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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30 (20:43) from 129.206.196.55' of 129.206.196.55' Article Number :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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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성에 관한 소고




만물유전과 창조론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신이라는 관념보다 더 근원적인 사실은 무엇일까. 그는 이러한 사실을 만물유전으로 통찰한다. 그에게 만물유전은 우주의 가장 근원적인 실상이라는 일종의 통찰에 기반한 믿음이며, 이러한 믿음의 내용들을 그는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자 한다.

이러한 안일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는 실재의 일반적인 원리에 상응하는 신의 의미를 충분하게 설명하려 한다. 즉 유동하는 실재의 본성과 근거에 대한 탐구와 함께 신학의 신 개념을 새롭게 발전시키고자 성찰을 시도한다.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작업의 궁극적인 동기는 어떻게 인간이 저 희미한 실재의 일반원리에 육박할 수 있느냐에 있다.

화이트헤드는 베르그송 류의 ‘엘랑비탈’이라는 관념이 새로운 해석의 통찰을 전혀 제공해주지 못한다고 그의 후기 저작 가운데 하나인 이성의 기능에서 지적하였다. 이는 화이트헤드가 구상한 유기체론이 우주의 본성에 대한 단편적인 답변으로 견지되었다고 하는 철학적 신학적 생기론 과도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창조론과 생기론과 목적론이 안고 있는 세 가지 안일한 사고방식이 자신의 유기체 이론과 그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 궁극자의 범주를 통해서 비판하는지를 주목하는 것은 화이트헤드의 중요한 강조이자 이 논문에서 규명해야 할 가장 중요한 쟁점이다. 마지막으로 동력인에 설명되어야 할 것을 목적인으로만 과도하게 설명해왔던 사상적인 오류를 화이트헤드는 어떻게 그의 유기체론에서 교정하는지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창조성과 현실태의 문제

여기에서 우리는 시공간적 연속을 바탕으로 한 현실세계의 전진에 있어서 창조성이라는 형성적 요소가 어떻게 형이상학적으로 뒷받침 하고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후기 저작인 사고의 양태에서도 이러한 우주의 과정을 추동하는 가능태로서 창조성에 대한 논의들을 우리는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창조성은 현실세계를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형성적 요소가 아니다. 즉 현실세계, 즉 모든 현실적 존재를 떠난 창조성의 논의는 존재론적 원리를 위배한다. 즉 모든 것이 적극적으로 현실태의 어딘가에 있으며, 가능태에 있어서는 어디에나 있다는 존재론적 원리를 위배하는 창조성의 자리는 어디에도 자체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과 창조성의 문제

신과 창조성의 관계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문제제기는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즉 우리는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이러한 활동력의 본성을 어떻게 창조성과 신과 영원한 객체라는 형성적 요소의 상호관계를 통하여 분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단서를 발견한다. 이는 영원한 객체와 신과 창조성의 기원에 대한 후기 형이상학 과정과 실재에서의 상세한 분석의 발아로서 기술된 부분이기도 하다.

우선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그는 영원한 활동력에 대한 분석을 영원한 객체의 측면과 결부시켜 전개한다. 그에 의하면 사건들의 일반적인 흐름에 대한 고찰을 통해 기저의 영원적 활동력을 분석해 낼 수 있다고 본다. 이 활동력의 본성 가운데에 모든 영원한 객체들의 영역에 대한 직시가 성립된다. 활동력의 본성 안에서 영원한 객체의 보편적 성격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자연의 생성 근거는 창조성이 되지만 생성의 내용은 영원한 객체를 기반으로 결정된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자연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영원한 객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영원한 객체는 창조적 자연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원한 객체는 창조적 자연 안에서 그 자체로도, 그리고 자연과도 결정적인 관계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즉 창조적 자연에서 영원적 활동력과 관련하여 영원한 객체가 출현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과학과 근대세계 6장 19세기에서 이루어진다. 이 논의를 조금 더 주목해보자.

