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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07 (08:06) from 129.206.196.35' of 129.206.196.35' Article Number :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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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 생명, 인간


1  

오늘도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지구적인 문제에 대한 글들을 접했습니다. 생각보다 심각한가 봅니다. 유럽도 어떻게 미국과의 힘겨루기에서 혹여나 밀려서 유전자 조작 농산물이 들어오지 않을까 고민을 하던 중, 한국의 상황을 생각해 보니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일 수 있구나 하는 판단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그 분야의 교수님은 유전조작의 과정에서 철두철미하게 다 조율을 한 후에 생산된 농산물이기에 그렇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보는 과학주의적인 입장에 서 있더군요. 그리고 이미 미시세계는 갖가지 유전자의 교란으로 황폐해져 있는 상황을 너무 간과한 채 거시적으로만 생각하는 대중들의 지식의 결핍을 꼬집더군요.

그러나 나는 한국에 들어가서 유전자 조작 식품을 먹을 기회가 있다면, 조금 피하고 싶습니다. 내 몸이 깨끗해서라기보다 되도록이면 무엇이든 자연적인 질서에 가까이 하고픈 이기적 본능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줄기세포의 문제가 분명 유전자조작 식품보다는 덜 위험하다 할지라도, 저는 이런 생각까지는 들었습니다. 줄기세포로 인하여 파괴된 신체의 일부가 원상복귀 되는 것 까지는 좋은데, 인간의 자손 번식의 과정에 인간생명체의 교란은 없는가 하는 개인적인 질문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현실에서 야기되는 유전자결함을 지닌 수많은 인간생명의 심각함이나 자연의 상태를 무시하고 우리가 순수하고 자연적인 유전자와 정보들을 잘 번식해 나아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아마 연구하시는 분들의 조언을 듣고 싶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2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윤리적 구성은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줄기세포연구가 그 존엄성을 파괴하였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저는 과학적 탐구와 발견을 그나마 가치가 개입되지 않은 영역으로 묶어두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적 탐구와 발견을 통하여 그를 매개로 인간의 존엄성이나 윤리적 구성이 가능한 것이지, 인간의 존엄성이나 윤리적 구성이 과학적 탐구의 문을 닫게 하는 장치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미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과학적 발견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고 하는 어떠한 패배주의적 태도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이나 윤리의 책임 있는 구성을 이미 바랄 수도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한국의 과학철학자 분들이 앞으로 많은 논의와 학문적 생산을 통해서 나름대로의 구체적인 길들을 제시하셨으면 좋겠고, 저 또한 그분들의 견해를 통해서 많은 지식과 깨달음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3  

저는 줄기세포 연구를 인본주의나 신본주의적 입장에서 바라보기보다는 자연주의적 입장에서 접근하고 싶습니다. 즉 이를 통하여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그리고 신의 주권에 관한 새로운 시각들도 우리가 논의하면서 얻어낼 수 있지만, 그동안 우리가 금긋고 살아왔던 인간과 신성의 범주가 생성하는 구체적인 자연을 터치하기에 어떠한 한계점에 다다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줄기세포라는 과학혁명의 전조 앞에 어떻게 인간은 그의 생명의 시작을 어떻게 잘 경계짓고 그로 인하여 인간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으며 과학의 성과를 잘 인류가 수렴해 낼 수 있느냐의 문제가 가장 클 것입니다. 수정 후 14일간을 이렇게 종교와 과학이 달리 접근하는 과정에서 양자 모두 근거와 입장과 신념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이 태초의 어둠과 같은 14일의 시간을 ‘이것이다’라고 규정하면서 결국 힘의 대립의 문제로 몰아나가는 경향성은 절대적으로 반대합니다. 그것은 성숙하지 못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종교나 과학이나 이런 의미에서 자신들의 신념을 이 14일에 대한 답으로 표명할 뿐이지 어디에도 정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기준으로 적절한 답을 구성해 나아갈 것인가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오늘날 상식적인 기준은 아무래도 인간의 존엄성의 관점 속에서 인간인 시점과 인간이 아닌 시점을 접근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인상을 받았고, 또한 저도 이러한 의견의 중요성에 많은 동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거시적으로 보면 저는 배아줄기세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 두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4 and 5).


4

첫째, 어짜피 인간의 존엄성은 배아줄기세포를 세포로 규정한다고 해서 훼손된다고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요구될 것 같군요.

