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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24 (23:45) from 147.142.196.118' of 147.142.196.118' Article Number :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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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07. 28]  1. 종교에 대하여








첫번째, 종교에 대하여


0.

사유는 그 자체의 끊임없는 운동성을 간직하고 있다. 언어는 그 운동의 연속성을 바탕으로 출현하는 새로운 사태이다. 언어는 사유의 운동을 더욱 투명하게 기술하거나, 혹은 사유의 방향을 잠정적으로 설정해주는 좌표의 과제를 지니고 있고, 사유는 이러한 언어의 도움을 통하여 무한에 직면한 자신의 표현을 더욱 구체적이며 연속적으로 건져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사유와 언어의 긴밀한 긴장을 바탕으로 새롭게 출현하는 무궁무진한 계기는, 그 사유와 언어의 윤리적 이론적 정당성의 유무보다 더욱 우선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모든 것들은 살고자 하고 이해하고자 하며 표현하고자 하는 가장 생생한 원천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낯선 언어에 오랫동안 갇혀있는 경험을 한다면, 모국어를 통한 자신만의 언어와 사유의 생생한 운동이 그에게 있어서 얼마나 절실한지를 새삼스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유는 일차적으로 살기위한 약동이며, 언어는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1.

신학도로서, 종교에 대한 논의를 진행할 때의 어려움은, 우리가 매우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종교적인 체험과 강렬한 경험이 그저 “종교”라는 개념으로 포섭될 때, 그저 아주 건조한 절대자와 피조물의 관계에 대한 논의로 매우 추상적으로 혹은 협소하게 처리되어버린다는 점일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교를 여러 종교 가운데 한 자리로 설정하고 다양한 종교 가운데 존재하는 일반적인 유형 및 그 모델과 의미들을 연구하는 학문이 종교학이라고 전제하고 들어가면 이는 매우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논의하는 추상적 수위가 구체적인 생생한 경험을 올바른 도식을 통하여 담보해낸다면, 이는 구체적인 삶의 뿌리를 향해, 혹은 구체적인 삶의 뿌리에서부터 유래하는 신학의 자리의 의미를 더욱 확고하게 드러내어주며, 신학이 그 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미래를 향한 과제를 더욱 유용하게 제시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3.

화이트헤드의 사유는 우주 전체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근거 지워지어 있으며 그의 언어는 일군의 특정한 개별영역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일반적인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잠재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는 우리시대의 추상과 구체의 고질적인 문제를 수학-형이상학의 차원에서 오랫동안 접근하고 나름대로의 성과를 발견하였으며, 그의 사유와 언어에도 이러한 성과가 보증되고 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특히 여기에서는 오늘 읽었던, 과학과 근대세계 12장에서 화이트헤드가 기술한 “종교와 과학”에서의 종교에 대한 몇몇 단편들을 바탕으로 우리가 처한 여러 신학적 현실적 문제들을 생각하는 계기로 삼고자 이어나가고자 한다. 우리의 자료는 화이트헤드의 “종교”에 대한 몇몇 단상과 우리의 경험 그 자체가 될 것이다. 더욱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의 경험에 대한 기술을 화이트헤드의 몇몇 단상을 매개로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4.

종교는 무한한 정신에 대한 직관적 경험이며, 과학은 무한한 자연에 대한 관찰적 경험이라고 말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종교와 과학의 불편한 관계의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근원적으로 종교와 과학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두 특징적인 이해방식이며, 진리를 기술하는 유용한 방식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우리는 종교적인 삶을 어떠한 삶으로 이해하는가. 진리에 대한, 선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한, 혹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발견과 고민 가운데 종교적인 삶이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에 대한 갈급, 그리고 인류에 대한 염려와 고뇌, 배려의 모습은 종교적인 삶으로 칭할 수 있는 것들의 중요한 정서로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는 바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고귀한 가능성에 대한 진지한 탐닉이며 부단히 자기를 그 고귀한 가능성을 향해 세우는 노력이다.
그럼 과학적인 삶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몇 개의 거대한 실험기구와 테크닉에 도취한 연구실의 과학자를 과학적인 삶이라고 칭할 수는 없다. 과학은 자연의 원리에 대한 본질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인류에 유용한 관념을 그로부터 추출해내는 진지한 성찰이다. 자연에 대한 본질적 인식은 거기에만 머무를 수 없으며 오히려 자연의 일부인 인류와의 견실한 관계를 제공하고 유용한 전망을 제시하기에, 과학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향하여 있다.

