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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의 용어




화이트헤드의 용어 해설집 (A. N. Whitehead, 오영환 역, 『과정과 실재』(민음사))





화이트헤드의 사상과 용어들이 매우 난해하다는 평을 듣는다. 이 <과정과 실재>에서 독자는 낯선 용어들을 만나면서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무릇 독창적 사상은 그것을 표현하는데 있어 그 독창성에 상응하는 새로운 개념들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인 <유기체의 철학>에서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그의 철학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새로운 일련의 전문용어들을 도입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낡은 용어로는 그가 기도하는 인간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하는 일반적 관념들의 정합적, 논리적, 필연적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새로운 구도를 표현하기에 부적당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는 주어와 술어, 실체, 속성 등과 같은 종래의 기본적인 용어들을 <파악>prehension, <영원적 객체>eternal object, <진입> ingression 등과 같은 신조어로 대체시키고 있다.

그의 새로운 용어들은 그의 철학의 가장 기초적인 개념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에 만약 그의 용어들을 낡은 철학적 어휘로 번역하려고 한다면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왜곡하거나 오해하는 위험성을 수반하게 된다. 사실상 그러한 시도는 시로스도 지적한 바와 같이 화이트헤드의 사상에 들어있는 본질적인 독창성을 보지 못하게 한다.

화이트헤드는 형식논리학자의 정의 방식에 의거하여 자신의 용어들을 정의하고 있다. 각각의 새로운 개념은 그에 앞서 정의된 어떤 개념에 의해 정의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체계내에서 형식적으로 정의되지 않는 근원적인 개념들이 남아 있게 되는데, 이들은 그 체계에 있어 기본적인 정의에 사용되는 개념들이다. 임의의 어떤 체계가 보다 큰 체계에 포함되어 있는 종속적인 체계인 경우, 이 종속적인 체계 내의 정의되지 않는 기본 개념들은 그보다 큰 체계를 배경으로 해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문제되는 체계가 전체를 포괄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 경우, 정의되지 않는 근원적인 개념들이나 이들에 의해 정의되는 개념들을 해명 내지 해석하기 위해 체계 밖의 무엇에 호소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는 오직 관념들의 체계를 하나의 전체로서 취급하고, 나아가 그 체계가 우리의 경험을 분석하고 범주화시켜 조직하는 방식으로부터 어떻게 그 의미를 얻고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 가능할 뿐이다. 화이트헤드는 수시로 그의 기본 개념과 다른 철학자들의 관념들을 대비시키고 있다. 실제로 일부 고전적인 체계에서의 기본적인 난점에 대한 그의 지적은 새로운 기본 개념을 끌어들이기 위한 그의 통상적인 도약대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다른 철학자들에게서 통용되었던 용어들을 이용하여 화이트헤드의 기본 개념들을 정의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의 개념적인 재조직 conceptual reorganization 은 과거의 우주론에 내재해 있던 결함들을 피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하에서 우리는 화이트헤드 자신의 말을 길잡이로 사용하면서, 화이트헤드가 그의 기본적인 개념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방식을 요약해 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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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적 역전 conceptual reversion

합생의 두 번째 위상인 개념적 파악의 위상은 합생의 최초 위상에 있어 현실적 존재인 여건을 특징지우고 있는 것으로서 경험되었던 영원적 객체들을 개념적으로 반복한다. 그러나 합생의 이러한 두 번째 위상은 현실태에 있어, 개념적 반복 conceptual reiteration 과 개념적 역전이라는 판이한 두 하위 위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반복은 합생에 있어 언제나 나타나는 요소인 반면 역전은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개념적 역전은 <(합생의 두 하위 위상 가운데) 최초의 하위 위상에서 여건을 형성하고 있는 영원적 객체들과 부분적으로는 동일하고 부분적으로는 상이한 여건들을 갖는 개념적 느낌의 이차적인 발생>이다. 개념적 역전의 결과로 <근사적인 참신성이 개념적으로 느껴진다.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주체적 형식들은 질적인 패턴에서, 그리고 대비를 통한 강도에서, 관련된 선택지들에 대한 긍정적인 개념적 파악에 의해 계속해서 풍부해질 수 있게 된다.... (개념적 역전)은 세계 속에 새로움을 가능케 하는 범주이다. 따라서 안정 속에서조차 획일적인 존속 같은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개념적 느낌은 영원적 객체를 여건으로 하는 느낌이다. 개념적 느낌들 가운데는 물리적 느낌의 최초 위상에서 물리적으로 느껴진 한정의 형식을 개념적으로 단순히 반복하는 것들도 있고, 사실을 특징지우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 것이 아니라 역전에 의해 발생한 영원적 객체들을 여건으로 하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역전의 결과로 말미암아 관련을 맺게 된 이 후자의 영원적 객체들은 반복된 영원적 객체들과 어떤 공통점을 지닌다. 그들의 새로움은 관련된 새로움이다. 관련성은 느낌의 강도에로의 최종적 지향 final aim 에 의해 지배되는 대비에로의 지향에 의해 결정된다. 여기서 최종적 지향이란 <각각의 통일화로 하여금 최대 깊이의 느낌의 강도를 성취하게 하려는 궁극적인 창조적 목적의 표현...>이다. 이 궁극적 목적은 최종적인 분석에서 신의 목적이 된다. 그리고 <보다 근본으로 설명하자면, 시간적인 주체에 있어서의 역전된 개념적 느낌은, 신의 경험에 있어서 개념적으로 질서지워진 관련항들에 대한 혼성적인 물리적 느낌 hybrid pysical feeling 으로부터... 파생된, 그 주체의 개념적 느낌에 귀속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전이란 <다수의 가능적 형상들의 관련성에 대한 원초적 통일>인 신의 원초적 본성에 대하여 각 현실적 존재의 느낌이 행사하는 기능인 것이다.



개념적 파악 conceptual prehesion

개념적 파악은 영원적 객체를 그 여건으로 하는 파악이다. 물리적 파악도 비록 현실적 존재를 그 여건으로 하는 파악이긴 하지만 영원적 객체들을 포함하고 있다. 다만 이때의 영원적 객체들은 내재적인 것으로서, 다시 말해 특정의 현실태를, 즉 파악되고 있는 현실적 존재들 속에 결정되어 있는 것으로서 포함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 개념적 파악은 <무제약적인 부정에 대한 느낌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어떠한 개별적인 실현과도 관계가 없는 하나의 특정한 영원적 객체에 대한 느낌이다.>

<그림 2>가 보여주고 있듯이 합생의 두 번째 위상은 개념적 파악의 위상이다. 각각의 현실적 존재는 순응적인 물리적 느낌들의 위상에서 자신의 삽생을 시작한다. 그리고 범주적 제약 Ⅳ에 따라 각각의 물리적 느낌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느껴진 현실적 존재의 한정성 내지 결합체의 한정성에 있어 예증된 영원적 객체를 여건으로 하는 하나의 순수한 개념적 느낌이 파생되어 나온다.> 개념적 파악의 출현과 더불어, 그것의 무제약적 부정이라는 특성에 힘입어 소여의 압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개념적 느낌의 주체적 형식은 가치평가--평가절상(역작용 adversion)일 수도 있고 평가절하(혐오 aversion)일 수도 있다 -- 이다. 합생을 진척시키는 데에 있어 그 여건인 영원적 객체의 중요성을 높이거나 억제하는 이 개념적 가치평가는 현실적 존재들에게 있어 가능한 창조적 반응의 가장 근원적인 유형이다. 여기 바로 이러한 지평에서도 이미 창조적 목적은 작용하고 있으며, 합생하고 있는 주체는, 비록 그 이후의 비교적 파악 comparative prehension 의 위상이 창조적 반응을 위한 훨씬 더 풍부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 자신의 합생을 결정짓는 자로서 자율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객체적 불멸성 objective immortality

독특한 한정성을 달성하려 한다는 것은 객체적 과정에 생기를 불어넣는 목적인이다. 그것의 달성은 그 과정을 멈추게 한다. 그 결과 초월을 통해 그 개별적 과정은, 달성 가능한 한정성의 보고(寶庫) riches 인 우주의 "실재적 가능태"에 추가되는 하나의 새로운 객체적 조건으로서의 그 객체적 불멸성으로 이행하게 된다.



객체적 존재 objective

<"객체"는 우리의 "경험"이 순응해야만 하는 "한정성" definiteness 을 특징지우는 초월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객체적 존재로 간주되는 현실적 존재는 <형상적인 것> formaliter 으로, 즉 그 자신의 생성의 직접성을 향유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현실적 존재가 아니라 단순한 사실이 되어 버린 죽은 여건 dead datum 으로 간주되는 현실적 존재, 따라서 주어지는 어떤 것, 즉 객체로서 그 자신을 넘어서는 모든 합생을 조건지우는, 객체적으로 불멸하는 죽은 여건으로 간주되는 현실적 존재이다. <데카르트의 표현으로 하자면, 만족 satisfation 은 "객체적 존재"로서의 그 현존과 관련하여 분석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현실적 존재이다. 그것은 완고하고 피할 수 없는 여러 귀결을 수반하고 있는, 확정적으로 결정된, 정착된 사실로서의 현실적 존재이다>.



객체화 objectification

<어떻게 현실적인 개체적 계기들이 새로운 창조를 위한 시원적 original 요소가 되는가에 대한 논의는 객체화 이론이라 불린다... 한 현실적 존재의 자기 창조에 있어서의 다른 현실적 존재의 기능은 전자의 현실적 존재에 대한 후자의 "객체화"이다>.

객체화 이론은 화이트헤드의 인식론에 핵심이 된다. <상대성의 원리> The Principle of Relativity 에서 구현되고 있듯이 객체화 이론은, 궁극에 있어 흄의 회의론에 이르게 되는 기본적인 가정들을 폐기하려고 한다. 상대성의 원리에 따르면 <다수의 존재로부터 하나의 현실태가 생성되는 실재적인 합생에 있어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모든 현실적 존재와 비현실적 존재가 지니고 있는 하나의 일반적인 형이상학적 성격이다>. 이것은 각 현실적 존재가 생성하여 일단 그 만족에 도달하면 그 주체성, 즉 그 자신의 생성의 직접성을 상실하고, 다음 세대의 현실적 존재들을 위한 여건으로 기능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이들 다음 세대의 현실적 존재들은 그 존재를 그들의 합생 속에 흡수될 수 있는 여건으로 파악함으로써 그 존재를 그 일부의 측면을 통해 그들 자신의 존재 속으로 통합하여 끌어들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비롯되어 흄에 이르고 있는 주어-술어, 실체-속성, 개별자-보편자의 이분법은 이러한 객체화 이론에서 한결같이 거부된다. <보편적 상대성의 원리는 "실체란 다른 주체에 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명을 정면에서 파기한다. 그와 반대로 이 원리에 따르면 현실적 존재는 다른 현실적 존재에 내재한다... 유기체 철학은 "다른 존재에 내재한다" being present in another entity 는 관념을 명확하게 밝히려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이 구절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유래한 것이지만 상서로운 표현이 못 된다. 그래서 이하의 논의에서는 그것을 "객체화"라는 용어로 대체하기로 하겠다.

화이트헤드의 객체화 이론은 어떤 현실적 존재들과 임의의 한 현실적 존재 α 사이의 관계가 α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 현실적 존재들은 α 속에 들어 있다는 학설이다. α의 파악은 그것과 이들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와 그 자신의 본질을 구성한다. 영원적 객체는 이러한 객체화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저 아리스토텔레스의 구절은 한 현실적 존재가 다른 존재에 단순히 부가된다는 조잡한 관념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유기체의 철학이 의도하는 바가 아니다. 영원적 객체들의 한 가지 역할은 그것이, 하나의 현실적 존재가 어떻게 해서 다른 현실적 존재들의 종합에 의해 구성되게 되는 것인가를 표현하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영원적 객체들은 다수의 현실적 존재들(여건)을 문제의(합생하는) 현실적 존재의 구성요소로서 이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존재하기 위해 그 자신 이외에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자"... 에 관한 데카르트의 학설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것이다>.



결합체 nexus

현실적 존재는 미시세계적 존재이다. 일상적인 경험에서 만나게 되는 거시세계적 존재 -- 사람, 나무, 집 -- 는 결합체 내기 사회라 불리는 현실적 존재들의 집합체이다. 비록 대부분의 논의에 있어 <사회>라는 말과 <결합체>라는 말은 서로 대체 가능하긴 하지만, 결합체의 집합은 사회의 집합보다 그 외연이 넓다. 사회는 모두 결합체이지만 모든 결합체가 다 사회는 아니다.

<현실적 존재들은 그들 상호간의 파악에 의해서 서로를 포섭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 존재와 파악이 실재적이고 개별적이며 개체적이라고 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실재적이고 개별적이며 개체적인, 현실적 존재들의 <공재>(共在, togetherness)라는 실재적인 개별적 사실들이 존재하게 된다. 현실적 존재들의 공재라는 이와 같은 개체적 사실은 모두 "결합체"라 불린다>.

