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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9 (21:01) from 84.173.81.150' of 84.173.81.150' Article Number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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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섭리론

신학의 개념은 '신앙의 체험'을 기반으로 하여 구성된 사고의 합리적, 문화적, 사회적 총체성에 의거한 산물이다. 그 개념 하나 하나는 각각의 역사적 함의와 경륜을 담고 있다. 그러나 신학적 작업에 있어서 개념의 역사적 배경과 중충적 요소, 그리고 그 개념에 대한 은유적 통찰을 결여한 채 그저 개념을 수용하거나 혹은 비판을 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신학적 개념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문자주의의 오류'이다.

'신학적 섭리론'은 은총론과 결부되어 등장한 난해한 개념이다. '섭리'는 신의 뜻에 의해 나의 삶이 여기에 이렇게 존재해 왔음을 고백하는, 하나의 신앙고백이다. 이러한 섭리론은 근대시대에 직면하면서부터 신학 내외로부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왔다. 특히 합리성과 과학정신으로 무장된 근대는 이러한 섭리론을, 신화적이며 반 지성적인 요소로 치부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바로 신학의 딜레마가 있다. 이럴 경우 섭리론에 대한 포기 혹은 재해석이 결사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신앙적 정동에 의한 고백과, 과학적 진술로서의 합리적 태도 사이의 길항은 '섭리론' 뿐만이 아니라 신앙과 신비를 고백하는 신앙전통의 세계를 근본적으로 과학적 진술의 칼날로서 접근해 들어갈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즉 신앙은 전적으로 Die innere, geistige Welt 내적이며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인간의 통찰과 고백에 존립하고 있다. 이것은 신앙의 실존주의나 개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은 모든 표상과 지성적 활동과 외형적인 세계ausserliche Welt를 넘어서는 소위 이 삶에 대한 직접지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기반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다. 그리고 신앙은 '비매개'적이다. 모든 과학과 이성이 '매개적' 작업에 의거하는 의미에서 신앙은 전적으로 '비매개'적이다.

이러한 신앙과 합리적 진술 사이의 길항은, 내부적으로는 그만큼 신앙을 다루는 신학적 언어의 핵심적인 작업이 얼마나 표피적이고 둔중한 것들인지를 제시한다. 또한 외부적으로는 다른 과학정신과 관련해서 얼마나 소통가능한 합리적 언어로 신앙의 경험을 제시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과제임을 암시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하나의 대안으로 주목해야 할 사고방식이 있다. 이는 신앙과 신학과 과학정신의 기본적인 소통을 위한 하나의 기본적 관점이 된다.

신앙의 언어가 삶에 대한 직접지적인 언어이며 과학의 언어가 삶에 대한 매개적 언어라 한다면, 이러한 직접지적인 진술 또한 '비매개적'이기 때문에 퇴각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각의 시대적 정당성을 충실히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후의 시대속에서도 정당성을 지닐 수 있는 지혜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이는 당대의 신앙의 언어가 이후에 폐기되어야 할 만큼 결핍된 것들이라고 하기 보다는 당대의 정당성을 충실히 지니고 있으면서 역사적으로 충분히 소통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신앙의 언어가 담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 신학적 작업의 정당성이 존재한다. 신앙의 언어는, 직접적인 현미경과 망원경이라는 매개를 동원하지 않고 세계를 간파했기 때문에 비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의 현미경과 망원경으로 세계를 간파한 또 하나의 과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신앙의 언어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문화적 매트릭스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다시 신학적 섭리론의 문제로 돌아가자. 신학적 섭리론의 근거가 되는 '섭리의 신앙'은 아주 구체적인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될 것이다 : "나는 내 의지와 주장으로 내 삶을 살아왔지만, 이렇게 지나놓고 보니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이러한 섭리론에 관한 '담론'은 몇 가지 맥락이 존재할 것이다. 첫째, 정말로 나의 모든 삶의 일거수 일투족이 하느님(혹은 밖)의 뜻에 의해 구획되어지고 기획되어진 것이라고 고백하는 점이다. 여기에는 진정 일생의 각각 사건들이 하느님의 Design에 의해 구현되어졌다고 보는 관점(1)에서부터, 나의 삶이라는 모난 돌이 다른 현실의 파도와 존재들과의 마찰들 속에서 잘 다듬어진 과정이었다고 보는 관점(2)이 있다. 전자의 관점은 작용인에 대한 목적인의 궁극적 강조에 기반하고 있으며, 후자의 관점은 작용인과 목적인 사이의 조화에 기반하고 있다. 결국은 섭리론은 '목적인'을 배제하지 않고 생각하는 인간의 종교적 성정에 기반하는 것이다.

