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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5 (23:31) from 129.206.196.174' of 129.206.196.174' Article Number :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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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상보성과 신학





1. 자연의 조직화


과학은 이성을 통하여 자연 내부의 관계성을 발견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고, 그 과정이 바로 이성의 조직화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를 더 자연으로 확대하면, 자연 자체가 조직화의 과정 속에서 새롭게 갱신하고 진화하고 있으며, 이성의 조직화는 자연의 조직화에 참여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자연의 조직화는 자연의 복잡화를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순화를 의미하는 것인가. 기본적으로 자연이 내포하고 있는 복잡한 관계에서 어떠한 패턴을 이성이 발견하는 것이라면 그 자연의 과정을 복잡화에서 단순화의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만, 꼭 그렇게만 규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어떠한 자연을 단순화하는 순간 그 단순화의 배경이 되는 복잡한 사태에 대한 기술과 이해도 요청되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자연 패턴의 조직화와 자연 복잡도의 증진 사이의 함수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이러한 이성과 자연의 조직화라는 주제는 바로 그 자연의 가능성이 어떻게 현실화되며 그 현실화되지 않은 가능성의 영역을 단지 카오스로만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거기에는 질서화 되기 이전의 어떤 방식의 존재양태가 기능하는가 하는 문제제기와 연결이 된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아주 구체적으로 이 두 만남의 가능성들이 그들의 개성의 교환과 구현으로 인하여 그에 걸맞게 현실화되는 면도 있지만 그 두 특성이 아직 현실화되지 않고 공동으로 내함 되거나, 아니면 드러나는 현실화에 특정하게 기여하는 영역이 존재할 것이다. 즉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언제든지 시시각각 새롭게 다른 현실화에 기여될 수 있는 그 퍼텐셜의 영역에 대한 논리적 접근이기도 하다.

이 현실화의 문제는 현실화라는 개념 자체의 규명과도 세세하게 연결이 된다. 예를 들어서 물리학에 있어서 자연을 개념화 한 물리적 대상이 물질인데 이 물질로도 잡히지 않는 자연의 대상들은 아직 현실화가 되지 않은 자연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화에 있어서 과학은 특정한 도구를 사용하여 자연을 접근하고 있으며, 철학과 신학 또한 각각의 도구와 사변으로 자연을 접근하고 있다. 단지 그 차이는, 과학적 도구는 그나마 객관적이고 통계적인데 철학적 도구는 사실 더 세련되고 고상해서 구축하기가 더 어려운 면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구성에 있어서는 소위 '잡탕'도 끼고 '구라'도 끼고 조금 계량화 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적 도구라는 객관적 생산물이 또 그 과학적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의 감각적 패턴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우리의 사유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아무리 현미경이 발달해도 그 현미경은 결국 우리의 시지각의 감각적 의미와 한계에서 가치를 발하고 그 과학적 대상에 대한 사유와 분석에도 관련을 맺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적 도구는 감각과 정신과 사유와의 관련성 속에서 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을 파악하는 도구는 자연의 본질을 해명함에 있어서 여전히 제한적이다. 예를 들어 물질과 지속의 문제를 접근할 때 과학이 분석하는 물질대상과 더불어 물질의 현실적 존속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그 물질이 어느 시점에서부터 지금 시점까지의 지속Dauer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그 지속 자체를 측량할 수 있는 우리의 과학적 인식론적 도구가 얼마나 잘 구비되어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즉 이는 도구를 통한  자연의 인식은 결국 필름 한 컷 한 컷의 종합이지만 자연은 원래 그러지 않(을 수 있)다는 아주 심각한 딜레마에 대한 대면이라고 할 수 있다.


2. 자연의 상보성

또 다른 문제는 자연대상의 현실화 저편에 있는 카오스의 그 포텐셜한 영역의 문제이다.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관찰대상을 관조할 수 있도록 관찰자가 헬리콥터를 타는, 소위 헬리콥터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즉 관찰자가 헬리콥터를 타고 꼭대기에서 동네를 관찰하면서 그 동네가 시끄럽다 조용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물론 헬리콥터로 멀리서 동네를 보면 동네가 훤히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추상적 관찰에 불과한 것이다. 오히려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문제는 관찰자의 구체적 정황과 관련된 어떠한 관계성의 발견으로 접근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보여진다.

즉 예를 든다면 우리가 수백명이 모인 선술집에 처음 들어가면 그것은 하나의 시끄러운 카오스의 덩어리이다. 수많은 소리들이 그냥 뭉친 총체적 카오스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한 테이블에 앉고나면 각자의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 물론 이러한 대화가 조용한 사막에서 대화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어려울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카오스는 내 밖의 테이블에 있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소리이고 코스모스는 내 테이블 에서 내가 들을 수 있는 수준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예에서 개인적으로 중요한 것은 코스모스보다는 아직 카오스 영역이 훨씬 방대하다고 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어디에서부터 카오스이며 어디에서부터 코스모스인가, 그리고 그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넘어갈 때의 메카니즘은 무엇인가의 문제제기이다.

