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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9 (12:33) from 92.227.66.199' of 92.227.66.199' Article Number :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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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 대한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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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신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물론 이 지식은 믿음과 동반되어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간혹 신에 대한 신학저서를 읽다 보면, 신에 대한 진술이 구성적이거나, 실존적, 그리고 개인취향적인 차원을 넘어서 매우 강렬한 힘과 의미를 발견할 때가 있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그 지식을 담고 전달하는 언어와 문자라고 하는 것은 분명 표피적인 것들이며 매개성의 운명을 지니고 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매개성을 넘어서 힘과 의미로 신에 대한 진술이 다가올 때, 나는 일종의 경이감 같은 것들도 느끼게 된다.

"신이 어떻게 세계를 알고 이해하며 우리에 개입하는가"에 관한 논문들을 읽던 도중 드는 생각은, 결국은 인간은 신의 시선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는 피조물적인 운명이라는 일종의 직관이자 확신이다.

인간은 분명 시공간적 존재이며 특정한 피조물적 존재방식 안에 거한다. 신은 그러한 존재방식과 동일하다고 할 수 없지만, 분명 우리의 시공간을 통하여, 그 안에, 그를 넘어 우리와 관계맺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소위 건조한 신론적 담론을 단지 신에 대한 단편 지식으로 치부하지 않고, 삶에 대한 직접지적인 진리로 고백하고 그에 의거하여 살아간다면, 이것은 상당히 진지하고 심각한 도전이 된다.

루터는 분명히 이러한 신의 인간에 대한 접촉방식의 그 불가해성, 무궁성, 그리고 영적 포스에 대한 종교적 명상과 성찰 속에서 대단히 깊은 차원의 지적, 종교적, 심미적 충격을 경험하였을런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 인간에게는 시작과 끝이 있다. 아마 그것이 비교적 낮은 차원의 피조물의 한계에 대한 성찰의 시작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직관적으로 매우 의미가 큰 성찰이다. 우리가 시작이 있듯이, 우리가 끝이 있으리라는 것.

생명 창조의 근원성의 빛에서 볼 때,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며, 그 창조주의 불가해한 섭리와 은총, 그리고 그의 주도적인 개입 아래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창조주의 자식들인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생명이기도 하지만, 창조주의 헤아릴 수 없는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아주 제한된 운명이기도 할 것이다.

내 앞에 하나님이 나를 본다는 것, 그리고 우리 피조물은 창조주의 시선을 피해 어디로 숨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우선적으로 우리 생에 대한 허심탄회하고 진솔한 대면을 불가피하게 요구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신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안에는 얼마든지 숨기고 숨을 수 있는 곳이 많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접촉은 마치 두 공고한 유리알이 만나서 외적인 마찰을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표피적이고 피상적이며 '거짓'스러울 수가 있다. 물론 그것을 원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초적 매개성에 기초한 인간과 인간사이의 만남의 방식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허락되거나 통용되지 않는다. 창조주는 피조물의 운명인 우리의 이러한 매개성, 인과성, 물리성에 제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창조주는 바로 그런 모든 인간적인 피조물의 범주들을 만든 창조주(creatio ex nihilo)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을 만나는 것은 매개적 조우이지만 신의 인간에 대한 만남은 매개적일 필요가 없다. 그것은 비매개적이며 직접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매개성에 익숙한 인간의 소통방식에 잘 잡히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신을 찾기가 어려우며 오히려 신이 없다고 과용 판단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인간을 속일 수 있어도 신을 속일 수는 없다.

물론 인간이 신을 없다고 생각하며 세상을 살아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는, 우리 삶과 생명의 터전은 전적으로 자발적, 우발적, 자연적이라는 형이상학적 가설을 이미 수용한 것이다. 물론 순수한 자연주의적 생의 철학에도 미덕은 있을 것이다. 무신론적 생의 철학이 비도덕적이고 비양심적이라는 전거는 어디에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허울좋은 유신론적 삶의 비양심성과 부조리함을 너무나도 부끄럽게 만들기도 한다.

문제는, 창조주를 내 삶의 근원으로 고백하고, 내 생명의 시작과 끝을 자각하는 유한한 존재에 대한 고백을 하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위의 명제는 여전히 절대절명의 명제가 된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신은 인간의 투사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거울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거울은 내 모든 생의 체험들을 다 투명하게 드러낸다. 거울 앞에 누가 자신의 모습을 숨길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알면 알 수록 진리의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얻게 되지만, 그를 두려워하고 그 창조자의 자식으로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야 하는 피조물의 과제를 생각하게 된다.

결국 신에 대한 지식은 결국 신에 대한 고답적인 명상과 신비주의의 숲으로 우리를 이끌기보다는, 우리 피조물에게 주어진 이 생생한 시간과 현실의 매우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차원까지 양심적, 도덕적, 책임적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작인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믿는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러한 삶을 향한 노력이 아니라면, 그가 지닌 그리스도인의 신에 대한 믿음과 지식은 어떠한 정당성과 의미도 지니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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