5.

화이트헤드는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하고도 일반적인 두 가지 힘을 종교적인 직관력과 정확한 관찰력과 논리적 연역을 향하는 인간의 내적 추진력이라고 말한다(p.264).

이는 종교적인 직관과 과학적인 추진력이 단지 현실종교인과 과학자 캠프에만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추동하는 원형적인 두 힘으로서 더욱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직관이 직관인 이유는, 그것은 인간의 내적 원천에 잇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 내부에로부터 주어지지 않는 특별한 인간의 능력이며, 동시에 인간 내부를 향한 가장 강렬한 인식의 원천인 것이다. 직관은 이러한 이유로 근본적으로 인간의 종교적 원천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다.
만약 종교라는 개념이 인간의 내적 설명으로 도출 불가능한 영역에 대한 소극적인 기술이라 한다면, 직관은 이 영역과 관계하며 이 영역에서부터 원천을 제공받기에, 도리어 적극적인 방식으로 종교를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된다.
직관과 관계하여 축적된 인류의 너무나도 풍부한 예술적, 행위적, 신비적 경험의 사례는 미지의 지평에 놓여 있는 종교에 대한 인류의 해명을 더욱 추가시킬 수 있는 질료가 된다.
이러한 종교영역에 대한 이해와 이를 둘러싼 여러 관념의 축적은 인간의 내적인 추진력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과학이 종교적 이해와 관념의 영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로 기능하였다. 종교적 체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인류의 종교적 진리의 표현은 점차 과학적 진리의 관점에서 새롭게 검토되기 시작하였다.  

6.

우리들의 일반적 지식구조의 특징은, 우리가 중요한 진리들을 줄곧 의식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우리가 구축할 수 있는 이들 진리의 정식들은 장차 수정되어야 할지 모르는 일반적인 사상적 관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p.267).

화이트헤드의 이와 같은 언급은 종교적 진리의 표현에 대한 과학적 검토의 중요한 근거로서 의미를 지닌다. 동시에 종교와 과학의 대립의 원인을 조명해주는 단서도 제공하고 있다.
인류의 진리에 대한 표현과 지식의 자리라고 하는 것은 과거적으로는 진리를 근거로 하고 있지만, 미래적으로는 언제든지 수정을 향해 열려있는, 혹은 수정이 요구되는 잠정의 것들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표현과 지식의 구조는 일반성과 관계되어 있지만, 표현과 지식의 내용은 언제든지 특정한 시대 시대마다 그에 상응하는 탄력성을 바탕으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종교와 과학적 표현 모두 마찬가지라 보여진다.

7.

진리에 대한 표현에 있어서 실수와 모순과 논리적 오류마저도 화이트헤드는 불치의 과정에 대한 관념을 바탕으로 새롭게 해석해낸다. 그렇기 때문에 논리학 마저도 과정속에서 와해되고 새롭게 재편되어야 할 중요한 재료로 이해된다.

논리학자들에 의하면 명제는 참이든가 거짓이든가 둘 중의 하나이며 그 중간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명제가 중요한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해도, 그것이 지금으로서는 밝혀져 있지 않은 제한이나 규정을 장차 받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266-267).

형식논리학에서 모순은 패배의 징표이지만, 실질적인 지식의 진화에 있어서 모순은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이 된다. 이것은 갖가지 의견을 최대한 허용해야 할 것이라고 보는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된다(271).

8.

