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iothek zum Wissen





2007/06/16 (02:03) from 84.173.185.205' of 84.173.185.205' Article Number : 287
Delete Modify Geist Access : 12089 , Lines : 116
신앙과 이성 - 융엘의 가다머 기념 강연을 듣고






1.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 기념 강연이 매 해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열린다. 그의 서거 1주년 기념강연은 데리다였다. 가다머를 추모하는 강연을 그는 하였지만, 세월 속에서 데리다도 서거하였다. 올해에는 에버하르트 융엘이 가다머 기념강연을 하였다. 그는 행복에 관한 강연, 이성과 신앙에 관한 강연, 그리고 오늘 마지막으로 열린 신앙과 이성에 관한 공개토론을 하였다. 오늘 공개토론에는 겨울학기 철학자의 신 보어레중을 인상깊게 진행하였던 하이델베르크 철학교수 Jens Halfwassen, 튀빙엔의 철학교수 Anton Friedrich Koch, 그리고 하이델베르크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다 베를린으로 간 Christoph Markschies 교수가 참여하였다.

이 가다머 기념강연은 가다머가 봉직했던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과의 주도적인 노력 속에서 고대철학 담당 한스 할프바센 교수를 중심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올해 서거한 가다머의 후임인 부브너 교수의 빈 자리는 매우 크기도 하였다. 융엘은 몇 년 전에 부브너 교수와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텍스트를 가지고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과에서 세미나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이런 면에서 융엘은 가다머, 부브너,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과와 인연이 적지 않다. 여기에서 융엘의 가다머 기념강연을 듣고 짤막하게나마 기록에 남기고자 한다.

2.

Fides Quaerens Intellectum, 이성을 추구하는 신앙, 이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설명하는 신학의 한 고전적인 명제이다. 더군다나 오늘날과 같이 세속화된 사회 안에서 신앙을 말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국면이 있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에서 이성과 신앙의 문제, 그리고 철학과 신학의 문제를 가지고 강연을 하고 고민을 하며 서로 토론을 하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가다머의 사상적 기원은 하이데거에게 있다. 융엘의 사상 또한 하이데거에 많이 빚지고 있다. 물론 융엘은 신학자의 자리에서 신학을 고민하였던 자였기에, 그에게는 그가 직접 배운 바르트, 그리고 신학적 전통이 풍부하게 그의 사상에 모여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철학과 신학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사유방식이며, 이 둘의 관계를 도외시하는 것은 그 둘이 지니는 창조적 지평융합의 가능성을 유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세속화된, 과학화된 사회 안에서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을 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이러한 긴밀한 대화는 더욱 더 요구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몇 년 전 폰라드 탄생 백주년 기념강좌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아주 크게 열린 적이 있었다. 독일과 세계 각지에서 폰라드를 연구하는, 그리고 그와 관련된 구약을 연구하는 학자와 제자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이 참여하였다. 당시에는 가다머가 생존해 있었으며, 기념강좌의 핵심적인 주요 강의를 가다머와 융엘은 하였다. 강좌 시작 전에 신대학 본관 앞에서 우연히 융엘 교수를 만났다. 그래서 그와의 만남에서 나는 당시 화이트헤드의 창조성 개념에 관련된 주제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융엘 교수는 카오스chaos와 관련된 담론 속에서 이 개념을 접근하고 이야기를 해주셨다. 물론 그가 말한 카오스는 자연과학적 담론에서의 카오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이번 주에 그의 강연들을 듣고 나는 그가 왜 당시 카오스라는 개념지평에서 나의 문제제기를 포착하였는지 더욱 더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할 것이다.

4.

신앙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신앙을 말할 때 매우 큰 어려움을 사실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맞닥뜨려지기 때문이다. 믿음은 말되어질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믿음은 궁극적으로 합리화 되어질 수 있는가?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우리가 무엇을 신앙한다,와 무엇을 이해한다,와 무엇을 말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분명히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과 다르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은 또한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그저 단순하게 그 '이해되지 않는 구석'을 "믿는다"는 개념으로 채우는 것과도 다르다. 많은 경우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고 할 때, 전혀 이해되지 않거나, 이해하기 싫은 부분을, 그냥 "믿는다"고 말하는 용법도 사실 현실 가운데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궁극적인 의미의 신앙과 관련되지 않는 것들이다.

5.