<상호 내재>mutual immanence 는 결합체를 구성하고 있는 현실적 존재들의 가장 일반적인 공통의 기능이다. 가장 공통되는 조건은 결합체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펼쳐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한 순간에 있어서 공간적으로 두께를 지닌 다수의 현실적 존재들인 한 그루의 나무는 또한 시간적으로 두께를 지닌 여러 세대의 현실적 존재들이다. 결합체에는 두 가지 극단적인 종류가 있는데 그 하나는 순수하게 시간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순수하게 공간적인 것이다. 순수하게 시간적인 결합체는 동시적인 현실적 계기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계기에서 계기에로의 시간적인 전이의 단순한 줄기이다. 여기에 관련된 상호 내재는 그 줄기 내에 있는 현실적 존재들이 제각기 자신에 직접적으로 선행하는 존재를 파악하고 있는 인과적인 내재 causal immanence 이다. 순수하게 공간적인 결합체는 선후관계에 있는 계기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동시적인 현실적 존재들로 이루어진 시간상의 한 켜 slice 이다. 그래서 여기에 관련된 상호 내재는 동시적 계기들에 고유한 간접적 유형의 내재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연장적 연관이라는 하나의 도식에 상호 함축되어 있는데서 비롯되는 내재이다.

사회는 사회적 질서를 향유하는 결합체이다. 사회적 질서란 이전 세대에 대한 파악에서 파생되어, 각 세대의 현실적 존재 가운데 들어 있는 특성을 보여주는 질서를 말한다. 따라서 순수하게 공간적인 결합체는 사회일 수 없는 것이다. 사회의 개념은 질서의 관념과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비사회적 결합체란 '혼돈'의 관념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결합체와 사회는 상당한 복잡성을 띠고 나타날 수 있다. 구조를 갖는 사회들이 있다. 이런 사회는 종속하는 사회와 종속하는 결합체를 모두, 또는 어느 하나를 포함하고 있다. 구조를 갖는 사회에 들어 있는 종속하는 사회와 종속하는 결합체의 차이는, 종속하는 사회가 구조를 갖는 사회를 떠나 일반적인 환경 가운데 놓일 때에도 그 지배적인 특성을 유지하는 데 반해 종속하는 결합체는 <그 구조를 갖는 사회에 의해서 제공되는 특수한 환경을 떠나서도 그들 자신을 발생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는 어떤 특성도 보여 주지 못한다는 데 있다>.



과정 process

<두 종류의 유동성 fluency 이 있다.. 한 종류는 개별적 존재자 particular existent 의 구조에 내재하는 유동성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유동성을 '합생' concrescence 이라고 불러왔다. 다른 한 종류는 개별적 존재자의 완결에 따르는 과정의 소멸이 그 개별적 존재자를, 과정의 반복에 의해 생겨나게 되는 다른 개별적 존재자들을 구성하는 시원적인 요소 original elements 로 만들어 가는 유동성이다. 이런 종류의 유동성을 나는 '이행' transition 이라고 불러왔다. 합생은 그것의 주체적 지향 subjective aim 인 어떤 목적인 final cause 을 향해서 나아가고, 이행은 불멸하는 (즉 객체적으로 불멸하는) 과거인 작용인 efficient cause 의 매개체이다>.

우리는 이 구절을 해석하기에 앞서 이것을 또 하나의 다른 구절과 병치시켜 볼 필요가 있다. <과정에는 두 종류, 즉 거시적 과정과 미시적 과정이 있다. 거시적 과정은 성취된 현실태로부터 성취 중에 있는 현실태에로의 이행인 반면, 미시적 과정은 단순히 실재적일 뿐인 조건들을 결정적인 현실태로 전환시키는 것이다.(다시 말해 이것은 합생이다)>. 이 두 번째 인용문은 저 두 종류의 유동이 과정의 두 종(種)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그래서 그것들은 <하나의> 과정에 속하는 종(種)들이라는 데 주의해야 하겠다. 화이트헤드의 체계 내에 두 가지 과정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과정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이한 두 전망으로부터, 상이한 두 맥락에서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

두 가지의 유동이 어떻게 하나의 과정의 종들일 수 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조성의 원리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이하의 설명은 <창조성>에 관한 항목에서 제공되고 있는 설명들을 전제로 해서 진행시키기로 하겠다. 과정은 <다자> many 로부터 <일자> one 에로의 창조적 전진이다. 여기서 일자는 그것을 탄생시킨 다자와는 별개의 것으로서의 새로운 존재이며, 이렇게 해서 생겨나는 새로운 다자는 계속해서 새로운 일자들을 탄생시키게 된다. <다자>와 <일자> 사이의 이와 같은 규칙적인 순환적 변화가 곧 과정이다. 때때로 화이트헤드는 <다자>로부터 발생하는 새로운 <일자>의 <출현> emergence 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경우 그는 합생, 즉 미시적 과정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의 연속되는 각 위상에 있어, 출현하는 현실적 존재는 만족에 도달하려는 창조적 충동을 머금은 채,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과 만나게 된다. 또 어떤 경우에 화이트헤드는 사라지는 현실적 존재로부터 새로운 현실적 존재에로의 창조적인 전진, 즉 우주의 진행중인 팽창을 강조하고 싶어한다. 이런 경우에 그는 전이, 즉 과거가 미래에 행사하는 작용인의 활동인 거시적 과정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유기체'라는 개념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과정'의 개념과 결부되어 있다. 현실적인 사물들의 공동체 community 는 유기체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태적인 유기체가 아니다. 그것은 산출의 과정 가운데 있는 미완의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것들과 관련한 우주의 팽창이 '과정'의 일차적인 의미가 된다. 그리고 그 팽창의 임의의 단계에 있는 우주가 '유기체'의 일차적 의미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기체는 결합체이다. 그 다음으로, 각 현실적 존재는 하나의 유기적 과정으로서 기술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대우주에 있어서의 우주를 소우주 microcosm 에서 되풀이한다. 그것은 위상에서 위상으로 진행해 나아가는 과정이며, 이때의 각 위상 그 후속 위상이, 문제되는 사물의 완결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실재적인 토대가 된다.



구조를 갖는 사회 structured society

구조를 갖는 사회는 종속적인 사회와 종속적인 결합체를 모두 포함하고 있거나 아니면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포함하고 있는 복잡한 사회이다. <구조를 갖는 사회는 현저하게 상이한 한정 특성을 지니고 있는 다양한 결합체들이 뒤얽혀 패턴화한 것이다. 이 결합체들 가운데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낮은 유형의 것이고, 또 어떤 것은 현저하게 보다 높은 유형에 속할 것이다. 구조를 갖는 하나의 사회 속에는 '추종적인' subservient 결합체와 '지배적인' regnant 결합체가 있을 것이다. 이 구조를 갖는 사회는, 추종적인 것이든 지배적인 것이든간에 그 각각의 하위 사회를, 똑같이 뒷받침해주는 직접적인 환경을 제공할 것이다>.

일부의 구조를 갖는 사회들은 <무기적인> inorganic 것이라 불린다. 이런 사회들도 사실상 복잡한 것이긴 하지만 충분할 정도의 복잡성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들이다. 이러한 수준에서 그 사회 내의 계기들은 그들의 주변세계를 파악할 때 문제되는 결합체의 여러 성원들이 지니고 있는 세부적인 다양성들은 제거하면서, 그 <결합체를 전체적, 평균적으로 객체화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수정, 바위, 행성, 태양> 등과 같은 것들의 수준에 있게 되며, <변환의 범주 Category of Transmutation 에 따라 작용하는 정신성의 개입>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구조를 갖는 살아 있는 사회는 더욱 복잡하다. 그것은 그 내부에 있는 구조를 갖는 무기적인 사회들을, 그 자신을 구성하는 결합체로서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구조를 갖는 살아 있는 사회 내의 지배적인 결합체는 살아 있을 것이다. 결합체는 그것이 살아 있는 어떤 계기들을 포함하고 있을 때 살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는 살아 있는 계기들이 그 속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에 따라 '살아 있음'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 살아 있는 계기는 <개념적 파악, 즉 욕구에 있어서의 선도(先導, initiative)>를 산출하는 현실적 존재이다. 이러한 계기들은 하나의 사회 속에 배치될 때 단순히 전체적인 평균만을 끌어낸다든가 세부적인 것들을 무시한다든가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환경의 새로움에 부응하기 위해 새로움을 산출해 낸다. <보다 고등한 유기체의 경우, 이러한 개념적 선도는 결국 다양한 경험에 관해 '사고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며, 보다 열등한 유기체의 경우에는, 단지 조화라는 이상에 복종하여 미적인 강조를 무반성적으로 조정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지나지 않게 된다>. <'생명'에 관한 이러한 학설에 따를 때, '생명'이라는 말의 일차적인 의미는 개념적인 새로움 -- 욕구의 새로움 -- 의 창출이다>.

토마토와 하나하나의 세포들은 살아 있다. 살아 있는 동물이나 살아 있는 인간을 충분히 설명하자면 훨씬 더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다. <살아 있는 사회에 있어서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결합체들 가운데 오직 일부만이, 그들의 모든 성원들의 정신적인 극이 어떤 독창적인 반응을 하는 그런 성격의 것일 것이다. 이들은 그 사회 내의 '완전히 살아 있는' 결합체들일 것이며, 실제로 사회는 그와 같은 결합체들이 지배적일 때만 '살아있는' 것이라 불린다>. 완전히 살아 있는 결합체는 종속적 결합체이지 종속적 사회가 아니다. 그것이 생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전체 사회의 보호가 필요하다. 어째서 그런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완전히 살아 있는 결합체는 입자적 사회가 아니다. 즉 그것은 존속하는 객체들의 줄기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존속하는 객체들은 인격적으로 질서지워져 있다. 그들의 과거는 그들 속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이러한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생명이란 자유를 얻으려는 노력이다. 존속하는 존재는 그것의 모든 계기들 하나하나를 그 계통의 노선과 결부시킨다. 영속하는 특성을 지니는 존속하는 영혼을 주장하는 학설은 생명이 제기하는 물음에 대해 전적으로 부적절한 답변이다>. 완전히 살아 있는 결합체는, <유사한 경험을 지니고 있는 과거의 계기들의 단순한 '인격적 질서'로부터가 아니라 물질적인 동물 신체의 복잡한 질서로부터 파생되는> 강도 높은 경험을 향유한다. <과거로부터의 반복이라는 구속이 없는 강도 높은 경험이 존재한다. 이것은 개념적 반작용의 자발성을 위한 조건이다>. 요컨대 완전히 살아 있는 결합체는 비록 이런 의미에서 비사회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 성원들의 어떤 역사적 경로에 따르는 인격적 질서의 줄기를 뒷받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존속하는 존재는 '살아있는 인격' living person 이다. 살아 있는 인격이라는 것은 생명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사실상 살아 있는 인격은 그 직접적인 환경이 살아 있는 비사회적 결합체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살아 있는 인격이라는 이와 같은 개념은 영혼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에 상응하는 것이다. 거기에 전제된 비사회적 결합체는 신체적 활동을 보고하는 뇌의 부분들로부터 계승하면서 뇌의 부분에서 부분으로 돌아다닌다. 이에 반해 살아 있는 인격은 살아 있는 피조물인 구조를 갖는 완전하고 복잡한 사회를 지배하는 통일된 중추적 통제의 장소이다.



긍정-부정의 대비 affirmation-negation contrast

대비란 복잡한 하나의 여건 속에 있는 여러 상이한 구성요소들에 대한 경험 내의 통일이다. 긍정-부정의 대비는 아주 특수한 두 종류의 구성요소를 통일 속에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정 종류의 대비는, 의식이란 바로 이런 종류의 대비를 느끼는데에 포함되어 있는 주체적 형식을 말한다는 중요한 이유 때문에 그것에 특수한 명칭을 부여하는 가운데 부각되어 왔다. 긍정-부정의 대비에 있어 통일 속에 결합되어 있는-- 즉 하나의 여건 속에 종합되어 있는 -- 두 구성요소는 (1) 현실적 존재들의 결합체에 대한 느낌과 (2) 그 결합체의 구성원들인 논리적 주어를 갖고 있는 명제 proposition 에 대한 느낌이다. 화이트헤드는 명제를 이론이라 부른다. 그래서 이 대비는 주어진 사실과, 그 사실에 연관되어 있는 오류 가능한 이론 사이의 대비라고 할 수 있다. <그림 1>에서 괄호 z는 긍정-부정의 대비를 시각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원 d는, 주체적 형식에 의식을 포함하고 있을 수 있는, 그 대비에 대한 느낌을 나타내고 있다.