다시 한번 종교와 과학의 문제로 되돌아가면, 종교적 진리의 경험은 일반성을 담보하고 있지만, 여전히 시대에 제한된 미완의 표현이며 새로운 해석을 시대마다 요구받게 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과학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의 가설이라고 하는 것도 끊임없이 자기지식의 영역의 확대를 통하여 새롭게 교정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간의 종교와 과학의 대립은 사소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과장되어 왔던 면이 있으며, 혹여나 그 대립 또한 그리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상이한 이 두 관점이 더욱 세련된 전망을 확보하면서 대화하고 화해 해야할 중요한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과학의 발전에 의하여 진행되는 우리시대의 뜨거운 감자인 유전공학이나 핵의 활용, 그리고 고도의 기술을 바탕으로 구축되는 가공의 무기의 출현에 있어서 과학은 너무나 자족적이며 기고만장한 자세를 가지고 있으며, 종교는 그곳에 놓여 있는 그릇된 정신을 비판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시대는 과학적 발견과 의미 또한 그 자체로서 정당한 주도권을 행사하기 지극히 어려워졌으며 여타의 다른 경제적, 국가적 요인과 이익 앞에 과학적 발견과 그 가치가 상당히 왜곡된 방식으로 기여되는 듯이 보인다.

9.

종교의 여러 원리들은 영원한 것일 수 있겠지만, 그 원리들을 표현하는 방식은 계속적인 발전을 요하는 것이다. ...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것은, 대개의 경우 과학에서의 진보가 다양한 종교적 신념의 표현 방식에 모종의 수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부각시키곤 한다는 점이다. ... 과학의 진보에 따라 종교 또한 그만큼 유리해지도록 종교 사상이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을 할 수 있게 되어야 할 것이다(273-274).

왜 종교의 원리들을 표현하는 방식은 계속적인 발전을 요하는 것일까. 기독교의 천사라는 관념은 오랫동안 중요한 종교의 원리들로 기능해 왔다. 하지만 탈신화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현실적으로 바늘 위에 천사가 몇 마리 앉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 사뭇 그 무게를 잃어가는 현대를 살아가면서, 천사라는 관념은 신화로 밀려나간다. 그 이면에는 인간이 성취한 이성적 과학적 자의식도 한 몫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사라는 관념은 그저 유폐해야 할 쓰레기에 불과한 것인가?

베스터만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가능성”(Gottes Moeglichkeit fuer uns)으로 천사의 관념을 다시 해석한다. 이는 종교적인 핵심 표현의 의미가 각 시대 가운데에서 새롭게 요구된다는 것을 적절하게 드러낸다. 이는 종교적 관념이 더욱 시대를 관통해 가면서 감추어진 의미를 더욱 재해석 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저 그 역사와 시대가 요구하는 해석학적 요청이라는 당위보다 더 근본적인 맥락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10.

화이트헤드의 종교에 대한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즉 종교란 인류의 기본적 경험의 한 유형을 나타낸 것이라는 점, 그리고 종교사상은 발전하는 가운데 점차 정확한 표현을 얻게 되는 동시에 외래의 심상에서 탈피하게 된다는 점, 또 종교와 과학 사이의 교류를 종교의 발전을 촉진하는하나의 커다란 요인이 된다는 점 등이다.”(276)

종교도 진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과의 교류는 종교 진화의 커다란 요인이라는 것이다. 특히 종교가 정확한 표현을 얻게 된다는 것은, 그저 단순히 20세기 후반 전세계적으로 신학의 역사 가운데 등장한 여러 상황신학의 출현이 그저 해석학적 다양성에 기인한, 변경의 반란으로만 마감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종교가 시대를 향해 염원하는, 그리고 시대가 종교를 향해 염원하는 그 새로운 표현을 우리는 얻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동시에 자연과학, 사회과학, 여성학의 교류와 도움 또한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로 기능하였다.