우리는 사건들의 일반적인 흐름을 통하여 그 기저의 영원한 활동력을 분석해 낼 수 있다. 형성적 요소도 이 영원한 활동력과 현실세계의 끊을 수 없는 연관성을 해명하기 위한 하나의 구분이다. 이 활동력의 본성 가운데에 영원한 객체의 영역에 대한 직시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직시의 근거는 현실세계의 개별자들의 복잡다단한 패턴들을 궁극적으로 한정할 수 있는 근본적인 기반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이는 영원한 활동력의 본성이 현실세계에서 다양하게 요구되는 일체의 개별자들(간)의 관념적 본질을 어떻게 마련하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영원한 객체는 현실 규정의 한 방식이며 가치중립적이다. 현실계기는 목적을 지니는 가치의 실현 과정이다. 위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현실계기에서 패턴을 형성한다는 것은 지속이 어떠한 방향성과 목적을 가진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객체 자체는 무가치적이나, 현실에서 생성하는 목적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어떻게 가치 있게 현실세계에 관여할 수 있는지를 문제 삼는다.

즉 이 문제는 그의 표현으로 다음과 같이 질문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유의 관념적 양상과 현상의 과정에서의 현실적인 양상들의 공재를 어떻게 해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다. 그에 의하면 사유와 현실의 공재는 가치를 산출한다. 공재는 이미 현실세계의 한 존재방식이다. 거기에서 가치는 출현한다. 그렇다면 그 가치의 출현에 대하여 영원한 객체는 어떻게 그의 관련성에 의해서 구현되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이러한 논의를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요약적으로 제시한다. 사물이 실현한다는 사실과 별개로 고찰될 수 있는 기저의 활동력은 세 유형의 직시를 갖고 있다. 첫째는 영원한 객체에 대한 직시, 둘째는 영원한 객체들의 종합과 관련하여 본 가치의 가능성에 대한 직시, 셋째는 미래에 실현될 수 있는 상황 전체와 관계를 필연적으로 맺는 현실적 사실에 대한 직시이다.

창조성과 영원한 객체에 관련하여 첫째 부분을 이해해보자. 이 영원한 객체에 대한 직시는 과정과 실재에서는 신의 원초적 본성으로 기술된다. 구체적으로 신의 원초적 본성은 모든 영원한 객체에 대한 완벽한 직시로 표현된다. 더 자세하게 언급하자면, 원초적으로 창조된 사실은 영원한 객체의 다양성 전체에 대한 무제약적인 개념적 가치평가이다. 즉 영원적 활동력에서 원초적으로 출현하는 최초의 사실은 영원한 객체에 대한 직시이며, 이 자체가 신이라는 것이다.

신은 그러므로 영원한 객체가 지닌 모든 추상적 가능성을 완벽하게 구현한 최초의 사태가 된다. 영원한 활동력 안에서 창조성과 영원한 객체와 신은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규정하며 출현한다. 영원한 활동력 안에서 창조성을 기반하여 신을 매개로 피조된 영원한 객체의 직시는 둘째의 예시인 영원한 객체의 일반적 가능태와 셋째의 예시인 실제적 가능태라는 양자적인 폭을 확보하면서 그 안에서 실현되는 현실세계를 한정한다. 여기에서의 중요한 것은, 과학과 근대세계에서는 형성적 요소로서의 창조성, 영원한 객체, 신이 영원한 활동력이라는 본성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실현되는지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형성적 요소의 내적 관계는 과정과 실재에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설명되고 적용된다.  




연장적 연속체

화이트헤드는 자연과 현실적 존재들을 궁극적으로 포섭하는 우주의 연대적 자리들을 “연장적 연속체”로 구상하였다. 연장적 연속체는 현실적 존재들의 자리들이 연대적 가능성으로 결합된 현실적 존재들의 총체적 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연장적 연속체도 현실적 존재에서 한층 추상화된 개념이다. 현실적 존재의 연대적 시공의 장을 확보하기 위한 형이상학적 사변의 산물이다. 또한 현재의 우주가 감지할 수 없는 과거적 무한성과 미래적 무한성의 그 양자를 양쪽으로 잇대고 있는 시공연속체의 사변적 그물이다.




