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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7/17 (23:42) from 203.252.18.128' of 203.252.18.128' Article Number :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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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의 <시간, 공간 개념>
베르그송의 시간, 공간 개념



1)베르그송의 문제의식: 존재의 형이상학에 대비되는 생성의 형이상학, 물질의 형이상학에 대비되는 생명/의식의 형이상학을 구성하는 것. 이는 일관된 이원적 대립구도 속에서 진행된다. 양과 질, 수적이고 불연속적인 현재적actuelle 다양성과 연속적이고 질적인 잠재적vituelle 다양성이 그 두 극을 구성하는 중심이다(Deleuze, {베르그송 주의}, 110쪽).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이론이 위치하고 있는 곳도 바로 이 지점이다. 여기서 그가 비판하려는 축과 끌려가는 축은 분명하다.

2)공간과 시간의 개념은 연장 tendu과 지속의 개념을 통해 파악된다. 연장적인 것은 일단 가분성(可分性)을 갖는다. 가분적인 것의 예로 그는 수를 드는데, 수의 개념은 多지만, 그것은 어떤 단위인 一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일과 다의 종합이고, 이는 수가 가분적임을 뜻한다. 반면 지속은 흐름이어서, 정의상 분할불가능하다. 즉 나누어지는 순간은 지속이 중단되는 순간이다.

3)여기서 多인 수는 단위에 의해 분할되는데, 이 때 분할의 단위는 서로 동질적이다. 즉 그것은 어떤 단위에 의해 동질화될 수 있음을 뜻한다. 한편 어떤 수가 일과 다의 종합이라고 할 때, 그것은 다수를 하나로 종합하는 단일성을 포함하고 있다. 두 가지 단일성; 분할하는 단위로서 단일성과 종합하는 작용으로서 단일성. 전자가 대상에 속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정신에 속하는 것이라고 한다. 만들어진 수와 만들어지는 수. 여기서도 베르그송이 집요하게 추구하는 이원론이 적용된다. "공간은 정신이 수를 만들어내는 소재고, 정신이 수를 세워놓는 매개mileu다."(김규영, 21-22쪽) 반면 "시간은 셀 수 있도록 상이한 의식상태가 서로 계기하는 매개이다."(김규영, 25쪽)--이런 점에서 볼 때 수는 단지 공간적인 것만도, 시간적인 것만도 아닌 셈이다.

4)양적인 다양성, 혹은 연장적인 것은 서로 병렬될 수 있지만, 질적인 다양성내지 지속적인 것은 요소들이 서로 뒤섞여 있다. 각각의 공간적 위치를 갖는(연장을 갖는) 요소들 사이에는 공허부le vide가 있으며, 이로 인해 각 요소들은 서로 간에 외재적이다. "이처럼 완전한 분리의 원인인 공허부에 의해 서로 단절되어 있는 물질은 서로 외적이고 기계적인m canique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뿐, 내적이고 능동적 관계를 통해 새로운 단위를 구성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전체는 부분의 단순한 집합에 불과하며, 부분이 계산가능하면 전체도 계산가능하므로 부분과 전체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수립된다."(김진성, {베르그송 연구}, 52) 여기서 주어진 것은 주어진 것이며, 주어지지 않은 것은 주어지지 않은 것이라는 동일률이 완전히 적용된다. 생성의 세계와 단절.

5)반면 지속은 어떤 하나의 순간에도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서로 뒤섞여 공존하는 것이다. 여기서 요소들을 서로 상호침투되어 있는 계기로서, 공간 내지 연장적인 것이 보여주는 순서적 내지 직선적 계기와 대비된다. 지속에서는 그 구성요소 사이에 공허부가 개재해있지 않으며, 따라서 상호침투하는 이 요소들은 서로에 대해 내재적immanent이다. 이 경우 부분은 전체 속에 존재하며 동시에 전체는 부분 속에 존재하기에 전체와 부분의 구분은 원리상 불가능하다(김진성, 55쪽).

6)하지만 지속은 언제나 순수 지속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느새 공간 관념이 개입한 지속과, 어떠한 혼입물도 없는 지속으로 구분될 수 있다. 동질적인 매개의 형태로 사고되는 시간, 예컨대 시계적인 시간은 순수 의식의 영역, 순수 지속의 영역에 공간 관념이 침투하여 생긴 혼합관념이다. 예를 들어 소리는 지속이지만, 그리하여 그것은 그 요소들의 혼합 상태에 따라 상이한 질(음색)을 갖고 상이한 강렬도intensit 를 갖지만, 그것 역시 세어질 수 있으며, 이 경우 세어지기 위해서는 소리의 중간에 공허부(중단)가 개재해야 한다. 음가로 간주되는 소리들의 선적인 병렬과, 화음이나 음색처럼 상이한 요소들의 동시적인 혼합상태. (불레즈와 리게티!)

7)이런 점에서 순수 지속은 순수 이질성이며(김규영, 28쪽), 동시성과 침투적 계기를 특징으로 한다(K mmel, 32쪽).

