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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30 (17:03) from 147.142.196.118' of 147.142.196.118' Article Number :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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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07. 30]  3. 하나님나라의 도래=종교의 끝장?





세번째, 하나님나라의 도래=종교의 끝장?





0.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종교의 끝장을 의미한다는 대목과 주장에서 우리는 신학의 ‘본래적’ 목소리를 정면으로 만나게 된다. 원래 종교와 신앙의 관계마저도 어찌 보면 같이 놓을 수 없는 자리가 기독교 신학이 아니었던가. 하물며 크라우스의 궁극적 관심인 하나님나라와 지금까지의 고민인 종교를 연결시켜보면 이러한 도식이 결코 어려운 내용만은 아니리라고 보여진다.

일단 하나님나라는 어느 인간의 종교적 관념에 갖힐 수 없는 지극히 미래적인 것이며, 새로운 출현이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열망에서 종교가 나오지, 종교가 하나님나라를 구상하지는 않았으리라.

만약 종교가 신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반응양식이었다면, 하나님나라는 인간의 반응양식과 같은 수위가 아니라 그 나라를 열고 그 나라를 성취시킬 하나님의 행위에 관련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칼 바르트는 하나님나라와 종교의 관계를 이렇게 언급하였다(S.58).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와 종교는 심연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다.”Darum sind Reich Gottes und Religion durch einen Abgrund geschieden(KD IV, 3 1068).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의 종교는 오히려 계시에 대한 저항이며, 하나님이 그의 계시를 통하여 행동하려는 것을 앞질러버리는 인간의 계획이다. 우리에게 계시되는 것 대신에 인간 자신이 고안한 하나님의 모습을 주장하려는 인간의 시도가 다름 아닌 종교이다.(KD I, 2 329)

급진적 종교사회주의자 불름하르트는 더 나아가 이렇게 강하게 주장한다.

“하나님나라의 전진을 위하여서는 종교보다 위험스러운 것은 없다.”Nichts ist gefaehrlicher fuer den Fortschritt des Reiches Gottes als eine Religion(Chr. Blumhardt, Auswahl aus seinen Predigten, Andachten und Schriften, 4 Bde.(1925ff.).

이렇듯 바르트와 불름하르트에 있어서는 하나님나라와의 관계 안에서 종교를 조명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나라는 모든 인간적인 종교적 양식과 지식과 의도를 넘어서서 우리에게 도래하는 영역이기에,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라 하는 것은 계시된 것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인간적인 욕망의 산물이기에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다름 아닌 이러한 욕망의 사멸, 종교의 종말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1.

그제는 종교는 신을 찾아나가려는 부단한 노력이라는 찬사를 화이트헤드로부터 받았다. 어제는 기독교 밖에서 종교는 인간의 환영의 산물이라는 비판을 포이에르바하로부터 받았다. 오늘은 기독교 안에서 종교는 인간의 시도의 산물이라는 비판을 바르트와 불름하르트로부터 받았다. 가면 갈 수록 쉽게 보였던 종교의 문제가 더욱 어려워진다는 인상을 지우지 않을 수 없다.

일단 화이트헤드의 언어는 지극한 고도의 추상성과 현실을 바탕으로 한 구체성의 맥락에서 고안되었기에 청량제와 같이 신선한 맛과 새로운 눈을 열게 해 주는 측면이 있다. 종교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로 보여진다. 그저 종교 하면 머리에 피비린내나는 역사적인 장면만 연상되기에 그저 항상 주눅들고 살아가는 종교인들에게는 정말로 신선하면서도 희망을 던져주는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종교에 대한 이해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주관적인 차원에 서 있는 일반인, 지성인, 상식인들에게는 대단한 설득력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대단히 일방적인 방향으로만 종교를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더욱더 넓은 눈으로 종교의 기원과 그 의미를 섬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거침없는 필치로 기술해낸 듯한 인상을 받는다. 화이트헤드의 언어를 통하여 세계를 보다보면, 마치 드넓은 우주 은하계의 중심에 푸르게 맺혀 있는 조그마한, 하지만 우리가 사는 지구를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우주에서부터 내가 이렇게 서 있는 자리에까지 점차적으로 가까워지면서 변모되는 영상을 제공해 준다.