창조성의 범주적 위치

화이트헤드는 새롭게 출현하는 이러한 시공적 경험의 방울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수 십 여개의 사변적 개념과 범주를 동원한다. 왜냐하면 그의 궁극적 관심은 현재 존재하는 이 생성의 우주를 내재적으로 설명하려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는 수 십 여개의 개념과 추상적 범주를 동원하여 구체적인 현실적 존재의 사태를 전 우주의 영역과 관계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가 구성한 범주들의 요소는 개별적으로 모두 47개이며 이 범주는 근본적으로 4조의 큰 범주로 묶여진다. 여기에서 나머지 3조 44개의 범주 요소의 지탱이 되는, 소위 범주들의 범주가 “궁극자의 범주”이다. 다시 말해서 궁극자의 범주는 다른 범주들의 범주이다. 결국 궁극자의 범주는 화이트헤드 사변을 최종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궁극적인 범주이며 어떠한 하위범주의 모순이나 기능도 궁극자의 범주를 통하여 체계적으로 설명되게 하는 범주이다. 바로 그 궁극자의 범주를 화이트헤드는 다many와 일one과 창조성creativity이라는 개념으로 정초하였다.

‘우주에 존재하는 것들’, 그리고 ‘설명될 수 있는 것들’, 그리고 ‘범주를 통해서 제약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세 차원들의 범주는 궁극적으로는, 존재하지도 않고, 설명되지 않으며, 제약되지도 않지만 직관에 호소하는 다자 일자 창조성에 의해 그 근거를 확보한다는 것이다. 즉 존재하게 하고, 설명하게 하며, 범주에 의해 제약될 수 있는 자연의 모든 영역을 사변을 거쳐 모두 해명하여도 결국은 그 해명의 영역이 닿지 못하는, 자명하고 피할 수 없는 우주의 궁극적 사태라고 하는 것은 “다자”와 “일자”와 “창조성”이라는 관념이다. 그것은 자연에서 발견 불가능한 실재이다. 단지 사변적 분석의 빛이 닿지 않는 자연의 궁극의 자리에 다자, 일자, 창조성이 있을 것이라고 화이트헤드는 직관하고,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창조적 자연은 지성의 경계에 넘어서는 신비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형이상학적으로도 가장 궁극적인 지위를 얻게 된다.

화이트헤드의 분석의 대상인 자연 자체가 창조적 자연이다. 사건의 원자적 출현 자체가 창조성을 머금은 물리적 팽창과 연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주는 언제나 현재이지만 존재는 새롭게 팽창한다. 그러나 존재는 자신의 유일한 시공경험의 연장적 점에 서 있기 때문에, 이 연장이라는 표현은 그 점에 존재의 과거에 누적되었고 미래도 누적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화이트헤드는 바로 이 생성하는 원초적 우주를 “존재”와 “설명”과 “제약”의 범주라는 3조 44개의 범주요소로 내재적으로 기술한다. 그러나 결국 이 내재적 범주는 궁극적으로는 “다자, 일자, 창조성”이라는 범주라는 보편적 특성과 연결되어 있다. 바로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의 과제는 현실적 존재가 실현되는 현재의 시공적 우주에 기여하지만, 현실적 존재의 내부에서 분석되지 않는 창조성의 영역을 궁극적으로 정초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화이트헤드의 자연에 대한 분석은 죽은 사태들을 배후에서부터 끊임없이 밀어내고 새로운 국면을 새롭게 출현하게 하는 창조적이며 과정적인 우주에 대한 내재적 분석이며 거기에서 그는 3조 44개의 범주 요소들을 동원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 내재적 분석의 근거가 되는 우주의 보편적 실재는 다자 일자 창조성이라는 궁극자의 범주이며 화이트헤드는 이를 요청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자연을 본성적으로 창조적 사태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자연의 창조성과 그 자연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관념의 난점이 존재한다. 이러한 관념의 난점을 직시하고 그는 자신의 이론적 구상을 통해서 생생한 자연의 사실에 대한 서술을 하였다.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작업은 생성의 자연을 더욱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인식론적 기반의 구체적인 확보와, 이를 통하여 자연의 실상을 온전히 존재론적으로 구제하려는 양가적 동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자연이 창조적이라는 사실은 그의 형이상학을 동원하여 얻어내고자 하는 궁극적 직관적 통찰이지, 형이상학 내부의 모든 기술이 자연의 창조성에 대한 설명에 편향적으로 집중되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현실적 존재의 추상성

