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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30 (03:07) from 78.51.111.253' of 78.51.111.253' Article Number :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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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와 아우토포에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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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케노시스

성서를 통해 드러나는 기독교신앙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문헌학과 역사학으로 협소화되어서는 안된다는 문맥 속에서 조직신학은 형이상학적 사유를 요청한다.

신의 세계창조에 관한 여러 신학적 사변 가운데 오늘날 유용한 설득력을 제시하는 관점은 케노시스론이다. 즉 신은 자신의 몸을 비움으로 피조세계의 공간을 허락하셨고, 거기에서부터 피조물은 새로운 생명을 덧입게 된다는 형이상학적 가설이다.

피조세계의 공간을 허락했다는 것은, 피조물에게 존재의 자유를 허락함을 의미한다. 신은 자신의 비움을 통해 피조세계를 세웠고, 피조세계는 신의 케노시스를 통하여 자신의 아우토포에시스, 자신의 자유를 얻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신의 케노시스와 피조물들의 아우토포에시스 사이의 관계성을 형이상학적 반성 속에서 사려깊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충일한 정신적 신의 온전성 안에서 물리적 피조세계가 등장하고 자유가 부여된다. 이러한 면에서 케노시스와 아우토포에시스의 관계는 정신성과 물리성이라는 대립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신은 순수하게 정신적이기에 물리적 세계를 열어놓았고, 피조세계의 물리성은 철저하게 물리적 기반을 바탕으로 생존하고 자유를 얻게 된다.


세계의 아우토포에시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물리성이 암시하는 기계론적 문맥 때문에, 물리적 세계와 자유가 서로 양립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반론이다.

이러한 반론은 물리적 세계의 자유의 성격을 묻는 질문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은 내용일 터인데, 물리적 피조세계의 자유는 전적으로 순수한 자유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물리적 세계의 완고한 토대 위에서 부여되는 제한적 자유이다. 그러므로 신의 케노시스는 순수한 아우토포에시스의 배제와도, 그리고 물리적 질서를 위배하는 전적인 아우토포에시스의 부여와도 관계가 없다.    

만약 신이 물리적 세계를 창조하고 거기에 자유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가설을 취한다면, 그러한 가설은 기계적 질서의 무한한 동어반복이라는 세계상, 그리고 이신론적인 가설이 남긴 덫과 난관을 결코 모면할 수가 없다.

신은 자신의 의지에 의거하여 자신의 순수한 자유의 몸을 찢고 물리적 세계를 들어 세우고 거기에 자유를 부여한다. 그것이 신의 케노시스와 피조물의 아우토포에시스이다.

이러한 원리에 입각하여 물리적 피조세계는 그 기초단위에서부터 물리적 토대를 바탕으로 하여 환경을 구성해 나아간다. 바로 이러한 물리적 질서의 원리에 입각한 물리적 실재의 패턴을 백두는 Many-One-Process로, 마투라나와 루만은 autopoesis로, 폴킹혼은 Bottum-up-Process로 정의하였다.

과학은 바로 이러한 아래에서부터 위로의 구성적 사고를 자신의 본령으로 하는 언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언어의 중요한 문법은 근원성에서 헤아려보면 결국은 기계론, 합리론, 인과론이다.


케노시스와 아우토포에시스의 접촉점

만약 우리가, 우리의 존재양식이 신의 케노시스에 의거한다는 신학적 가설을 수용한다면, 여기에서는 과학적 사유와 신학적 사유의 접촉점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과학적 사유는 첫째, 케노시스에 의해 허락된 피조적 질서에 대한 우선적인 탐구에 제한된 것이며, 둘째, 피조물의 사유에 제한된 것이기 때문이며, 셋째, 그러므로 그 과학적 사유의 시선에서는 그 사유의 토대인 케노시스에 관한 실질적 접근을 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학의 공리는 피조된 세계의 질서에 대한 본성의 타진의 기저에 있는,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에 결부된다. 신학적 공리의 관점에서 물리적 세계는 신의 작품이고, 물리적 세계에는 신의 기획이 결부되어 있다. 이렇게 물리적 세계는 신의 작품과 신의 기획에 의거한 산물이기 때문에 이제 물리적 세계는 어떻게 신의 흔적과 기획을 '물리적 세계'에서 찾아내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가 등장한다.

만약 신의 정신성과 흔적을 물리적 세계에서 모두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신과 물리적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지위가 해체됨을 뜻한다. 드러난 것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의 원리에 입각하여 드러났다 하더라도, 드러난 것이 드러내고자 하는 원리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드러난 것의 어떠한 아우토포에시스적인, 자기재귀적인 운동도 드러내고자 하는 원리를 다 파악할 수는 없다.


세계에 대한 신의 문법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물리적 세계에서 신의 정신성을 파악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파악의 문법은 물리적 세계의 문법인 기계론, 합리론, 인과론과는 동일/상이한 문법일까.

신의 정신성에 대한 파악의 문법을 이해하는 단서는 비교적 쉬울 수 있다. 만약 물리성과 정신성이 상호 길항적 관계임을 우리가 주목한다면, 신의 정신성에 대한 파악의 문법을 기계론, 합리론, 인과론과는 대별되는 창발론, 초합리론, 목적론으로 추론할 수가 있다.

