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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30 (17:00) from 147.142.196.118' of 147.142.196.118' Article Number :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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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07. 29]  2. 정작 종교는 신학의 무엇?







두번째, 정작 종교는 신학의 무엇?


0.

이전의 글에 대한 타자의 린치는 없었다. 그러나 내 마음에서는 그 글들을 마음속에서 헤아리면서 상당히 불편하였다. 종교는 모험이요, 시대마다 해석되어야 할 것을 어김없이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 영원한 미지항이라는 것은 나름대로 새겨야 할 것들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논지는 상당히 부르조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인상도 동시에 들었다. 이는 나만의 비판도 아니다. 물론 문명사 전체의 관조를 통하여, 그리고 과학과 종교라는 큰 전망으로 그 관계를 조명하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럼에도 어디 한 구석이 비어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더욱이 우리의 자리는 종교와 신학의 엄연한 차이를 가까스로 무시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1.

만약 기존의 종교에 대한 논의가 신과 세계의 그저 형식논리적인 관계만을 언급하였다는 인상을 받았다면, 화이트헤드는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는 경험세계의 구체성을 바탕으로 종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종교 사이의 갈등과 인간의 죄와 가난의 문제를 조명하기에는 어려운 면이 나에게는 있었다. 더군다나, 종교와 신학의 차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뚜렷한 대답을 발견할 수 없는 면이 있었다.

오늘 만난 한스 요아힘 크라우스의 "하나님의 나라 : 자유의 나라"(Reich Gottes : Reich der Freiheit)의 종교의 문제(Das Problem der Religion, S.55-63)은 를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들을 갖게 한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조직신학적인 문제들을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계 안에서 해명하는 책의 이 부분은 종교의 문제를 신학사 안에서 접근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2.

맞다. 종교는 쉽게 정의될 수 없는 것들이다. 마치 사랑을 쉽게 정의할 수 없듯이. 종교체험은 매우 강렬한 체험이긴 한데 잘 설명이 안 되는 체험이며 심지어 비합리적인 면모까지 가미되어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화이트헤드는 종교를 과정의 관점과 진화의 관점에서 일관되고 흥미롭게 해명하였다. 그런데 헉슬리는 진화와 종교(Evolution und Religion)의 문제가 여전히 체계적으로 인식되지 않았다고 본다(S.55). 헉슬리가 말한 진화가 생물학적 진화만을 이야기 하는지, 아니면 더욱 적극적으로 화이트헤드가 강조하는 모험에 관련된 부분까지도 포함하는지 잘 판단은 서지 않으나, 사실 종교도 진화한다는 발상에는 버럭 찬물을 끼얹는 소리인 것은 분명하다고 여겨진다.

"나는 미래의 인류를 보고 있네!"(Ich sehe den kuenftigen Menschen)라는 헉슬리의 저서 혹은 번역서가 1966년에 나왔으니 화이트헤드의 발상보다는 훨씬 뒤에 나온 이야기로 보인다. 진화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한 헉슬리조차도 비교적 종교와 진화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판단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화이트헤드와 헉슬리는 다 영국태생이며 헉슬리는 왕립학회 회원이기까지 하였으니, 화이트헤드의 논지는 결코 모르지 않으리라.

물론 화이트헤드가 말한 종교의 진화의 문제는 단지 생물학적인 진화로서 이해한 면이 결코 아니리라 본다. 만약 종교가 진화한다는 화이트헤드의 발상을 적극적으로 해석해본다면, 인류의 신에 대한 이해는 매 시대의 제약을 지닌다는 것이며, 진리의 정식은 시대를 건너가면서 새로운 수정이 첨가된다는 것이리라. 만약 헉슬리가 이러한 부분마저도 용인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의 주장을 용인하지 않으리라. 혹여나 헉슬리의 진화는 단지 생물학적 진화에 제한된 개념이 아닌가 하는 판단이 들기도 하다.

3.

종교현상학의 두 주력 주자들인 오토와 레우의 종교에 대한 정의는 ‘신적 능력에 대한 체험’Erfahrung goettlicher Macht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종교는 신적 능력의 체험에 대한 ‘인간적 반응’menschliche Reaktion이다. 우리가 위에서 그렇게 피하고자 하였던 종교에 대한 재미없는 정의가 여기 이렇게 다시 언급이 된다. 한 쪽에는 신과 능력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인간과 반응이 있고. 그런데 내가 조금 가슴이 뜨끔했던 부분은 ‘신적인 능력’이라는 표현이다.

