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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7 (08:41) from 84.173.141.161' of 84.173.141.161' Article Number :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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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미로와 마음의 낙원 - 꼬메니우스와 백두




    

Comenius (1592-1670)         Whitehead (1861-1947)


1. 세상의 미로와 마음의 낙원

"세상의 미로와 마음의 낙원"(Das Labyrinth der Welt und das Paradies des Herzens, Amsterdam 1631)은 꼬메니우스(Johann Amos Comenius, 1592-1670)의 저명한 저서의 이름이다. 꼬메니우스는 세상의 유동성과 하나님의 영원성의 대조 사이에 있는 인간의 지위를 매우 근본적으로 접근한 신학자이자 철학자, 그리고 교육학자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는 꼬메니우스가 대면했던 이러한 물리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의 역설적인 관계와 그 관계 안에서 존재하는 인간 영혼의 지위를 백두의 사유와 더불어 성찰하고자 한다.

2. 아인슈타인과 화이트헤드

몇년 전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 탄생 백주년 기념이었을까. 독일에서 아인슈타인의 과학적인 성과를 조명하는 방송이 많이 나왔다. 어느 방송에서 상대성이론의 혁명적 의의를 어느 교수가 설명하였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상대성'을 강조하는 이론이 아니라고 강변하였다. 물론 그것은 맞는 말이다.

아인슈타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물리학의 포문을 연 천재라고도 할 수 있지만, 고전역학의 세례를 성실하게 받은 시대의 마지막 자식임을 그 교수는 역설적으로 설명해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인슈타인을 통속적으로 설명했던 그 교수의 지적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시공간의 상대성을 말했지만 그것은 결국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강변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아인슈타인과 동시대를 공유했던 화이트헤드는 그의 독자적인 상대성이론을 제시했다. 물론 아인슈타인은 화이트헤드의 빚을 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직접 만난 적은 있었던 것으로 안다), 화이트헤드는 아인슈타인의 빚을 많이 진 것으로 보인다. 이 빚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대안적인 상대성이론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아주 많이 책에서 인용하고 생각보다 훨씬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는 사실이다.

백두의 아인슈타인에 대한 공격은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사실에 의거한다. 모든 유동하는 사실 속에서 영원한 것들을 온전하게 정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상대성의 현실속에서 절대성은 '추상'이지 아프리오리하게 부여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강변이다.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백두는 아인슈타인의 강체, 측정, 광속일정, 빛의 굴곡 개념 등등 모두를 기초부터 거부한다.그것은 어떠한 법칙의 구성에까지 해당된다. 그는 아주 레디칼한 절대적인 상대론자였다. 그리고 그 '영원한' 상대성의 원리에 자신의 주장 마저도 상대화의 가능성을 형식적으로 완벽하게 열어놓았다.

3. 물리적 실재의 미로와 같은 본성

나는 물리학자가 아니기에 백두가 대안적으로 제시했던 상대성이론이라는 물리적 가설체계, 그리고 그가 접근한 빛의 굴곡과 중력의 문제가 오늘날의 현대 이론물리학에서 어떠한 의미와 한계를 지니는지 아직 연구해보지는 못했고, 또한 역량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자연철학적-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지점을 언급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자연철학적인 반성 속에서 백두는 아인슈타인이 직시했던 물리적 세계의 본성에 관한 진술을 넘어서서 그 본성의 더 깊은 곳까지 철학적 반성 속에서 타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공간은 상대적이라고 말하는 물리적 법칙을 다시 물리학자는, 그 법칙 또한 상대적이라고 말을 할 수는 없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물리학자는 물에 빠진 자신의 머리를 끄집어 올리면서 물에서 나오려는 역설의 관계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두의 아인슈타인에 대한 호된 비판, 그리고 물리적 법칙 또한 상대적이며 추상적 통약에서나 가능하다는 강조는 그가 어찌 보면 이미 '물리학적 질서'에 관한 진술을 벗어나서 '철학적 시선'의 자리에서 아인슈타인을 비판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레디칼한 의미에서 백두에게 있어서 물리적 세계의 모든 특성은 상대적이고, 개별적이며, 유동적이다. 백두는 이러한 관점을 아인슈타인을 넘어서서 끝까지 극단적으로 물리적 실재의 바닥으로까지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기껏해야 우리가 어떠한 물리적 실재의 원리를 확인하기 위해서 꺼낸 백두의 카드라고 하는 것이, 물리적 실재의 파편적인 국면에 대한 관찰을 넘어서서 그것들의 과정과 흐름(process and flow) 가운데 드러나는 원리를 파악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순간은 전부가 아니라 파편이기에 흐름속에서 드러나는 본성을 파악하는 방법을 그는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순간은 실재가 아니고, 과정이 실재(process is reality)가 된다. 오히려 순간은 파편일 뿐이다.