신앙은 매우 궁극적인 것이다. 마치 이성이 궁극적인 것과 같이 말이다. 이런 궁극적인 의미에서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조명하는 것은 철학과 신학의 가장 핵심적인 고리와 그 경계를 건드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에서 이 문제를 볼 때에 이성은 존재자가 존재를 해명하기 위하여 궁극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능동적 행위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하향의 세계에서 상향의 세계, 유한의 세계에서 진리의 세계를 탐구하기 위한 어떠한 과정에서 이성은 기능한다. 만약 우리에게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내면의 어두움으로부터 나아가서 저 밖에 있는 밝은 존재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는 길목을 차단당하였음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성의 빛을 가지고 진리를 탐험할 때 신앙은 그 이성의 세계로 편입될 수 있는가? 아니면 이성은 신앙을 그 이성의 세계 안으로 초대할 수 있는가? 이것이 이성과 신앙의 관계를 도모할 때 겪게 되는 가장 큰 딜레마이기도 하다.

6.

만약 이성이 신앙을 자신의 세계 안으로 초대할 수 없다면 신앙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사실 오늘날의 세속화된 사유방식에서 신앙의 많은 자리는 점점 이성의 영역으로 퇴각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신앙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기독교와 특정한 문화신앙공동체 안에서만 기호화되는 특수한 언어로 후퇴하는 듯한 인상은 분명하다. 오늘날의 현대인은 신앙이 없어도 존재하고 존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사유의 매트릭스는 종종 자명한 것들로 용인되게 이른다. 그러나 융엘은 그러한 이성으로 진리를 진술하는 관점에 포섭되지 않는 신앙의 세계를 하나의 자명한 것으로 설정하고 당당하게 오늘날 ‚신앙’을 말하고 있다.

7.

이성은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성은 에로스이다. 그것은 성공적일 수 있으며 이성은 진리에 대한 진술에 상당히 유용한 면을 지니고 있다. 이성은 밝게 비추이며 비추인 것들에 대한 체계적이고 역사적인 누적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성은 저 밖의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는지 몰라도, 저 밖의 것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이해할 수는 없다. 바로 여기에서 신앙의 문제가 등장한다. 신앙은 이러한 이성이 지닌 소위 미묘한 사각지대를 집중하며 신앙의 실재론적 정당성을 요청할 수 있다. 이성은 안에서 밖을 향해 말을 거는 행위이지만, 신앙은 어떻게 밖이 안으로 들어오는지를 조명하는 근거에 관한 진술이다.

8.

나라는 인격은 밖에서 조명될 수 있다. 타인은 나를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의 나에 대한 모든 파악은 매개적이며 파편적이다. 타인이 그리는 나에 대한 파편들의 집합은 진정한 의미의 나일 수 있는가? 더군다나 나의 인격은 타인의 이성적 인식 속에서 궁극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저 밖의 나를 향한 시선은 그곳으로부터 나와서 나를 고유하게 착색시키는 행위일 뿐이다. 나는 물론 타인의 시선에 의해 잡히고 소여되며 심지어 사용이 되지만, 내 안의 인격성은 어떠한 외부의 이성적 조명으로도 드러나지 못한다. 이럴 경우 나는 어떻게 나의 인격을 밖으로 드러낼까. 내 인격으로 보고자 하는 저 외부의 존재에게 나는 어떠한 방식의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9.

만약 외부의 그가 나의 인격을 진정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성 뿐만 아니라 나의 내 인격을 드러내고자 하는 노력이 동반된다. 그러므로 내 인격에 대한 타인의 이해는 타인의 이성적 조명 뿐만 아니라, 내가 내 인격을 타인에게 건네고자 하는 계시의 노력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 실존이 저 밖의 실존의 근거 혹은 존재 혹은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우리 안의 내부에서부터 밖을 향해 소위 투사되는 이성 만으로는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존재에 대한 궁극적 이해는 내 안에서의 이성 뿐만 아니라 저 밖의 나를 향한 계시가 중요한 기여를 하는 것이다. 바로 이성을 넘어선 신앙은, 저 존재가 나를 향해 말을 걸고, 자신의 인격을 나에게 던지고자 하는 바를 들으려는 행위와도 같다. 이성은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신앙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담기 위한 전혀 다른 존재방식이다.

10.

공간표상적으로는 이 안과 밖이라는 구분이 의미가 있지만, 신앙과 이성의 문제는 또 다른 의미에서 보면 존재의 이해에 관한 심화된 두 방식의 심층적인 채널이기도 하다. 이성은 존재에 대한 특정한 질료를 발견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앙은 이러한 질료로 발견되지 않지만 오히려 나와 간접적으로 관련된 대상에 대한 비매개적 직시와도 같다. 존재는 모두 말로서 말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말을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인 근거와도 같다. 우리는 그 말되어지지 않는 것을 담기 위해서라도 말되어진 것에 대한 진술의 한계를 응시해야 한다. 그것은 언어를 넘어서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넘어서 존재할 뿐이다.