화이트헤드는 자연의 창조성을 분석하기 위하여, 이러한 구체적인 현재적 사건의 장을 출발점으로 하여 거기에서 가설적 추상화의 작업에 몰두해 들어간다. 즉 동시적 세계의 사건들과 그 사건들의 기원이 되는 과거로부터의 발생 과정들을 현재에서부터 역으로 추론하여 구성해낸다. 여기에서 잠시 현실적 존재의 추상성에 대하여 언급하자. 위에서 말한 바로 그 구체적인 현재적 사태가 현실적 존재이며 모든 형이상학적 기술은 현실적 존재에 대한 설명의 기술로 전개된다. 바로 이 현실적 존재는 화이트헤드의 사변에서는 구체적이며 이 구체적 개념에 대한 설명으로서 그 이외의 범주는 추상적으로 기술된다. 그러나 현실적 존재라는 개념 자체가 추상화의 절차 속에서 구성된 궁극적 개념이기 때문에, 역으로 현실적 존재가 궁극적으로 가장 추상적인 존재로서의 지위를 점한다.




진화론, 생기론, 창조론

화이트헤드는 유기체론의 통찰을 담고 전개되어온 사상을 진화론이라는 가설로 간주한다. 즉 유기체를 자연성립의 기초로 생각하는 방식이 바로 다름 아닌 진화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우선 진화론은 유물론 사상적 토대로서 기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유물론의 주요한 근거로서 운용되는 진화론과, 유기체 관념을 기초적으로 보존하면서 전개되는 진화론의 구분이 세심하게 요구된다. 또한 진화론은 생기론, 목적론, 신학적 창조론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자리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진화론과 거리를 두는 관념인 생기론과 목적론과 창조론은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이해와는 어떤 대립각을 지니는지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낭만주의의 의미

화이트헤드는 추상관념에 얽혀서 오랫동안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이해를 가했던 과학적 개념의 도식에 대한 반기가 각각의 시대에서 표출되었다고 평가한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반기의 한 흐름을 과학과 근대세계 5장 낭만주의적 반동에서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18세기에까지 풍미했던 편협한 형이상학과, 명석한 논리적 지성에 기반한 신과 물질의 메커니즘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근대 사상에 내포된 어수선한 모습에 대한 저항은 문학 일각의 낭만주의적 반동을 통하여 강렬하게 전개된다고 화이트헤드는 지적한다. 이러한 운동은 테니슨, 워즈워스, 셸리의 시와 문학에 나타난 생생한 변화와 지속이라는 자연에 대한 옹호와 낭만적 태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그는 서술한다. 과학의 메커니즘은 미적 직관을 통하여 발견하는 자연의 생생함과 결코 화해될 수 없음을 이들은 직시하고 과학의 세계를 멀리 벗어나 그들이 지닌 천부적 예술성으로 생성하는 자연의 본래 모습을 문학의 언어로 호소하고 찬사한다.




궁극자의 범주와 관찰자의 문제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궁극자의 범주는 다자, 일자, 창조성을 구성 요소로 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우주는 다에서 일로의 창조적 진행이다. 그리고 이 다에서 일로의 전진이 사물의 본성이다. 다는 사물의 다가 아니고 일은 정수의 1이 아니다. 이는 사물의 성격에 관한 관념이다. 이러한 다자, 일자, 창조성의 관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다자와 일자는 관찰자의 입각점에서, 어떠한 특정한 범주적 구분 - 화이트헤드의 4조의 범주와는 다른 의미에서 - 을 통하여 구별되는가. 물론 화이트헤드는 다자와 일자가 숫자적 사물이 아님을 명시했다. 그러나 궁극자의 범주와 관찰자의 문제를 접근하기 위해서 부득이하게 '책읽기'라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고자 한다.

“책을 읽는다”는 예를 들어 새로움의 문제를 이해해보자. ‘종이’와 ‘잉크’라는 다자적 요소들은 ‘글자’라는 일자적 특성의 새로움을 도입한다. 그리고 ‘글자’와 ‘글자’라는 다자적 요소들은 ‘단어’라는 새로운 범주를 제공한다. 더 나아가서 연속적으로 ‘단어들의 요소’는 ‘문장’, ‘문장’들의 요소는 책을 읽는 독자에 있어서 ‘의미의 새로움’을 도입한다. 우리는 이러한 책 읽기의 과정에 드러난 새로움의 문제를 더 구체적으로 해명하기 위하여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가한다.