아쉽게도 물리적 국면은 모든 것이 순간성의 그늘에 놓여있는 것들이다. 우리의 모든 실재의 물리적 국면은 추이와 생성과 시간의 노예들이다. 그것은 유동하는 것들이며 거기에서 영존하는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통하여 바라보는 저 세계는 단 하나도 그냥 영존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다 사라지고 희미해지며 흩어진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까? 물리적 세계의 끝인, 상대성, 순간성, 그리고 유한성이 우리의 전부일까. 여기에서부터 내가 고민하는 내용이 시작된다.

4. '영원의 관점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저 밖의 흩어지는 세계를 '흩어진다'고 보는 그 눈이 있다는 것이다. 즉 저 밖의 물리적 세계의 파편화되어지는 국면을 관찰하는 시선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 시선이 바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인 바, '영원의 관점에서'(sub specie aeternitatis)라는 전통적인 신학적 화두이다.

물론 우리는 눈이 있기 때문에 저 밖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금 거울로 비쳐서 보이는 저 눈동자가 나의 '시선'이 결코 아니다. 저 눈은 나의 시선이 표상화된 표면의 얼룩일 뿐이다. 나의 시선을 발견하기 위하여 거울을 수백개 동원하고 현미경과 최첨단의 안과 장치를 동원하더라도 거기에는 나의 '시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선의 흔적일 뿐이다. 시선과 눈동자는 같은 자리를 점유할런지 몰라도 고향이 다른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 하나는 나의 '시선' 그리고 그 시선으로 바라보는 저 밖의 시끄럽고 잡다한 풍경들이다. 그리고 저 풍경은 유동하는 물리적 세계이며 그 물리적 세계의 끝은 영원히 순간적인 질료인 것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소위 저 밖의 미로와 같은 모호하고 단편적이며 궁극적으로 개별적인 물리적 표면과, 그 표면을 응시하는 시선을 품고 있다. 그 응시하는 시선은, 어느 누구에게 응시 당해도 다시 새롭게 응시한다. 말하자면 나는 누가 나를 보는 것을 다시 본다. 우리의 시선은 '영원의 관점에'(sub specie aeternitatis) 근거하고 있기에 그것은 세상을 응시하지만 세상은 그것의 본성을 궁극적으로 염탐하거나 침투할 수 없다. 시선은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을 지언정, 밖에서는 그 시선 본성을 드러내려는 모든 시도가 불가능하다.

5. 나는 누구인가

이런 의미에서 나는 유동하는 질료와 영원한 형상과 같은 시선의 교차이다. 질료는 저 밖의 세계로 드러나고 형상은 내 안에 있고 저 밖을 응시하지만 여전히 질료화되지 않는 영원한 빛이다. 나에게 있어서 그러므로 저 밖의 세상은 영원한 어둠의 자리이며 내 안은 영원한 빛이다.

'나'라는 실존은 이러한 상대적 질료와 절대적 형상이 만나는 자리이다. 그래서 밖을 보면 상대성 속에서 헝클어진 질료들을 본다. 그리고 안을 헤아려보면 이러한 모든 물리적인 시끄러움을 관조하는 시선이 숨어 있다. 그 시선은 분명히 나에 현존하지만 동시에 현존의 근거에 숨어 있다. 그것은 세상을 관조하는 빛이기도 하지만 세상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어둠과도 같다.

