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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16 (05:06) from 217.95.24.51' of 217.95.24.51' Article Number :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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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05. 15] 47. 영혼의 종말론





지도교수와 지도교수 밑에서 종말론에 관한 논문을 쓴 Gregor Etzelmüller 박사와 몇몇의 과정생, 그리고 헝가리 프라하대학의 Jan. Stefan 교수와 헝가리 출신의 과정생이 모여 2004년 5월 14일부터 15일까지 이틀동안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바르트의 종말론이라는 주제로 오버세미나를 하다. 텍스트는 바르트의 뮌스터 강의의 구원론이었다.(Karl Barth - Gesamtausgabe II. Akademische Werke 1925/1926 - >>Unterricht in der christlichen Religion<<, III. Band : Die Lehre von der Erlösung, 2003, Theologischer Verlag Zürich, 378-493).

며칠 전 <영혼의 기하학> 에서는 인간의 정체성인 몸과 마음과 영혼의 문제를 잠시 숙고해 보았다. 영혼은 사멸하는 육체와는 달리 경험적으로 쉽사리 변하지도 않고 인간의 정체성과 관련된 한 점으로 배려되었었다. 그리고 육체가 사멸하여도 영혼은 사멸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설을 가지고 어떠한 방식으로 인간은 시공과 죽음을 넘어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개인적인 가설들을 스케치해 보았다.

어제 오늘 이틀동안 집중적으로 종말론을 검토한 시간은 바로, 이렇게 영혼과 육체의 문제, 죽음의 문제, 그리고 몸의 부활의 문제가 어떻게 신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를 다루는, 나에게는 정말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사실 종말론에 관련된 세부적인 논의는 너무나 다양하다. 거기에는 시간과 영원의 관계, 즉 시간론, 영혼과 육체의 관계, 즉 영혼의 존재론, 또한 신론과 심판과 부활이라는 신학의 가장 궁극적인 주제들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다.

우선 시간의 문제를 고려해 보자. 시간과 영원에 관한 접근은 첫째, 시간의 총합으로서의 영원, 둘째, 시간과 영원의 대립관계, 셋째, 영원으로서의 시간이라는 세 가지 측면으로 분류될 수가 있다. 신학적 시간론에 있어서 지금까지 삼위일체론과 잘 조화롭게 구비될 수 있는 이론은 여전히 쉽사리 찾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적실한 신학적 시간론의 새로운 구상은 여전히 우리시대의 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간과 영원의 문제를 고려할 때 우리는 이마고데이와 시간적 사건들 상관관계를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핵심적으로 죽은 자들의 존재방식을 어떻게 신학적으로 해명하고 종말과 연결시켜서 핵심적으로 구상하느냐가 종말론의 주된 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칼 바르트는 레디칼하게 사람의 영혼은 불멸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즉 영혼불멸설의 입장에 서 있다. 죽음은 시간세계의 한 경험일 뿐 죽음에 영혼까지 죽지는 않는다. 스탈린이나 히틀러는 육체를 죽일 수는 있어도 영혼은 죽일 수 없다. 이러한 영혼의 문제는 희망의 문제와도 연결이 된다. (바르트의 죄와 죽음의 문제는 더 집중적으로 봐야 할 것 같다).

희망은 미래에 대한 경험으로서의 희망을 의미한다. 이 희망은 은총과 더불어 존재한다. 창조는 꼭 실재론적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문화적 정치적 차원의 창조를 염두해야 할 필요도 있다.


바르트에 있어서 사멸된 육체를 떠나는 영혼은 특이하게도 여정중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이것은 참 많은 논쟁을 제시해 주었다. 또한 영혼은 궁극적으로 종말의 때에 육체의 부활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이 육체의 부활은 다른 사람의 기억을 통하여 재현되는 소위 과정신학적 차원의 부활이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는 의미로서의 레디칼한 육체의 부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완성의 시간, 재림의 시간에 우리는 육체를 얻으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시간은 완전한 우리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심판과 재림, 그리고 육체의 부활과 최후 종말의 시간이 동시적 사건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었다.

서양의 정신적 뿌리인 기독교는 인간 정체성의 문제의 숙고에서 영혼 개념을 고안해 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체의 문제는 한 치도 후퇴할 수 없는 명명백백한 자신들의 고민이자 문화이기도 하다. 인간의 삶과 죽음과 정체성에 관련한 고민과 숙고와 전통이 바로 기독교에서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과 심판이라는 신학적 성찰이기도 하다. 인간은 죽으면 신체, 즉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전거가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그러나 그 영혼은 하나님의 품에서 쉼을 경험한다. 그것도 일종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종말의 심판과 재림을 통하여 인간의 정체성을 온전하게 구현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육체의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드러난다. 만약 이러한 육체에 대한 희망을 버리면 기독교는 도케티즘으로 빠질 수 있다.