느낌 feeling

느낌은 긍정적 파악이다. <'느낌'이라는 말은 단순한 기술적 용어 technical term 이다. 그러나 이 말은 합생하는 현실태가 여건을 사유화하여 appropriate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작용을 시사하기 위해 채택되었다>. 화이트헤드는 로크가 <개별자에 결정되어 있는 관념들> ideas determined to particulars 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구절을 중시한다. 여기서의 요지는 로크가 적어도 몇 군데에서 지각의 표상이론을 버리는 한편, 경험에 있어 우리의 관념들은 단순한 표상이 아니라 주제가 되는 존재들을 이끌어들여 자신의 구조 내의 구성요소로 통합시키는 방편적 매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느낌>이라는 기술적인 용어에는 로크가 우연히 제시했던 개념을 유기체 철학의 핵심으로 포섭하려는 시도가 담겨 있다. <현실적 존재에 대한 직접적인 '관념' -- 또는 '느낌' -- 이라는 개념은 모든 상식의 전제이다. ...현실적 존재 하나하나는 그 여건에서 생겨나는 경험의 행위로 간주된다. 그것은 다수의 여건들을 하나의 개체적 '만족'의 통일 속에 흡수하기 위해 그 여건들을 '느끼는' 과정이다. 여기서 '느낌'이란 용어는 여건의 객체성으로부터 문제되는 현실적 존재의 주체성에로 이행하는 기본적인 일반적 작용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되는 용어이다>.

feeling 이라는 말은 일상어에서는 an emotional response, an aesthetic sensitivity, 혹은 a physical contact with an object 를 의미하는데, 화이트헤드는 이 세 가지 의미를 모두 포섭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다수성 multiplicity

다수성은 화이트헤드의 체계에서 논리적 집합의 개념에 해당되는 것이다. <다수성은 다수의 존재들로 성립되며, 그것의 통일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존재들이 제각기 최소한 다른 어떤 존재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하나의 조건을 충족시킨다는 사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다수성은 발생적으로 유지되는 질서지우는 특성 genetically sustained ordering characteristic 의 결과로 그 통일성을 갖게 되는 사회와 대조될 수 있다. 이러한 사회는 자립적인데 반해 다수성은 수학적 개념의 질서를 포함하고 있을 뿐으로, 동일한 집합명 class-name 이 적용되는 존재들의 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다수성은, 그 각 구성요소에 참여하는 어떤 규정에서 파생되는 통일성을 갖고 있는 복잡한 사물의 한 유형이다. 그러나 다수성은 단순히 그 다양한 구성요소들로부터 파생되는 통일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대비 contrast

대비는 복잡한 하나의 여건 가운데 들어 있는 다수의 구성요소들이 지니는 통일성이다. 이 명칭은 다소간 오해의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과 통일시킨다는 것>to put in a unity with 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비>란 <양립불가능성>과 반대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현실적 존재가 그 경험의 항목들을 보다 많이 대비 속에, 그리고 대비들의 대비 속에 놓을 수 있으면 있을수록 그만큼 더 그 현실적 존재는 자신의 만족에 있어 깊이와 강도를 이끌어 낼 수 있게 된다. 그 경험의 항목들을 대비 속에 놓을 수 없는 근원적인 현실적 존재들은, 그에 따르는 양립 불가능성 때문에 항목들 가운데 일부를 관련 없는 것으로 떨쳐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며, 그 결과 그들의 경험은 비교적 천박하고 사소한 것이 되고 만다.



동시적인 것 [동시태] contemporaneousness

동시적인 현실적 존재들은 상호간에 인과적으로 독립해서 발생하는 현실적 존재들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다른 것의 합성의 초기 수용적 위상을 위한 여건으로서 객체화되지 않는다. <현실적 존재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다른 것에 의해 한정되는 '주어진' 현실적 세계에 속하지 않을 때, 그 현실적 존재들은 '동시적'이라 불린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동시성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설명 속에 포섭된다. 위의 정의를 따른다면 어떤 현실적 존재 M은, 서로 동시적인 것이 아닌 두 현실적 존재 N, P와 동시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동시적 영역들은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지각에 의해 인식된다. 이런 지각의 양태는 <세계의 '연장적' 관계에 대한 명석, 판명한 의식>을 제공한다. 동시적인 현실적 존재들은 상대방의 느낌의 객체화에 의해 상대방의 구조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 사이의 유일한 연관성은 <그것들이 동일한 연장적 도식 extensive scheme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관성은 동시적인 두 현실적 존재 A와 B가, 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다. A와 B는 모두 연장적 연관의 고리 내에서 발생하고 있다. 여기서 연장적 연관의 이들 양태가 지니는 연장성은 공간적, 시간적 그리고 기하학적 관계가 과거로부터 중요한 것으로 주어져 있을 경우, A와 B가 속해 있는 특정한 우주시대에 있어 전개되고 있는 우주로서는 유일하게 택할 수 있는 실재적 가능태이다. 따라서 A와 B는 모두 상대방의 연장적 속성에 관한 무엇인가를 느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을 출현시킨 과거를 직접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동시적인 것들과 관련하여,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지각에서 얻어지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연장적 속성에 대한 앎이다.



만족 satisfaction

<현실적 존재는 우주의 모든 항목과의 완벽하게 결정적인 유대 관계 ㅡ 이는 긍정적인 파악이거나 부정적인 파악이다. ㅡ 를 동반하는 하나의 복잡한 느낌에서 그 생성을 종결한다. 이러한 종결이 그 현실적 존재의 '만족'이다>. <만족>은 <'합생의 과정'으로부터 추상된 '응결체로서의 존재'라는 개념>을 구현하고 있다. <그것은 과정으로부터 유리된, 그래서 과정인 동시에 결실인 원자적 존재의 현실성을 상실하고 있는 결과물이다... '만족'은 '실체'나 '주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초월체' superject 이다. 그것은 존재를 마감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제의 존재에 대체되는 존재들의 생성을 가능케 하는 창조성에 그 자신의 특성을 부과하는 자기 초월체이다>. 현실적 존재의 이와 같은 종결은 <그 자신을 넘어서는 현실적 존재의 자기 초월을 구현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현실적 존재가 <자신을 넘어서는 미래의 개척지에다 결정적인 조건을 부가하는> 방편이 되고 있다.



명제 proposition

명제는, 단순하거나 복잡한 영원적 객체가 현실적 존재나 현실적 존재들의 결합체와 융합되어 있는 혼성적 종류의 존재이다. 이러한 융합에 있어 관련된 영원적 객체와 현실적 존재들은 모두 그들의 특성 가운데 일부를 상실하게 된다. 영원적 객체로서의 영원적 객체는 비결정의 현실적 존재들 가운데 순수하게 일반적인 <임의의 것>과 관계할 뿐이다. 그러나 명제 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서의 영원적 객체(이때 그것은 그 명제의 <술어적 패턴>predicative pattern 이라 불리게 된다)는, 비록 그것이 현실적 존재의 가능적 한정자라는 특성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관련의 절대적 일반성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그것에 융합된 현실적 존재들에 제한되고 만다. 또 융합에 연루된 현실적 존재들도 완벽하게 결정적이던 특성을 잃게 된다. 현실태들의 구체적인 한정성이 제거되어 특정한 장소를 지적해 주는 지시적 기능만이 남는다. 그리고 실제로 그 현실태들을 특징지워 주던 영원적 객체들은 제거된다. 그래서 그 현실태들은 단순한 <그것들> its, 즉 할당되는 어떠한 술어적 패턴도 수용할 수 있는 단순한 가능태로 환원되어 버린다. 단순한 <그것들> its 로서의 현실태들은 그 명제의 <논리적 주어> logical subject 라 불리게 된다.

명제 그 자체는 그것의 진리치와 관련하여 결정되어 있지 않다. 비록 논리적 주어들이 사실로서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명제는 그 술어적 패턴이, 그 논리적 주어들에 의해 현실적 세계속에 예증된 한정의 현실적 형식인가 아닌가에 따라 참이거나 거짓이 되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명제는 또한 명제적 느낌 속에 그 자신을 실현시키는 일과 관련해서도 본질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그것을 느낄 주체를 기다리고 있는 느낌의 여건이다. 그래서 세계에서의 그것의 기능은 느낌에 대한 유혹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기능이 논리학자들에 의해 강조되어 왔던 명제의 단순한 진리치 truth value 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되풀이해서 주장한다. 존재론적 원리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어떤 곳(여기서 <어떤 곳>은 어떤 현실적 존재를 의미한다)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명제는 장소 locus를 갖는다. 명제의 장소는, 그들의 형식적 세계가 그 명제의 논리적 주어를 포함하고 있는 그런 모든 현실적 존재들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때 그 장소 안에 있는 모든 현실적 존재들이 그 명제를 긍정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도시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 도시 중앙에 빈터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데도 오직 한 사람의 진취적인 기업가만은 <저 모퉁이에 있는 식당> 이라는 말로써 지칭되는 명제를 긍정적으로 파악하는 수가 있는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그 명제를 파악하는 순간에 있어 그 명제는 거짓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명제에 있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느낌에 대한 유혹으로서의 그 명제는 그 기업가로 하여금 그 땅을 사서 식당을 짓도록 할 수가 있다. 이것이 명제의 중요한 기능이다. 그러므로 명제는 새로움으로의 전진을 위한 길을 열어 주고 있는 것이다.



명제적 느낌 propositional feeling

명제적 느낌은 명제를 그 여건으로 하고 있는 느낌이다. 명제적 느낌은 단순한 비교적 느낌이다. <결정적 논리적 주어와 관계 맺고 있는 것으로서, 그 순수한 가능태에 있어서 실현된 영원적 객체는 문제되는 현실적 계기의 정신성에 있어서의 '명제적 느낌'이라 불린다>



물리적 목적 physica purpose

물리적 목적은 합생의 세번째 위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단순한 비교적 느낌 comparative feeling 들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종류의 느낌이다. 단순한 비교적 느낌에서는 (첫번째 위상에서 생겨난) 단순한 물리적 느낌과 그것의 개념적 대응물, 즉 (두번째 위상에서) 그 단순한 물리적 느낌에서 파생된 개념적 느낌과의 통합이 이루어진다. 물리적 목적과 보다 복잡 미묘한 명제적 느낌 사이의 차이는 바로 이러한 통합의 성격에 있다. 이 차이는 두번째 위상에서 생겨난 개념적 느낌의 운명 속에 있다. 통합에 있어 개념적 느낌의 여건인 영원적 객체가 사실에 대한 그것의 비결정성, 즉 그것의 보편성 또는 그것의 사실 초월성을 보존하고 있을 때 그 통합은 세번째 위상에서 명제적 느낌을 낳게 된다. 그러나 그 영원적 객체가 사실에 대한 그것의 비결정성, 곧 그것의 초월성을 상실하고 사실 속으로 내재해 들어갈 때, 즉 첫번째 위상에서의 물리적 느낌에서 시원적으로 예증되었던 것으로서의 그 자신과 결합해 들어갈 때 그 통합은 세번째 위상에서 물리적 목적을 낳게 되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보자면 물리적 목적은, 두번째 위상에서의 개념적 느낌의 주체적 형식이 역작용일 수도 있고 혐오일 수도 있다는 사실만 접어둔다면, 첫번째 위사에서의 물리적 느낌의 반복이다. 주체적 형식이 역작용일 경우 물리적 목적의 주체인 현실적 존재는 그 물리적 느낌을 보존하여 이를 미래의 계기로 전달하려는 경향을 띠게 되며, 그 주체적 형식이 혐오일 경우 어떻게든 그 물리적 느낌은 그 주체를 넘어서는 미래에 있어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는 경향을 보이게 될 것이다.

명제적 느낌들은 의식을 낳을 수 있는 보다 복잡 미묘한 통합과 통합의 통합을 위한 유혹이 되는데 반해 물리적 목적을은 최종적인 것이 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더이상의 통합을 금하며, 의식을 동반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우리가 무생물이라 부르는 사회의 구성원인 근원적인 종류의 현실적 존재들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변화 change


현실적 존재들은 변화하지도 않으며 운동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생성한다. 그리고 그들의 생성은 또한 그들의 소멸의 순간이기도 하다. <현실적 존재는 결코 운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있는 곳 where it is 에 있으며 지금의 그것 what it is 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화이트헤드가 지적하고 있다시피, <'운동'이라든지 '운동하는물체'라는 개념에 주어질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이 의미는 사건이라는 개념에 의해 짜여진다. 사건은 현실적 존재들의 결합체, 즉 상호 연관된 현실적 존재들의 연장적 줄기 extensive string 이다. <'변화'라는 개념의 근본적인 의미는 '결정된 어떤 사건 속에 포함되어 있는 현실적 계기들 사이의 차이'이다>. 이런 사실을 표현하는 보다 기본적인 또 다른 방식은 영원적 객체라는 개념을 통하는 길이다. <'변화'는 현실적 사물들로 이루어진 발전하는 우주에서 영원적 객체들이 겪는 모험을 기술하는 말이다>. 이들 두 설명 방식은 서로를 전제로 하고 있다. 계기하면서 사건을 구성하고 있는 현실적 존재들 가운데 현존하는 영원적 객체들의 패턴에 아무런 변경도 없을 경우, 변화도 운동도 없게 될 것이며, 오직 반복에서 비롯되는 단순한 지속만이 있게 될 것이다.



변환 transmutation

변환은 미시세계적 파악들로부터 거시세계적 지각을 발생시키는 작용이다. 예를 들어 변환을 통해, 하나의 탁자에 대한 지각은 그 탁자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의 현실적 존재들에 대한 파악들을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변환은 임의의 한 주체 내의 순수한 물리적 느낌들의 계열에 있어(이 느낌들은 어떤 중요한 특징의 질서를 지니고 있는 결합체의 개별적인 구성원들에 대한 느낌들이어야 하겠다) 그 느낌들 속의 영원적 객체들 내에 동일한 패턴이 있게 될 때 일어날 수 있다. 그 임의의 주체의 두번째 위상에서 동일한 개념적 느낌이 이 물리적 느낌들 각각에서 발생하게 된다. 첫번째 위상에서의 순수한 물리적 느낌 모두 또는 그들 중의 대다수와 공평하게 관련되는 이 하나의 개념적 느낌은 변환에 있어 열쇠가 된다. 세번째 위상에서 따라나오는 통합된 느낌에서 이 하나의 개념적 느낌은 전체로서의 그 결합체와 대비되어 들어간다. 그리고 <전체로서의 그 결합체는 그것의 여러 성원에 어떤 방식으로 속하는 하나의 특성을 이끌어낸다> 어떤 특정의 특성을 예증하고 있는 하나의 전체로서의 그 결합체에 대한 이와 같은 변환된 물리적 느낌은, 결합체의 여러 현실적 존재들에 대한 처음의 여러 느낌들을 그 결합체에 대한 하나의 느낌으로 대체시킨 셈이 된다. 그래서 탁자를 구성하고 있는 현실적 존재들에 대한 다수의 느낌들을 대신하는 것으로서의 그 탁자에 대한 느낌이 있게 되는 것이다.



