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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1 (00:11) from 84.173.98.55' of 84.173.98.55' Article Number :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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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존재론




눈은 대단히 묘한 존재론적 지위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피할 수 없이 대면하는 것은 상대방의 눈이다. 왜 가슴도 아니고 다리도 아니고 눈일까. 그리고 우리는 왜 눈을 통한 인상을 대단히 중요한 정보와 인식의 자료로 채택할까? 사실 눈은 우리에게 보여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가끔 내 눈동자를 거울에 비추어서 보곤 한다. 우리가 눈동자를 아주 자세히 주목해 보면 주변의 흰자를 둘러싼, 가운데의 검은 동공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 거울을 통하여 보여지는 동공은, 나에게 보여지는 '동공'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내가 그를 통하여 세상을 보는 창이다. 동공이 창이라고 하는 것은 은유를 넘어선 대단히 구체적이고도 자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 동공이 진정 나의 '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 거울에 비추어진 동공이 진정 나의 눈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벼운 예부터 들어보자. 내 눈이 현재 침침하고 고통스럽다고 하자. 그로 인해 내가 보는 현재의 세계가 흐릿하게 보인다고 하자. 그러한 내가 거울을 통해서 내 동공을 본다면, 그를 통하여 내 눈의 침침함과 고통, 혹은 내 세계의 흐릿함을 그 이미지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눈의 작용'을 보지 못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거울을 통해서 보는 '눈'은 소위 '표상화된 눈'일 뿐이다. 진정한 눈은 거울의 이미지에 존재하지 않고 이미 미끌어져 어디론가 침잠했을 뿐이다.

레비나스는 바로 이 '눈'의 존재론에 대하여 대단히 심각하게 고민한 사상가이다. 즉 우리가 타인을 바라볼 때 그 타인은 이미 '기하학적 변형'*에 의해 표상화 되어버린 존재이다. 마치 우리 거울의 눈이 진정한 나의 눈, 혹은 진정한 눈의 활동을 담아내지 못하듯, 내가 보는 타인의 영상에는 진정한 타인이 머물러 있지 않았음을 그는 간파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 이해는 궁극적으로 타인에 대한 순명적 태도와 존경, 그리고 끊임없는 그 타자성의 의미 속에서만 열림을 레비나스는 강조하고 있다.

레비나스는 눈의 존재론적 지위를 인격과 윤리의 코드 속에서 접근했다면,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인식론을 '눈'이라는 묘한 지위와의 검토 속에서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해 낸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with our eyes 세계를 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눈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본 거울의 눈은 진짜가 아니다.

타인의 동공을 본다는 것은 육체로 표상화된 타인의 모든 존재성을 마지막으로 부정하는 그 지점을 '본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표상화 될 수 있어도 어찌 보면 그 동공은 표상화 될 수 없는 지점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 동공은 심연과 같으며, 헤아릴 수 없이 절대적이며 신묘한 가치가 물리적 세계에 섬세하게 연결된, 일종의 '영혼의 송과선'과 같기도 하다. 그러므로 눈빛을 맞추고 눈을 바라본다는 것은 타인을 시각화한다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시각화의 과정에 끝끝내 저항하는, 혹은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타인의 궁극적 가치를 제한적으로나마 컨택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눈의 존재론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눈은 하나의 감각 기능보다는 뇌의 진화이다. 머리의 뇌가 진화해서 얼굴의 표면을 뚫고 나왔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눈은 어떠한 기관보다 영혼에 가까이 다가간 존재이다. 눈을 통해서 영혼의 상태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은 무슨 신비주의나 밀교적인 주장이 아니라 아주 정확한 주장일 것이다. 물론 위에서도 언급되었다 시피 눈은 궁극적으로는 '시각화'될 수 없으며 영혼은 더더군다나 모든 표상화의 틈새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눈을 통해 영혼의 상태를 감지한다는 것은 제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은 영혼의 많은 것을 말해주는 창이다.

눈 밖의 광자가 눈의 시지각을 자극하고 신경을 통하여 뇌의 전달되었을 때 색을 느낀다고 하는 관점은 '물리주의적' 관점이다. 물론 이는 정당한 물리학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방식에는, 이미 '표상화된 물리적 세계'를 전제로 그 안에서 '눈'과 '색'과 '뇌'를 정위했기 때문에 물리학적인 설명력 이상의 영역, 예를 들어서 현상학이나 형이상학적 논의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어떻게 시각화가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할 때에, 이미 시각화되어 버린 물리적 시공의 지위를 전제로 '시각화'의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그 설명의 궁극적 정당성을 이미 훼손했다는 반증이다. "꽃향기를 어떻게 느끼는가" 라는 질문에, "꽃 향기가 저기 있으니까 느끼겠지" 라는 대답은 이 과정의 본질을 지시하는 적절한 대답이 아니다.

색에 대한 접근에는 색의 객관성을 강조하는 뉴턴 계열과 색의 주관성을 강조하는 괴테 계열의 전통 속에서 이루어져 왔다. 여기에서 논의되는 '색의 주관성'은 색 자체가 주관적 의지에 의해 "빨강"이 "파랑"으로 변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이 색의 현상은 내가 세계를 파악할 때에 저 객관적인 대상에 속한 색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며, 색은 저 대상과 주체 사이의 경험관계에서 출현하는 일종의 파생물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철학적 사변에 대한 여러 논의들이 현대의 시각경험에 대한 뇌과학적 논의 속에서 정당성을 얻고 있는 것으로 안다.

눈은 어둠이며 깊이이다. 색은 관계이며 사건이다. 사실 눈과 색에 대한 논의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모든 개체들이 저 세계의 부속품이라고 여기는 대단히 오래 된 전체주의와 객관주의의 망령을 해체하는 중요한 발단이 된다. 오히려 우리의 표상화된 세계는 '나'와 '세계'의 상호주관적 필드이며, 안에서 나가는 것과 밖에서 들어오는 것 사이의 마찰과 교감으로 구현된 '경험세계'로 정위가 된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객관이라고 칭하는 '시간'과 '공간'과 '물질'의 문제를 기초에서부터 흔들고, 또한 우리가 자명한 것이라고 칭하는 '시각적 세계'에 대한 신뢰를 반표상주의적 관점 속에서 회의하게 한다. 더 나아가서 신체-마음, 자아-타자, 나-세계의 존재지위를 근본적으로 질문하게 하는 핵심적 화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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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 감각, 기하학적 변형 (2006.02.17)









M.C. Escher | Eye






    관련링크

주체, 감각, 기하학적 변형 (2006.02.17)

색리학 (2005.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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