종말론적 감각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성서에 기대고 있는 전거이기도 하고, 기독교의 희망의 원리이기도 하며, 세상을 경험하는 인간의 도덕적 가치와 관련하여 많은 힘을 준다. 기독교의 종말론에 있어서 육체의 부활은 화이트헤드의 객체적 불멸성이라는 타자를 통한 기억과 재현의 차원이 아니라 아주 레디칼한 주체적 불멸성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의 비전에 의하여 죽음을 경험하는 인간 영혼은 의미없는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의 가능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종말에 있어서 영원한 삶에 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비전은 기독교교리의 최고의 비밀이기도 하고 마지막 열쇠와 같다. 그 비전은 인간의 상징과 관념으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비전은 심판과 관련한 세계에 대한 비전일 수도 있고, 심판 이후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심판과 구원은 꼭 기독교적인 인식론적일 필요는 없다. 이는 심판과 구원이 교회라는 인식론이 주는 벽에 갇혀 있지 않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바르트의 세계의 종말에 관한 기록은 중후하고 장엄하다. 그리고 엄숙하다. 신학의 궁극적 비밀과 본질에 관련한 핵심적인 논의이다. 인간 정체성의 문제가 어떻게 신과 연결이 되고 또 마지막에 그 인간은 다시 어떻게 죽음을 넘어 다시 육체를 얻고 완성되는가를 고민하는 신학적 사고의 진수를 경험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론의 구성에 대한 적지 않은 해석학적 비판이 아주 강하게 들어왔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은 대체적으로 아래로부터의 이해의 불가능성을 말한다. 그러나 자신의 신학적 논증을 전개하고, 또한 그것이 아래로부터의 이해를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논증이라 할 때 이 딜레마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이다.

죽음을 넘어서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거하고 재림을 통하여 어떻게 그가 다시 몸을 얻는가 하는, 지극히 진지하고 심오하며 신비롭기까지 한 이 신학의 정교하고 장중한 논리들을 보면서, 신학 또한 아주 깊이 들어가면, 결국은 그 신학자의 믿음의 체계, 가설의 체계에 대한 정당성의 문제로 진리치는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살아있는 신학자가 죽음의 세계, 빛이 닿지 않는 세계, 영원의 세계를 언급할 때 그 부분은 더욱 분명하게 부각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체와 영혼 그리고 죽음과 부활, 이것은 결코 굳은 신학적 논변이 아니다. 그것은 신학의 궁극적 핵심의 문제이다. 에크하르트는 하느님을 신성의 또다른 환상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분별지가 사라지는 자리에 하느님과 인간의 그 차이도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그 무의 자리를 보고 있다. 그러나 바르트에 있어서 영혼의 자리는 결코 죽음으로도 훼손되지 않고, 신과 더불어 무화되지도 않으며, 종말에 와서는 육체의 부활을 통하여 온전한 정체성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지도교수가 1년전에 돌아가신 어머님을 그리워하며 슬퍼하고 있을 때 두 딸은 할머니의 영혼이 하늘에 있다는 말을 하며 위로하였다 한다. 이는 신학의 종말론, 혹은 신학의 지혜가 기대고 있는 어떠한 심오한 합리성Tiefe Rationalitaet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신학은 지혜의 언어이다. 부활을 꼭 물리적 개념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그것은 문화적 개념으로 소통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의 전통과 경전의 여러 메시지들은 우리들의 순간 순간의 인간경험을 통전적으로 현재화 하는 심오한 지혜의 성취이다. 그것들은 결코 값싼 언어가 아니다.

종말은 신학적인 의미와 우주론적인 의미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종말의 때도 다가오는 때와 하느님 나라의 실현의 때 이 양자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새롭게 발현하는 현실의 성취와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이 양가적 특징은 삼위일체론과 더 조화롭게 결합되어야 할 것이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성서적 연관성이 아주 밀도있게 결부된 신학이다. 그러나 그것은 컨텍스튜얼한 신학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그 신학에 결여된 것은 윤리에 대한 고려이다. 하모니, 조화에 대한 강조만으로는 희망과 종말의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의 영원한 죽음, 영원한 증오에 관한 언급들은 새로운 시사점을 제공하기도 한다.

종말론에 관련된 종교적 문화적 상징은 복합적이다. 부활,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 심판과 재림, 이러한 복합적 관념의 장을 충실히 고려할 때 종말론의 의미는 제대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신체의 사멸과 영혼의 도상, 그리고 다시 육체의 부활에 대한 소망과 희망, 이러한 믿음은 허상이 아니라 어떠한 실재보다 더 자명한 세상의 것인지도 모른다.

영혼과 우주의 탄생, 죽음, 부활은 결코 쉽게 대답되어질 수 없는 신학의 물음들이다. 영혼의 종말론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다. 거기에는 잠시 피고 지는 인간의 생에 대한 깊은 이해와 어떠한 죽음도 영혼을 파괴할 수 없다는 신의 마음을 지닌 인간에 대한 격려가 있다. 우리의 생은 죽음을 거쳐 영원한 가치를 지니며 우리의 삶에 펼쳐지는 선과 죄의 댓가는 결코 무로 돌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그 자리를 얻게 된다는 가치를 암시하고 있다. 어떻게 그것이 포이에르바하가 말한 착각과 동류일 수 있을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를 더 인간으로서 진실하게 하고 담대하게 하며, 세상을 더 신실하게 하는 신학의 전통과 과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세계의 궁극적인 비밀과 같은 하나님의 신실성, 하나님의 희망, 하나님의 인간 영혼을 향한 그 비전을 얼마나 깊이 헤아리고 '상상'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의 '상상'은 믿음과 신앙, 그리고 사랑과 희생의 비밀에 대한 경험에 연루된 것이기에 그 '상상'도 지난한  경험의 산물이다. 나는 바르트의  육체와 영혼 종말과 심판에 관한 한 편의 장중한 건축물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육체가 소멸하면서 죽음을 경험하는 영혼을 끝까지 바라보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신비를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하느님의 신비를 신학의 언어로 그려내는 그 신앙의 진지함과 깊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내 생의 고민과 따로 떨어진 학문이 아니라, 내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두려워하고, 슬퍼하며 기뻐하는 나의 경험들과 직접 닿아있는 신학을 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행복하였으며 감사함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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