놀랍게도 포이에르바하와 두 신학자의 종교에 대한 비판은 인간적인 산물이라는 점에서 공유하고 있다. 종교 밖에서도, 종교 안에서도 종교가 인간과 너무 가까이 자리잡혀 있다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는 있다. 포이에르바하에 의하면 종교는 인간이 고안한 종교라는 것을 폭로함으로 진정한 종교는 환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바르트와 불름하르트에 의하면 종교는 인간의 시도가 묻어있는 의심스러운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서야 하나님나라와 진정한 계시를 만날 수 있는 것이라고. 종교의 탈각과 종교의 극복이 화해할 수 없는 두 캠프의 차이로 보여진다.

2.

지금 우리에게 문제는 무엇인가. 실마리가 잘 풀리지 않을 때에는 무조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종교는 신과 인간의 문제와 관련한다. 신선한 언어로 종교를 본 화이트헤드를 우리는 간단히 점검해보았다. 그에 있어서 종교는 신을 찾는 인간의 모험이다. 그리고 이후의 종교학자들의 이해를 잠시 헤아려 보았다. 종교는 신적인 권능에 대한 인간적인 반응이다. 거기에서 신적인 권능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해석학의 원심분리기에 와해되지 않는 벡터적 플레로마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진단을 내려보았다. 그리고 그 힘의 물살은 계속 우리 세계의 어디에서부터/어디론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물살의 계기를 이루는 종교인의 역할을 고려할 수도 있는데 우리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포이에르바하의 종교에 대한 비판, 즉 종교는 인간의 환상의 산물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인간의 환상이 아닌게 어디 있는가 하는 반론을 내세웠다. 오히려 그 환상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더욱 중요한 점임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바르트와 불름하르트의 종교에 대한 비판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거기에서 특히 하나님나라의 가장 적대적인 악역을 종교가 다 맡아서 끙끙거리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여기까지다.

3. 정리하고 나니 이제야 대충 가야할 길들이 보인다. 바르트와 불름하르트의 종교에 대한 비판은 사실 신학적 사변의 산물만이 아니고 그 당시의 독일의 정치적 격변, 그리고 그 와중의 독일교회의 타협과 변절에 대한 철저한 신학적 반응이자 신학화의 산물이라는 점일 것이다. 만약 종교에 대한 비판이 그 맥락에 있다면, 이는 이 유형과 다른 유형 사이의 추상적 사변의 성격에 대한 논의만을 진행하는 것보다, 현실관계속에서 저 유형의 의미들을 고려하는 것이 더 요구되리라. 특히 오늘의 현실관계들을 저 유형들이 얼마나 구출해낼 수 있는가를 논의함으로 그 이론유형의 정당성을 평가할 수 있으리라고 보인다.

4. 나는 종교간의 갈등이 이렇게 치열하게 진행되는지를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한국은 그나저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 또한 챙피한 사고들도 많은데, 그래도 양반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 티브이를 장식하는 많은 종교간의 갈등은 아무래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종교갈등이다. 특히 아랍쪽의 종교간의 문제와 그 갈등의 유형은 아직도 내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역사적으로 오래된 반목의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

한국도 여기보다는 양반이지만, 그래도 요즘 들어서 자꾸 여러 종교 내외적인 문제들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기독교와 불교의 갈등, 특히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배타적 폭력성이 심각하리만치 집요하게 진행되고 있다.

또한 한국 기독교의 종파주의와 교파분열은 정말 심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루터 이래 몇 백년이 넘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 독일의 개신교는 한국의 양상처럼 교파가 분열되지도 않고 조직적으로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독일교회의 대단한 저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작년인가 몰트만이 한국에 와서 한 소리가 있다. 한국교회는 독일의 기본을 배우고, 독일교회는 한국의 열정을 배워야 한다고.

