002. 12. 16. 오전 2시 15분,

























































Oystein Sevag l Tojo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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