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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11 (09:23) from 80.139.176.16' of 80.139.176.16' Article Number :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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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05. 10] 46. 과학과 신학 5 : 영혼의 기하학






이것은 순전히 나의 내면적인 가설들이다. 영혼의 빙점을 넘어 주조되어지는 육체나, 육체라는 물리적 피라미드의 정점에서 출현하는 영혼이라는, 우리 문명이 그나마 제공하고 있는 영혼에 관한 관념들이 개인적으로는 썩 만족스러운 가설이 아닌 듯 하다. 전자는 마치 신화적이고 후자는 괜시리 기계론적이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한 인간을 깊이 만나고 그의 인격과 교감할 때, 그 교감과 접촉의 대상은 시시각각 변하는 물리적이고도 신체적 존재가 아니라 그 변화에 영향받지 않고 초월하는 모종의 연속적 인격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십년 이상을 알고 만나는 친구들이나 존경하는 스승님들을 마음속에서 홀로 헤아릴 때,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난 내가 만나는 그 들의 인격과 정체성과 내면이 별로 변화했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은 신체라는 물리적 조건의 영향을 우연적으로 받을 수 있다. 몸이 피곤하면 마음도 피곤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과 영혼의 활동성은 그 물리적 조건과는 비교적 무관한 듯 하다. 그리고 심지어 물리적 조건이 소멸한다 하더라도 마음 또한 소멸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시공에 물리적 바디를 소유하지 않은 많은 이들에 대한 살아있는 이들의 만남과 회상을 모두 기억의 단순한 재현으로만 처리해버리는 것은 너무 야박한 영혼의 방정식이다.

혹시 이런 것은 아닐까. 시공에 관련한 물리적 바디와 그 정체성 X는 병행 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쉽게 잘 분리되어지지 않는 접촉과 병존의 관계라는 것. 시공에 걸맞게 구현된 물리적 바디는 그 정체성 X의 한 방식이고, 시공을 넘어간 그 차원에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

고전적으로 영혼은 육체에 자신의 둥지를 치거나, 육체가 사멸하면 영혼은 날개가 달려 하늘로 비상한다는 식의 문법은 조금 지루하다. 그렇다고 디테일하게 이 문법의 전제인 '인격'을 미세한 모나드이론으로 해체해버리는 실재론이나, 신학은 형이상학이 아니라며 영혼과 육체의 핵심을 협소한 책상의 몽상으로 치부해버리는 현실론, 아니면 자신이 주장하는 핵심적 전제에 대한 반성적 검토 없이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감염된 비상식의 도그마를 강변하는 변증론이 각각의 대안이 될 수도 없어 보인다.

내가 아는 사람들의 신체는 세월속에서 풍화하지만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인격과 영혼은 어찌 그리 세월의 풍랑에도 그렇게 쉽사리 바뀌지 않는가? 이것은 나만의 착각인가? 어찌보면 신체는 시공의 옷이지만 마음과 영혼은 꼭 시공이 강요하는 코르셋과 관련 없는 영역의 것들이 아닐까.

인간에 관련해서는 영혼과 육체의 문제이지만, 신에 관련해서는 신과 물리적 세계의 문제이다. 관념과 감각의 병행, 심신의 병행이 바로 신에 대한 반성으로 연결될 때에는 신과 세계의 병행론 정도가 아닐까 싶다.

신과 세계의 상호침투? 이 발상은 좀 나이브 하지 않은가? 세계와 신 사이의 소통의 단절이라는 전통적 담론의 강한 부정어가 될 지언정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어 보인다.  저 담론에 따르면, 세계에 신의 발끝만 잠시 거쳐도 그것은 신과 세계의 상호침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세계의 신격화? 이 발상도 상당히 과격하며 거칠다. 오히려 저 발상은 가설이라기 보다는 소망의 체계에 보다 가까운 것들로 보인다. 나도 세계의 신격화를 소망한다. 그러나 가설로 보기에는 거기에는 삼박자 변증법의 스텝이 보여주는 건조한 기계론으로 오해될 소지가 크다.

죽어서 천국가는 것이 영혼이라는 사이비 기독교적 교설 뿐만이 아니라, 흙에서 나온 인간은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는 구약성서의 메시지 뿐만이 아니라, 영혼이라는 관념은 인간 정체성에 관한 깊은 성찰이 가미된 인류의 문화적 개념이다. 대학 농활 시절, 뜨거운 식용유에 던져지면서 순간 바싹 마른 튀김이 되어버리는, 형들이 막 잡아온 작은 송사리들을 보면서 그 송사리들에게도 영혼이 있나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아직도 그 죽은 송사리의 영혼이 존재하는지는 참 어려운 질문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최소한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다는 신념체계를 갖는 것이 내가 살아가고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가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꼭 육체에서 나왔다든지, 역으로 육체에 둥지를 튼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영혼은 생명 정체성의 정점을 지시하는 관념이며 시공에 관련한 신체적 생명이 소멸되어도 다른 세계에서는 그에 걸맞는 바디로 얼마든지 영혼과 더불어 존재가능할 것이다. 다른 차원의 바디가 어떤 형태가 될 지는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나 다른 차원에서도 영혼은 연속성을 가지고 충분히 존재할 수도 있어 보인다. 단지 지금 중요한 것은 영혼으로서의 마음과 신체는 병존하는 것이며 두 차원이 서로 조화 가운데에서 놀랍게 병존하는 것이다.

내가 죽을 때 육신은 시간의 퇴화속에 희미해져 가지만 의식도 희미해질 수 있지만, 영혼은 그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의 그 선명성과 정체성을 잃지 않고 죽음과 더불어 거하고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방식의 차원으로의 진입을 준비하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육신과 의식의 소멸속에 영혼이 해체된다면, 오늘 우리가 생생하게 경험하는, 남아있는 자들과 소멸한 자와 사상의 서늘한 교감과 만남을 살아있는 자의 기억 재현과 상징 조작의 몫으로만 돌릴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 광활한 우주는 진정 산 자의 죽은 자에 대한 회상의 뺑뺑이 밖에 되지 않는 것인가? 내가 알고 있는 죽은 자들, 예수, 하느님 경험이 단지 내 회상의 산물일 뿐인가.

나는 시간 속에서 변화한다. 주름이 생기고 근력을 잃는다. 그러나 나는 그 변화하는 나를 다시 냉철하게 본다. 그 시선은 시간의 변화와 무관한 시선같아 조금은 서늘하다. 내 삶에 걸터 앉은 이 두 다른 차원은 엄연히 공존한다. 이러한 영혼의 기하학은 순전히 나의 주관적 경험에 기반한 내면의 가설들이다. 하지만 더욱 구체적으로 정신과 뇌에 관한 정신의학, 심신병행론, 신학적 심리학적 영혼론, 사이버네틱스 등을 통해서 충실히 반성되어야 할, 갈 길이 많은 사변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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