한국교회는 열정이 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지극히 개인적인 종파주의나 교파분열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되었다. 사실 종파주의나 교파분열을 우리의 현실로 보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우리의 엄연한 사실이니 별로 말할 자세가 안되어 있다면, 나도 할 말은 별로 없다. 사실 찢어진 교파를 다시 꿰매자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없을뿐더러 그것은 두 배는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파주의나 교파분열의 그 원인을 헤아려보면 그저 수수방관해야 할 것들은 아니리라고 보여진다. 이 원인은 지극히 반신앙적이고 비교회적이면서 혹은 정치적인 면들과 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교파분열의 든든한 신학적 신앙적 근거는 바로 내가 고백하고 믿고 신앙하는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고, 나의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라는 착각에 기인한 경우가 많다고 보여진다. 이 배타적 신앙관과 배타적 신인식이 한국의 교파분열과 종파주의의 기저에 뿌리깊게 자리잡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의 토양에서 신학화되지 않은 신학적 주장이긴 하지만 만약 바르트와 불름하르트의 주장이 우리의 현실에서 의미를 발휘한다면, 바로 종파주의와 교파분열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신학적 근거를 제공해준다는 점일 것이다.

이성은 합의된 정신의 개인적 복귀이다. 식상한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이성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채 수 백년 우리가 뿌리 내려온 감성의 대지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직통으로 오늘의 서구문화를, 그리고 근대문화를 받아들였다. 만약 바르트와 불름하르트가 계시와 잘못된 이성의 문제를 삐집고 저 주장을 들여밀었다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계시와 잘못된 감정의 문제를 고려할 수 있는 여지가 된다. 사실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론이 서구신학과 전통에는 말빨이 잘 먹힐런지는 몰라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거리가 먼 듯이 보인다. 아니 우리에게는 별로 의미를 발하지 못하는 듯이 보인다. 그가 말한 종교는 감정과 교류한다는 주장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지극히 밑바닥부터 간직하고 있는 것들이며, 도리어 우리에게 있어서는 계시사건과 지극히 고무되어 있는 뒤틀린 감성과의 엇갈린 부닥침이 문제가 되는 것이기에 말이다.

나는 바르트와 불름하르트의 주장은 적어도 우리의 신앙공동체의 현실에서는 여전히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많은 신학운동이 해방이후로 진행되고 있고 또한 전근대와 초근대 사이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정체성을 찾기 위하여 많은 이들이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약한 고리들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5.

왜 종교인은 한편으로는 정신적으로 막나가는가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인 접근도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그랬다. 인간은 참으로 연약한 존재라고. 강할 것 같지만, 쉽게 쓰러진다고. 그 절대적인 힘과 권능에 가까이 가는 체험을 통해서 인간은 오히려 자신의 약함과 무능력함, 그리고 절대적인 은총 위에 내가 존재한다는 지극히 고귀한 통찰을 바탕으로 타자와 연대하는 삶이 종교적 성찰의 기본적인 자세라고 한다면, 어찌 한편으로는 종교와의 교감을 통하여 오히려 인간이 인간의 탈을 벗고 신이 되어버리는가. 이는 매우 놀라운 사례일런지도 모른다.

종교적 근본주의와 배타주의가 시간을 지나면서 외적으로 타종교와의 갈등을 유발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생생한 예증을 종교간의 현실을 통하여 체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며칠전에는 이단 김재준 목사가 한국에 바르트를 소개해서 바르트가 욕을 많이 얻어먹는다며, 이단이 아닌 교단에서 바르트를 소개했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어느 교수의 강의록을 읽게 되었다. 물론 학생이 임의로 정리한 강의록이라 정확한 정황은 읽지 못하지만, 장공 탄신 백주년이 된 올해가 되기까지 이렇게 밖에 한국신학이 장공을 이해하지 못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한국은 사람 키워내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깨달음이다. 욕하고 매장하는 것에 대하여 너무나도 우리 사회는 관대하며, 이와는 반대로 큰 나무의 의미를 헤아리고 그 거목 아래에서 소중한 원천을 얻고자 하는 데에는 우리 사회가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어느 나라 못지않게 탁월한 사상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듯한 사상과 사상가에 엄청난 인력과 대중적 정서와 학자그룹들이 달라들어서 고유한 사상으로 정초하고 만들어가는 이곳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함석헌과 김재준은 한국종교계와 한국기독교의 커다란 성과이며 산물인데 그저 그렇게 잊혀져가는 것이 너무나 아쉽기만 하다.