11.

이성은 소위 존재의 질감에 대한 매개적 진술을 도모한다. 신앙은 존재의 내감에 대한 비매개적 체현과도 같은 것들이다. 진리는 말되어진 것에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가능하게 하는 그 근거이기도 하다. 이성은 말을 만들지만, 신앙은 말을 넘어 진리를 만나게 한다. 이러한 이성과 신앙의 역사적 관계는 대립적 측면도 있지만, 사실 상호 긴밀하게 엮어져 내려왔음을 우리는 헤아릴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진리를 보고 그러한 진리는 이성과 말을 넘어서서 존재함을 명료하게 보았던 초기 그리스도교는 언어와 말의 필요성 속에서 헬레니즘적 문화와 몸을 섞었다. 그것은 한 편으로는 무한한 것이 유한한 것으로 구현되는 것은 붕괴와 추락이 아니라 하나의 온전한 실현이라고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며, 신의 육화, 십자가사건의 본질 또한 이러한 패턴이 진리의 존재방식임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무한한 것은 유한한 것으로 흘러 내려온다. 말을 넘어선 기독교의 진리는 헬레니즘적인 언어와 말과 이성을 통하여 세속화 되었다. 그것은 신앙의 이성화이며, 신앙의 세속화이다. 모든 이성화와 세속화는 양가적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 그 이성화와 세속화의 프로세스 자체는 진리의 현현방식인 것이다.

12.    
 
버트란트 러셀은 철학은 신학과 자연과학 사이를 오고 가는 방법론적 학문이라는 말을 하였다. 진리의 표면에 관한 물리적 진술과 진리의 내면에 관한 신학적 진술은 모두 의미가 있으며 물리적 진술과 신학적 진술 사이의 스펙트럼은 이성과 신앙 사이의 스펙트럼과 궤를 같이 한다. 철학은 오히려 이러한 신학의 비의와도 같은 핵심적 진리에 대한 말의 발화를 위한 중요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성적 작업이며, 또한 말을 만들기 때문에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축척이 가능한 것들이다. 하지만 모든 말되어진 것들로 말되어지지 않는 것들을 규정하는 시도는 그 본성상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말되어지지 않는 것들에 대한 추구는 모든 이성적 조명을 무장해재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거기에서 이성과 신앙의 분명한 차이와 경계가 있다.

13.

신앙의 이름으로 이성과, 이성적 작업과, 이성적 노력을 매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신앙에 대한 발화와 체험의 노력은, 결국은 신앙의 세속화(Saekularisierung der Glaube, Eberhard Juengel)로서 그 또한 서설적 노력일 뿐이다. 어디에도 이성에 대한 신앙의 독단적 선점권은 허용될 수 없다. 또한 우리의 모든 신앙적 체험과 진술은 구현된 파편적인, 존재에 대한 흔적일 뿐이며, 아무리 신앙의 이름이라도 그것 자체의 절대적 정당성을 우리는 여전히 소유하지 못한다.

우리가 신앙을 체험하고 말한다고 해서 신앙 자체의 소유권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각자의 신앙에 대한 흔적과 그 자욱을 말로 남길 뿐이다. 이러한 궁극적인 지점에 있어서 신앙에 대한 진술은 모든 이성적 진술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다. 신앙에 대한 진술은 궁극적 신앙의 빛 아래에서 상대화 되어지는 것이기에 어느 누구도 그 빛을 독자적으로 소유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믿음은 결정적으로 이성적 도움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14.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융엘교수가 나에게 던진 말 카오스chaos라는 단어의 화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궁극적 존재의 차원에서 보면 카오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 그 자체는 카오스일 수 없다. 현존하는 우리 삶의 시야계에서 우리는 우리의 이성적인 조명을 신을 향해 가한다. 그것은 파편적이며 그 신에 대한 현존재들 사이의 진술은 통약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빛에서 존재를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는 모든 파편적인 이해의 한계선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진입의 문을 여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신비로 남아 있는 일자적 본질에 대한 점근선적 접근을 말하는 것이며 한층 더욱 가까이 계시된 신의 현존에 눈을 뜨는 것이다.