이럴 경우 창발론, 초합리론, 목적론이 어떻게 신의 세계에 대한 존재방식에 대한 파악 문법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문법으로 신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시도한 일군의 전통적 신학의 관점들을 접할 수 있다. 오늘날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이러한 문법으로 신의 본성을 접근하는 이들은 융과 백두와 폴킹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연과학적 사유를 실재의 본성을 접근하는 중요한 문법이라고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신학 내부에서의 현대신학자로서는 판넨베르크와 몰트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창발론과 초합리론, 목적론의 문법으로 신의 세계에 대한 본성을 해명하고자 하는 도식의 장점은, 물리적 세계의 아우토포에시스적인 원리를 배제하지 않고 그것을 포함하면서 신의 케노시스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사유들은 20세기와 21세기의 신 자연신학의 기초에 충실히 기여하고 있다.


몇 가지 쟁점

이러한 사유는 신과 세계의 본성을 실존적 인간론의 영역으로 제한하지 않으면서 물리적 질서와 합리적 언어에 입각하여 재해석해 내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디테일하게 해명되어야 할 부분이 몇 가지 존재한다.

첫째, 실재의 표면인 물리적 세계의 아우토포에시스와 실재의 배면인 신성의 케노시스를 모두 품고 있는 인간과 인간경험의 지위에 대한 더 깊은 분석이 요구된다.

기본적으로 세계의 물리성과 신의 정신성의 양극적 성격을 피할 수 없는 실재의 구조로 전제한다면, 인간은 이러한 양극적 대립과 조화의 산물이라는 점은 쉽게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과 조화의 중심점에 인간이 놓여 있다는 지적은, 핵심적인 논의를 피해가는, 쉬운 언어적 방편일 수 있다. 이러한 언어적 방편의 사례는, 물리적으로는 자연으로부터 진화한 존재이며, 영적으로는 신의 형상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가설이다. 이는 소위 영적 창조론과 물리적 진화론의 단순한 결합으로 머무를 소지가 크다.

둘째, 물리적 정보의 상향적 구현bottum-up으로 인하여 영적인 정보가 창발적으로 실현top-down된다고 보는 소위 낭만적 창발주의론의 관점은 궁극적으로는 신의 케노시스론의 원리와 위배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내 신체라는 물리적 세포와 신경과 기관들의 자율적인 정보들의 상향적-종합적 구현체로서 어떠한 정신적 사건이 창발하고, 동시적으로, 그 창발된 사건이 신체를 특정하게 작인해 낸다는 관점은 물질성과 정신성의 이원론을 지양하는 주요한 논지로 기여될 수 있다.

문제는, 만약 이러한 관점을 채택한다면, 이러한 심신병행론적 창발론의 논지와, 우리가 최초의 공리로 설정했던 신의 케노시스론과의 공존이 매우 어려워질 수 있다. 즉 물리적 세계는 창발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정보의 상향적 하향적 실현이 진행되지만, 신의 케노시스 가설은 이러한 물리적 창발성의 원리와 무관한 태초의 특이점에 대한 논의이며, 결국 이 둘은 서로 접합점을 쉽게 찾을 수 없게 된다.

물론 물리적 세계의 창발성의 원리 자체가 신의 케노시스 속에서 등장한 피조적 원리에 제한되어야 한다는 반론을 기대할 수 있다. 이럴 경우 사변적으로 신의 원리와 물리적 세계의 원리는 '이분화의 난점'이라는 비판을 직면하게 된다.


셋째, 인과성과 물리적 질서를 넘어 출현하는 창발성을 신의 세계에 대한 개입방식이라고 규정하는 관점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있다. 현존하는 물리적 질서 안으로 체계화할 수 없는 어떠한 우발적, 창발적 사태가 드러나지만, 그것은 세계의 새로운 질서에 기여되는 여건들이며, 결국은 물리적 질서로 재편된다는 관점이다. 즉 여기에서는 질서의 풍요로운 확대, 그리고 여하한의 우발성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선형적인 낙관주의가 결부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은 현존하는 물리적, 체계적 질서를 승인하면서도 새롭게 펼쳐지는 세계의 우발적, 창발적, 창조적 국면을 신의 간섭의 빛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신의 흔적(우발적, 창발적, 창조적 국면)을 통하여 신을 이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이해는 결국 세계의 신성화라는 관점, 그리고 세계는 궁극적으로 신을 향해 나아간다는 관점을 통하여 그 정당성을 얻게 된다. (물리적 질서로 체계화되지 않으나 엄연한 신의 세계 통치의 전조 양식을 몰트만은 '희망'이라는 관념으로 주장하고 희망의 종말론적 의미를 재해석한다.)

실재에 대한 우리 인식의 불가해성이라는 한 관점에서 창발성과 우발성을 접근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창발성과 우발성이라는 개념에서 두 가지를 헤아려볼 수 있다. 하나는 우리의 모든 인식, 이해와 해명은 우리의 체험을 온전히 반영할 수 없는 숙명이다. 다른 하나는, 실재에 대한 우리 인식의 수렴도보다 실재에서 형성되는 복잡성의 발산도가 더 크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은 그 체험을 창발성과 우발성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이럴 경우 세계에서 출현하는 창발성과 우발성은 '궁극적'으로 세계의 질서로 수용, 수렴된다는 가설과 대치된다.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할 경우 우발적 사건이 세계로 수렴되는 선형적 낙관주의와 세계의 신성화라는 가설과도 대치된다. 이는, 우리에게 드러난 신deus revelatus 이상으로, 신은 더욱 멀리 우리의 이해로부터 사라져간다deus absconditus는 말이 될 것이다.






    관련링크

 신의 정신성 (2007.11.30)

 신의 시간경험 (2007.08.24)

 융의 동시성 현상과 실재의 문제 (2006.11.17)

 신학적 섭리론 (200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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