저는 배아줄기세포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런지 몰라도 자명한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세포라 하더라도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어떠한 특별한 목적 없이 착취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체의 존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배아줄기세포가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배아줄기세포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소위 ‘망가진’ 인간의 존엄성을 살릴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생명의 가능성인 살아있는 세포에 인격을 부여하는 만큼 우리는 왜 살아있는 생명의 정점(저는 여기에 ‘아름다운 정점’이라는 수사를 첨가하고 싶습니다)에 있는 수많은 불치병 난치병 환자들의 처절한 현실을 상상해내지 못하는지 의문을 많이 가집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인간을 자연의 고결한 완성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범주에 제한된 표현이 아닙니다. 자연의 여느 생명체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인간생명은 이 생태계의 어느 생명체보다 소위 진화를 거듭하여 성장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성장으로 인하여 이 자연 전체를 성숙한 태도로 책임져야 할 의미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인간이 되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이들 가운데 우리의 많은 이웃은 정말 죽은 사람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처한 고통을 운명으로 규정하는 어느 여하한의 종교적인 도그마나 신념은 너무나 잔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고통속에서도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깊은 영성을 인간은 갖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안에 있는 이의 고백에서 나와야 하지 그 고통 밖에 있는 사람들이나 신의 시선에서 나와서는 안될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배아줄기세포가 세포냐 인간이냐라는 논의는 어쩌면 대단한 관념론적 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그 배아에서 출발하여 생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이 처하는 고통에 비해서 사소할 수도 있는 고민이라 생각합니다.

인간 정체성의 문제라는 소위 심각한 사안은 바로 ‘배아줄기세포가 세포냐 인간이냐’라는 문제와 연관고리를 갖는데, 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생명의 가능태로서의 단위가 중요한 것이냐 아니면 인간의 삶의 세계에 진입한 생명체가 당하는 고통의 극복이 중요한 것이냐의 문제가 중요한 관심이 됩니다. 만약에 후자의 문제가 저에게 하등의 고려요소가 안된다면, 저는 배아줄기세포가 세포냐 인간이냐를 떠나서 신적인 존재라고 규정하여도 받아들일 동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배아줄기세포를 세포냐 인간이냐라고 규정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 것 보다는, 이 세상에서 이미 태어나서 뜻하지 않게 고통에 직면하여 그 본유의 존엄성을 갖지 못하는 인간에게 인간의 존엄성은 진정 무엇인가가 더욱 직접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런 고려 속에서 저는 배아줄기세포는 오히려 인간 존엄성의 파괴가 아니라 인간 존엄성의 회복이라고 일단은 고백하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고려할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4.1.

하나는 ‘어린 생명’이 ‘늙은 생명’의 희생양이 되어 강자에 의해 약자가 파괴되며, 인간존엄성이 파괴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꼭 그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생명의 가능성의 단위가 현실화된 생명의 고통을 위해 기여될 수 있다는 차원으로 생각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즉 줄기세포의 사용을 단지 세대간의 문제, 그리고 약자(배아줄기세포)와 강자(성인)의 문제로 몰아서 이해하는 것은 근시안적인 접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 그대로 나의 자식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생명의 가능성들 가운데 현실화  되었기 때문에 그가 이렇게 세상을 본 것일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현실화된 생명이 뜻하지 않게 인간의 존엄성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에 처했을 때, 배아줄기세포의 위치는, 수많은 생명의 포텐셜을 현실화된 생명이 처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기여로 자리 잡혀질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 자체를 약탈로 보기 때문에 반대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생명의 끈질긴 희생과 질서로 봐야 하는지가 결정적인 입장의 차이가 될 것입니다.


4.2.

다른 하나는, 인간의 존엄성이 배아에 들어있기 때문에 배아를 파괴하면 존엄성이 파괴된다는 소위 유사 유물론적 사고의 견해입니다. 이는 인간의 배아에 영혼이 있다고 하는 영혼의 이해에 관한 유사유물론적 견해와 궤를 같이 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 사이의 노력과 성숙으로 인해 형성이 되는 관계적이고 문화적인 관념이지 어떠한 아프리오리한 관념이 아니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어느 사이트에 가보니 복제인간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짐승에 불과한 것이며 그러므로 복제인간의 존엄성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상당히 경악할 만한 내용의 기사를 접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라는 판단이 듭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DNA에 묻어있는 구성요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할 때에 형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배아줄기세포를 세포로 인정하는 것이 미래에 도래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수단화라는 문화적 발견의 가능성과 직결된다고 보기에는 고려해야 할 여러 변수들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인간이 신의 능력을 입고 나왔다고 하는 소위 유출론적 관념에서도 얼마든지 인간의 수단화는 신의 이름으로 오히려 자행되어질 수 있으며, 인간이 자연의 먼지와 몇몇 유기체의 결합으로 출현했다고 하는 소위 자연주의적 생성론의 관점에서도 얼마든지 인간의 존엄성은 더 아름답게 보존될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합니다.