첫째, 다자적 요소들로 지칭된 계열들과 일자의 요소로 지칭된 계열은 동일한가의 물음이다. 위의 비유에서 ‘글자’의 위상은 ‘종이와 잉크’의 위상에 비해 한층 추상화된 다른 계열이다.

둘째, 다자에서 일자의 요소로 도입되면서 등장하는 새로움이 진정한 새로움인가의 물음이다. 말하자면 이미 (책을 읽는 독자에 있어서) ‘종이와 잉크의 결합’을 통하여 출현한 ‘글자’의 범주는 전혀 새롭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다자’(종이/잉크)와 ‘일자’(글자)를 경험하는 ‘관찰자’ 없이 창조성은 어떻게 도입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즉 위의 예에서 종이와 잉크에서의 단어와 의미의 출현은 궁극적으로 독자를 매개로 진행된다. 즉 독자 없이 어떻게 다자와 일자와 창조성이라는 ‘관념’이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의 물음이다.

첫째 물음은 다자와 일자 사이의 ‘내적 관계’의 물음이고, 둘째 물음은 ‘범주’의 문제이며, 셋째 물음은 존재론으로서의 궁극자의 범주는 어떤 방식으로 ‘인식론’과 접맥되는가의 문제이다. 화이트헤드는 구체적으로 그의 문헌에서 이와 같은 새로움의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고려했는지 검토하고자 한다. 특히 화이트헤드는 어떠한 기본적인 의도 속에서 창조성 개념에 대한 사상적 관심과 발전을 진행해 왔는지를 검토하기 위해서도 시스템이론의 '관찰자의 문제'와의 연관성 속에서 궁극자의 범주의 문제를 접근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창조성의 두 가지 성격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자연은 창조적이라는 주장은 창조적 자연에 대한 그의 형이상학적 구성과 해명 속에서 상세하게 전개된다. 즉 현실적 존재의 내적 합생이나 외적 이행에 대한 기술 자체가 창조적인 사태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인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가 형이상학 체계내적으로 창조적 자연을 설명한다 하더라도 이 체계가 궁극적으로 근거하는 기반이 창조성에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에 있어 창조적 자연을 기반으로 한 창조성의 지위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창조적 자연의 근간이 되는 창조성이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그 의미는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의 체계내적인 지위로서의 창조성을 거칠게 도식화하면, 현실적 존재의 합생과 이행에 개입하는 창조성과, 현실적 존재의 궁극적 기반으로서의 창조성의 문제로 일별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i) 새롭게 출현하는 자연의 발생과정과 연루된 창조성과, ii) 저 자연의 궁극적 근거인 창조성 사이의 양극적 특성이다. 편의적으로 구분하면, 각 현실적 존재의 생성에 개별적으로 연관된 “요소적 창조성”과, 현실적 존재들의 범주를 지탱하는 “범주적 창조성”으로 구분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별적 사태들의 구현에 기여하는 요소적 창조성은 어떠한 특성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가? 그것은, 자연에 존재하는 현실적 존재들의 형성 과정에 독특하게 개입하는 창조성의 성격에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논란과 쟁점이 잠복되어 있다. 각각의 현실적 존재는 철저하게 원자화된, 상대적 독립성을 지닌 완결된 세계이다. 거기에는 개별적인 존재들의 다양하고 개성적인 과거와 목적과 미래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현실적 존재의 생성에 개입하는 창조성은 특별히 다자적 성격을 지니지 않아도, 각 현실적 존재는 자신의 개별적 특성을 기반으로 하여 창조성을 머금고 자신을 실현해 나아갈 수 있다. 즉 여기에서의 쟁점은, 철저하게 다자적이고 개별적이며 독립적인 현실적 존재들은 공통기반으로서의 창조성을 근간으로 하여 실현되는가 아니면, 각자의 현실적 존재의 특성과 결부된 창조성을 근간으로 하여 실현되는가의 문제이다. 이 쟁점에 관련해서는, 창조성은 그 자체로 공통기반을 제공하며, 각각의 현실적 존재는 창조성이 제공하는 공통의 특성을 분유하면서도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바탕으로 그의 개체적 실현을 이루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적절한 지적이라고 보여진다.