사건 event

화이트헤드의 초기 저작에서는 사건의 개념이 중심에 있었다. 사건은 후기 저작에서 현실적 존재들이 행하고 있는 역할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했었다. 초기 저작에서 사건은 시간적으로 명백히 연장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 존재는 한순간에 발생한다. 그것의 생성은 또한 그것의 소멸의 순간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사건과 현실적 존재는 완전히 서로 다른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후기 저작에서도 사건의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더이상 초기 저작에서처럼 근본적인 개념이 아니다. <과정과 실재>에서 <사건은 "어떤 연장량 extensive quantum 에 있어 어떤 결정적인 방식으로 서로 관계 맺고 있는 현실적 계기들의 결합체이다. 그것은 그 형상적 완결성 formal completeness 을 누리고 있는 결합체이거나 객체화된 결합체이다. 하나의 현실적 계기는 단 하나의 구성원만을 지니고 있는 사건의 극단적 유형이다... 예컨대 분자는 현실적 계기들의 역사적 경로이며, 이러한 경로가 곧 하나의 "사건"이다>.

 

사회 society

사회는 사회적 질서를 갖추고 있는 결합체이다. <결합체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사회적 질서'를 향유하고 있다. 즉 1)그 결합체에 포함된 각 현실적 존재들의 한정성에 예시된 공통 요소로서의 형상이 있을 것, 2)그 결합체의 각 구성원이 그 결합체의 다른 구성원들을 파악함으로 말미암아 그 각 구성원에 부과되는 조건들에 근거하여, 이 공통요소로서의 형상이 그 결합체의 각 구성원에서 생겨나고 있을 것, 그리고 3)이때의 파악들이 그 공통 형상에 대한 긍정적 느낌을 포함하고 있음으로 해서 재생 reprodution 의 조건을 부여하고 있을 것 등이다>. 이 공통 요소로서의 형상은 그 사외의 <한정 특성> defining characteristic 이라 불린다.

형상적 한정의 의의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일컬어지는 '사회'의 핵심은 그것이 자립해 있다 self-sustaining 는 것, 다시 말하면 그것은 그 자신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는 동일한 집합명이 적용되는 존재들의 어떤 집합 이상의 것이다. 즉 그것은 단순한 수학적 개념의 '질서'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 사회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각 성원들이 동일한 사회 내의 다른 성원들로부터 파생되어 나왔다는 데에 근거하여, 하나의 집합명이 그 각 성원들에게 적용되어야만 한다. 그 사회의 성원들은, 그것들이 그들의 공통 특성을 근거로하여 각기 그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다, 그와 같은 유사성을 낳게 되는 여러 조건을 부과하기 때문에 유사한 것들이 된다>.

사회에는 여러 유형이 있으며 그 복잡성의 등급도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사회들의 사회내에는 상이한 종류의 많은 사회들이 있다.



상징적 연관 symbolic reference

상징적 연관은 인간의 극히 민첩한 지각을 특징지우고 있는 혼합된 양태의 지각이다. 그것은 인과적 효과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지각과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지각과의 통합 내지 그들간의 상호작용이다.

인과적 효과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지각은, <그 느낌의 여러 색조에 의해 구성되는 것로서의, 그리고 이들 느낌의 여러 색조를 통해 효과를 낳는 것으로서의 과거의 정착된 세계에 대한 지각이다>. 이러한 양태의 느낌은 물리적인 세계에 충만해 있으며 인간의 경험에서는 내장의 느낌 visceral feeling ㅡ 예컨대 오래 끄는 위통 ㅡ 이나 맹목적으로 나타나는 기억 같은 것으로 예증된다. 이에 반해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지각은 <단지 감각 여건에 의해 동시적인 공간영역을, 그것의 공간적 형태 및 지각자로부터의 그것의 공간적 전망과 관련하여 모호성으로부터 구출해 내는데 그치는 지각...> 이다. 현시적 직접성은 <단순한 시각> bare sight 의 산물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회색의 돌에 대한 지각속에 있는 단순한 시각이, 그 지각자와 동시적인 회색의 형태, 그러면서도 지각자와 다소 모호하게 한정되는 어떤 공간적 관계를 맺고 있는 회색의 형태에 대한 시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단순한 시각은 지각자와 동시적인 어떤 공간적 영역이 그 지각자에 대해 갖는 기하학적인 전망적 관계를 예시하는데 그친다. 그리고 이러한 예시는 '회색'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진다. '회색'이라는 감각 여건은 그 영역을 다른 영역들과의 모호한 혼재 상태로부터 구출해낸다>.

화이트헤드는 철학자들이 지각을 분석하면서 인과적 효과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지각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고 주장한다. <철학자들은 내장의 느낌을 통해 얻어지는 우주에 관한 정보를 멸시하고 시각적 느낌 visual feeling 에만 주의를 집중시켜 왔다>. 그 결과 철학은 현시적 직접성에 의해서만 지각을 분석하려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흄의 회의론을 낳았다. <인과율에 대한 흄의 논박은 사실상... 순수한 현시적 직접성이... 어떠한 인과적 영향력도 드러내 보여 주지 못한다는 것을 장황하지만 설득력있게 논증한 것이다... 결론은 현시적 직접성에 의해 밝혀지는 것에 관한 한, 동시적인 우주 내의 현실적 존재들은 인과적으로 상호 독립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일상적인 지각을 꿰뚫고 있는 <인과적인 영향력 causal influence 이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회색의 돌에 대한 우리의 시지각 visual perception 을 의식에 새겨넣을때, 거기에는 단순한 시각 이상의 무엇인가가 연루되어 있다. 그 '돌'은 그것의 과거와 관련을 맺고 있다. '돌'은 명백히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미래를 갖게 될 것이다. 미래에 있어 그것은, 아주 작은 것일 경우 돌팔매용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아주 큰 것일 경우 의자로서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시적 직접성에 포함되는 감각 여건은 선행하는 동물 신체에서의 근원적인 느낌으로부터, 즉 인과적 효과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지각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인과적 효과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지각 내의 감각 자료에 기본적으로 따라다녔던, 과거의 현존이 지니는 모호한 견실성 massiveness은, 그 감각 자료가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지각 내의 선명하게 한정된 동시적인 공간적 영역에 투사되고, 그 결과 혼합된 양태의 상징적 연관이 그 돌을 공간의 동시적인 영역에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서 지각하는 동시에 그 돌을 과거를 지니고 있고 또 미래에 있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속하는 존재로 지각하게 될 때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순응적 느낌 conformal feelings

합생의 최초 위상은 순응적 위상, 반응적 위상, 최초의 위상, 수용적 위상, 또는 근원적 위상 등으로 명명된다. 그래서 이 위상을 구성하는 파악들은 순응적 느낌, 반응적 느낌, 또는 순수 물리적 느낌 등으로 불린다. 순응적 위상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연결고리를 제공함으로써 합생을 개시한다. 과거는 객체화된 여건으로서 주어지는데, <호응적 위상은 이러한 여건들을 느낌의 주체적 통일을 위한 소재로서 흡수한다>. 이 순응적 느낌들은 <벡터vector 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저곳에 있는 것을 느끼고는 이를 이곳에 있는 것으로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순응적 느낌은 <객체적 내용을 주체적 느낌으로 변형시킨다>. 순응적 느낌들은 <단순한 가능태 potentiality 였던 여건이 실현의 복잡한 통일을 위한 개체화된 기반이 되는> 통로가 되고 있다. 비록 이러한 통일은 합생의 보다 후기 위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달성되는 것이긴 하지만, 그러한 통일의 기반이 되는 재료는 순응적 느낌에 의해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순응적 느낌은 반복하고 재생한다. 이 다음의 보충적 국면의 비교적인 느낌들이 새로움의 원천이며, 순응적 느낌은 새로움을 낳지 못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순응적 느낌의 지평에서도 주체적 지향 subjective aim 의 지배에 따르는 창조적 선택이 있게 된다. 왜냐하면 순응적 느낌의 여건이 되는 계기내의 어떤 요소는 객체화되어 선택되는 반면 다른 어떤 요소는 부정적 파악에 의해 배제되어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음의 인용문은 화이트헤드의 도식에서 순응적 느낌이 갖는 중요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단순한 주체적 반응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을 뿐, 보다 높은 위상에서의 독창성을 결하고 있는 이 직접적인 지각은 수용성 receptivity 의 모습으로 나타난 현실적 존재의 구조를 보여준다. 인과관계의 표현으로 하자면, 그것은 현실세계에서 작동하고 있는 작용인을 기술하고 있다. 로크가 제기했던 것과 같은 인식론의 표현으로 하자면, 그것은 개별적 존재자 particular existent 의 관념이 어떻게 지각자의 주관 속으로 흡수되고, 어떻게 외부세계에 대한 그 지각자의 경험을 위한 여건이 되는가를 기술하고 있다. 과학의 표현으로 하자면, 그것은 국지화된 에너지의 양적 강도가 그 자신 속에 그 기원의 여러 벡터적 흔적과 그 종적(種的) 형식들의 특수성들을 띠게 되는가를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원자적 양자들이 일정량의 에너지 집성 속에서 식별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이런 방식으로 유기체의 철학은 ㅡ 마땅히 그래야 하겠지만 ㅡ 사실에 호소한다>.



신 God

<신은 현실적 존재이며,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텅빈 공간에서의 지극히 하찮은 현존의 한 가닥도 현실적 존재이다. 그런데 비록 그 중요성에서 등급이 있고 기능에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현실태 actuality 가 예증하는 여러 원리에서 볼 때 모든 현실적 존재들은 동일한 지평에 있는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유(類)의 현실적 존재들이 있을 뿐이라는 가정은 유기체 철학이 따르려는 우주론의 이상에 속한다>. 신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설명이 정확히 어떻게 이러한 이상과 조화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화이트헤드가 그의 철학에서 <신은 형이상학적 원리들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 불러들여진, 모든 형이상학적 원리들로부터의 예외자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신은 형이상학적 원리들의 주요한 예증 사례인 것이다>.

신의 구조는 세계의 구조와 대칭 mirror image 을 이룬다. 세계는 미완의 것이다. 그것은 그 본성상 자신을 완결짓기 위해 모든 사물의 기초에 있는 하나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이 존재가 신이다. 세계를 완결짓는 존재로서의 신은, 왼손이 오른손의 보완물이듯이 세계의 보완물이며, 그 결과 모든 현실적 존재들을 지배하는 원리들은 신에게서 몇몇 사례를 통해 반대되는 방식으로 예증된다.

시간적 세계의 존재들은 여건으로서의 계기들에 대한 물리적 파악과 더불어 생겨난다. 그래서 그 존재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 확고하게 뿌리박고 있게 된다. 신은 영원적 객체들의 비시간적 영역에 대한 그의 <개념적>파악과 더불어 생겨난다. ㅡ 이것은 신의 <원초적 본성> primordial nature 이며, 이런 본성 때문에 신은 비시간적인 현실적 존재로 지칭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간적 영역의 현실적 존재들은 물리적 파악으로부터 개념적 파악으로 나아간다. 신은 이와 반대이다. 왜냐하면 그의 <결과적 본성>은 시간적 세계 내의 현실적 존대들에 대한 그의 물리적 파악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시간적 계기들과 마찬가지로 신은 그의 결과적 본성에 속하는 물리적 느낌들이 그의 원초적 본성에 속하는 개념적 느낌들과 통합되는 비교적 느낌의 위상에 의해 완결된다. 또 시간적 존재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에게서도 이러한 통합은 <자기 초월체적 본성> superjective nature 을 낳는다. 이것은 <갖가지 시간적인 사례들 속에서 초월적인 창조성을 규정하는 신의 특수한 만족이 가지는 실용적 가치의 성격>이다.

하나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영원적 객체들은 존재론적 원리상 현실태와의 연계를 필요로 하는 존재의 일종이다. <모든 것은 어떤 곳에 있어야 한다.여기서 '어떤 곳'이란 '어떤 현실적 존재'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주의 일반적인 가능태는 어떤 곳에 있어야 한다... 이 '어떤 곳'은 비시간적인 현실적 존재... (즉) 신의 원초적 정신이다>. 이것은 체계의 내적 구조가 신을 필요로 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그 체계는 또한 객체화의 학설과 관련해서도 신을 필요로 한다. 현실적 존재들은 생성하고 이어서 소멸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객체적으로 불멸하는 것으로 기능한다. 객체적으로 불멸하는 것으로서의 현실적 존재들은 현실태와의 연계를 상실한 것들이며, 이런 점에서 그것들은 영원적 객체들의 영역과 유사한 것이다. 객체적으로 불멸하는 현실적 존재들은 신의 결과적 본성을 통해 현실태와 연계된다. 결과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신은 현실적 존재들의 각 세대를 파악하고 보존하며 미래에로 그들의 역량을 매개한다. 이러한 역할에 있어 신은 그의 전통적인 구원의 능력과 심판의 권능을 보여준다. 신의 결과적 본성은 세계의 성장과 더불어 성장한다. 그리고 그의 결과적 본성에서 구원된 것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그의 가치평가를 통해 신은 <구원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버리지 않는 사랑의 심판>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그 체계는 새로움과 진보가 가능하도록 현실태와 가능태를 매개해 줄 존재를 필요로 한다. 원초적 본성에 있어서의 신은 가능태의 무한한 영역을 파악하며, 결과적 본성에 있어서의 신은 세계의 현실태들을 파악한다. 그리고 그의 자기 초월체적 본성은 그의 원초적 통찰과 그의 결과적 파악들이 짜여들어간 것이다. 여기서 현실적 사실이 가능태의 영역과 병치될 때, 그 사실적 상황에 있어 새로운, 그러면서도 관련된 가능태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과 중요한 대비를 이루며 나타나게 된다. 창조적 전진에 있어서의 신의 목적은 세계에 대한 그의 경험이 그 자신의 경험에 있어 가능한 최대의 강도를 낳게 할 그런 성격의 세계를 출현시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신ㅡ이는 자기 초월체적으로 기능하는 신이다ㅡ은 발생하는 각 현실적 존재에다 주체적 지향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존재 자체의 합생을 통한 그러한 지향의 완결은, 신에 의해 파악될 때 신에게 최대 강도의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그런 류의 질서지워진 복잡한 세계를 창출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현실적 존재의 초기 주체적 지향을 제공한다고 하는 제한된 의미에 있어 <신은 각각의 시간적인 현실적 존재의 창조자라 할 수 있다>.



