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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5 (09:23) from 84.173.143.221' of 84.173.143.221' Article Number :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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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소시즘과 성스러움의 의미



70년대 초반 독일에서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엑소시즘의 사건이 있었다. 엑소시즘의 당사자인 Anneliese Michel는 젊은 나이에 결국 죽었다. 가톨릭 일각에서는 이 사건을 악마에 의해 순교당한 사건으로 해석한다. 그녀가 죽은 곳은 가톨릭의 명소가 되었다.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찾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는 사건이 흐른 수십년 후의 이 시점에서 물을 수 있다. 정말 그녀는 악마에 의해 순교당한 것이었을까. 그것은 악마에 의한 순교였을까, 아니면 엑소시즘을 위한 순교였을까.


이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엑소시즘 사건에는 종교적, 정신병리적 차원의 문제를 포괄한 해석의 다의성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종교적 권위, 성스러움과 폭력의 문제가 다층적으로 얽혀 있다. 여기에서 주목하는 한 측면은 바로 신부와 소녀 사이의 비대칭적 힘과 종교적 권위, 권력의 문제이다. 엑소시즘을 하였던 신부는 소녀를 악마에 사로잡힌 자로 해석한다. 그에 반해 소녀는 자신이 악마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가족과 환경의 부담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것으로 자신을 해석할 수도 있다. 하물며 신부에게 그 해석을 호소하였을 수도 있었다.

그 소녀는 악마와 같은 목소리, 모습, 메시지를 드러냈다고 한다. 물론 이 부분은 되도록이면 신중하게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녀가 악마같은 소리를 낸다는 사실이, 그녀의 영혼 안에 악마가 빙의하였다는 확고한 증거자료가 될 수 있을까? 오히려 '종교적 권위와 권력'의 맥락에서 신부와 소녀 사이에 이루어진 상황과 그로 인해 야기된 결과를 헤아릴 필요가 있어 보인다.

모든 관계에는 권위와 권력, 그리고 힘의 역학이 존재한다. 그것은 종교의 체계라고 해도 예외적이지 않아 보인다. 엑소시즘의 사건은 소위 '악마'가 우리의 생에 도대체 어떠한 의미를 지닌가, 라는 고도의 사변적이고 종교적인 물음 이전에 소위 일방적인 '종교적 권위'가 갖고 있는 어두운 측면을 잘 드러내준다.

생각해 보건데 연약한 인간일 수록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자생적으로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기가 어려울 수 있다. 자신 안의 결핍을 타자와 환경을 통하여 보완하고 극복하려는 성향은 어찌 보면 연약한 인간의 특성을 넘어서서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일반적인 천형인지도 모른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비대칭적 관계가 보여주는 양식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원한 동경과 권위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것은 타자를 향한 존경과 귀기울임의 순기능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소녀와 신부와의 역할극은 너무나도 일방적인 구석이 있어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진정 그 소녀는 신부에게 있어서 쉽고 단순하게 종교적으로 해석될 영혼이자 삶이었을까"를 나는 계속 묻게 된다.

인간은 환경을 주도적으로 장악하지만, 환경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하비투스에 얼마든지 동조될 수 있다. Anneliese Michel는 앓았다. 신부는 그녀에게 "악마의 빙의"라는 해석의 체계를 부여하였다. 그렇다면 그녀가 살아남기 위해 취할 수 있는 태도란 무엇이 남아 있을까?


* * *


인간과 인간 사이는 우선적으로는 교감과 체험의 관계가 되어야 하지 섯불리 해석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해석은 인격적 교감과 체험이 충분히 익은 후에 이루어져도 되는 것이다. 아니 되도록이면 해석은 멀리하는 것이 인간과의 대면에서 더욱 요구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해석은 살아있는 생명을 해부하고 특정하게 대상화 하는 측면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대상의 해석에는 도식이 필요하다. 도식은 살아있는 것을 죽이는 것이기도 하다. 생명이 움직이는 속도를 맞추어내지 못하는 모든 도식은 위험스러운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불가피하게 해석이 요구되는 부분이 있다. 교감과 체험으로도 해명되지 않는 갈등과 불가피한 대립, 혹은 문제발생의 상황에서는 도식으로 대상을 해석하고 특정하게 자기화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석은 극단적인 갈등상황에 대한 해결의 의미로서 요청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해와 해석의 해석학적 순환은 죽은 텍스트와의 대화에 비교적 엄격하게 제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에 비해 살아있는 인간은 해석의 대상이기보다 우선적으로 이해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인간과 그 생에 대한 종교적인 해석은 매우 궁극적이고 총체적인 측면을 담고 있다. 삶의 구조는 중층적이고 복잡하다. 그리하여 그렇게 단순한 종교적 차원으로 그 삶의 생명성이 재단되거나 평가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른 지평속에서 충분히 조명될 수 있는 것들을 섯불리 종교적인 차원으로 해명하려 하거나 환원하려 하는 태도는 본성상 위험해 보인다. 삶의 중층성과 복잡성을 단순하고 거칠게 종교적 관점으로 환원하는 태도는 오히려 종교적 해석이 드러낼 수 있는 심미적 통전성과 총체성, 그리고 삶의 온전한 조명을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성적이 좋지 않으면 공부를 한 시간 더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고, 몸이 아프면 운동을 하고 병원에 가는 것이 더욱 더 상식적인 태도이다. 그리고 기도를 하면 된다. 이러한 자발적 노력이 전혀 없는 소위 종교적 행위는 주술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로또 대박이 어떻게 신의 은총으로 둔갑될 수 있겠는가. 그러한 생의 물리적인 차원의 문제를 소위 신의 능력, 혹은 신의 호소와 직접적으로 결부시키는 행위는 전혀 온당하지 않은 비상식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내가 형성한 특정한 물리적 생활세계와 환경을 파괴하면서까지 신을 호소하고 부르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신을 양분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거기에는 세상과 신의 균열이 불가피하게 존재한다. 즉 거기에는 인간과 그 삶이 꾸려 나가는 물리적 생활세계의 그물망과, 그 물리적 그물망과 전혀 관계없는 순수한 초월적인 신 사이의 분명한 이질성이 놓여 있다.

그러나 신은 기적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가 아니다. 그리고 생활세계의 질서를 파괴하고 들어오는 이질적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삶과 일상은 어떠한 기적적인 사건보다 더욱 기적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해석과 신을 애써 먼저 찾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우리 생과 삶의 근거가 되는 종교적 기반을 간과하거나 성급히 도외시하는 태도일 수 있다.

타자에 대한 체험과 공명보다, 타자에 대한 거친 해석을 먼저 가하는 태도, 그리고 우리보다 일상에 더 가까이 거한 신을 도외시하고 저 멀리에서 신을 성급하게 요청하고 찾는 태도, 그리고 생의 다차원성이 지니는 그 복잡성과 모호함을 성찰하지 않고 종교적인 차원에서만 거칠게 환원하여 규정하려는 태도는, 결국 소녀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던 엑소시즘의 역사적 반복일 수 있음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이는 타자에 대한 해석, 성스러움, 그리고 신과 종교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또 하나의 거친 폭력일 수도 있음을 헤아리게 한다.

우리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이러한 폭력을 키워왔을까. 또한 얼마나 많은 폭력을 우리가 가하였을까. 이는 Anneliese Michel의 죽음을 회상하면서 슬피 떠오르는 생각들이다.











    관련링크

 엑소시즘의 그늘 (200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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