8)동질성을 통해 공간관념이 개입된 지속은 양의 형식으로 변환된다. 예를 들어 시간은 이 경우 양의 형식으로 역학이나 천문학의 공식에 개입하며, 이로써 속도와 같은 강렬도를 측정하는 것도 그것을 따라 양화된다. 근대 과학과 시계적 시간. 근원적 시간과 공간화된 시간. 질로서의 시간과 양으로서의 시간.(K mmel, 29쪽)

9)동질적 단위에 의해 분할되고 구분되는 공간화된 지속은 시간의 차원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단절로 나타난다(김진성, 54쪽). 이 경우 과거는 현재에 보존되지 않는다.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며, 과거와 현재의 공존 내지 침투는 불가능하다. (현재)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며, 과거는 지나간 것이(고, 미래는 오지 않은 것이)다. 시간은 여기서 흐르지 않으며 오직 현재만을 영원히 반복한다. 나르는 화살은 날지 않으며, 도는 프로펠러는 원을 그리지 않는다.

10)반면 모든 구성요소가 혼재하며 상호침투되어 있는 순수 지속에서는, 그리하여 공허부가 요소들 사이에 개입하지 않는 순수 지속에서는 과거와 현재는 분할되지 않는다. 과거는 현재와 결합하며, 이로써 언제나 새로운 혼합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상호침투는 기억으로 나타난다(김진성, 55쪽). 생명체의 경우 과거는 흘러가지 않고 현재에 살아남으며, 현재와 하나의 새로운 단위를 이룸으로써 의식의 세계는 매순간 새로운 질로 탄생한다. 이 새로운 질은 순간에서 보면 창조지만, 이는 과거의 보존과 혼합, 지속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기에 이를 '창조적 진화'라고 부른다.(김진성, 53쪽)

11)이러한 지속의 세계에서는 인과율이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과율이란 공간이나 시간 또는 질에 서로 외면적이고 분간할 수 있는 둘 이상의 요소가 존재한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12)"고로 고립된 수적 다양성, 서로 침투하고 있지 않는,...동질적인 사물의 고정적이고 경직된 서열, 이러한 것들이 공간의 특징이다. 이에 대해 서로 침투하고 있는 이질적인 여러 가지 질, 항상 변전하고 있는 여러 가지 상태, 고정된 서열의 결여 및 이전 이후 요소를 구별하는 것의 불가능성, 이것이 지속의 특징이다."(K mmel, 26쪽)

김규영, {시간론}, 서강대 출판부, 1987

▶ 저자는 고대(Aristoteles, Plotinos), 중세(Augustinus, Thomas), 근세(Newton, Kant), 현대(Bergson, Husserl; Heidegger, Berdjajev)로 이어지는 시간론의 명맥을 서구 철학사를 통해 고찰한다. 고대와 중세의 시간론이 영원한 존재에 대한 向慕의 산물이라면, 근세는 자연과학을 전제로 한 시간론을 構想하였고, 현대는 주체의 의식 속에서 시간론을 追窮하였다.

제VI장 Husserl의 시간구성의 基底 --근원적 시간의 주체에 관한 試論

제I절 서론
시간의식의 현상학적 분석을 시도한 훗설의 출발점은 '객관적 시간의 배제'로부터이다.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 소여로서의 현상하는 시간(지속) 그 자체가 훗설의 문제의 대상이다. 그것은 경험세계의 시간이 아니라 의식경과의 내재적 시간이다. 이 내재적 시간의 명증성을 보장하는 현상학적 여건은 시간파악(die Zeitauffassungen), 즉 體驗(die Erlebnisse)이다. 훗설은 '시간의식(Zeitbewusstsein)'의 구명을 통해 시간의 아프리오리를 밝히고자 한다. 이는 '근원적 시간'의 문제로서, '시간의 근원'의 문제는 여전히 未決로 남는다.