범주적 창조성이라는 구분이 유의미 해질 수 있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즉 창조성은 분명하게 3조의 범주들의 궁극적 범주로서 요청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형이상학적 범주와 그러한 기술이 궁극적으로 기능하기 위한 요소로서 창조성은 요청된다는 점이다. 이는, 창조성이 단지 현실적 존재의 생성의 과정에 개입되는 요소일 뿐만이 아니라, 자연과 우주의 총체적인 추진력과 추동력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화이트헤드의 3조의 범주가 내적인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우주를 설명하는 중요한 형이상학적 기술이라 하더라도, 그 범주가 궁극적으로 창조성을 기반하지 않는다면, 그 기술이 보여주는 우주는 정태적인 우주에 머무를 뿐이며, 그것은 우주의 한 순간에 대한 제한적이며 잠정적인 서술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성은 우주의 새로움의 근거가 되는, 가능태로서의 지위를 범주적으로 차지하고 있다. 우주의 생성과 존속에 대한 형이상학적 진술의 요소들은 3조의 범주이지만, 그 우주의 생성과 존속의 기반은 궁극자의 범주를 통해서 확보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현실적 존재의 실현 근거로서의 창조성을 요소적 창조성과 범주적 창조성이라는 두 차원으로 구분하였다. 요소적 창조성의 차원에서, 불치의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현실적 존재들은 공통의 창조성을 기반으로 하여도 그 개별적 가치들을 실현할 수 있으며, 범주적 창조성의 논의에서의 창조성은, 3조의 정태적인 형이상학적 진술을 통하여서 확보될 수 없는 우주의 생성과 존속을 제공하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이 창조성의 양자적 성격 모두 화이트헤드의 궁극자의 범주에 대한 논의 소에서 개괄적으로 조명되어야 하므로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화이트헤드가 정의한 궁극자의 범주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화이트헤드가 궁극자의 범주로 지적한 다자, 일자, 창조성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될 것이다.



자연의 사건과 궁극자의 범주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자연의 전체상은 진화적인 팽창의 상이다. 그는 시간과 공간과 물질이라는 추상적 관념들을 구체적인 현실사태의 한 국면으로 융화시키기 위한 의도로서 가장 현실적이고 궁극적인 단위인 사건event 개념을 주장한다. 그 사건은 생성하는 우주에서 어떠한 것이 통일적으로 발현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사건에 기반한 사물은 자신이 속해 있는 전체를 제한된 자신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그 자신이 된다. 이는 대단히 완강한 사실이며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는 엄연한 사물들의 본질이자 우주의 사태가 된다. 여기에서 어떠한 것이 통일적으로 발현한다고 할 때의 이 발현은, 다자적으로 존재하는 요소들이 수량적으로 일자화 된 종합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지칭한다. 그리고 이 발현은 그 다자의 내부에서는 분석되지 않는 것을 담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존재하는 요소들의 단순한 융합만으로는 ‘한정성의 결여’로 인하여 비존재로 하락된다. 이러한 ‘발현’이라는 자연적 특성에 대한 언급은 후기에 있어서 사물의 출현에 관여하는 궁극자의 범주의 요청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창조적 자연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자연은 본성적으로 창조적이다. 창조적이라 함은 새롭게 존재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이 순간 머물러 있는 존재는 우주의 한 켜에 불과한, 그러나 자연의 유일한 전체인 '지속'(duraion, CN 53.)을 경험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현재의 관점에서 존재들은 과거로 밀려나가며 새로운 존재가 현재를 향해 끊임없이 새롭게 유입된다. 이 현재의 순간이 우주의 한 켜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대단히 소극적인 설명으로도 오해될 수 있지만, 사실상 우주는 그게 전부이다. 인간의 경험은 지금 현재 존재하는 이 우주의 한 켜만을 대면할 뿐이다. 우리 인식과 경험의 무대는 자연 저편으로부터 시간과 공간의 옷을 입고 출현하는 사건들과 그 사건의 동시적 연쇄체인 우주의 한 켜일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우주의 전부이다.

현실적 존재는 죽은 사태들이다. 물론 이 죽은 사태는 실현된 사태이다. 그러나 이 실현을 관장하는, 그 실현 내면의 생성의 사태는 우리의 인식으로도 감지하지 못하고 단지 사변적으로만 추상할 수 있는, 현실적 존재의 탄생과 종결의 한 단위일 뿐이다. 이렇게 죽은 지금의 현실적 존재는 생성하는 그의 새로운 현실적 존재로 인하여 끊임없이 교체되고 존속된다. 현실적 존재는 굳어진 사태이지만 그 현실적 존재의 기저에서 새롭게 출현하는 새로운 존재의 생성이 미시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존재의 동일성에 대한 주장은 잠정적이고 추상적일 뿐이다.