만약에 인간의 장기를 얼마든지 줄기세포를 통하여 교체할 수 있는 미래가 도래했을 때, 그 현실을 우리의 생명의 가능성의 고마운 희생에 의해 깊은 의미로 헤아릴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단지 내가 원하는 부품을 내가 사서 교체하는데 무슨 고상한 해석이 필요할 것인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관계된 것이지 줄기세포가 지닌 인간존엄성의 훼손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더 문화사적인 견해들을 접해보고 더 구성할 필요성을 느낍니다만 이렇게 간략하게나마 저의 생각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5.

둘째, 인간이 신 중심적, 혹은 인간중심적으로 생각해왔던 가치관이 깨져나가는 시점이라면 전반적으로 생명현상과 자연에 대한 더 사려깊은 안목을 인류가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신 중심적이건 인간 중심적이건 그 양 축 사이의 반동 어느 곳에도 자연의 영역이 상세하게 터치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인간은 자연과 생명에 대한 접근을 신의 이름으로 행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은 인간과 자연과 생명에 대한 탐구를 제한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과 자연과 생명을 깊이 파고들면 결국은 밖에 있는 신과 인간과 자연과 생명에 스며 있는 신의 그림자와의 경계를 구분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신은 우리에게 그동안 대단히 현실적 관련성을 지니면서도 추상적으로만 접근되는 대상이었을런지도 모릅니다.

신으로 표상되는 그 전적인 생명의 가능성은 우리 인간에게도 그리고 자연에게도 어떠한 방식으로든 내면화 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단계에 이르렀는지도 모릅니다. 그 생명의 가능성을 마투라나는 아우토포에시스autopoesis라는 묘한 관념으로 표현하기도 하였고 시대에 따라 관념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접근하기도 했습니다. 과학은 바로 신의 품에서 그동안 그려왔던 생명의 가능성을, 자연과 자연의 소우주인 인간이라는 환경에서 발견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 생명의 아우토포에시스를 가지고 과학과 의학은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려고 합니다. 적어도 과학적 합리성의 견해에서 보면 그것은 충분한 정당성을 지닌 행위입니다. 과학은 이 새로운 아우토포에시스를 발견하였고 인류의 복지라는 이름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종교는 여전히 아우토포에시스를 신에게만 귀속시키려는 입장을 계속 고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으로부터 은총으로 받았던 생명의 포텐셜을 이제 인간은 자신의 일부에서 발견하고 다시 자신의 생명의 존속을 위하여 그 비밀을 향해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진지한 노력인지, 신성탈환인지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생명의 포텐셜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인간의 진지한 노력이 되거나, 거룩한 신성과 인간존엄성의 탈환이 되는 것이지 그 자체의 과학적 행위에 우리가 돌을 던질 수는 없다고 봅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건강한 과학은 세속화된 종교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과학의 사회적 복지와 구현은 마치, 순수한 이념을 지닌 종교가 사회적으로 불완전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떻게 지혜를 다해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선용하느냐에 따라 그 명암이 갈라진다고 생각합니다.


6

내 밖에 있는 저 생명들은 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나에게는 비존재와 다를 바 없습니다. 내 옆에 있는 친구와 나는 눈빛을 나눕니다. 우리는 대화를 하고 서로의 인격을 존중합니다. 배아는 말 없음과 인격 사이의 어느 부분에 놓여 있는 생명일 것입니다. 그것을 저 비존재의 영역으로 밀어내는 것이 인간을 훼손하는 것이며, 거기에서 눈빛을 읽고 인격을 발견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고양시키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정도가 될 것입니다. 새가 얼마나 날고 싶었으면 겨드랑이에 날개가 생겼을까요. 그 수많은 비존재로의 가능성을 마다하고 수 만년의 꿈을 품고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질병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많은 인류 또한 건강한 우리와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살아있는 자에 대한 살 수 있는 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만 년의 꿈을 품고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의 후 세대들의 뜻하지 않은 질병과 고통 또한, 어쩌면 가능성으로만 남아있을 수도 있는 그 생명의 포텐셜을 통하여 극복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꼭 비인간적인 선택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7  

나는 바랍니다. 우리의 이 모든 윤리적 난점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과학적 성과들이 나올 수 있기를 말입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 현실만을 살지 새로운 기술이 존재하는 그 미지의 내일을 건너가서 살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판단은 오늘의 현실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제한된 판단일 수 있습니다.

생명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고양된 문화의 문제 이전에 절실한 생존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생명은 끊임없는 희생의 탯줄로 엮어지는 생존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은 어쩌면 잔혹합니다. 배아라는 생명이 말이 없듯, 건강을 잃은 많은 인류는 오늘도 병상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생명을 걸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입이 있어도 말할 기력이 없습니다.

말이 없는 이 침묵의 두 생명 사이에서 우리는 지혜롭게 무엇이 공존의 길이며 생명의 길인지를 우리 문명이 길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부족한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링크 : 서프라이즈 (200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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