제II절 현상학적 시간
시간 현상은 하나의 흐름으로 구성된다. 이 흐름의 각 위상(Phase)은 각각 하나의 殘影연속으로, 지속 속의 변화를 구성한다. 이 시간을 구성하는 흐름이 '절대적 意識流'이고, 이때의 의식은 그 자신이 결코 대상이 될 수 없다--결코 객관적이지 않다--는 의미에서 '절대적 주관성'이다. 이는 시간 안에서 구성되는 대상성과는 원리적으로 분명히 다른, 시간을 구성하는 대상성이다.
의식의 흐름, 의식류의 통일성을 형성하는 근거는 의식내재적인 것, 즉 記憶이다. 의식의 흐름은 위상의 이행, 즉 의식의 過去把持的 변모(retentionale Modifikation)에 의해 통일체를 구성한다. 매순간 새롭게 구성되는 양태의 형식은 지금의 것(das Jetzige), 방금 지나간 것(das soeben Vergangen), 장차 올 것(das K nftige)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의식류가 그 자신의 통일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의식류는 본질적으로 이중의 지향성(eine doppelte Intentionalit t)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소리나는 音을 들을 때 음의 마디마디를 하나씩 꿰뚫어 의식하는 동시에, 이어지는 그 음들의 延長을 하나의 흐름으로 의식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식의 양면성은 우리가 의식의 시선을 어느쪽으로 돌리는가에 달린 것으로, 의식의 지향성의 이중성을 전제로 한다. 과거의 지향이 현재에 있어서 파지된 과거임을 뜻하는 '과거파지(Retention)'는 이러한 이중의 지향성을 보여준다. 즉 파지란 현재에서 의식하는 과거의 파지로서, 최초의 기점에서는 새로운 原감각이던 것이, 다음의 순간위상에서는 선행한 원감각의 직접적 과거파지가 되고, 그 다음 순간위상에는 원감각의 과거파지의 과거파지가 되는 식으로 하나의 연속성을 지닌다.
훗설은 이와는 다른 또 하나의 지향성을 '가로(橫)의 지향성(Querintentionalit t)'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의식류의 現-共在的 단면에 주의를 집중할 때 경험하는 의식작용(현상)을 지칭한다. 세로(縱)의 지향성의 성격이 前-共在的(Vor-Zugleich)이라면, 가로(橫)의 지향성의 성격은 現-共在的(Da-Zugleich)이다. 세로.가로 지향성은 의식류를 구성하는 양면이자 양축, 즉 두 개의 시선(der Blick)이다.
훗설에게 시간의 모태는 의식이며, 시간의 경과는 의식의 흐름을 지반으로 성립되는 것, 즉 시간의식은 의식시간을 기반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현상학적 시간은 한마디로 절대주관적.前경험적인.前현상적.前내재적 '擬시간적 시간성'이다.

제III절 시간구성의 기저
우리가 경험하는 同時와 繼起가 지각되는 기저에 칸트가 '선험적 시간의 표상'을 두고--선험논리적으로 전제하고--논한데 반하여, 훗설은 '체험적인 의식의 흐름'을 보며--현상학적으로 기술하며--밝혔을 따름이다. 즉 양자는 시간을 다룬 방식은 물론, 해명하고자 한 시간문제도 애초에 달랐다. 칸트의 선험적 시간은 자연과학에서 사용하는 '객관적 시간'을 전제로서 인정하고 출발한 것이지만, 훗설은 이와는 반대로 '객관적 시간의 배제'를 전제로 출발하였다. 또 칸트가 인식주관의 '감성형식'으로 시간을 보았다면, 훗설은 시간의식의 내적 현상을 사실대로 기술하고 직시함으로써 '시간의 근원'을 파악하고자 했다.
훗설에게는 두 가지 시간이 있다.
1) '구체적 시간'이란 충실된, 충만한, 채워진 시간이다.
2) 그러한 '시간류'의 경우에도 '흐름'은 '아무런 시간을 안 가진', 무시간적인, 즉 시간에 매이지 않고, 시간에 좌우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그 '흐름'은 '무시간류'이다.
따라서 여기서 훗설의 (현상학적) 시간은 양의적 술어이다. 즉 현상학적 시간은 '시간류의 시간', 즉 '구체적 시간'이면서, '시간류의 흐름' 그 자체, 즉 무시간적인 '절대적 의식류'를 뜻하기도 한다. 변동하는 시간은 무시간적인 시간류를 기저에 깔고 있다.

제IV절 결론
훗설의 현상학적 시간론에 따르면 시간은 무시간적인 것을 기저로 해서만 성립된다. 여기서 시간적인 것과 무시간적인 것의 결합 합류의 문제가 난점으로 제기된다. 훗설은 변동 속에서 동일한 것을 觀取할 수 있는 '직관하는 視線'을 실체의 대응자로서 의식의 주관측에 내세웠다. '시선'이야말로 '근원적 시간의 주체'의 대표이자 대용인 것이다.
시간의 근원문제에 대한 훗설의 해명은 한마디로 '시간의식형성의 인식근거'를 밝힌 것이다. 훗설은 이 문제를 체험류, 의식류, 시간류로 지칭되는 광의의 현상학적 시간을 통해 해결했는데, 종국에 그것은 '前경험적 시간' 혹은 '擬시간적 시간성' 또는 '前현상적.前내재적 의식류'라는 술어로 표현되었다. 따라서 훗설에게는 '시간류의 흐름'이 '시간류의 시간'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었다. '구체적 시간'의 근원인 '전현상적.전내재적 의식류'가 현상학적 시간내에서의 '근원적 시간'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근원적 시간의 근원'은 무엇일까? 이 문제는 '擬시간적 시간성'을 지닌 근원적 시간류, 곧 '전경험적 경험류', '절대주관적 의식류'의 '현존에 대한 존재근거'를 캐묻는 것이다. 훗설이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圈外로 추방했던 문제, 즉 시간을 존재와 결부시키는 문제가 이제 훗설의 門下에서 하이데거에 의해 제기될 것이었다.


http://www.seosayun.org/data.htm  

1999/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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