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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06 (09:02) from 217.95.27.227' of 217.95.27.227' Article Number :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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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05. 05] 44. 과학과 신학 3 :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당대의 큰 사상가들이 구사하는 개념은, 이전의 사상과 그 개념이 보여주지 못하는 영역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전략이 가미되어 있다. 그것은 기술언어일 수도 있으며 이론언어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기술언어와 이론언어는 독자들이 읽고 판단할 때에는 별반 다를 바 없을 수도 있으나, 정작 그 언어를 창출하는 사상가의 전체 사유의 배경을 고려해보면 잘 잡히지 않는 정말 어려운 부분이 연루되어 있거나, 아니면 생각보다 훨씬 독창적일 수가 있다.

이럴 경우 그 사상을 접하는 이가 행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이해와 해석의 방법은 자신이 사유하고 있는 그 전체상-프래임과 내가 읽고 있는 철학자의 프래임을 유비적으로 소통시키는 방법일 수 있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기본적으로 한 사상가의 사상의 뿌리에까지 우리가 접근해 들어가기 위해 내 시간을 엄청나게 쏟을 필요가 있는가 하는 '가치'와 '효용성'이 문제가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상의 운동에 있어서 결국 자신을 새롭게 이해하고 갱신하려는 목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깨달음을 향한 수단이 독서와 사상의 섭렵이라는 점이다. 물론 어떠한 사상의 전문적인 전달을 자신의 삶의 운명으로 생각하는 사상의 전도사들의 삶은 조금 다르겠지만.

단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하나는 나의 사고를 매개로 큰 사상과의 소통을 전개할 때 자신의 사고가 끊임없이 개방될 수 있는 개방가능성을 분명하게 전제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사상의 운동이 결국 무지몽매한 신비주의나 자기 기만으로 추락되지 않으려면, 나의 사고 혹은 저자의 사상이 '현실'세계에서 실질적인 의미를 주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때에는 가차없이 폐기처분하는 것이 오히려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삶은 무지몽매한 사상의 오류들이나,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는 관념들을 마루타로 실행하기에는 너무 생이 짧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는 사상이 아무리 커도 개인의 존재감 마저도 박탈할 만큼 도대체 그 얼마나 크고 대단한 가치들일까 하는 야속한 생각도 개인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에 참여하는 세미나 가운데 하나가 <하이데거와 형이상학의 문제>이다. 철학과 부브너 교수와 튀빙엔 대학의 은퇴교수 융엘이 공동 참여하고 지도하는 세미나이다. 위에서 잠시 지적한 관념의 운동을 고려하면서 생각의 단편들을 정리해 나아가고자 한다.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핵심 개념어는 존재자와 존재이다. 이 존재자와 존재라는 기술언어의 맥락에는 두 가치가 숨어 있다. 거기에는 영원한 진리와 시공의 현재라는 양가적 가치가 숨어 있다. 그리고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이 둘이 어떠한 방식으로 매개되는 자리를 그의 기술언어를 동원하여 풀어내고 있다.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형이상학이란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진술이다. 그것은 인간의 궁극적 진리에 관한 탐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있어서 진리에 관한 탐구의 주체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 인간 또한 시간과 공간의 유한한 지평에 제한된 존재자의 특성을 지녔기에 존재에 관한 탐구인 형이상학의 문제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이전의 형이상학 전통에서는 존재에 대한 탐구를 함에 있어서 정작 그 탐구의 주체가 시공간에 연루된 존재자임을 고려하지 않고 방치하였다. 이는 두 가지 문제를 제시한다. 하나는, 진리에 대한 탐구는 결국 존재자들끼리의 사유의 이전투구에 불과한 환영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존재의 망각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사유의 다른 출처, 존재와 진리의 계시가 더더욱 중요한 것임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공식적으로 우리가 텍스트를 통해서 나눌 수 있는 관념의 어법들이었다.

나는 몇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 이론은 전체의 경험세계에 대한 반성이라는 점이다. 이론은 추상이다. 그것은 경험을 설명하기 위한 문명의 전략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걸어다니기만 하면 대한민국의 형체를 전부 보거나 판단할 수 없다. 우리가 잘 걷기 위해서는 꼭 걷기만 해서는 안되고, 지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비상이고 초월이고 인공위성을 통한 관찰에서 나오는 국면이다. 삶은 푸른 생명나무고, 이론은 회색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은 철저하게 경험세계를 전체적으로 반성하게 하는 데에 그 생명력이 있다. 얼마나 전체를 짚어낼 수 있느냐, 그 이론이 얼마나 전체 경험과 호응하느냐가 그의 중요한 전거가 된다는 점이다.