이러한 저 밖의 세계와 내 안의 시선의 교차로서의 나를 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여기에는 다양한 방식의 신학적 성찰의 가능성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시간속에서 조금씩 해명되어야 할 것들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미로와 마음의 낙원은 꼬메니우스의 의미심장한 제목이며 그의 가장 기본적인 신학적 정조가 표출된 주제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물리적 세계의 '유동성'과 정신의 '영원성'의 관점을 충실히 담고 있으며, 그러하기에 매우 유용한 인식론적 존재론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6. 무한으로부터 피조된 사건

백두는 꼬메니우스의 잘 정립된 신학적 인간론과 존재론의 근거를 물리적 세계의 본성에 대한 본격적인 타진을 통하여 더욱 세련되게 복원한다. 백두에 있어서 물리적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미로에 둘러 쌓여 있다.

물리적 세계의 사건은 저 무한한 실재의 다층적 관계에서 출현한 점과도 같다. 그 점은 무한에서 출현한 유한한 피조사건이다. 그리고 각각의 피조사건으로서의 점은 고유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각각의 사건이 동일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각각의 사건의 기원이 동일하지 않으며 그 기원 자체가 소위 각각의 무한성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두 사건은 겉으로 볼 때 유사한 빙산의 일각들이지만 수면 밑을 열어 보면 전혀 다른 빙산의 뿌리들을 갖고 있듯이 말이다.

물리적 세계의 사건들은 그러므로 무한하며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상대화되어 출현한 유한한 사건들이다. 그것은 점으로 출현하였기에 다음 스텝에서는 사라진다. 점 자체는 그 순간을 넘어서 소멸한다. 그것은 피조된 점의 운명이다. 그들은 그 안에 연루된 자신의 영원한 고향에 대한 탐험을 가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저 물리적 세계를 바라보는 '나' 또한 저 물리적 사건의 출현과 동일한 방식으로 탄생된다. 나의 탄생과 돌의 탄생이 실재의 차원에서 헤아리면 결코 다르지 않다.

7. 존재의 근거인 영원의 빛

저 실재의 무한한 영역에서부터 패턴화된 사건이 나이다. 그러나 나는 피조되었지만 나의 내면은 그 피조의 근거인 '영원의 빛'을 품고 있다. 나는 남이 아니라 나이기 때문에 피조된 나의 사건과 피조의 근거가 되는 영원의 빛을 동시에 경험한다.

그러므로 나의 근거와 그 영원의 빛에 대한 탐험의 여정은 저 밖을 향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저 밖은 영원한 거울에 비추인 회색 영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개적이며 부차적인 환영이기도 하다. 오히려 나의 내면에 존재하면서 나를 나이게끔 하는 그 근거, 시선에 대한 무한한 지향이 나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사실 알고보면 저 돌에도 자신의 근거가 된 그 영원의 빛과 뿌리가 있으며 그 돌 또한 그 자신의 본성과 지금 긴밀하게 교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 돌을 내 밖의 '영상의 한 점'으로 파악하고 있는 나의 입장에서는 저 돌의 내부에서 진행되는 그 교감의 진위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이는 마치 내 안에 있는 '영원의 시선'을 저 밖에서 나를 관찰하는 타인이 접근할 수 없듯이 말이다. 돌 안에 있는 '영원의 시선'은 돌을 통해서만 발견이 가능하지 나에게는 그 시선의 관찰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

꼬메니우스에게 있어서 세상은 미로이고 마음은 낙원이다. 그것은 유동하는 세상의 허상성을 강조하고 마음의 낙원으로 회귀하라는 연약한 정언명법이 아니다. 흐르는 저 밖의 영상과 그 모든 흐름을 거슬러 나의 근거가 되는 마음안의 그 영원한 시선,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말한 것이다.

백두에게 있어서 실재의 물리적 표면의 운명은 하락, 추락, 그리고 영원한 상대화로 점철된다. 그것은 하향적이며 소멸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실재의 정신적 내면은 상승하고 영원을 그리워하며 영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재의 내면은 그 영원의 시선과 비매개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두에게 있어서 세상은 영원히 소멸하는 것들이지만 우리의 마음은 궁극적으로는 불멸하는 영원한 가치가 된다.















    주요개념

안과 밖 | 드러나는 것과 드러내는 것 |

무한으로부터 유한으로의 기하학적 변형 |

과정을 통해 유한에서 무한을 추출하는 매개적 접근 |   

무한에서 유한을 직시하는 비매개적 접근 |

물리적 소멸과 정신적 불멸의 문제 | 드러난 신과 감추어진 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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