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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7/17 (23:46) from 203.252.18.128' of 203.252.18.128' Article Number : 41
Delete Modify 전철 Access : 6127 , Lines : 130
동시성의 문제에 대하여
동시성의 문제가 저에게 중요하게 다가온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화이트헤드의 동시성 개념은, 시간에 대한 고전적인 견해와
상대론적 견해의 분기점을 긋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는 어떠한 원인과 결과의 연관관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두 존재도 동일한 현실세계를 한정하지 않는다는
기묘한 세계를 이 동시성 개념은 저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 융의 동시성 이론은, 인과관계의 의식현상이 파탄나며
전혀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경험하는 인류의 경험사례를
그저 낮설기 때문에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그 현상에 대해서 조명할 수 있는
가설이라고 판단됩니다.
물론 저의 경험을 조명해 주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님께서 주소를 적어주신다면,
Jung의 Synchronicity : An acausal Connecting Principle을 중심으로
전개한 <융의 동시성이론과 그 의미> 아티클을 보내드려도 될런지요.

그리고 이벤트를 둘러싼 자연과 우주에 대하여
개인적인 스케치를 해보겠습니다.
어짜피 듬성듬성한 스케치의 한계를 님께서도 아시니 양해하시길 바랍니다.

일단 이벤트 자체는 우주의 궁극적 본성이라고 할까요.
이벤트는 지속(Duration)가운데 발현되는 자연 전체의 활동입니다.
이 이벤트는 엘랑비탈과 유사한 의미라고 할까요.
그러나 굳이 인격적인 개념을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세계를 나름대로 파악하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주체들은
이 지속의 켜에 고유하게 정초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주체들이 마치 백미터 달리기를 하는 출발점에
국민학생들이 줄지어 서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여기에서는
동시성의 개념이나 4차원 시공연속체의 개념과도 융회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지성은 이 4차원 시공연속체마저도 공간화시켜서 생각할수 밖에 없는
베르그송의 지적을 고스란히 받아야만 한다는 제약이 있는 것입니다.
여하간 제가 생각하는 주체, 혹은 '영혼'에 스며있는 인격적인
개념에 대해서 별로 개의치 않는다면
영혼, 혹은 플레로마, 이렇게 불리우는 것들은 지속의 켜에 착상되어 있습니다.
이 주체는, 인격적인 단위 하부의 가장 마이크로한 개념일 수 있고
신적인 단위의 가장 마크로한 개념일수도 있습니다. 어디에서 개념화하고
짜르냐 할 때 그것은 가장 미시적인 독립체일 수 있고, 또한 가장 거시적인
인격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개념입니다.

이벤트는 벡터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황이나 사태로 표시한다면
마치 이벤트가 사진에 찍힌 결과를 우리는 상황이나 사태로 기술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벤트와 주체와의 관계를 설정한다면
이벤트는 우주의 박동과 같은 그 무엇이고
주체는 우주에 생존하는 그 무엇이기에
우주의 박동을 고스란히 주체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님께서 말씀하시는 함정의 문제가 연루되어 있습니다.
그럼 주체가 경험한 것 자체, 혹은 의식의 산물 그 자체로
환원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주체 자체가 이벤트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주체가 그 이벤트가 아닌 이상 이벤트 자체를 경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주체가 그 자신을 매개로 이벤트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는 있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계기적으로 주체의 이분화가 진행이 됩니다.
즉 이벤트와의 착상 이전의 초기위상에서의 주체는
이벤트와의 착상을 통하여 새롭게 주체화 되는 것입니다.
즉 주체의 이벤트에 대한 간접적 경험은, 엄밀히 말하자면
기억속에 누적되어 있는 초기위상의 주체와, 이벤트와의 착상을 통하여
전개되는 후기위상의 주체 사이의 대조Contrast의 산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놀라게 됩니다. 주체가 무엇을 경험한다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경험이전의 주체>와 <경험 이후의 주체>와의 대조를
"주체의 무엇에 대한 경험의 결과"로 지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간의 문제로 돌아갑시다.
형이상학적인 개념의 이벤트는 이 자연이 시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지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덜컥거린다는 것, 불연속적이라는 것,
뒤집어 이야기하면 '새로워진다는 것'
이것은 이벤트로서의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하나의 사태인 것입니다. 저는 이벤트가 자연을 매개로 해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자연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주체, 영혼, 플레로마 또한 끊임없는 이벤트적 계기 위에서
춤을 추고 자신의 운신의 행로를 결정하는 '인격체'이기 때문에
이벤트는 결코 그들과 따로 떼어져서 생존하는 독립체가 아닙니다.
또한 그들 자체가 이벤트'적' 산물이기에 이벤트를 간접적으로 경험합니다.
그것이 <의식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이벤트를 의식화한다는 것보다
저의 생각은 자신의 정체성에 이미 침투되어 있기 때문에 의식화 된다고
봅니다. 주체의 자연적 이벤트에 대한 의식화는 결코 능동적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의식의 시간이 주체의 영역에서 주도적으로 열려진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는 주체의 생존의 경로 가운데에서
특성화된 결과의 몫의 산물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식은 사물을 보려한 자율적인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는
입장을 저는 따르고 싶습니다.

이벤트는 비인격적이고 무채색입니다.
심장이 그저 뛰듯이 우주는 뛰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심장이 멈춰도 눈이 깜박거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연결하자면 심장이 멈추면 눈도 멈춰질 것입니다.

주체는 고유한 생존방식을 그 자신이 창출하는
인격적인 플레로마입니다.
그렇다고 인간과 같은 고등한 유기체의
인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인간과 같은 고등한 유기체의 인격은
자연과 주체의 대조를 더욱 깊이 향유할 수 있기에
진정한 의미의 창조적 '의식의 시간'을 열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에 진입할 수록 인간이 사는 지구는
그 자연적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의식시간 사이의
긴장의 파탄의 결과입니다.

케슬러가 언급한 인간 뇌의 구피질은 자연의 시간의 기관organ입니다.
인간 뇌의 신피질은 인간의 시간을 창출하는 기관입니다.

신학의 지혜는 자연시간과 인간시간의 성숙한 조화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내가 경험하고 살아가고 대화하고 꿈을 꾸고 절망하는 그 모든 사유의
영역은 결국 자연의 시간 위에서 그 자연의 시간의 널판 위에
전철이라는 영혼의 혹은 주체의 정체성이 각인시키고
투사시키는 고유한 시간입니다.

내일 괴테 등록 때문에 무엇을 준비해야한다는 주체의 전망은
이 글을 쓰는 시간이 몇십 분 지나지 않았다고
시계시간으로 메시지를 던지는 자연의 시간 마저도
매우 급박하고 숨돌릴 틈 없는 의식의 시간으로 전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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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6/28

http://theology.co.kr/wwwb/CrazyWWWBoard.cgi?db=theme&mode=read&num=527&page=3&ftype=1&fval=%c0%fc%c3%b6&backdepth=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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