여건 datum

파악의 여건은 파악되는 것이요, 주어지는 것이다. <느낌의 분석에 있어, '사물에 앞서는'ante rem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모두 여건이다...>. <현식적 존재의 성격은 궁극적으로 그 여건에 의해 좌우된다. 합생에서 생겨나는 느낌의 자유가 어떤 성격의 것이든간에 현실적 존재는 그 여건에 내재하는 잠재능력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여건은 제한하면서 동시에 제공한다. 바로 이러한 학설로부터, 유기체의 성격은 그 환경의 성격에 달려 있게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화이트헤드는 최초의 여건 initial datum 과 객체적 여건 objective datum 을 구별한다. 이구별은 단순 물리적 느낌, 즉 단 하나의 현실적 존재를 여건으로 하고 있는 느낌을 고찰하고 있을 경우 관련이 있게 된다. 여건인 하나의 현실적 존재 전체는 최초의 여건이라 불린다. 이 최초의 여건은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느낌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의해서 합생하는 주체에 대하여 객체화된다. 이처럼 그것을 객체화시키는 느낌은 객체적 여건이라 불린다. <객체화는 객체화된 존재의 완전한 구조를 관련성 없는 것으로, 또는 종속적 관련성만을 지니는 것으로 축출해 버린다. 객체화된 존재 내의 어떤 실재적인 구성요소는, 그 객체화된 특정의 존재가 그 주체의 경험에 있어서 여건이 되는 방식의 역할을 떠맡는다>. 이 <실재적 구성요소>는 객체적 여건이며, 그것이 만들어내는 객체화는 합생하는 주체에 있어서의 최초의 여건에 대한 <전망>이라 불린다.



연장적 연속체 extensive continuum

사회들은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각 사회는 그 사회적 환경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마치 한 도시가 어떤 지방에 속하고 그 지방은 어떤 주에 속하며 다시 그 주는 어느 한 국가에 속하듯이 서로간에 순차적으로 감싸안고 있다. 물론 어느 한 주 안에 여러 지방이 있듯이, 감싸안고 있는 사회 안에는 같은 유형의 여러 사회들이 들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자연은 <보다 특수한 사회가 보다 넓은 사회 속에 포함되어 있는 방식으로, 점차 그 지배의 폭에서 넓어지고 있는 사회들의 <계열>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우주 시대는 전자적인 현실적 존재들과 양성자적인 현실적 존재들의 거대한 사회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리고 이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질서는 우리가 <자연의 법칙>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는 기하학적 공리들을 머금고 있는 보다 넓은 사회적 배경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보다 넓은 사회 가운데는, 한 지방에 두 도시가 있을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반(反)전자적, 반(反)양성자적인 사회들이 존재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하학적 사회는 훨씬 더 넓은 4차원의 사회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것을 넘어설 때 단순한 차원성만을 지닌 사회에 부딪치게 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오늘날 우리의 인식 범위 내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넓은 사회, 즉 화이트헤드가 <연장적 연속체>라 부르고 있는 단순한 연장성의 사회와 만나게 된다. <연장적 결합의 일반적 속성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직접적인 우주 시대를 훨씬 넘어서서 확대되고 있는 거대한 결합체의 한정 특성을 식별하게 된다... 이 궁극적이고도 거대한 사회는, 우리가 우리의 현 발전 단계에서 체계적인 특성들을 식별할 수 있는 한, 우리의 시대가 놓여 있는 전체 환경을 구성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연장적 연속체의 개념을 사회에 의거한 외적인 역할에서 고찰했다. 순수한 또는 일반적인 가능태라는 관념에서 출발하여 그 내적인 역할에서 그 개념에 접근해 가는 것도 이해에 도움이 된다. 일반적 가능태란 <영원적 객체의 다수성에 의해 제공되는, 서로 무모순적이거나 선택적인 가능태들의 묶음이다>. 그것은, 세계속으로 진입할 때 논리적인 제한 외에는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는, 그 자체로서 고찰된 영원적 객체들의 영역이다. 그러나 실제로 세계에로의 진입에 있어 논리에 의한 제한뿐만 아니라 과거의 환경에 의한 제한도 있게 된다ㅡ순수한 가능태에서 보자면 키가 5피트인 40대 뚱뚱한 사람이 7피트의 높이까지 뛰어오를 수 있으나 이는 실재적인 가능태가 아니다. 실재적 가능태란 순수한 가능태를 제한한 것, 곧 한정한 것으로서, 주어진 사실적 세계의 여러 조건들이 그 세계로부터 생겨나는 임의의 특정 현실적 존재에다 제공하는 가능태이다. 연장적 연속체는 <세계의 일반적 특성에서 생기는 질서ㅡ즉 실재적 가능태ㅡ에 대한 최초의 규정이다. 현재의 시대를 넘어서는 그 완전한 일반성에서 볼 경우, 연장적 연속체는 형태나 차원 또는 측정 가능성 같은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우리의 우주 시대에서 비롯되는 실재적 가능태의 부가적인 결정들이다>. 우리의 우주 시대 밖으로 뻗어 나가는 거대한 사회로서의 연장적 연속체는 그 무수한 세대들의 집단적인 사회적 계승을 통해, 일반적인 가능태에다 최초의 가장 일반적인 제한을 가하고 있다. 이 제한은 현실적 존재들의 각 세대가 그 나름의 어떤 특수한 성격의 질서를 지니고 있든지간에 최소한 그것들은 <'연장적 결합', '전체와 부분', '연장적 추상'에 의해 도출될 수 있는 다양한 유형의 '기하학적 요소들'>등과 같은 일반적 속성들을 띠고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에는 직선을 정의할 수 있게 하며, 그래서 측정 가능성을 이끌어들이는 보다 특수한 속성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 이론에 들어 있는 전문적인 기하학적 측면들은 지금과 같은 입문적 연구의 범위를 넘어선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언급으로 충분하겠다. 즉 시공 연속체는 단순한 연장을 전제로 하는 보다 특수한 성질들의 집합이며, <그 시간화와 공간화를 떠난 연장은 다수의 객체들이 하나의 경험이라는 실재적 통일 속으로 결합해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관계들의 일반적 도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경험 행위는, 그 자신의 전망적 관점이 연장적 내용을 가지며, 다른 현실적 존재들은 그들 자신의 연장적 관계를 유지한 채 객체화된다는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하여 연장적 질서의 객체적 도식을 갖는다>.



영원적 객체 eternal object

<그에 대한 개념적 인지에 있어 시간적 세계의 어떠한 특정의 현실적 존재와도 필연적인 관련이 없는 그런 존재는 모두 '영원적 객체'라 불린다>. 영원적 객체들은 현실적 존재들의 성격을 특징지울 수 있는 한정의 형식이다. 그것들은 <사실의 종적인 결정 specific determination 을 위한 순수가능태 pure potenials>이다. 현실적 존재의 생성과정이란 한정의 다양한 형식들(영원적 객체들)을 취사선택하는 일련의 결단을 통해 한정성을 획득해 가는 과정이다. <각 현실태의 결정적인 한정성은 이러한 형상들로부터의 선택의 표현이다. 그것은 이런 형상들을 다양한 관련성 속에 등급화시킨다>. 취사선택하는 주체는 현실적 존재이다. <영원적 객체는 항상 현실적 존재들을 위한 가능태이다. 그러나 그 본질상 그것은 개념적으로 느껴지는 것으로서, 시간적 세계의 임의의 특정 현실적 존재에로의 그 물리적 진입 physical ingression 과 관련하여 중성적이다>.

임의의 현실적 존재는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결단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 존재는 그것을 위해 주어진 여러 결단에서 생겨나며, 바로 그 자신의 현존에, 그것 다음에 오는 다른 현실적 존재들을 위한 결단을 제공한다>. 그것이 계승하는 과거는 그것에다 그것이 반복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한정의 형식들을 제공한다. <과거와 현재를 통합시키는 벡터 전이 vector transition 의 토대로서 얼마간의 순응이 필요하다. 여건을 결정하고 주체적 형식을 결정한다는 두 가지 기능에 있어서의 영원적 객체는 따라서 관계적 relational 이다... 영원적 객체가 파악의 여건을 제공하기 위해, 현실적 세계를 객체화시키는 기능을 통해 진입할 때, 그것은 '여건적으로' datively 기능하고 있다>.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이 되려면 현실적 존재는 어떤 결정적인 형식을 취해야만 한다. 현실적 존재는 그의 합생의 구성요소로서 어떤 영원적 객체를 참여토록 하고 어떤 영원적 객체를 참여하지 못하도록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결단을 통해 이를 성취한다. 현실적 존재의 결단에 내포되어 있는 생성, 곧 과정은 그 현실적 존재의 생존과 하나가 되고 있다. 이에 반해 영원적 객체들은 그 본질상 영원하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변화를 벗어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임의의 현실적 존재인 생성의 과정 자체가!! 그 현실적 존재를 그것이게끔 해 줄 일종의 한정인 종적 특성을 선택된 영원적 객체에 의해 결정해 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변화 가운데 내포되어 있다. <세계의 과정을 구성하는 현실태들은, 모든 현실적 존재에 있어 한정의 가능태를 조성하는 다른 사물들의 진입(또는 '관여' participation)을 예시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시간적인 사물들은 영원적인 사물에 관여함으로써 생겨난다>.

이런 주장은 플라톤의 학설과 유사한데 사실상 어느 정도는 그의 학설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주체적 종 subjective species의 영원적 객체와 객체적 종 objective species의 영원적 객체를 구별하고, 나아가 <객체적 종의 영원적 객체들은 플라톤의 수학적인 형상>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형상 form)들은 <느낌의 여건이 어떤 객체화된 결합체나 어떤 단일의 현실적 존재를 한정하는 요소>라는 의미에서 객체적이다. 주체적 종의 영원적 객체는 <느낌의 주체적 형식을 한정하는 요소>라는 의미에서 주체적이다. <그것은 정서이든가, 강도이든가, 역작용이든가, 혐오이든가, 쾌락이든가, 고통이든가이다>. 화이트헤드의 도식은 영원적 객체의 영역에다 두드러진 실재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플라톤적 도식과 다르다. 존재론적 원리는 가장 완전한 의미의 실재성을 현실적 존재에 부여한다. 그리고 여기서 화이트헤드는 플라톤의 <피안> other worldliness 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론을 구현하고 있다. 그런데 존재론적 원리에 따르면 <모든 것은 어떤 곳에 있어야 한다. 여기서 '어떤 곳'이란 '어떤 현실적 존재'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주의 일반적인 가능태(즉 영원적 객체의 영역)도 어떤 곳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이 거기서 실현되어 있지 않은 그런 현실적 존재들에 대하여 근사적인 관련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어떤 곳'은 비시간적인 현실적 존재이다. 따라서 '근사적인 관련성'은 '신의 원초적인 정신에 있어서의 관련성'을 의미한다>.



욕구 appetition

<욕구란 우선 개념적으로 파악된 여건을 실현시키는 충동과 결부되어 있는, 직접적인 물리적 느낌에 대한 개념적 가치평가 conceptual valuation이다>. 네 번째 범주적 제약 cateforeal obligation 에 따르면 각각의 물리적 느낌으로부터 파생되는 순수한 개념적 느낌이 있다. 그리고 개념적 느낌의 주체적 형식은 평가절상(역작용 adversion)일 수도 있고 평가절하(혐오 aversion)일 수도 있는 가치평가라는 특성을 지닌다. 욕구는 <불안정 unrest 의 원리를 자기 자신 속에 간직하고 있는 직접적인 사태이다>. 그래서 이 가치평가의 요소ㅡ역작용 또는 혐오ㅡ는 불안정의 장소인 것이다. 역전에 의해서 현실적 존재의 정신적 극에 새로운 개념적 느낌이 현존할 수 있게 되며, 욕구에 의해서 그러한 현실적 존재는 <창조성을 제약하여 미래에 있어 그 정신적 극의 물리적 실현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욕구>라는 개념은 신의 원초적 본성과 관련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신의 원초적 본성은 영원적 객체의 영역에 대한 <무제약적인 개념적 가치평가, 즉 스피노자가 사용했던 의미의 '무한한'개념적 가치평가>이다. 이것은 단순히 개념적 느낌이 아니라 개념적 가치평가라는 점에 유의해야 하겠다. <이것은 창조적 질서가 의존하는 영원적 객체들의 공재에 대한 궁극적이고도 기본적인 조정이다>. <신의 원초적 본성 primordial nature 을 구성하는 여러 욕구의 등급화된 질서>는 모든 현실적 존재에 의해 파악되는데, 이들 존재 하나하나에 있어 그 질서는 이들 각 존재가 각자의 합생을 이끌어가면서 지향하는 하나의 유혹이 되고 있다. 신의 목적은 느낌의 강도를 증진시키는 데에 있다. 그의 욕구들은 그의 목적을 구성한다. 그래서 세계 속에서 느껴진 것으로서의 그의 욕구들은 그의 목적에 이바지한다.