사실 신학에 있어서 이러한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논의는 신학의 사유적 전제로서 아주 강하게 작동되는 총체성Totalitaet 개념의 영향으로 인해 서로 접합되기가 어려운 면이 있었다. 사고의 기본적인 상식으로 차지하고 있는 완전성의 개념을 버리고 형이상학적 신학적 논의를 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서는 현대 과학적 전통에서 발견한 상보성complementarity 개념이 근래에 신학적 작업으로 많이 논의된다. 즉 신과 자연의 존재양식을 입자성과 파동성이라는 메타포로 접근하는 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상보성의 중요정신 가운데 하나인 관찰자와 대상이라는 이 문제가 신학적으로 어떻게 접합될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의와 진행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신학적으로는 인간과 신 사이의 인식의 상보성, 존재의 상보성의 문제로 주제화 되어진다.


3. 신학의 과제: 신학은 신에 관한 설명인가 신에 대한 경험의 봉사인가.


이 지점에 관련하여 우리는 설명으로서의 신과 존재로서의 신의 딜레마로 이 문제를 접근할 수 있다. 과학적 개념인 상보성을 신학적으로 유비시키면, 신을 설명하면 존재성이 날라가고, 신을 존재로만 바라보면 그 대상을 설명하기가 어려운 그 딜레마의 과학적 유비이기도 하다. 이러한 딜레마는 결국, 신은 설명의 대상인가 아니면 존재(인식,믿음)의 대상인가 라는 핵심적인 신학적 문제로 접근하게 된다.

더 깊은 맥락에서 상보성 개념을 검토한다면, 사실 상보성 개념은 소위 과학주의의 언어전통의 개념이며, 그러한 과학주의는 일종의 우주에 대한 최적의 설명가능성을 그의 전제로 하고 있기에, 소위 고백신앙의 전통이나, 존재신론이나 신비주의의 전통과 결탁된 신학적 논의가 상보성 개념이라는 현대적 통찰과 연결되기에는 근본적으로 제한을 지니고 있다. 오히려 신과 인간의 상보성 개념이라는 논의의 신학적 해명의 시도들은 역사 속에서 이단시 되었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인 이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과학적 발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상보성 개념은 자연의 원자론에서 관계론으로의 전향을 전제로 한다고 하지만 신학이라는 담론이 바탕으로 하고 있는 신 관념의 뿌리깊은 일자주의적이거나 전일론적 사고와는 이미 뿌리를 달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러한 신학의 전통과 과학주의적 전통의 길항을 헤아려 보면, 궁극적으로는 신학을 사고로 하는 전통과, 신학의 서술과 사고가 제한이 있다고 보는 전통의 차이가 존재함을 우리는 암시 받게 된다.  

전통적인 테제인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라는 강조가 바로 신앙이 이성과 참 같은 길을 가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역설에서 나온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루터의 이성은 창녀다라는 식의 이성에 대한 완전한 폄하의 관점은 아니더라도, 이 이성이라고 하는 도구가 신학적 서술의 완벽한 조건이 될 수는 없음을 고려하고, 더불어 이성적 작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필요할 것이다.

오히려 신학의 핵심적 과제는 신비와 신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그 신비와 신에 대한 체험을 하고 고백하게 하며 발견하게 하는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영화를 볼 때 영화에 스며든 어떠한 영혼과 마음의 감동을 느낀다. 영화를 만든 사람은 이미 자신이 체험한 영혼과 마음의 감동만으로 그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서 감동을 느끼는 자와 감동을 재현하는 자의 차이가 존재한다. 즉 영화 제작자는 그 영화를 영혼과 마음의 감동만으로 만들지 않고 치밀한 메카니즘에 대한 연구와 검토를 통해서 그 영화를 만들듯, 어떻게 교회가 세상에 희망이 되고 감동이 될 수 있는가를 찾는 여정이 바로 신학의 합리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학은 바로 교회가 어떻게 세상의 공동체에게 희망과 감동을 주며 봉사를 할 수 있는가를 신학적 합리성을 통해서 해명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은 바로 그 합리적이고도 신학적 작업의 여러 도구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이성에 대한 폄하로 해석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과학적 전통과 합리성의 경계에서 발견된 자연의 상보성을 단지 과학적이고 이성적 관찰의 산물로 폄하해서 신학적 합리성의 고려대상에서 배제하는 태도도 적절하지 못한 태도이다. 즉 신학에서도 자연의 상보성을 자연에 대한 일종의 과학적 유비로서 인식하고 풍요롭게 검토할 필요성은 있다. 오히려 왜 자연의 상보성이라는 메타포가 신학언어에서 전통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어떤 이유 속에서 쉽게 논의될 수 없었는지를 주목하는 것이 겸허하고 의미있는 태도가 될 것이다. (2005.10.05)






    관련링크

신학의 합리성 (2004.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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