실질적으로 현실적 존재 내부에 대한 분석을 감행해 들어가면 이미 현실적 존재의 내부는 물리적 계기의 실현이라는 외형적 단위를 넘어서는 곳에 대한 접근이기 때문에 무시공적이다. 그리고 현실적 존재들 사이의 분석을 감행해 들어가면 한 현실적 존재의 위상의, 다른 위상의 시공간과 관련된 인식일 뿐이기 때문에 소위 동일 시공적이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더 이상 배후로 들어갈 수 없는 우주의 근본적인 요소로서의 현실적 존재 내부의 생성과 그 뿌리 깊은 특징이 제시된다.

현실적 존재는 끊임없이 새롭게 출현한다. 그러나 현실적 존재의 생성은 내부적으로는 자연의 시공간을 넘어선 자연의 추이(CN 67.)에 있고, 현실적 존재들 사이의 연쇄적 관계를 볼 때도 물리적이며 시공간적 그물로는 잡히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에 대한 직관적 표현은, 드러난 실재는 실현되면서 소멸한다는 것이고, 또한 저 실재의 내면으로부터 끊임없는 창발적 요소가 현실로 출현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죽어 있는 것과 새롭게 살아 들어오는 이 역동적이고도 이중적인 국면을 화이트헤드는 “실재는 과정”(Nature is a process, CN 53.)이라고 표현해 낸다.

현실적으로 모든 것들은 시공 속에서 사건화 된다. 그리고 모든 것들은 다시 시공에 출현한 다른 현실적 존재만을 경험할 뿐이다. 그 경험은 피조물적인 것들이고 단지 물리적이며 연장적인 것들에 관한 경험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변 속에서 그 현실적 존재를 바탕으로 하여 그 현실적 존재의 과거적이고도, 미래적인 계기들의 연속성을 검토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검토는 현실화된 피조물에 대한 분석의 수위가 물리적 외곽에 제한된 것들이다. 현실적 존재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구체적인 변화의 요소를 현실적 존재라는 추상적 동일성에 묶어 둠으로써 현실적 존재 내부의 생성과 소멸의 프로세스에 대한 논의를 비켜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적 존재의 과거-미래적 연속성의 관점에서 현실적 존재들의 조건을 이해한다면, 현실적 존재는 그 피조물의 원자화된 자리를 갖고 있음을 지시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시공을 점유하고 있는 그 원자화된 존재는 단 하나이며 그것이 현실적 존재인 것이다.

세상에 출현한 존재들은 새로움을 덧입고 실현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물리적으로 출현하였다는 것은 결국 사건으로 구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새로움의 산물로서 시공과 더불어 출현한 저 사건이며, 저 사건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 말을 하지 않는 현실적 사태이다. 우리가 자연을 창조적이라 말할 수 있는 연결고리는 바로 저 출현한 물리적 사태의 배후에는, 물리적으로 출현된 사태에 대한 파악으로는 결코 해명될 수 없는 형성의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주요한 형성의 요소가 창조성과 신이다.




창조성의 주제와 전망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자연의 존속을 지탱해내는 무수한 피조세계들의 ‘창조적 생명력’과 ‘아우토포에시스’(Autopoesis)에 관한 신학적 성찰은, 존재신론과 같은 고전적 틀 속에서는 포착되기 어려운 면이 있어 보인다. 또한 삼위일체의 신학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성령론적 접근은 거친 도식과 주관주의적인 해석의 오류로 하락될 소지도 있다. 그리고 합리적 설명력을 주요 근간으로 하는 과정신학적인 해석은 화이트헤드의 통찰의 언어적 표층만을 전달할 요소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 서구 기독교사상의 신비주의와 교리사 전통에서 빛과 힘과 권능으로 표상되었던 ‘창조성’의 문제를 어떻게 기독교 신학은 수용하고 비판했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하는 것도 중요한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그리고 신학적 논의의 외곽에 있는, 구성주의 생물학, 시스템이론, 생명공학의 성과와 그 풍부한 논의들에 대해 신학적 안목으로 주목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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