종교 또한 일종의 모험이며 새로운 해석의 과정과 함께하는 진지한 진통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더욱 크게 보아서 “종교란 신을 찾아 나서는 인간 본성의 산물”(276)이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들어서 우리는 신을 잃어버렸다 한다. 그러나 어찌 보면 우리는 신을 더욱 가까이 찾아나가는 부단한 노력 가운데 있다는 표현이 더욱 우리의 현실을 설명하는 중요한 기술일런지도 모른다. 이전에 있었던 신이 그저 우리 앞에 놓여진 여러 피조세계의 문제들과 종교사이의 갈등 문제 때문에 그의 그림자만 우리에게 남기고 어디론가 훌쩍 떠났을 리 만무하다. 또한 빛이 바랜 이전의 종교적 관념과 표현을 헤집으면서 현대의 새로운 눈으로 신을 찾는 열정과 노력은, 시간은 결코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진리가 우리에게 주는 불가피한 과제일는지 모른다.

11.

“심히 망설여지기는 하지만, 나는 이제 내가 종교적 정신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생각하는 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란, 눈 앞에서 변천해 가고 있는 유동적 사물들의 피안이나 배후, 또는 그 내부에 있는 그 무엇, 실재하면서도 실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무엇, 머나면 저편의 가능태이면서도 최대의 현재적 사실인 그 무엇, 변천하고 있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좀처럼 파악되지 않는 그 무엇, 그것의 소유가 궁극적인 선이 되지만 결코 손에 미치지 않는 곳에 있는 그 무엇, 궁극적인 이상이 되면서도 그것에 대한 탐구가 가망없는 일이 되고 마는 그 무엇에 대한 비전(vision)이다.”(277)

인간은 어디론가 흐른다. 그러나 인간은 그 흐름 가운데에서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가치를 찾기를 소망한다. 흐름 가운데에서 불변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어찌 가능할까. 종교가 어떠한 제도와 형식과 율법을 통하여 인간에게 온전히 수여될 수 있다는 우리시대의 실증적인 발상과는 달리, 실재하지만 다 드러나지 않는 그 무엇을 고백하는 것이 종교의 본질인 것이다. 이 종교적 비전을 가슴에 품고, 그 힘을 가지고 더욱 순수하고 고결하게 나와 이웃과 인류의 조화와 평화를 궁극적으로 꿈꾸는 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인간은 그 비전을 구하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며, 삶과 생명을 던지면서 미래의 영광을 소망하는 것이다.
이는 어찌보면 일종의 지극한“영혼의 모혐이요, 도달하기 어려운 것을 향해 솟는 비상이다. 종교의 죽음은 모험의 고귀한 소망을 억압하는 데서 온다.”(278)

12.

우리는 현대문명의 강한 지지를 받고 있는 과학주의와, 종교다원주의의 시대를 걷고 있다. 이 시대의 수많은 홍역을 앓아가고 있으며, 또한 이를 피할 길이 별로 없는 듯이 보인다. 더군다나 한국이라는 다문화 공존의 특이한 공간에서는 더욱이 절실한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는 모험이며, 조화를 향한 추구이고 신의 최고의 비전을 향한 인간의 진지한 발걸음이다. 과학은 종교의 중요한 표현 형식을 더욱 증진시키고 새롭게 여는 기여를 한다. 조화는 종교의 이해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관념중의 하나이다. 심지어 조화 없는 맹목적 지향이 다름 아닌 악이기 때문이다. 조화의 관념은 종교다원의 문화를 걷는 우리에 있어도 결정적인 가치이고, 과학과 종교의 그 쓰라린 대립과 갈등의 역사를 가슴에 품고 있는 이 현실을 새롭게 들추게 하는 가치이다.

종교를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에 스며들어야 할 것은 저 무한한 영원성 앞에 서 있는 유한한 존재의 성찰, 그와 동시에 그 손에 미치지 않는 그 영원한 비젼을 향해 한번 발 벗고 적극적으로 자기를 실험하며 나가보려는 탐구정신의 지극한 정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마치 수많은 신앙의 고귀한 어른들이 그렇게 걸어갔듯이 우리도 그렇게.




7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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