6.

그렇다면 문화다원의 상황, 종교다원의 상황에서 바르트와 불름하르트의 신학적 판단의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이 대목 또한 이전의 선판단과는 달리 새로운 해석과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판단된다. 2001년 여름 신학사상에 게재된 정승훈 박사의 “칼 바르트와 문화해석학” 논문은 기존의 해석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바르트 신학을 독해해 내고 있다. 특히 타자의 얼굴, 교회 외부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소리들에 대한 관심이 바르트의 보편 화해론을 통하여 개진될 수 있다는 것이다(pp.172-196).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와 불름하르트가 문화다원과 종교다원의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는 전초적인 신학적 기지로서 역할을 능히 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의문이 간다. 바르트와 종교사회주의에 관련한 신학논의와 자료는 너무나도 방대하게 이곳에 널려 있으며, 또한 이곳에서 이제 점차 기세를 더하며 일고 있는 포스트모던적 신학의 논의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이 훨씬 필요하다 할 것이다.

알고보니 벨커교수는 루터교 전통도 아닌 개혁교회 전통에 바르트의 유산을 받아안으면서 현대의 다양한 논의에 매우 적극적으로 뛰어들면서 신학세계를 넓혀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의 관심은 화이트헤드 사상의 신학적 접맥, 성령론, 종교철학의 문제, 그리고 포스트모던의 세계상에서의 개혁교회의 정체성 해명 등등, 젊은 나이에 상당히 치열하고 진지하게 신학작업을 펼쳐오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요며칠 벨커와 링크 교수의 논문 저서 및 자료를 중점적으로 수집하였다.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이 선생님들은 화이트헤드와 포이에르바하와 바르트와 불름하르트의 종교이해를 어떻게 바라보고 비판하는지 이제 검토해야 할 과제가 있다.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에 살아있는 책을 읽을 수 있으며, 혹은 직접 질문할 수 있는 행복한 기회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7.

종교에 대한 언급은 신적인 능력을 체험하는 살아있는 공동체에 대한 이해와 기술이기에 이는 매우 신중해야 하며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는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을 고려하면서 진행되어야 한다. 심지어 백 년 전의 선현들의 언급이 아무리 빛나도, 그것은 오늘의 현실을 전혀 구유해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이트헤드의 참신성을 바탕으로 한 거대한 구도를 통하여 이에 대하여 지극히 신선한 이해를 가질 수 있었고, 포이에르바하의 신학적 인간학의 진정한 목소리를 통하여 종교의 인식에 관련한 허실을 분명히 인지할 수 있었으며, 바르트와 불름하르트를 통하여 계시 자체로 나가지 못한 채 인간 안에 갖힌 종교의 그 치명적 약점을 신학적으로 밝혀낼 수 있었다. 그리고 간단히 우리가 처한 종교다원의 현실과, 종파주의와 교파주의의 현실을 헤아려보았다.

8. 종교라는 개념은 지극히 추상적인 수위에 걸터앉아 있기에 개념은 같을런지는 몰라도 이렇게 접근하는 자리와 맥락에 따라 서로 상이하게 논의가 진행된다. 그만큼 코걸이, 귀걸이의 오류로 빠질 경우가 지극히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난점을 피하는 경우는, 아주 구체적으로 종교와 종교의 관계와 난맥을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종교의 특성을 그 자체에서부터 인식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하리라 본다. 머리만 가지고 있으면 신학자가 아니라 기껏해야 종교철학자에 머무른다는 농담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대한 드넓은 전망 안에서 신학의 길을 가는 것, 이것은 당연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며칠 전 저녁에 우연히 읽었던 마치니와 무명이 남긴 이 구절 때문에 단지 글이 시작되었고 계획하지도 않은 단상을 남기게 된 이유가 된 것 같다.

