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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01 (03:16) from 80.139.182.51' of 80.139.182.51' Article Number :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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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02. 28] 36. 창조에 대한 몇몇 접근들















1.

근래에 몰트만 판넨베르크 벨커 폴킹혼의 저작들을 창조성이라는 주제와 관점으로서 잠시 검토해 보았다. 몰트만은 그의 창조론에서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새롭게 해석해 낸다. 카발라의 짐줌으로부터 착상된 그의 사변은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구태의연한 관념에 빛을 준다고 몰트만은 생각하고 있다. 그에게 무로부터의 창조는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대상이지 쓰레기통으로 처분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그는 암묵적으로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창조론의 중요한 테마로 채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무로부터의 창조는 거부할 수 없는 신학적 창조론의 중요한 보루라고 그는 판단한다. 자기수난과 자기비움의 공간으로부터 하느님의 창조는 출발하지만, 여하한의 하느님의 창조와 피조된 세상 사이의 구분은 몰트만이 놓치지 않으려 하는 강조점이기도 하다.


2.

판넨베르크는 우선 과학과 신학의 대립점을 자신의 신학적 구상들을 통하여 해소하려는 노력을 끈질기게 시도한다. 하느님의 세상에 대한 활동을 담아내는 신학적 언술은 세상을 설명하는 과학적 언술과 대치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양자 모두 하느님의 활동영역을 공통분모로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무로부터의 창조는 단지 7일만의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전 우주적인 진행의 역사를 함축한 고백이다. 그는 장이론Feldtheorie을 도입한다. 장은 어떠한 특정한 사건을 품고 있는 우연성과 우발성의 모태이다. 그에게 있어서 관계를 기반으로한 우연성과 가능성의 장은 출현한 사건보다 근본적인 지위를 갖는다. 신학자의 입장에서 과학적 성과를 기반으로 하여 신학의 정당성과 근거를 확보하고 새롭게 해석하려는 작업은 판넨베르크의 중요한 특징으로 보인다.


3.

벨커는 우선 성서전승에 대한 적극적 이해를 동원하여 창조의 문제를 주석적으로 접근한다. 그에 있어서 하나님의 무로부터의 창조이냐 세계의 유지 보존이냐 하는 판단은 착종된 이원론적 물음이다.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창조의 중요한 포인트는 세상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다. 그는 이를 성서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추출해 낸다. 그에 의하면 반응이 없이는 창조와 새로운 창조도 없다. 벨커 또한 이 세계의 창조의 문제를 에메르겐쯔 개념으로 접근한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질적인 차이가 존재하는 자리를 피조물의 활동성과 창조주의 민감한 반응으로 새롭게 교체한다. 이는 몰트만과의 몇몇 차이 가운데 하나로도 보인다.


4.

폴킹혼의 관심은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라 지속적 창조creatio continua가 어떻게 실재의 세계에서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느냐 하는 실재론적 모델의 구상에 집중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세계는 신의 구현된 몸이다. 이는 동시적이다. 창조는 이러한 구현하는/구현되는 신과 세계 사이의 어떠한 필연적 작용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결정론은 아니다. 하느님은 세계 밖/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동일한 영역을 점유하지만 차원이 다른 가치이다. 물리학자이기도 한 그는 어느 신학자보다 그간의 과학의 흐름과 성과를 매우 정확하게 읽고 소화하고 신학화 하고 있으며, 주장은 섬세하고 대담하기까지 하다. 그의 몰트만과 판넨베르크와 과정신학에 대한 몇몇의 비판은 그쪽으로부터의 반론의 여지가 쉽지 않아 보인다. 과학과 종교의 대화를 접근함에 있어서 그를 대면하지 않고는 안될 정도로, 중요한 사상적 위치를 이미 차지하고 있어 보인다.


5.

몇 가지가 떠올랐다. 첫째, 무로부터의 창조가 갖는 근본적인 의미와 그 모델의 한계, 그리고 재해석의 가능성이다. 여기에서의 쟁점은 고전적인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이해를 버린다고 해서 신론의 중요한 부분 마저도 폐기되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기독교신학의 중요한 핵심을 놓쳐버리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일련의 내적 재구성을 통한 재해석의 부류와, 그 가설을 폐기하면서 창조론을 주장하는 부류 사이에 어떠한 설득력 있는 관계 설정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창조론에 있어서 창조와 보존이라는 이 신학적 언술의 배타적 도식이 주는 현실적 유용성이 얼마나 있느냐를 셈하는 작업이다. 이는 신학적 언술의 대립항, 즉 창조/계시, 내재/초월, 신앙fidei/실재entis 라는 표현이 추상화를 동반한 그 수위에서 얼마나 현실을 적실하게 대변하고 유용성의 빛을 가져다 주는지를 검토하는 작업이다. 신학적 언술은 여타의 어느 언어보다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여타학문의 문맥과의 비교를 통한 재해석이라든지 비판적 교정이 요구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과학과 신학의 출발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담하고 적극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재의 유비와 신앙의 유비라는 전혀 다른 방법론, 사물의 본성과 사물의 지혜를 추구하는 목적의 차이, 어떻게how와 왜why라는 궁극적 해답의 요청의 갈림길은 사실 쉽게 통합될 수 없는 양자적 특성으로 보인다. 이러한 차이를 바탕으로 과학과 신학 사이의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모든 과학적 가설이 그 자체로 신학적 설명력을 제공할 수 있다고는 판단되지 않는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각기 한 부분을 동원할 때보다 훨씬 더욱 일반적인 설명력을 대화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느냐가 기준으로 되어야 한다. 즉 중요한 것은 이 양자의 대화와 모델의 구상을 통하여 우리가 경험하는 신앙과 삶의 실재들을 얼마나 더 설득력 있게 구출해 낼 수 있느냐인 점이다. 과학과 신학이 그저 방향 없이 무매개적으로, 혹은 어떠한 특정한 이익을 위해 대화하는 작업 자체만으로 각광을 받는 시대는 지났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2003. 0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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