이는 전체Ganze에 대한 일종의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는 형이상학과 신학에 제한된 의미를 넘어선다. 즉 어떠한 각 학문과 이론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단위에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음을 의미하고, 우리의 세계는 여러 특정한 입장에서 전체를 단면화 한다 하더라도 그 내용들간의 이론적 부정합성을 야기할 만큼 불합리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세계는 어떻게 짤라서 보아도 충분히 추상적인 이론의 측면에서 보여질 수 있도록 구비가 되어 있으며, 그 각각의 이론들이 궁극적으로는 세계의 합리성에 기반하여 정합적으로 유기화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이론을 통한 학문Wissenschaft는 어떠한 진리와 본질의 확인이 아니라 그 본질의 의미에 대한 지시이다. 이론은 추상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경험과 상응성을 지닐 지언정 경험과 교체될 수는 없다. 세상에 어떠한 이론도 그 진리와 본질에 대한 순수한 지시를 내포하지는 않는다. 하이데거의 개념과 연결시켜 고려해 본다면, 이론은 말하자면 존재자의 언어유희이지 결코 존재의 언어적 실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미에서 무엇이 이론과 학문의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인가? 그것은 그 이론과 학문을 통하여 우리가 얼마나 진리에 대하여 묻게 되는가 하는 점이다. 학문은 결코 대답을 주지 않는다. 예전에는 쉽게 보였던 것이 알고보면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폭로자이다. 하나를 분명하게 알아가면서 동시에 그 하나에 관련된 열의 확인되지 않은 물음이 열리는 과정이 학문의 탐구 과정이다.

셋째, 학문은 열정이다.Wissenschaft ist unsere Leidenschaft. 이는 융엘의 표현이기도 하다. 학문은 '원래' 열정이다. 그리고 학문은 열정적으로 해야 한다. 학문이 현실에 있어서 어떠한 의미와 권력과 함의를 지니든 학문은 원래 열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그것은 '잘 쓰여져야 할' 열정이다.

넷째, 어떤 의미에서 학문은 무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질문의 내용마저도 학문의 기술에 포함될 필요는 없다. 이에 대해서는 더 많은 설명이 요구된다.


융엘의 동료이자 노벨화학상을 탄 교수와의 경험을 그는 회상하였다. 만약 그 동료가 특별하게 예각화된 주제를 고민하지 않고, 본인처럼 소위 전체를 고민했다면, 그에게 노벨상의 영광은 없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이는 소위 존재자의 학문인 과학/학문과, 존재와 무에 관한 학문인 형이상학의 차이를 지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는 충분히 생각해야 하고 고려해야 할 지점이다. 특히 하이데거의 맥락에서 형이상학은 존재의 탈은폐, 존재의 계시를 통한 신학이 가미되어 있다. 마치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에 관한 이해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은총으로 자신을 인간에게 보여줌으로서 열린다는 신학적 계시론을 연상하게 한다. 말하자면 형이상학과 신학은 소위 은총과 기도가 겸비되어야 할 학문이라는 점을 지시하기도 한다.

샤르트르가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고 하였다. 며칠 전 동구의 10여개 국이 EU에 포함된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와 여러 역사 경제적인 당위를 설명하지만 결국 그 역사적 사건의 깊은 동인은 실존주의적 맥락에서 짚어보면 인간의 낯선 것에 대한 Angst 불안에 있다. 다양한 주의가 횡횡하는 시대에서 실존주의의 핵심을 강조하기 위해 부브너와 융엘은 EU 맴버들의 실존적 불안감을 짚어낸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학문의 엄격한 논리와 방법론에 대극적으로 어설픈 '불안'의 과잉해석이나 '자유'의 과잉요청을 동원하여 신비주의나 몽상주의로 빠질 수 있다는 비판적 해석도 가능하다. 이는 오늘 맑스 베버의 학문이론을 대변하여 하이데거의 실존과 자유 관념을 끊임없이 비판한 몇몇의 동료들의 항변에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내가 보고 있는 몇몇 시스템이론이나 실재론적 형이상학의 관점에서도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는 여지의 것들이다. 그러나 나부터 기본적으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그 인간적인 주장 마저도 깰 만큼 완고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어찌 보면 실재하는 세상의 물리적 무게만큼, 실존의 존재감과 경외감이 깨지지 않음을 더더욱 바라는지도 모른다. 이제 강의는 시작이다. 이렇게 하이데거, 부브너와 융엘과의 오래간만의 만남을 기록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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