자연과학적인 경험양식 속에서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업은 이런 의미에서 소위 실재의 물리적 국면이 보여주는 다양한 패턴을 실재의 정신적 국면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용함을 의미한다. 즉 물리적 경험세계의 논리를 정신적 세계를 향해 투사하는 행위이다. 진화론은 구현된 물리적 세계 안에서 통용되는 진리이다.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이, 그리고 낮은 단계에서부터 높은 단계가 상향적으로 출현하는 논리는 실재의 물리적 측면에서 추출된 논리이다. 이러한 논리를 소위 존재의 근거와 본성을 탐구하는 신학에 적용할 때 여전히 이러한 실재의 물리적 측면에서 추출된 논리의 패턴은 여전히 잔존하게 된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신은 카오스에서 코스모스적으로 창생하고 출현하는 것이며 신 또한 진화한다는 가설의 색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신은 창생하고 진화한다는 관점은 소위 물리적으로 구현된 세계의 창에 드러난 신의 존재방식에 대한 진술인 것이며, 그가 원래 본성상 창생하고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진화하는 존재인지에 대한 결론은 그러므로 물리적 질서의 논리의 경계 안에서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결론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은 소위 존재 자체의 시선에서 볼 때에도 모순되지는 않는다. 존재의 활동이 물리적 세계에서는 존재의 탄생으로 기술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리적 세계의 근저가 되는 존재 자체가 탄생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궁극적으로 보증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존재의 물리적 지평에 대한 해석과 존재의 본원적 지평에 대한 해석은 이렇게 양극적일 수 있다. 영원한 존재의 빛에서 보면 현존이 유동하지만, 현존의 시선에서 존재 또한 유동chaos으로 보여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15.

융엘은 존재의 물리적 국면과 존재의 본성적 국면에 대한 방법론적 시선을 모두 갖고 있는 것이며 어떠한 물리적, 철학적 이성의 조명으로 잡히지 않는 그 지점에 대해서, 그것은 존재하지만 파악되지 않을 뿐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 그러한 것들이 존재하지도 않았으면 십자가 사건 또한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이성의 눈으로는 신의 십자가 사건이 보여주는 역설적인 현존방식 또한 파악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앙은 십자가 사건이 신의 세계에 대한 존재방식을 파악하게 하는 채널이며, 또한 신의 계시를 통하여 신앙을 통해서 파악되는 것들이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성으로 파악되지 않을 뿐이다.

16.

나는 나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는가? 이해된 저 나는 진정한 의미의 나인가? 이해는 이 둘의 나 사이의 무한한 연쇄운동과도 같다. 그것은 점근선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파편적이다. 신앙은 바로 드러난 나와 감추어진 나의 무한한 해리를 통합해내는 궁극적 이해와도 같다. 이는 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를 이해하는 것은 본성상 제한적이다. 그러나 신앙은 이해의 대상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지 않지만, 그래서 그것은 무한한 존재의 증명자료를 타인에게 제출할 수 없지만 무한과 유한을 매개하는 유일한 컨택 양식이다. 그 접촉의 가능성은 첫째, 무한한 존재가 유한한 존재의 근거라는 사실, 둘째, 무한한 존재가 유한한 존재를 향해 자기를 드러내려 한다는 사실 속에서 열린다. 그러나 그 드러냄의 내용은 충실히 이성 속에서 포착되는 것은 아니다.

17.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그것은 신앙의 관점에서 진술된 신학적 명제이다. 이성의 관점에서는 다음과 같은 변주를 기대할 수 있다. 신앙을 추구하는 이해. 자신의 이성적인 이해가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근거는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과 '이해의 내용'으로만 연결된 것인지 아니면 그 대상의 '계시와 믿음'을 통해서 연결된 것인지에 대한 물음 속에서 더욱 더 명료해질 것이다. 여전히 무한한 존재는 유한한 존재와 결부되어 있다. 우리는 무한한 존재에 대한 이성적 이해의 질료들을 역사 속에서 여전히 간취하고 개간하며 역사에 쌓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위 이성의 빛에 의거한 역사적 재료들이 무한한 존재와 진리에 대한 궁극적 보증수표가 될 수는 없다. 여전히 존재는 무한한 신비에 감추어져 있다. 이러한 신비에 감추어진 존재는 신앙의 눈을 통하여 더욱 더 밝히 드러나고 조명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유한자의 세계에 초대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진리와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향해 걸고 있는 믿음이라는 존재방식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통찰되고 현시되며, 그 믿음의 경험은 우리가 거한 유한한 세계의 대지에 흔적으로 남는다. 이성은 진리를 대면한 흔적들을 그 빛으로 조명하여, 무화를 넘어 우리가 거하는 이 대지 위에 심화시키고 구제해야 할 과제가 있다.



  




에버하르트 융엘과 철학과 교수 젠스 할프바센(Jens Halfwassen)


Heidelberger Gadamer - Professur
Eberhard Juengel (Tuebingen)

Glueck - Religion - Verneunft
Einheit oder Wiederstreit?

Heidelberg 2007.06.12-15




    관련링크

융엘교수 세미나 : Was ist Metaphysik? (2004.05.05)






Backward Forward Post Reply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