우주 시대 cosmic epoch

현실적 존재들의 철저한 형이상학적 특성은 모든 현실적 존재들이 공유하고 있는 특성이다. 그러나 현실적 존재들의 어떤 특성 집합은, 철저하게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한, 즉 보편적이지 않은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많은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우주 시대라는 개념은, 명백하게 보편적이지도 않고 완벽하게 일반적이지도 않으나 <우리 자신과의 직접적 관련을 추적해 볼 수 있는 현실적 존재들의 가장 넓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그런 관계들의 기반으로서의 거대한 사회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 시대를 특징지우는 것은 전자적인 현실적 존재, 양성자적인 현실적 존재, 그리고 에너지의 양자에서 희미하게 식별될 수 있는 훨씬 더 궁극적인 현실적 존재들이다>.

이 학설에 내포되어 있는 흥미로운 사실은 화이트헤드가 자연의 법칙을 진화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 사회의 무한한 존속을 보장해 줄 이상적인 질서의 완전한 달성이란 있을 수 없다. 사회란, <무질서>가 그 사회의 이상과 관련하여 정의되는 경우, 바로 그런 무질서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그 사회가 어느 정도의 성장을 거쳤을 때, 그것의 보다 넓은 환경이었던 유리한 배경은 소멸하거나 그 사회의 존속에 더이상 유리한 것으로 작용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될 때 그 사회는 그 구성원들의 재생을 중지하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일정한 쇠퇴의 단계를 거친 후 소멸하게 된다. 따라서 우주의 어떤 부분에 있어서의 재생을 결정하는 <법칙들>의 체계는 서서히 등장하여 지배력을 갖추고 나서 그 나름의 지속의 단계를 거친 후, 그 체계를 낳았던 사회의 쇠퇴와 함께 소멸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우주 시대는 이와 같은 어떤 법칙들의 체계에 의해 구성되어 있으며,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후, 지금으로선 생각할 수도 없는 어떤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질서로 대체될 것이다.

이렇게 분석해 놓고 보면 자연의 법칙들은 오늘날의 다른 몇몇 설명에서 보다 훨씬 덜 신비스럽고 훨씬 덜 불가사이한 것으로 나타난다. <전자기장에 관한 맥스웰의 방정식은 방대한 수의 전자와 양성자를 근거로하여 힘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각 전자는 전자적 계기들 electronic occasions의 사회이며, 각 양자는 양성자적 계기들 protonic occasions 의 사회이다. 이러한 계기들은 전자기적 법칙의 근거이다... 그러나 법칙들이 완전히 지켜지지는 않고 있다는 의미에서, 또 그 재생이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의미에서 무질서가 생겨났다. 따라서 현재의 자연법칙들을 대신하여 점차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뒤이어 등장하는 새로운 유형의 질서에로의 점차적인 전이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의식 consciousness

<의식은 우리가 긍정-부정의 대비를 느끼는 방식이다>. 긍정-부정의 대비는 현실적 존재들의 결합체에 대한 느낌과, 그 결합체의 구성원들을 그 논리적 주어로 하고 있는 명제에 대한 느낌을 결합시켜 하나의 여건으로 통일시키는 작용을 수반하고 있다.

명제적 느낌은 합생의 세번째 위상에서 발생하며, 명제적 느낌과 의식을 포함하고 있는 사실 사이의 대비는 합생의 네번째 위상에서 이루어지는 한층 더 높은 통합의 산물이기 때문에, 의식은 <경험의 불가결한 토대가 아니라 어쩌다 우연히 얻어질 뿐인 결험의 월계관이라는>결론이 나온다. <의식은 경험을 전제로 하지만 경험은 의식을 전제로 하지 않기>때문에 <의식에 있어서의 명석성이 발생과정에 있어서의 근원성을 보증하는 증거일 수 없고, 오히려 그 반대의 학설이 진실에 보다 가깝다>고 하겠다. 화이트헤드의 체계에 중핵이 되는 이러한 일련의 연관관계는 흄에 대한 그의 논박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는 흄이 의식적인 지각을 그의 근원적인 사실로 삼아 출발했고, 그래서 인과관계에 대한 일체의 앎이 어떻게든 이 근원적인 사실로부터 유도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인과관계에 대한 흄의 분석 전체가 처음부터 부적절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흄은 그러한 앎을 유도해 낼 수 없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이런 사실은 인과관계에 관해 아무것도 입증해 주는 바가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과적 연관성은, 의식이 전제로 하고 있으면서도 모호하게 인지할 수 있을 뿐인 근원적인 파악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의식이란 다만 복잡한 통합의 후기에 속하는 파생적 위상에서 나타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종류의 위상이 그 합생에 있어 무시될 수 있는 그런 현실적 계기인 경우, 그 계기의 경험 속에서는 어떠한 인식도 있을 수 없게 된다. 의식은 보다 후기의 위상에 속하는 주체적 형식이기 때문에, 그것이 직접적으로 조명하는 파악들은 불순한 유형의 파악들이다. 의식은 다만 보다 근원적인 유형의 파악들이, 통합을 낳게 될 여러 요소로 남아 있는 한에 있어, 이러한 파악들을 조명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 속에 명석 판명하게 부각되어 나타나는 우리 경험의 요소들은 경험의 기본적인 사실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과정에서 생겨난 파생적인 양상들 derivative modification 이다. 예컨대, 의식은 단지 인과적 효과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파악을 희미하게 조명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런 파악은 우리의 경험에 있어 근원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파악은 우리가 가장 생생하게 의식하면서 향유하는 파악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파악은 경험 주체의 합생에 있어서의 후기의 파생물이다. 이처럼 후기의 파생적 요소가 근원적인 요소보다도 더욱 명석하게 의식에 의해 조명된다고 하는 법칙을 무시한 결과, 경험하는 계기를 적절히 분석하려는 작업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사실상 철학의 여러 난제들 가운데 대다수가 바로 여기에 기인하고 있다>.



인과적 효과성 causal efficacy

인과적 효과성은 지각의 두 가지 순수 양태 가운데 보다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다.(다른 하나의 양태는 현시적 직접성 presentational immediacy 으로서 이 두 가지가 결합하여 우리의 일상적인 앎의 양태인 상징적 연관이라는 복합적 지각 양태를 형성하게 된다). 지각의 순수양태로서의 인과적 효과성은 의식이나 생명을 내포하고 있지 않으며, 생명없는 물질적 대상들을 구성하고 있는 현실적 존재들을 포함하여 모든 현실적 존재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다.

인과적 효과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지각은 과거의 여건으로부터 느낌을 계승하는 기본적인 양태이다. 그래서 그것이 전달하는 느낌들은 과거의 효과로서 느껴지는 것들로서 모호하고 전체적이며 불분명하다. 그것은 화이트헤드가 <생경한> crude 지각이라는 말로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합생의 최초 위상에 있어 순응적 느낌으로서 일어난다. 순응적 느낌은 벡터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합생의 과정에 있는 임의의 주체속으로 다른 사물들이 들어와

구성요소가 되는 ㅡ즉 객체화되는ㅡ 통로이며, 그래서 또한 <인과적 느낌>이라 불리기도 한다. <한 현실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 작용하는 힘이란 단지 전자가 후자의 구조속에서 객체화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입자적 사회 corpuscular society

입자적 사회는 구조를 갖는 사회의 일종이다. 입자적 사회의 독특한 성격은 그것을 구성하는 하위 사회들이 한결같이 존속하는 객체들 enduring objects 의 줄기라는 점이다. 존속하는 객체란 순수하게 시간적이면서 연속하는 사회를 말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어떠한 두 동시적인 현실적 계기도 포함하고 있지 않은 연속적인 계승의 단순한 줄기인 것이다. <입자적 결합체 전체의 한정 특성의 중요성과 비교된, 여러 존속하는 객체들의 한정 특성들의 상대적인 중요성에 따라 사회는 보다 더 입자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보다 덜 입자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원인 : 작용인과 목적인 causation : efficient and final

<건전한 형이상학이 해결해야 할 하나의 과제는, 목적인과 작용인을 이들 상호간의 적절한 관계속에서 해명하는 일이다>. 생물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은, <중세기 기독교로 하여금 목적인의 개념을 무모하리만큼 지나치게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였고, 근대의 과학 시대를 통해서는 그에 대한 반동으로 '작용인'의 개념을 똑같이 지나치게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던> 그런 여러 원리들을 빚어냈다>. 하이트헤드는 이들 양극단 사이의 중간을 택하고자 한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있어 작용인과 목적인의 관계는 합생의 초기 순응적 위상과 후속하는 보충적 위상들간의 관계이다. 초기의 위상은 작용인의 위상이요 인과적 효과성의 위상이며, 보충적위상들은, 이들이 일단 중요한 것일 경우, 새로움과 합목적적 조정의 위상들이다. 생명없는 물질적 대상들을 구성하는 단순한 계기들인 경우, 보충적 위상들은 무기력하고 작용인이 지배력을 행사하지만, 보충적 위상이 중요하게 되는 보다 복잡 미묘한 현실적 존재들인 경우, 전적으로 작용인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기술은 관련된 현실적 존재들의 완전한 실재성을 사상(捨象)하게 되며, 그 결과 왜곡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보충적 작용은 사소한 것에 머무는 단계로부터, 인간과 동물에 있어 지배적인 현실적 존재들의 경로에서처럼 지극히 중요한 것이 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차등화될 수 있다.
<유기체 철학의 학설은, 합생의 구성요소들을 결정함에 있어 작용인이 아무리 광범하게 그 영향력을 행사한다 해도... 이러한 구성요소들의 결정 너머에는 언제나 우주의 자기 창조적 통일의 최종적 반작용이 있다고 본다. 이 최종적 반작용은 작용인의 여러 결정에다 창조적 강조의 결정적인 날인(捺印)을 함으로써 자기 창조적 활동을 완결짓는다. 각 계기는 그 주체적 강도의 정도에 비례하여 그 창조적 강조의 정도를 나타낸다... 그러나 시간적 세계에 있어 비교적 경미한 경험적 강도를 지니는 계기들인 경우, 그 창조적 강조의 결단 하나하나는, 그것들이 수용하여 전달하는 결정된 구성요소들과 비교해 볼 때 무시될 수 있다>.



자기 초월체 superject

<현실적 존재는 그 자신의 생성의 직접성을 관장하는 주체로서, 그리고 객체적 불멸성의 기능을 행사하고 있는 원자적 피조물인 자기 초월체로서 각각 고찰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자기 초월적 주체이며, 이 두 측면의 기술은 모두 어느 한순간도 간과될 수 없다>. 현실적 존재의 자기 초월체적 특성은 <초월적인 창조성을 규정하는, 특수한 만족의 실용적인 가치이다>. 다시말해 그것은 현실적 존재가 후속하는 세대의 현실적 존재들의 합생을 위해 주어진 여건으로서 기능하게 될 때 그 존재가 갖게 되는 죽은 여건으로서의 특성인 것이다.



정신적인 극 mental pole

몇 가지 분석을 위해서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를 정신적인 극과 물리적인 극이라는 구별가능한 두 부분으로 분할한다. 물리적인 극은 <그림 1>에서 합생의 최초 위상, 즉 순응적 느낌의초기 위상으로 분류되어 있는 것에 해당된다. 그리고 정신적인 극은 <그림1>에서 보충적 위상으로, 즉 개념적 느낌들과 비교적 느낌들이 속하는 독창적인 국면으로 분류된 것에 해당된다.
물리적인 극은 과거로부터 그것에 주어진 것을 단순히 수용할 뿐, 그 나름의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는 현실적 존재의 측면이다. 정신적인 극은 주어진 것에 반응하는 현실적 존재의 측면이다. <정신적인 극은 그 합생의 결정자로서 주체를 이끌어들인다. 정신적인 극은 그 자신의 이상을 결정하는 주체이다... 합생 중에 있는 경험의 양극적 성격은, 그 물리적인 극에 있어서는 외적인 현실적 세계로부터 파생되는 경험의 객체적 측면에 이바지하고, 정신적인 극에 있어서는 물리적 느낌들에 연관된 주체적인 개념적 가치 평가로부터 파생되는 경험의 주체적 측면에 이바지한다>.

<물리적인 극>과 <정신적인 극>이라는 말은,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거부하고 현실적 존재들이 궁극적으로 유일한 실재적 현실태라고 주장하는 철학 속에 자리하기에는 그다지 적절한 것이 못 될 수도 있겠다. 물론 화이트헤드도 정신과 물질이라는 낡은 개념을 다시 도입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물리적 세계에 있는 현실적 존재들은 단지 물리적인 극만을 가지며 정신적인 극은 보다 고등한 유기체에만 들어 있다고 하는 것도 결단코 사실이 아니다. <어떠한 현실적 존재도 양극 가운데 어느 하나를 결여하고 있을 수 없다. 비록 상이한 현실적 존재에서 그들의 상대적 중요성이 달라질 수는 있다 해도... 따라서 현실적 존재는 본질적으로 양극적인 것으로서, 물리적인 극과 정신적인 극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물리적 세계조차도 정신적 작용들의 복합체인 반대쪽 측면과의 관련을 떠나서는 올바르게 이해될 수 없다>. 반면에 이것은 <이러한 정신적인 작용이 복잡한 통합의 산물인 의식을 수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존속하는 객체 enduring object

<'존속하는 객체' 또는 '존속하는 피조물'이란, 그 사회적 질서가 '인격적 질서'라는 특수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그런 사회이다>. 인격적으로 질서지워진 사회는 연속적으로 질서지워진다. 다시 말해 그것은 순수하게 시간적인 사회, 즉 동시적인 어떤 두 계기도 포함하고 있지 않은 연속적 계승의 단순한 줄기이다.



