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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7/17 (23:48) from 203.252.18.128' of 203.252.18.128' Article Number :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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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chronicity에 대한 한 가지 체험


나에게 Synchronicity에 대한 체험은 결코 적지 않게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중에 한 가지 체험을 솔직담백하게 고백해보자.

신학의 길을 평생 걸어가야겠다는 유년시절과 중고등학교의 신념은 고3때 루터의 전기를 읽으면서 박살나 버렸다. 우선 나에게는 그런 자질이 없다는 것이었다. 실로 고민을 많이 했다. 그 몇 개월 동안은 하나님과 하나님을 알아나아가는 신학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과 고민을 곰삭이며 숨어 산 회색빛 사각지대였다. 정말 힘든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시름시름 앓던 중 어느 날 꿈을 꾸었다. 몇 년전의 꿈이라 하더라도 기억은 선명하다. 나의 의식에 검은 망토를 두른 어떤 형체가 나타났다.

뭐, 지금 생각하면 베트멘과 같은 형체였다. 어두운 배경 가운데 등장하는, 그러나 얼굴은 분명하게 윤곽을 드러내지 않은 베트멘의 분위기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당시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수 없었던 "꿈의 공간"에 있었기에 매우 커다란 두려움을 갖고 그와 대면하고 있었다. 그 꿈안에서의 나는 당연히 꿈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그를 대면하고 있었다. 무엇인가 확증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데모닉한 악마와 사탄의 이미지를 지닌 존재임이 확실하였었다.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고,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었다.

당시의 꿈에서는 내가 경험하는 바가 '개꿈'일 것이다라는 모종의 자기쇠뇌도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꿈을 꾸다가 옥상에서 '이건 꿈이야!'하며 몸을 날리고 난후 그 몇 초 동안 하늘에서 추락하는, 활공비행하는 짜릿함을 자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꿈은 전지적 작가가 되어 편안한 자세, 혹은 불편한 자세로 영화 스크린 안에서 전개되는 풍경과 스토리를 감상하는 입장으로 전개가 되는데, 놀랍게도 그 데모믹한 존재는 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무엇을 묻는다.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너 나를 따라오려느냐"라는 질문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어이가 없는 '꿈'이었다. 하지만 나는 침묵할 수가 없었다. 이미 그 꿈은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돌아가는 스크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나에게 모종의 선택을 강요하였다.

몇 초의 긴장이 흐른 후에 나는 그 끔찍한 데몬과의 대면을 피하고 싶었던지 아니면, 본능적이었던지, "아니!!!"라는 큰 소리를 질렀다. 순간 나의 의식에는 그가 사라지고 놀러간 서울 친척집 형의 집에서 땀에 홍건히 젖어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바로 옆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형은 나의 목소리에 놀랐던지 벌떡 깨어 무슨 일이 있느냐고 비몽사몽의 의식에서도 나를 다급하게 채근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몇 개월의 지난한 고통의 과정은 이 꿈을 계기로 점차 서서히 아물어져 가게 되었다. 어느 현실 못지 않게 그 꿈에서는 나의 선택을 요구했고, 나도 의식하지 못한 나의 내면은 이미 모종의 선택과 지향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발견한 계기였던 것이다. 그 꿈은 나에게 신학의 길로 들어서게 한 몇 가지의 터닝포인트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몇 가지의 질문거리가 이 꿈을 통해서 형성이 되었다.

첫째,인간은 꿈에서도 자기의지가 표현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본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은 꿈에 관여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이다. 이후 나는 이에 대하여 아는 지인들에게 이에 대해 물어보곤 하였다. 그런데 또렷한 대답은 얻지 못했다.

둘째, 만약 내가 그 꿈을 통해서 그를 따라가겠다고 했다면 현실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라는 질문이다. 이는 첫째의 질문의 단순한 변형에 불과할런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꿈이 버추얼한 차원이 아니라 더욱 진실한 차원이고 그 꿈에서 나에게 요구한 모종의 선택에 상응하여 나의 현실이 변화되었을까 하는 질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어떤 지인은 나에게 만약 당시에 그 데모닉한 존재에 대해서 따라가겠다고 고백을 했다면 나는 즉사했을 것이라는 해석을 가했다. 그 해석의 정당성 유무를 너머서서 지금도 인상적인 이야기로 남아 있다. 꿈에서 내린 결단 때문에 인간의 삶이 마감될 수도 있을까? 꿈에서의 선택은 죽음마저도 감내해야 할 처절한 결단인가?

나의 꿈이 꼭 동시성에 대한 체험으로 보아야 할 소지가 있을까 하는 물음도 들곤 한다. 오히려 내가 신학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 나의 인생에 있어서 매우 건강하고 올바른 삶이 될 수 있음을 그 깊은 무의식과 셀프는 끊임없이 꿈을 통하여 요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 메시지가 꿈을 통하여 나에게 감지된 차원이라고 본다면, 이 꿈은 동시성의 문제와는 조금 다른 영역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성은 double dimension(이것이 문제이다. 융의 <동시성>을 지탱하고 있는 형이상학은 어쩔 수 없이 이원적 세게관을 전제하는 것인가? 누적적 시공간cumulative time-space continuum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상호침투적 시공간inter-penentrate time-space continuum을 이 형이상학은 전제하는가? 그것이 가능한가?) 사이의 일치를 논의하는 가설이라고 본다면, 일상적이고 인과적인 삶의 양식과는 다른 차원의 지평과, 일상적인 삶의 양식의 지평이 이 꿈을 매개로 해서 서로 의미있는 일치를 나타내고 있기에 나는 이 꿈을 동시성의 꿈으로 보아도 결코 무리수를 두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해본다. 만약 꿈에서 내가 그를 따르지 않으리라고 고백했으면서도 신학의 길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이는 동시성의 사례 가운데 중요한 의미있는 일치에 포함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문제는 남는다. 내가 꿈에서 데몬을 거부하였다 하더라도 정말 내가 신학의 길을 온전히 걸어가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져본다. 아직은 쉽사리 단정할 수는 없다. 정말 그 꿈에서와 같이 데몬을 거부하는 그 처절한 외침의 고백이 현재 걸어가는 신학의 길에서 꿈틀거리는가? 아니면 허접쓰레기의 신학 외투만을 입고 오히려 데몬을 따라가는 여정인가? 정말 물음이 아닐 수 없다.

동시성 담론은 건강하지 않은 의식적 삶을 정당화 해주는 고약한 기제가 될 수도 있음을 애써 놓치지 말아야 겠다.


1999/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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