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iothek zum Wissen





2006/08/28 (07:54) from 84.173.105.244' of 84.173.105.244' Article Number : 256
Delete Modify Geist Access : 10006 , Lines : 46
죽음과 불멸




천 년 전의 별은 천 년이 지나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는 이미 죽었을런지 몰라도 나에게 그는 이렇게 살아 있다. 사실 그 (죽은) 별은 만 광년 떨어진 다른 존재에게 자신이 이렇게 살아있음을 보여 주기 위하여 지금도 우주를 쏜살같이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달리기의 모체는 별이 아니라 별의 빛을 지금도 퍼트리는 우주의 추이적 본성에 있다. 이것이 화이트헤드가 고안하였던 객체적 불멸성objective immotality이라는 개념의 우주론적 발상이자 그 배경이다. 죽음과 불멸은 관측과 연루된 상관개념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서 있는 이 우주는 지금 '이' 사건을 '객체적인 관계' 속에서 '불멸적 사건'으로 세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순간의 실현은 불멸적 사건으로 변화된 사건이다. 이러한 불멸성이라는 관념의 핵심에는, 나와 타자는 결국 '매개적 관계'임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불멸이라는 개념은 '매개'를 통하여 의미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멸은 그냥 불멸이 아니라 관계적이며 그리고 객체적 불멸이 된다.

나와 타자는 궁극적으로 독립적 개체의 완결체가 아니라 오히려 상호 관계를 통하여 출현한 '타자' 와 '나'라는 사건으로 이해된다. 나와 타자는 이러한 상호관계가 만들어내는 '관계성'과 '표상성'의 사건 안에 거할 뿐이다.

저 '타인'이라는 표상은 (타인 자신에게는 가짜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진짜이다. 저 표상이 나에게 진짜라는 의미는, 저 표상은 내가 타인을 접할 수 있는 실질적이고 유일한 체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표상은 타인의, 나와의 관계에서 구현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저 타인 밖에 없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순간은 죽지 않는다. 오히려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그 완성은 그 사건을 둘러싼 환경과의 관계성 속에서 영원히 정초된 것이다. 이렇게 '실현된' 사건 자체가 죽음과 무화를 넘어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사건은 백년 후의 타인에게 '현재'로 존재할 것이며, 천년 후에도 '현재'로 존재할 것이다. 우주는 우리의 모든 사건을 현재 속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멸성과 관계론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적 설명은 우리의 인격적 경험과 인격의 사멸에 대해서 충분한 직관적 납득과 동의를 제시하지 못한다. 이는 형이상학과 인간학 사이의 깊은 해리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관계적 객체적 불멸성이라는 통찰은, 주체적 불멸과 객체적 불멸 이 모두에 대한 침묵과 거친 도그마보다는 더욱 솔직한 태도일 수는 있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며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해 두려워한다. 우리 대부분의 일상적이고 인격적 경험은 나와 타인의 죽음 너머의 주체적 불멸성, 혹은 죽음 너머의 연속성을 갈망한다. 이는 인간의 진한 소망이자 염원이다. 즉 객체적 불멸성이라는 사변적 통찰을 넘어서는 주체적 불멸성에 대한 작렬하는 갈망이 우리에게 존재한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계와 불멸은 우리에게는 영원한 수수께끼가 될 뿐이다.

우리의 순간 순간의 사건들이 다른 것들과의 어울림 속에서 '유일하고 영원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객체적으로 영원히 남는다는 사실에 우리는 만족할 수 있을까? 우리의 순간들이 오히려 소멸하지 않고 세상 안에서 실현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정녕 만족할 수 있을까?

'객체적 불멸'이라는 답은 '사변'의 끝과 완성이다. 사변은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사변에 있어서는 그것 이상의 답이 없을런지도 모른다. '믿음'의 시작은 바로 이 사변을 통한 온전한 '실현' 혹은 '절망'에서 열리는 또 다른 길이다. 믿음이 사변보다 더 깊고 위대한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사변으로 열리지 않는 생명 강가 건너의 비밀을 믿음의 열쇠로 열고 고백하며, 그 믿음대로 살아낸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믿음은 어리석은 짓인가? 사변은 믿음을 어리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짜피 사변의 벽을 넘어선 세계에 대한 고백에서 믿음은 열린다. 그 지점에서 사변은 침묵하지만, 믿음은 움직인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사변은 믿음을 평가할 수 없다. 단지 믿음의 고백을 제한적으로 조명하거나 비판할 수 있을 뿐이다.

죽음과 불멸에 대한 사변의 궁극적 대답은 객체적 불멸이라는 관념으로 눈물겹게 완성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그 매개지를 넘어선 죽음과 불멸에 대한 직접지의 세계를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두드리며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관련링크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2006.07.27)
















Backward Forward Post Reply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