“모든종교의 본질은 무엇 때문에 나는 사는가, 무한한 우주와 나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 속에서만 성립된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의문의 해답을 선조들의 지혜로부터 얻는다고 해도 그 모든 해답의 선택과 깨우침은 그 사람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8. 사족

독일친구들이 잔뜩 옆에 있었던 신학도서관에서 아주 우연히 만난 이 어린학생의 슬픈 글 때문에 힘들어서 혼났다. 그리고 내가 가진 불필요한 많은 것들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우리의 이웃은, 아니 우리 모든 피조세계는 여전히 신음하고 있다. 종교적 감수성은 바로 이 어린이와 같은 정서를 잊지 않고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며, 우리 이웃의 얼굴이 더욱 슬프지 않기를 바라면서 진정으로 하늘의 은총을 구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하늘의 능력을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 투명하게 건네기를 소망하는 것이리라. 이전보다 더 우리가 더욱 훈련받아야 하고, 우리가 더욱 가난해져야 하는 것... 지우들의 일독을 권한다.



『용욱이 이야기』

            사랑하는 예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구로동에 사는 용욱이예요.
            구로 초등학교 3학년이구요.
            우리는 벌집에 살아요.
            벌집이 무엇인지 예수님은 잘 아시지요?
            한 울타리에 55가구가 사는데요.
            방문에 1, 2, 3, 4, 5...번호가 써 있어요.
            우리 집은 32호예요.
            화장실은 동네 공중변소를 쓰는데,
            아침에는 줄을 길게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해요.
            줄을 설 때마다 저는 21호에 사는 순희 보기가 부끄러워서
            못 본 척 하거나 참았다가 학교 화장실에 가기도 해요.
            우리 식구는 외할머니와 엄마, 여동생 용숙이랑 4식구가 살아요.
            우리 방은 할머니 말씀대로 라면 박스만해서
            4식구가 다같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엄마는 구로2동에 있는 술집에서 주무시고 새벽에 오셔요.
            할머니는 운이 좋아야 한 달에 두 번 정도
            취로사업장에 가서 일을 하시고 있어요.
            아빠는 청송교도소에 계시는데 엄마는 우리보고 죽었다고 말해요.
            예수님, 우리는 참 가난해요.
            그래서 동회에서 구호양식을 주는데도 도시락 못 싸 가는 날이 더 많아요.
            엄마는 술을 많이 먹어서 간이 나쁘다는데도 매일 술 취해서
            어린애 마냥 엉엉 우시길 잘하고 우리를 보고
            "이 애물 단지들아! 왜 태어났니...같이 죽어버리자" 고
            하실 때가 많아요.
            지난 4월달 부활절날 제가 엄마 때문에 회개하면서 운 것
            예수님은 보셨죠.
            저는 예수님이 제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정말로 이해 못했거든요.
            저는 죄가 통 없는 사람인줄만 알았던 거예요.
            그런데 그 날은 제가 죄인인 것을 알았어요.
            저는 친구들이 우리 엄마보고 "술집 작부"라고 하는 말을 듣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구요.
            매일 술 먹고 주정하면서 다같이 죽자고 하는 엄마가 얼마나
            미웠는지 아시죠.
            지난 부활절날 저는 "엄마 미워했던 거 용서해주세요"라고
            예수님께 기도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는 모습으로
            "용욱아 내가 너를 용서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저는 그만 와락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어요.
            그날 교회에서 찐계란 두 개를 부활절 선물로 주시길래 집에 갖고 와서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드리면서 생전 처음으로 전도를 했어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구요.
            몸이 아파서 누워계시던 엄마는 화를 내시면서
            "흥, 구원만 받아서 사냐"
            하시면서 "집주인이 전세금 50만원에