종교라 하는 것이 그저 인간적인 욕망이나 환상이나 프로그램의 산물이 아니라면, 그리고 나는 아니라고 믿는데, 저 신적인 능력이라 하는 것은 결코 말놀음이 아니라는 말이라는 것이다.

며칠동안 계속 이곳에서는 티브이에서 이탈리아 어느 곳의 화산폭발이 대거 뉴스에 등장하고 있다. 수십미터의 높이로 치솟는 그 불덩이들을 보면 평온한 대지의 관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우리 지구 심장에는 저렇게 뜨거운 것들을 품고 있구나 하는 놀라움을 느끼곤 한다. 신적인 능력이라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어마어마한 벡터적 힘이지 결코 해석학적 독해의 산물이나 가상적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고대의 신플라톤주의와 같이 그 자체의 자족을 넘어서서 부글부글 밑의 세계로 하강하여 흘러내리듯이 말이다.

종은 종치는 자의 힘만큼 울린다는 해석학적 발상도 일견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근거 없이 종이 울리는가. 아무리 종치는 자의 힘이 기고만장하고 넘치더라도 칠 종이 없거나, 종이 있더라도 저 공기가 없는 진공의 우주에서 그 종을 치면 울릴 수 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인격은 순간의 허장성세의 산물이 아니다. 오랫동안 한 사람의 일관된 의지와 소망과 경험의 결이 정련된 산물이다. 인간의 영혼은 놀랍게도 인격을 느낄 줄 안다. 말과 표현을 넘어서서. 그리고 그 인격은 말과 표현을 넘어서서 다른 이에게 전달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인격적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지식과 언어가 아직은 충분히 고안되지 않아서, 부분적으로 동양의 기 이론이나, 관상학에서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장이론이나 양자역학 혹은 다층적 위상들을 전제하는 유기체에 대한 언급, 그리고 현대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조력을 바탕으로, 이러한 잘 설명 안 되는 부분도 언젠가는 해명이 되리라 예상은 해본다.

우리가 꽃을 보면 아름답고 향기를 느끼는 이유는, 꽃 색깔의 입자가 우리의 시신경을 타격하고, 꽃의 향기 입자가 우리의 후각을 강타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실로 근거가 없는 반응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모르는 순수한 자기조직적 운동과 반응을 동반하는 예외사항도 분명히 있으리라 보이긴 한다.)

원시시대에는 자연의 풍파를 신적인 능력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원시인의 신적인 능력에 대한 영역은 현대에 들어서 많이 협소해진 면도 있다. 많은 영역들이 이성적 과학적 자의식에 의하여 밀려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저 ‘신적인 능력’의 영역을 그저 인간이 아직 이성과 과학으로 개척하지 못한 신화적 영역으로만 이해한다면, 이는 어찌 보면 종교 자체가 수상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시에 ‘신적인 능력’에 비추어서 인류의 이성적 과학적 성과를 적대적으로 생각하는 자세 또한 성숙한 종교의 성찰은 아니리라 보여진다.

종교학자나 종교현상학자는 저 ‘신적인 능력’과 ‘인간적 반응’의 복잡다단한 현상과 함수에 관심이 있지, 정작 신적인 능력에 대한 언급은 또 다른 문제로 남겨두었다. 어느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만 현대에 와서도 저 능력에 대한 경험을 많은 종교인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손을 통하여 혈루증이 치유되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눈이 열린 사람들에 대한 마태복음의 이야기의 공통분모는 마찰을 매개로, 손을 매개로 그들이 치유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특별한, 그리고 희귀한 경험이라 하더라도, 이 우주는 그 경험을 포괄하는 체계를 지니고 있고, 지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권능과 힘의 전달은 매개를 통한 마찰을 바탕으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아무리 현대인이 이러한 ‘신적인 능력’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더라도 이러한 능력이 확률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 우주는 가능성을 품는 체계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차원적 우주의 체계에 대한 이해의 가장 큰 적은 다수결적, 민주주의적 발상체계라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동시성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도 지속 내부의 무시간적 계기라는, 일상에서는 거의 무시해도 끄떡없는 그 일말의 계기에서 출현하고, 우리의 우주는 그 무시해도 거뜬할 듯한 미미한 계기를 조용히 품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종교현상학의 정의를 바탕으로 우리는 교회과 기독교를 이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본다. 교회는 이 신적인 존엄Numen의 체험에 대한 반응의 역사적 산물이다. 기독교는 예수라는 인간의 신적인 능력을 보고 고백하고 재현하는 역사의 종교이다.

