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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7/17 (23:41) from 203.252.18.128' of 203.252.18.128' Article Number :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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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동시성이론과 화엄경에 있어서 새로움의 문제


융의 동시성 이론과 화엄경이 서로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착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티브 오딘의 Process Metaphysics and Hya-yen Buddhism (Albany : State University of New York)은 바로 그 착상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주도면밀한 해석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런데 님의 이야기 가운데 걸리는 부분이 몇 가지 있어서 다시 펜을 듭니다.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라고 딱 잘라 말한다는 점인데요..
물론 그렇게 볼 수 있는 여지가 융과 화엄 사상에 있겠지요.
그러나 어떠한 가능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현실화 된다고 하여서
그것이 새로움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제가 11시 30분에 시작하는 강의를 들어갈 수도 있고,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둘이 저에게는 상호 다른 가능성이죠. 그렇다고 강의를 참여하는 것, 혹은 강의를 참여하지 않는 사건이, 전혀 새로움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가능성의 현실화 또한 모종의 새로움으로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지요. 새로움은 이런 의미에서 두 가지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가능성의 현실화의 새로움, 둘째는 전혀 새로운 가능성의 창출인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융의 형이상학이 '새로움'의 문제를 전혀 논의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융-화엄불교와 대극적인 지점을 차지하고 있는 과정 사상과의 비교 안에서 상호침투interpenetration냐 혹은 누적accumulation이냐 하는 세계관과 시간관의 문제를 볼 때 융과 화엄불교가 상대적으로 새로움의 요소를 개진할 수 없는 정태적인 우주론이라고 애써 볼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느냐 하는 것은 조금은 더 확인해 보아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스티브 오딘의 관점과 해석이 얼마나 타당성을 지니고 있느냐에 대한 반론인 것이지요.

그리고 한국인의 영성, 한국인의 심성이라는 표현은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메타포라는 생각이 드는데, <한국인의 원형>이라는 표현은 융의 체계에 비추어 볼 때 그 의도는 이해가 가지만 잘 어울리지 않는 조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원형은 질료적으로 채워져 있는 영역이 아니라 고유한 페턴을 형성하게 하는 가능성의 영역이기 때문이지요. 또한 한국이라는 구체적인 논리적 수위를 훨씬 넘어서는 추상적 수위에서 원형이라는 개념은 의미를 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하간 융의 동시성이론과 화엄경에 있어서 새로움의 문제에 관한 여러 분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1999/05/11

http://theology.co.kr/wwwb/CrazyWWWBoard.cgi?db=theme&mode=read&num=321&page=3&ftype=1&fval=%c0%fc%c3%b6&backdepth=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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