            월세 3만원을 더 올려달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구원만 말고 50만원만 주시면
            네가 예수를 믿지 말라고 해도 믿겠다" 하시지 않겠어요.
            저는 엄마가 예수님을 믿겠다는 말이 신이 나서 기도한 거
            예수님은 아시지요?
            학교 갔다 집에 올 때도 몰래 교회에 들어가서 기도했잖아요.
            근데 마침 어린이날 기념 글짓기 대회가 덕수궁에서 있다면서
            우리 담임 선생님께서 저를 뽑아서 보내 주셨어요.
            저는 청송에 계신 아버지와 서초동에서 꽃가게를 하면서
            행복하게 살던 때 얘기를 그리워하면서 불행한 지금의 상황을 썼거든요.
            청송에 계신 아버지도 어린이날에는 그때를 분명히 그리워하시고
            계실테니 엄마도 술 취하지 말고 희망을 갖고 살아주면 좋겠다고 썼어요.
            예수님, 그 날 제가 1등 상을 타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시지요?
            그 날 엄마는 너무 몸이 아파서 술도 못 드시고 울지도 못하셨어요.
            그런데 그 날 저녁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 오셨어요.
            글짓기의 심사위원장을 맡으신 노 할아버지 동화작가 선생님이 물어 물어 저희
            집에 찾아오신 거예요.
            대접할게 하나도 없다고 할머니는 급히 동네 구멍가게에 가셔서
            사이다 한 병을 사오셨어요.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똑똑한 아들을 두었으니
            힘을 내라고 위로해 주셨어요.
            엄마는 눈물만 줄줄 흘리면서 엄마가 일하는 술집에 내려가시면
            약주라도 한잔 대접하겠다고 하니까 그 할아버지는 자신이 지으신
            동화책 다섯 권을 놓고 돌아가셨어요.
            저는 밤늦게까지 할아버지께서 지으신 동화책을 읽다가 깜짝 놀랐어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책갈피에서 흰봉투 하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펴보니 생전 처음 보는 수표가 아니겠어요.
            엄마에게 보여 드렸더니 엄마도 깜짝 놀라시며 "세상에 이럴수가...이렇게 고마운
            분이 계시다니" 말씀하시다가 눈물을 흘리셨어요.
            저는 마음 속으로
            "할아버지께서 가져 오셨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주신 거예요"
            라고 말하는데, 엄마도 그런 내 마음을 아셨는지
            "얘 용욱아 예수님이 구원만 주신 것이 아니라 50만원도 주셨구나"
            라고 우시면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할머니도 우시고 저도 감사의 눈물이 나왔어요.
            동생 용숙이도 괜히 따라 울면서
            "오빠, 그럼 우리 안 쫓겨나구 여기서 계속 사는거야?" 말했어요.
            너무나 신기한 일이 주일날 또 벌어졌어요.
            엄마가 주일날 교회에 가겠다고 화장을 엷게 하시고 나선 것이예요.
            대예배에 가신 엄마가 얼마나 우셨는지 두 눈이 솔방울만해 가지고
            집에 오셨더라구요.
            나는 엄마가 우셨길래 또 같이 죽자고 하면 어떻게 하나
            겁을 먹고 있는데
            "용욱아, 그 할아버지한테 빨리 편지 써.
            엄마가 죽지 않고 열심히 벌어서 주신 돈을 꼭 갚아 드린다고 말이야"
            라고 하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엄마가 저렇게 변하신 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감사했어요.
            "고마우신 예수님! 참 좋으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사랑으로 주신 수표는 제가 커서 꼭 갚을께요.
            그러니까 제가 어른이 될 때까지 동화 할아버지께서
            건강하게 사시도록 예수님이 돌봐주세요.
            이것만은 꼭 약속해 주세요.
            예수님! 너무나 좋으신 예수님!
            이 세상에서 최고의 예수님을 용욱이가 찬양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 용욱이 드림

            <이 글은 서울 글짓기대회에서 1등한 어린이의 글입니다>


           ..... http://socialethics.org 에서 퍼옴.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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