4.

그러나 이 신에 대한 인간의 자세가 역으로 전도되고, 인간적인 소망과 의지를 오히려 신적인 능력을 향해 강요하기도 한다. 이 부분에 관하여는 본회퍼를 포함하여 많은 신학자가 비판을 하였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안다. 특히 루터는 이를 영적인 욕망concupiscentia spiritualis라고 하면서 매우 호되게 비판한다(S.56). 또한 가장 결정적인 비판은, 종교는 인간소망의 투사라고 말하는 포이에르바하에 와서 이루어진다. 이 한 마디 비판에 동조한 수많은 후세들은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기독교를 떠나고 있다.

포이에르바하의 종교비판, 구체적으로 기독교비판에 대한 여러 재비판이 신학적으로 존재한다. 포이에르바하의 비판은 한편으로는 종교의 본질에 대한 본질적 비판이 아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의 썩은 기독교에 대한 비판일 뿐 지금의 건강한 기독교를 보면 그 비판은 철회될 수 있으리라는 등등.

포이에르바하의 비판은 사실 크세노파네스의 안트로몰피즘에 대한 언급을 바탕에 깔고 있다. 어찌보면 진정 눈에서 소의 신은 소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포이에르바하는 추상을 통하여 획득된 개념을 구체적인 인류의 현재로부터 단절시키고, 오히려 파생적인 것이 일차적인 것으로 전도되어 버리는 헤겔의 관념적 세계관을 역으로 뒤집어버렸고 이를 계기로 맑스의 사상에 불을 질렀다. 적어도 포이에르바하의 추상과 구체의 전도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는 화이트헤드의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에 대한 언급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또한 포이에르바하의 신이 인간의 소망의 산물이라는 발상도 일견 화이트헤드의 발상과도 사뭇 연결된다. 만약 신이 인간의 소망의 산물이 아니라면, 무엇이 인간의 소망의 산물인가. 아니 무엇이 인간의 소망의 산물이 될 수 있는 것인가. 현실적 존재의 내적 판단에 대해서는 심지어 신도 어찌 할 수 없는 절대적인 영역이다. 물론 현실적 존재를 품고 있는 동시적 계기들의 지속 전체가 신이며 또한 현실적 존재를 새로운 방식으로 유인하는 가능성을 신이 갖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포이에르바하는 화이트헤드에 비해서 신의 존재를 인간의 영역 밖에 모셔두어야만 하는 강박관념이 도사렸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화끈하게 인간 밖의 신이든, 인간 내부의 신이든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화이트헤드는 크세노파네스의 이야기도 별로 틀렸다고 말하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포이에르바하의 딴지에도 마찬가지로 그럴만한 이야기라고 말할 런지도 모른다. 적어도 화이트헤드에게 중요한 것은 신이 인간 내부에 있다는 것도 인정하면서, 그 인간 내부의 신이 얼마나 인간 밖의 신을 향해 다가가고 있느냐를 문제삼은 듯이 보여진다. 인간 안의 신은 신의 결과적 본성이고 인간 밖의 신은 신의 원초적 본성이며 결과적 본성은 원초적 본성으로 결국 수렴된다는 신뢰를 화이트헤드의 체계에서는 보증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떠나서, 인간의 소망의 산물이 신이라는 발상을 비판하는 관점에 대해서는 너무나 가혹한 신학적 매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한편으로는 들기도 한다. 인간은 소망의 성취보다 오히려 소망이 더 많은 존재이다. 기쁨보다 슬픔이 많고,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가 더 많은 아이러니한 삶 가운데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소망의 대상은 신이다. 분명 신은 그가 신이라면 인간의 소망에 착색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소망을 실현하시는 분이시리라. 그러나 어린아이의 무엇을 요구하는 바램에 그저 엄격하게 그것을 구입할 수 있는 돈을 통장에 자동이체하는 분이 하나님은 아니지 않는가.
물론 우리는 히틀러와 당시 독일교회의 신에 대한 이미지와의 야합과, 현재 우리나라의 소망이 아닌 욕망으로 착색되어버린 하나님의 얼굴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소망 앞에서는 그에 따르는 얼굴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뜻을 여는 능력 있는 존재가 아닐까. 오늘 포이에르바하가 종교 비판을 언급했다면 적지 않은 우리시대의 신학이 그의 비판에 오히려 많은 동의를 표할 수 있는 구석은 결코 없는 것일까.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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