존재 entity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어떠한 것도 그 자체만으로 자족적으로 고립해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존재하는 것은 항상 상호간에 연관되어 있고, 또 그 체계적 우주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인식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그의 주안점은 종래의 낡은 용어로 말미암아 소용없게 되고 만 직접 경험을 구출하고자하는 데 있었고, 나아가서는 동적인 우주론 속에서 보다 광범한 일반성을 탐구하려는 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ntity란 말은 본래 라틴어의 ens, 희랍어의 einai 와 연결되는 말로서, '있다'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역어로는 존재(물), 유(有), 실재, 실체 등을 생각할 수 있고, 또 단순히 <사물>이라고도 옮길 수 있는 말이다. 사실상 화이트헤드는 어떤 특정한 용어와 구별할 필요가 없는 한 entity를 사물(thing)과 동의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술어(術語)로서 화이트헤드가 현실적 존재 actual entity 를 사용할 때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실재물 real thing>을 의미한다. 이때에 과정 자체가 현실적 존재가 무엇이냐를 구성한다>는 과정의 원리가 중요하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 존재하는 것은 과정과 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화이트헤드는 entity 에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존재론적 원리 ontological principle

존재론적 원리는 <생성의 과정이 임의의 특정 순간에 순응하고 있는 모든 조건은 그 근거를 그 합생의 현실적 세계속에 있는 어떤 현실적 존재의 성격에 두고 있거나 합생의 과정에 있는 그 주체의 성격에 두고 있다[고 천명한다]... 존재론적 원리에 따르면 알지 못하는 곳으로부터 세계 속으로 유입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은 모든 현실적 계기가 갖는 현실적 세계의 부분이다. 신은 그의 원초적 본성 가운데 영원적 객체의 영역을 포섭해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신적인 요소를 인정함으로써, 현실적인 것을 떠나서는 아무것도ㅡ사실에 있어서든 효과에 있어서든ㅡ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반 원리가 보존된다... 따라서 현실세계는 현실적 계기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며, 또한 존재론적 원리에 의하자면, <현존>의 어떤 의미에 있어서건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현실적 계기들로부터 추상되어 파생된 것들이다>.



주체적 지향 subjective aim

현실적 존재의 주체적 지향은 그 주체가 장차 실현하려는 이상으로서, 바로 그 생성하고 있는 주체의 본성을 결정한다. 각 현실적 존재가 자기 원인자 causa sui 라는 학설은, 처음에 주체가 있고 이로부터 느낌들이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먼저 느낌들이 있고 이들이 통합을 거쳐 통일된 하나의 주체를 성립시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정은 주체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체가 과정으로부터 창출되어 나온다. <주체가 그 자신의 산출과정에 내재되어 있다는 이 학설은, 주체적 과정의 최초 위상에서 주체적 지향의 개념적 느낌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물리적인 느낌들과 그 밖의 다른 느낌들은, 초기 여건들을 처리하는 가운데 이 개념적 지향을 실현하기 위한 여러 중간 단계로서 생겨난다>.
이러한 주체적 지향은, 신에 대한 혼성적인 물리적 느낌 hybrid physical feeling 의 결과로 각 현실적 존재의 최초 위상에서 생겨난다. 원초적인 것으로서의 신은 영원적 객체의 영역을개념적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결과적인 것으로서의 신은 세계의 현실태들을 그 발생과 동시에 물리적으로 파악한다. 느낌의 통합을 통해 신은 그의 물리적 느낌과 그의 원초적 통찰을 결부시키는 가운데, 특정 단계에 도달해 있는 세계를 위해 관련성 있는 새로운 가능태들을 부각시킨다. 자기 초월체로서의 신은 각 현실적 존재에다, 그 현실적 존재가 장차 되어갈 수 있는 것에 대한 통찰을 그것의 주체적 지향으로서 제공한다. 이 주체적 지향은 각 현실적 존재에 있어 성장을 위한 이상을 형성한다. 이러한 이상은 실제로 실현될 경우, 질서지워진 최대의 복잡성을 세계속에 낳게 될 그런 성격의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결과적 본성에 의해 물리적으로 파악될 때 자신에게 최대 강도의 만족을 선사해 줄 그런 종류의 세계를 산출하려는 의도를 수반하고 있는 신이 세계 속에서 작용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주체적 지향은 세계 속에서 신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화이트헤드가 자신은 신을, 통치자 시저의 상이나 냉혹한 도덕주의자나 부동의 동자 unmoved mover 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정적 속에서 서서히 사랑에 의해 작용하는, 세계 내의 부드러운 요소들을 강조>하는 겸양에 대한 갈릴리 사람들의 간결한 통찰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할 때, 그는 주체적 지향의 원천으로서의 신에 대한 그의 학설을 암암리에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신은 서서히 작용한다. 왜냐하면 현실적 존재로 하여금 제공된 유혹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주체적 지향은 합생의 계속되는 여러 위상을 거치는 가운데 단순화되거나 수정될 수도 있다.



주체적 형식 subjective form

파악의 주체적 형식은 그 파악의 주체가 그 파악의 여건을 느끼는 <방식>이다. 주체적 형식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주체적 종의) 영원적 객체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종적인 한정성 specific definiteness 을 지니기 때문에 주체적 형식이다. <주체적 형식에는 정서, 평가, 목적, 역작용, 혐오감, 의식과 같은 많은 종들이 있다>. 동일한 여건도 전혀 상이한 주체적 형식들로 채색되어 서로 다른 주체 속에 수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응석을 잘 받아 주는 어머니와 이웃의 나이 많은 노처녀는 개구장이 어린애의 똑같은 거짓부렁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전혀 다른 정서적인 반응을 보이며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가치 평가는 개념적 느낌의 주체적 형식으로서, 평가절상(역작용)일 수도 있고, 평가절하(혐오)일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에 그것은 현재의 합생에 있어, 그리고 이를 넘어서는 미래에 있어 그 여건들의 계속되는 중요성을 보장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여건들의 중요성이 어느 정도 줄어들게 된다.
임의의 한 주체를 구성하고 있는 파악들의 주체적 형식들은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그들의 전반적인 특성은 그 합생하는 주체의 자기 형성을 지배하고 있는 하나의 주체적 지향에 의해 결정된다.



지성적 느낌 intellectual feeling

지성적 느낌은 임의의 복잡 미묘한 합생의 네번째 위상을 구성하는 복잡한 비교적 느낌이다.(그림 2) 그것은 이론과 사실의 대비, 있을 수 있는 것과 있는 것의 대비를 느낀다. 대비되는 요소들은 세번째 위상에서의 명제ㅡ이론ㅡ와, 그 명제의 논리적 주어를 포함하고 있는 첫번째 위상에서의 사실에 대한 느낌이다. 의식은 <긍정-부정의 대비>로 이따금 지칭되는 이와 같은 대비에 대한 느낌의 주체적 형식으로서 생겨난다.<추상적 가능성 속에 있는 몇몇 영원적 객체들이 현실적 사실에 관련된 것으로 실현될 경우, 지성적 작용을 수반하는 현실적 계기가 있게 된다>.



지속 duration

지속이란, <그 임의의 두 성원이 동시적인 것이라는 특성에 의해 정의되는> 우주의 횡단면 cross section 이다. 임의의 현실적 존재 M이 있을 때, M을 포함하는 지속의 모든 구성원은 M과 동시적이다. <지속의 특징적인 속성은 '생성의 일치' unison of becoming 라고 불린다>.

고전적인 시간 이론은 임의의 현실적 존재를 가로지르는 지속은 하나밖에 없다고 가정했었다. 화이트헤드가 현대의 상대성이론을 그의 체계속에 통합시키는 방식은 하나 이상의 지속이 임의의 현실적 존재를 관통하고 있다는 주장을 축으로 하고 있다. M을 통과하는 모든 지속의 모든 구성원은 M과 동시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하나 이상의 지속이 M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 자체는 상이한 지속의 구성원이어서 동시적이지 않으나 M과는 모두 동시적인 두 계기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이론에서 시간과 공간의 뒤틀림 warping 이라는 표현으로 지칭되고 있는 것이 보여주는 효과의 한 가지 사례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어떤 에포크 epoch 에서의 세계의 직접적인 현재적 상태>라는 개념에 대한 일상적인 신념에 따라다니는 지극히 명백한 확신은 <어느 정도의 수용이 형이상학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러한 관념이 전적으로 거부된다면, 확신이 갖는 보편적 명백성은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명백성을 지닌 보다 강력한 사례는 달리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명백한 확신과 최근의 물리학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해결책은 임의의 어떤 현실적 존재에 결부되어 있는 하나의 특정한 지속을 떼어내어 이 지속으로 하여금 일상적인 확신에 답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특정한 지속은 <현재화된 지속> presented duration 이라 불린다. 그것은 그것에 결부되어 있는 존재가 갖는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지각의 기능이다. 이러한 양태의 지각에 있어 감각 여건 sensa 은 세계의 횡단면 내에 있는 잠재적인 하위 분할을 예시한다. 이 횡단면은 그 존재의 직접적 현재이며, 그 존재의 현재화된 지속은 그것의 직접적 현재 내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하나의 지속이다.



진입 ingression

이 용어는 플라톤의 <관여> participation 라는 개념과 내용적으로 유사하다. 그것은 영원적 객체가 현실적 존재 속에 현존하게 되는 방식을 가리킨다.



창조성 creativity

<창조성>은 화이트헤드가 <궁극자의 범주> category of Ultimate 라 부르고 있는 것에 포함되어 있는 세 가지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이 범주는 유기체 철학의 다른 모든 측면이 전제로 삼고 있는 일반적인 원리를 표현한다. 여기에 들어 있는 다른 두 개념은 <다자>와 <일자>이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과정철학 process philosophy 이다. 그래서 창조성이라는 개념은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체계 전체의 기본적인 전제는 진행 ongoingness 이다. 현실적 존재들의 세대는 끊임없이 계승하면서 이어진다. 창조성은 진행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현실적 존재들에 관한 궁극적인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창조성의 원리는 <다자>와 <일자>간의 관계성을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1) 임의의 순간에 우주는 이접적으로 다양하게 존재하는 <다자>이다. (2) <다자가 복잡한 통일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사물의 본성에 속한다>. (3) 이러한 단일화, 즉 합생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일자>는 진실로 새로운 것이다. 다시말해 그것은 그것이 통일시킨 것에 맞서 있으며, 그렇기에 또한 그것이 통일시킨 하나하나의 항목들과 구별되는 별개의 것이다. (4) 여기에 그 과정이 시작되었던 당시와 동일한 상황(즉 이접적인 다양성)이 있게 되며, 그래서 과정은 피조물에서 피조물로 창조적으로 전진하는 가운데 최후의 심판날까지 자신을 되풀이하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원리는 이접 disjunction에서 연접 conjunction으로 전진하는 가운데 이접적으로 주어진 존재들과는 다른 또 하나의 새로운 존재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창조성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이해는 존재론적 원리를 침해하지 않는다. 창조성은 현실적 존재들과는 다른 어떤 종류의 존재도 아니요 현실적 존재들보다 더 실재적인 어떤 것도 아니다. 그리고 창조성은 또한 그런 것들을 지칭하는 개념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현실적 존재들이 관여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관계성을 기술하고 있다. <'창조성'은 궁극적인 사태를 특징지우는 보편자들의 보편자이다>.



최초의 느낌 primary feeling

<두 가지 극단적인 경우에 있어서, 느낌의 초기 여건들은 그들 자신의 통일성을 갖고 있다. 한 경우에 있어서는 여건이, 그 느낌의 주체를 별개로 할 때, 단 하나의 현실적 존재로 환원된다. 다른 한 경우에 있어서는 그 여건이 단 하나의 영원적 객체로 환원된다>. 화이트헤드는 최초의 느낌을 <단순한 느낌> 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는 <단순한 물리적 느낌>을 길게 논하고 있다. ㅡ 이것은 첫번째 종류의 원초적 느낌에 속할 것이다. 이와 같은 단순한 물리적 느낌들은, 비록 모든 순응적 느낌 conformal feeling 이 단순한 느낌일 필요는 없지만, <순응적 느낌들>이다.



파악 prehension

파악은 <관계성의 구체적 사실>로 정의된다. 파악을 통해 임의의 한 현실적 존재는 다른 현실적 존재 속에 객체화되며 영원적 객체는 현실적 존재 속에 진입하게 된다. 그것은 <벡터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저곳에' 있는 것을 느끼고는 이를 '이곳에' 있는 것으로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파악은 현실적 존재를 구성한다. <현실적 존재에 대한 그 가장 구체적인 요소들로의 최초의 분석은, 그 존재가 그것의 생성과정에서 생겨났던 여러 파악들의 합생임을 드러내 보여준다>. 파악은 그 관계적 특성을 본질로 한다. <모든 파악은 세 가지 요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a) 파악하는 '주체', 즉 그 파악을 자신의 구체적인 요소로 하고 있는 현실적 존재, (b) '파악되는 여건', (c) 그 주체가 그 여건을 파악하는 방식인 '주체적 형식'>.

