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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4 (08:25) from 84.173.185.18' of 84.173.185.18' Article Number :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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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시간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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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시간경험 Hat Gott eine Erfahrung der Zeit?

John Polkinghorne은 화이트헤드의 신의 양극성의 모델을 적절한 신학적 모델로 수용한다.*) 왜냐하면 신의 영원성에 대한 극단적 강조는 자신의 피조세계와의 관련성을 해체시키기 때문이다. 신은 영원하다. 그러나 동시에 시간을 경험한다. 문제는 신의 시간 경험이 신의 세계 경험을 뜻하는가이다.

신이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신이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신이 세계로 변화됨을 말하지는 않는다. 내가 물을 경험한다고 하여 물로 변모하는 것이 아니듯 말이다.

신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신이 세계가 된다는 뜻이 아니며, 더 나아가 세계가 신이 된다는 뜻도 아니다. 만약 세계가 신이 된다면, 동일하게 신의 세계화도 가능해야만 할 것이다. 즉 신이나 세계나 상호 경험은 결코 자신의 관점의 해체를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신의 세계경험은 세계에 대한 수동적인 경험이라고 하기 보다는, 세계에서 새롭게 출현한 질서의 구유와 보존의 양식이 될 것이다. 신의 세계 경험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서 그 세계의 '경험'을 경험하고 자신 안에 그것을 기억하는 태도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시간경험은 신의 세계경험이며, 그것은 세계가 구현한 현실을 자신 안에 기억함을 뜻한다. 이 신의 기억은 세계의 기억과는 다르다.

세계의 기억은 여전히 상실적이다. 그것은 물리적 실재의 운명과도 같다. 세계의 피조적 개체들은 주체적으로 생멸한다. 세계의 기억은 망각과 동류이다. 그러나 신에게 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세계의 시간을 경험하는 것은 그의 혼성적 본성에 기인하지만 그에게 망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의 순수한 정신적 본성에 기인한다.


영원한 신과 유한한 몸

몸은 피조물의 운명이다. 몸은 그를 둘러싼 환경을 직접 대면할 수 없게 한다. 우리의 모든 세계는 몸을 통해 들어오는, 몸에 의해 구현된 세계이다. 현실은 몸의 숫자만큼 세계상을 품고 있다.

신은 몸의 근원(creatio ex nihilo)이자 몸의 보존(creatio continua)이다. 과학은 몸의 근원을 다룰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을 통한 실재의 해석이 과학이기 때문이다. 몸이 있기 때문에 과학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몸을 가지고 저 밖과 내 안을 다시 반추하는 해석하는 과학이기에 그는 몸의 보존에 대한 유용한 진술을 행할 수 있다. 하지만 몸의 출현 이전의 세계를 과학은 표상해낼 수 없다. 과학의 모든 표상은 몸의 흔적을 넘어설 수 없다.

신학은 몸의 보존에 대한 해석을 과학적 표상을 통하여 풍요롭게 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신학의 독특한 자리는 아니다. 신학은 몸의 특이점을 넘어서 '믿음'과 '사변'과 '종교이성'의 관점에서 몸의 출현을 성찰한다. 과학이 실재의 물리적 표상을 전담하는 시선이라면, 신학은 모든 표상을 넘어서는 궁극적인 기원과 종말을 탐구하는 시선이다.


아포리아를 넘어

신학은, 몸을 넘어선 신과 몸 이전의 무를 신앙의 빛 안에서 해명하려 한다. 창조론과 세상의 출발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이러한 해명을 위해 존재하는 지성적 텍스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물음을 품는 독특한 생명체이다. 인간은 인간에게 답이 아니라 물음이다. 신학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물음을 생과 우주의 끝까지 던지는 학문이다.

우리의 몸이 그저 출현했을 수도 있고, 신의 창조에 의해 몸이 출현했을 수도 있다. 적막한 현실은 우리의 출현에 대해 아무런 대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침묵 가운데 감추어져 있다. 사람은 이 아포리아를 믿음을 통하여 넘어선다. 전자, 후자 모두 믿음에 의거한 선택이다. 신을 믿는 자들은 후자를 선택하고, 그에 입각하여 생을 살아내려는 이들이다.


몸은 신의 텍스트?

우리는 우리의 본질과 세계를 묻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는 신으로까지 나아간다. 몸은 신을 배반하지만, 우리의 몸과 저 세계는 신을 해석하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허나 그 해석은 너무나도 어렵다. 자연신학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문제는 몸과 신 사이의 요동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뿌리로 하고 있다.

신은 불현듯 현전하거나 사라진다.

인간은 신을 볼 수 없다. 뒤틀림 속에서만 대상에 대한 텍스트가 나오며, 모든 해석은 몸의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을 볼 수 없다. 단지 인간은 신을 믿거나 신을 해석할 수 밖에 없다.

신을 대면하려는 여정에 신학은 과학과 어느 정도는 동행할 수 있다. 허나 과학이 멈추어도 신학은 나아간다. 때가 되어 신학이 지쳐서 멈추어도, 신학의 심장인 신앙은 그 무한한 여정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신을 찾는 여정은 구원을 소망하는 피조물들의 운명이며, 신의 시간경험은 세계 구원과 함수 관계이다. 우리가 신을 찾아 나서듯, 신은 시간을 경험하였을 것이며 경험할 것이다. 신은 피조물을 향한 구원의 원리이다. 그러나 일방적인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구원은 침묵일 뿐이다. 신의 피조물을 향한 구원의 실현을 위해서라도, 몸을 지닌 우리들의 신을 찾는 여정은 계속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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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e offene Welt, wie wir sie im letzten Abschnitt dargestellt haben, wäre eine Welt, die wirklich im Werden ist. Die Zukunft ist noch nicht da, als erwarte sie einfach, daß wir in sie eintreten, sondern wir gestalten sie in unserer Gegenwart. Wenn dieser Eindruck nicht trügt, müßte auch Gott die Welt in ihrem zeitlichen Werden kennen. Eine Vielzahl von Theologen des 20. Jahrhunderts, von Karl Barth an und bis zu den naturwissenschaftlich ausgebildeten Theologen hin, hat aus verschiedenen Gründen betont, daß es neben der göttlichen Ewigkeit in Gott selbst auch eine Erfahrung der Zeit geben müsse. Daß Gott sowohl einen ewigen als auch einen zeitlichen Pol habe, ist in der Theologie mittlerweile weitehend anerkannt. Diese Einsicht ist eine der Grundüberzeugungen der Prozeßtheologie, findet aber auch bei vielen anderen Theologen Zustimmung.

- JOHN POLKINGHORNE, Theologie und Naturwissenschaften, Gütersloh 2001,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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