섭리론에 대립하는 관점은 전적인 인과론이다. 레디칼한 인과론적 사고에는 섭리론이 개입될 요소가 없다. 물론 레디칼한 인과론적 사고가 아니라 하더라도 느슨한 인과론적 과정에 개입되는 '창발적' 요소를 '신의 섭리'로 환원시켜서 이해하려는 '섭리론'에 대한 거부를 '느슨한 인과론주의자'는 갖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관점에서 가하는 '섭리론'에 대한 비판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즉 '섭리론'의 요소에서 '창발적 요소'와 '신의 Design'을 구분해 낼 수 있는 언어적 역량과 사변이 여전히 우리에게 충분하게 주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섭리론에 관한 또 다른 맥락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둘째, 나는 우연히 삶의 자리에 특정한 행위를 했는데, 결국은 필연적으로 그러한 삶의 행위가 어떠한 큰 삶의 섭리로서 기여되었다고 고백하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관점을 '인과론적 계열'로 환원시켜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원인이 있으니 그러한 결과가 있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이러한 두번째 진술의 '우연과 필연'의 함수 또한 '인과율'로 환원시켜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삶에서의 우연에서의 필연으로의 이행에 관한 여러 통찰들(자끄모노, 하이젠베르크, 화이트헤드)은 신학적 섭리론이 담아내려는 정신과 어느정도 소통이 된다. 우리 개체들의 자유도는 전체의 틀이 주조하고 부여한 운명적 속성을 배반할 수 없다. 그래서 틸리히도 자유와 운명을 존재의 기본적인 양식으로 이해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심각하게 우리 개인 '자유'의 존재론적 근거를 문제삼는 단계까지 진입하게 된다. 나는 한국어를 자유롭게 쓴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에서 1970년대에 탄생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행위이다. 그리고 한국어이든 외국어이든 '언어'를 그나마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기원후(AD) 시대에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행위이다. 그리고 수십, 수백만년 전에 행성과 지구와의 충돌을 모면하고 이렇게 지구가 살아남았기 때문에 가능한 행위이다. 즉 여기에서 우리 개체의 자유도는 전체의 어떠한 특성과 결부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두번째 관점과 관련하여 연결되는 부분은 미시적인 우연의 행위가 거시적인 차원 속에서는 필연성으로 이행되어진다는 특성이다. 어린 아이가 순간 순간 행하는 제스추어는 우연적인 듯 하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어린 아이의 그 각각의 행위를 수렴하고 모아서 이해하는 순간, 각각의 행위에는 어떠한 필연적 동기들이 연루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라는 아이디어는 바로 이러한 부분의 우연적 행위를 주도하는 전체적인 통일성이 그 행위에 관통하고 있으며 이러한 통일성은 부분과 그 합에 대한 분석에서는 도출되지 않는다는 점을 아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어려움은 남는다. 우리의 각각의 부분적이고 우연적인 행위와 그 모든 합에 의해서도 도출되지 않는 전체적이고 필연적이며 궁극적인 '뜻'을 신학에서는 신학적 섭리론으로 채택할 수가 있더라도 답은 분명하지 않다. 즉 이 '뜻'이 선험적인 신의 뜻이라고 우리가 이해하는 순간, 이것은 전통적인 방식의 레디칼한 섭리론으로의 회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부분적이고 우연적인 행위와, 전체적이고 필연적인 뜻에 대한 적절한 조화를 찾아낼 수 있을까?

만약 이 '뜻'에는 어떠한 필연성과 어떠한 전제를 갖을 필요가 없다고 고백한다면, 이는 고백신앙에서 전제하는 '인격적 신'과 '신의 궁극적 섭리'*를 강력하게 부정하는 관점이 된다. 오히려 이러한 관점에서는 신은 인간 앞에서 인간을 추동하는 vision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모든 행위의 총체성을 넘어서는 +a의 창발적이며 전체적인 지점을 '신'으로 고백한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사고에서는 이러한 둘의 차이를 명쾌하게 구분할 수 있는 어떠한 논거도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

어찌 보면 신의 신비는 우리 이성이 해갈할 수 없는 이 세계의 물음의 영역과 심오하게 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해명할 수 없는 그 미지의 영역을 신이라고 고백하여도, 그것은 논법으로는 틀리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고백'하는 신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가 위에서부터 검토해 왔다 시피, '신학적 섭리론', 그리고 그 신학적 작업의 근거가 되는 "내 모든 인생은 그저 그런 헛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큰 섭리에 의해 운행되어져 왔습니다"라는 고백이 결코 허황되고 공허한 주장이 아니며, 매개적 사고, 과학적 사고가 우리에게 제시한 우연과 필연, 그리고 부분과 전체에 대한 핵심적 아이디어와 긴밀하게 내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서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의 인생은 헛된 것이 아니라 모두 주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라는 고백의 핵심은 우연과 필연, 부분과 전체에 대한 과학정신과의 소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섭리론은 개인의 의지와 노력과 능동적 행위(작용인)을 배제하는 담론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모든 삶이 궁극적으로는 창조주에 의해 허락되어졌고, 창조주의 큰 사랑과 은혜의 손길 안에 이루어졌으며, 현실적으로 우리의 삶이 세상의 관점에서 연약하고 가난하고 궁핍하며 쓸쓸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이 현실의 그 모두를 생생하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품으시며 기획하신다는, '은총'에 대한 또 다른 신앙고백의 표현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 신의 피조물을 향한 섭리는 형태의 섭리인가 아니면 내용의 섭리인가, 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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