<물리적 파악>은 그 여건이 현실적 존재들을 포함하는 파악이다. <개념적 파악>은 그 여건이 영원적 객체들을 포함하는 파악이다. 물리적 파악과 개념적 파악은 공히 <순수한>것으로 지칭된다. <불순한 파악>은 두 유형의 순수한 파악을 통합하는 합생의 후기 위상에 속한 파악이다. <혼성적 파악>은 <다른 어떤 주체에 속해 있는 개념적 파악 내지 '불순한' 파악에 대한 어떤 주체의 파악>이다. <긍정적 파악>(또는 <느낌>)은 그 여건을, 주체가 되는 계기의 종합 속으로 포섭하는 반면 <부정적 파악>은 그런 종합으로부터 그 여건을 배제한다.

<현실적 존재의 지각 구조는, 저마다 그 나름의 형상적 현존 formal existence 을 수반하고 있는 현실적 존재들이 어떻게 문제되는 현실적 존재의 지각적 구조 속에 객체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우주의 연대성에 관한 문제이다. 보편과 특수, 주어와 술어, 다른 개별적 실체 속에 내재할 수 없는 개별적 실체, 관계의 외재성 등에 관한 고전적 학설들은 하나같이 이 문제를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유기체 철학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합생하는 통합에 포함되어 있다가 느낌의 일정한 복합적 통일에서 종결되는 파악에 관한 학설이다>

화이트헤드는 이 용어를 사용하는데 있어 라이프니쯔에게 간접적으로 빚지고 있음을 시인한다. 라이프니쯔는 하나의 단자 monad 가 다른 단자를 고려하거나 인식할 수 있는 보다 하등한 방식과 보다 고등한 방식을 각각 <지각> perception 과 <통각> apperception 이라 불렀다. 화이트헤드로서도 이와 같은 용어들이 필요했지만 그는 이런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라이프니쯔가 사용한 용어들은 화이트헤드가 거부하는 표상적 지각 reprerentative perception 의 관념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저한 이해>를 의미하는 <파악>이라는 유사한 용어가 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라이프니쯔의 본을 따라 파악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내게 되는데, 이 용어는 의식이나 표상적 지각과 같은 것을 전혀 시사함이 없이, 임의의 계기가 다른 현실적 존재들이나 영원적 객체들을 그 자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이끌어들이는 일반적이고도 보다 기본적인 방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합생 concrescence

합생이란 임의의 어떤 현실적 존재인 하나의 과정에 붙여진 명칭이다. 그것은 <개별적 존재자의 실재적인 내적 구조>이다. 합생은 다자가 일자의 통일속에 결합해 들어가는 것이다. 합생의 초기 위상은 문제되는 현실적 존재의 현실적 세계를 구성하는 다수의 이접적 존재들에 대한 별개의 여러 느낌들로 이루어진다. 그 이하의 위상에서 이러한 별개의 여러 느낌들은 그 현실적 존재의 만족이라 불리는 느낌의 통일 속에 하나로 결합해 들어가게, 곧 합생하게 된다. <'합생'이란 다수의 사물들로 구성된 우주가, 그 다자의 각 항을 새로운 일자의 구조속에 결정적으로 종속시킴으로써 개체적 통일성을 획득하게 되는 그런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만족에 도달하면서 현실적 존재는 완결되어 소멸한다ㅡ즉 그것은 합생의 새로운 사례들을 위한 여건이 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현시적 직접성 presentational immedicy

현시적 직접성은 지각의 두 가지 순수 양태 가운데 보다 복잡 미묘한 것이다(인과적 효과성은 다른 하나의 순수 양태인데, 이 양자가 결합하여 우리의 일상적인 앎의 양태인 상징적 연관이라는 지각의 복합 양태를 형성한다).

현시적 직접성은 <세계의 '연장적'관계에 대한 명석 판명한 의식을 포함하고 있는>지각의 양태이다. <이 양태에서 동시적 세계는 연장적 관계의 연속체로서 의식적으로 파악된다>. 과거를 계승하는 양태인 인과적 효과성은, 모호하고 불분명하면서도 정서적인 힘에서는 견실한 여건들을 현재 속으로 전달하는 반면 현시적 직접성은, 선명하고 정확하며 공간적으로 정초되어 있으나 고립되어 분리되어 있고 시간적으로 독립해 있는 여건들을 전달해 준다. 그리고 이런 여건들은 연속의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파악하는 주체와 동시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연장적 관계들에 대한 앎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시적 직접성은 인과적 효과성 가운데 이미 들어 있는 것이 지닌 어떤 측면들을 가공한 것이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까닭은, 비록 인과적 효과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지각이 합생의 최초 위상에서 발생하는 것이긴 하지만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지각은 보다 후기 위상에서 발생하는 것으로서, 인과적 효과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데에 있다. 특히 인과적 효과성은 모호하고 불명확하며 거의 관련 없는 방식으로 감각여건들을 포함하고 있다. 현시적 직접성은 이들 모호한 정서적 느낌들을 포착하여, 그 지각적 계기와 동시적인 영역에 투사되는 선명한 성질들로 변형시킨다. 그 결과 <저기에 있는 회색>과 같은 순간적인 앎이 성립하게 되는데, 이것은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지각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이것은 색채의 순간적인 움직임이 눈의 가장자리에서 포착될 때 우리가 갖게 되는 인식이다. 지속하는 회색의 돌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인식이 있게 되는 것은 복합적 양태에 있어서의 지각이 성립하고 나서의 일이다.



현실적 계기 actual occasion

온갖 실질적인 논의에 있어 <현실적 계기>와 <현실적 존재>는 교체 가능한 개념이다. 화이트헤드는 단 한 가지 차이점만을 지적하고 있다. 즉 <계기>라는 말은 시-공적 위치 spatio-temporal location 를 함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은 하나의 비시간적인 현실적 존재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신은 언제나 '현실적 계기'라는 용어거 적용되는 영역 밖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비록 <'현실적 계기'라는 용어가 '현실적 존재'와 동의어로 사용된다>고는 하더라도 <현실적 계기>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을 경우, 우리는 <연장성이라는 특성-시간적 연장, 즉 '지속'이라는 형태의 연장성이건, 공간적 연장이라는 형태의 연장성이건, 아니면 시공적 연장이라는 보다 완전한 의미에서의 연장성이건간에-이 문제의 논의와 다소간 직접적으로 관련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현실적 세계 actual world

임의의 한 현실적 존재의 현실적 세계는 그 현실적 존재에 합생의 초기 수용적 위상에 주어진 여건으로서 객체화된 현실적 존재들의 집합이다. <현실적 세계>라는 표현은 <현재>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 표현은 관점이 변할 때마다 그 의미가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두 현실적 존재도 동일한 현실적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다.



현실적 존재 actual entity

<'현실적 존재'-'현실적 계기'라고도 불린다-는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궁극적인 실재적 사물이다>. 이들은 데모크리투스의 원자들처럼 미시적 microcosmic 존재로서, 사회 또는 결합체라 불리는 이들의 집합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거시적 macrocosmic 존재, 예컨대 나무나 집, 사람 같은 것들을 형성한다. 그러나 데모크리투스의 원자들은 활성이 없고 소멸 불가능한 물질적 질료인데 반해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들은 활성과 무상성(無常性)을 지닌 <복잡하고도 상호의존적인 경험의 방울들 drops of experience>이다.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궁극적인 실재적 사물들은 경험의 방울들이라는 주장이, 의식이 무생물계에 충만해 있다는 주장을 함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의식이란 지극히 복잡 미묘한 현실적 존재들의 특성에지나지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적 존재들은, 이들이 우리가 인간의 뇌라고 부르는 사회와 같은 고도로 복잡한 사회의 구성원이 될 때 비로소 의식을 산출하게 되는 복잡미묘성의 가능태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통찰은, 우리가 진화론을 진지하게 수용하고서 감각력을 갖춘 합목적적인 생명체가 원초적인 늪지로부터 점차적으로 발생하게 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으려면 그 늪지는 그 늪지로부터의 동물과 인간의 발생을 불가사의한 사태로 만들어버리지 않는 그런 성격의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은 성격의 중성적 일원론 neutral monism 을 내세우고 있다. 즉 현실적 존재들은 물질적 질료도 아니요 라이프니쯔의 영혼도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다른 현실적 존재들과 결합하여 물질의 시간적 줄기를 형성할 수도 있고, 뇌와 같은 복잡한 사회와 얽혀 있는 다른 복잡미묘한 현실적 존재들과 결합하여, 우리가 보통 지속성을 지닌 인격체의 의식적인 영혼이라 부르고 있는 계승의 경로 route of inheritance 를 형성할 수도 있는 과정의 단위들 units of process 이다.

현실적 존재들은 과정의 단위들이다. 그리고 <과정과 실재> 라는 제목은 화이트헤드에게 있어 과정의 이 미시적 단위들이 궁극적 실재라는 점을 보이기 위해 채택되고 있다.- <보다 실재적인 어떤 것을 발견하기 위해 현실적 존재의 배후로 나아갈 수 없다>. 다른 한편 현실적 존재들의 집합체를 궁극적인 실재로 오해하는 것은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을 판이한 두 종류의 실재로 상정함으로써 이런 오류를 범했다.

현실적 존재는 <합생의 개별 사례에 귀속될 수 있는 통일성이다>. 합생이란 사라져 가는 과거의 잔여물들이 현재의 새로운 통일체의 생동하는 직접성 속으로 결합해 들어오는 것을 말한다. 현실적 존재의 존속은 한 순간ㅡ그 생성의 순간, 즉 사라져 가는 과거의 요소들로부터 자기를 창조하는 그 적극적인 과정의 순간ㅡ에 불과하며, 이어서 그것 또한 소멸한다. 그것은 이제 객체적으로 불멸하는 것으로서, 후속하는 현실적 존재들의 발생을 위한 죽은 여건이 되기에 이른다. 현실적 존재의 합생은 과거의 소여 givenness 가 그것에게로 밀려오는 수동적이고 수용적인 시점에서 시작된다. 다음으로 그것은 주어진 여건들을 조정하고 통합하고 때때로 수정하는 일련의 창조적인 보충의 여러 위상을 거쳐 자신의 생성을 완결짓는다. 단순한 현실적 존재들인 경우에는 소여의 단순한 반복이 있게 된다. 그것들은, <받아들여 그대로 간직했다가 아무런 가감없이 복원시키는 매개체>인 셈이다. 복잡미묘한 현실적 존재들은 복잡한 계승을, 그들의 사회적 환경의 결과로서 향유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계승의 복잡성은 통합과 통일을 실현시키는 수단으로서의 여러 보충의 위상에서 독창성을 낳게 된다.



현재화된 장소 presented locus

임의의 한 현실적 존재의 현재화된 장소란 <감각여건에 의해 한정된 자신의 영역을 지니고 있는,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에서 지각된>, 그 현실적 존재와 <동시적인 결합체>를 말한다. 이따금 화이트헤드는 현재화된 장소를 현실적 존재의 <직접적 현재> immediate present, 또는 현실적 존재의 <현재화된 지속> presented duration 이라는 말로 지칭하기도 한다.



형상적인 것 formaliter

형상적인 것으로서 고찰되는 현실적 존재는 주체적인 것으로서, 즉 그 자신의 생성의 직접성을 향유하고 있는 것으로 고찰되는 현실적 존재이다. <나는 칸트 이전의 용어법을 채택해서, 현실적 존재가 향유하는 경험은 형상적 존재라고 말하겠다. 이것을 통해 내가 뜻하는 바는 '형상적으로' 고찰되고 있는 존재는 그 구조의 여러 형상과 관련하여 기술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 존재는 그 형상에 힘입어 그 나름의 절대적인 자기 실현을 달성한 개체적 존재가 되고 있다... 문제의 현실태가 갖는 '형상적' 실재성은 그 합생과정에 속하며 그것의 '만족'에 속하지 않는다>



형이상학 metaphysics

형이상학 또는 사변철학은 <우리의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해낼 수 있는, 일반적인 관념들의 정합적이고 논리적이며 필연적인 체계를 축조하려는 시도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해석> interpretation 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향유하고 지각하고 의지하고 생각할 때 의식되는 모든 것이 일반적 도식의 특수한 사례라는 특성을 갖게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적 구성의 참된 방법은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관념들의 도식을 축조하고, 그 도식에 의거하여 과감하게 경험을 해석해 나아가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완벽하게 일반적인 현실적 존재들의 특성을 논할 때 <형이상학적>이란 형용사를 사용한다. <현실적 존재의 형이상학적 특성ㅡ'형이상학'이라는 말 본래의 일반적 의미에서ㅡ은 모든 현실적 존재에 적용되는 것들이어야 한다>. 화이트헤드의 태도에는 독단주의의 기색이 전혀 없다. <그러한 형이상학적 개념들이 지금까지 그 엄격한 순수성에 있어서 한번이라도 정식화되어 본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논리나 수학의 가장 일반적인 원리들을 고찰하고 있는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우리는 충분히 넓은 사회, 그러면서도 그 한정 특성이 지금까지 있어 왔거나 앞으로 있게 될지도 모르는 모든 현실적 존재들에다 그대로 귀속될 수는 없는 그런 사회에 국한시켜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적 논의에서는 어떤 진술을 궁극적인 것으로 보려는 독단적 확실성을 암시하는 것만으로도 어리석음의 징표가 된다>.









참조

Donald W. Shernurne, A Key to Whitehead‘s Process and Reality (Cicago: Macmillan Pub. Co,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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