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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30 (17:33) from 147.142.196.118' of 147.142.196.118' Article Number :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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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08. 05]  4. 이마고데이와 아르키미데스의 점






네번째, 이마고데이와 아르키미데스의 점

0.

어제는 논문을 쓰는 박사과정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타이완에서 왔고 칼빈의 이마고데이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는 중이다. 그 동료는 그저 우리와 생활을 할 때에는 문제가 결코 없는 동료이다. 오히려 동양에서 온 조용한 신학도로 비추어질 뿐이다. 그러나 혹여나 신학적인 토론을 하면 매우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여 옆에 있는 이들의 눈살을 간간히 찌푸리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며칠 전에는 독터 페르난도 엔스와 토론을 하는데 몰트만의 십자가의 신학, 고난의 신학에 대해서 딱 잘라 그 신학은 제1세계의 책상에서 나온 지극한 관념적 접근이라고 ‘고난받는 아시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비판을 하더니만, 이후에는 잠시 기숙사에 들른 해방신학자 보프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정치적 해방은 완전한 해방이 될 수 없다면서 또 다시 비판해대는 것이다. 페르난도야 사람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제1세계 신학자의 콤플렉스 때문에 제3세계의 신학도에 대한 예의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였던지, 앞으로 너가 잘 하면 되겠다고 격려 반 얼버무리는 것 반으로 무마했다.

나야 나와 하는 토론이 아니어서 그저 듣고만 있었는데 어제는 우연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러한 신학적인 문제를 가지고 토론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토론하면서 며칠전에 보았던 페르난도에 대한 이 동료의 태도를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1.

나는 지금 읽고 있는 벨커의 책들과, Kreativitaet에 대한 단상을 주절주절 거리고 있는데, 그 이야기를 듣다가 내 말을 짜르면서 나의 신학이 어느 신학에 속하는지를 물어보는 것이다. 이 친구는 남의 말을 잘 끊으면서 자기의 주장과 질문만을 일방적으로 하는 성격임을 모르지 않았지만, 이렇게 다시 내가 실감나게 경험하게 되었다. 한쪽은 심문관처럼, 한쪽은 죄인처럼 말이다.

나는 아르키미디안 포인트라는 메타포를 창조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내가 생각하는 이마고데이와의 관련성을 나름대로 설명하였다. 그랬더니, 그 동료는 나의 이야기를 듣다가 새 종교를 한번 만들어 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였다. 허참, 가면 갈수록 태산이 이 상황이었다.

내가 여기에 와서 배운 것은 어짜피 대화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감정적인 발언을 들어도 얼굴 붉으락 푸르락하거나 야만적인 짐승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핏줄 하나 세우지 않으면서 조목조목 논리로 돌파해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 게임이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 용인되는 것이 이 동네의 한 특성이기 때문이다.

옛날 같았으면 책상을 박차고 나오거나, 경멸스러운 태도를 고고하게 유지하였을 터인데, 여기에 와서 인내력이 많이 늘었는지, 별로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도대체 이 친구는 왜 이렇게 대화를 하는지에 대하여 이번에 아예 자기점검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자 하였다.

2.

칼빈의 이마고데이를 공부한다는 친구가 그저 칼빈이 문자적으로만 남긴 이마고데이를 줄줄 머리에 쳐 넣으면서 그것을 다시 카피하고 울궈먹는 작업이 본인에게는 고고하고 멋쩍스럽게 보일런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지극히 해석학적인 안목과 신학적 사유의 탄력을 잃어버린 사체게임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서 덕분에 칼빈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만 동료를 통하여 더 얻게 될 것 같아서 내가 생각하는 이마고데이와 아르케미디안 포인트를 나도 지치지 않고 주절주절 거렸다.

마치 나를 새로운 사이비 이론을 숭앙하는 이로 생각하는 듯한 태도를 교정하기 위하여, 오히려 그의 지도교수이기도 한 벨커교수의 논지와 하빌리타치온 논문의 주제를 인용하고 설명하였다. 그는 과학과 신학에 관한 접근 및 이에 관한 여러 다양한 논의를 벌써 많이 발표하였고, 이러한 이유로 이 독일에서도 약간의 오해를 받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자주 미국으로 도피?하는 듯한 인상을 받을 정도로 말이다.

그 동료는 자기의 지도교수의 주장마저도 자신의 독단적인 판단을 가지고 내 팽기칠 수 있는 용기는 없기에 그저 논문을 아직 접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어물거리기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료는 포스트모던틱하게 보이는 현대적 신학논의에 대하여 아주 고까운 반응을 보이며, 단지 과학과의 조우도 신학의 불필요한 과제로 이해하고, 또한 이러한 유럽?의 신학이 자기네 나라에 유입되어 들어와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어서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현대적 신학논의가 어찌 유럽신학이 되어버렸는지도 궁금하고, 또한 이 유럽신학의 유입을 직접 자기네 나라의 공동체주의를 망친 개인주의의 중요한 발아로 생각하는지도 참 궁금하였다. 그 동료는, 우리는 중국의 놀라운 정신문명을 가지고 있기에 이를 바탕으로 서구의 문명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모종의 소명감도 언급하였다.

타이완도 중국과 갈라졌긴 하지만, 모든 것이 엇갈리긴 하였지만, 이런 경우에는 중국의 수천년의 사상을 자기네 사상이라고 우기는 것에 대해서 뭐 내가 뭐라 토달 근거는 없다. 단지 아참! 타이완도 몇십년 전에는 중국이었지 하는 생각을 불현듯 하게 되었다.

사실 안타깝게도 내가 만난 타이완 동료들은 중국에 대하여 상당히 적대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다. 한국이 북한에 대하여 연민 그리고 언젠가는 만나야 할 동족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면이었다. 그 와중에 중국의 엄청난 사상에 대한 자랑을 해대니, 말은 맞는데 별로 공감은 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창조와 관련한 시간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스티브오딘이 도식화한 동양의 시간관과 서양의 시간관의 차이과 그로 인한 사유체계 및 문명형성의 특징과 차이를 언급하니, 그 시간개념이 중국의 어느 시대의 누구의 이야기냐 하면서 또 다시 토를 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수천 년의 엄청난 사상의 역사와, 수많은 꽁쯔 등등 사상가들이 많아서 그렇게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식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말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어리석게도 질문만 받고 그 동료는 질문만 해댔다. 도대체 얼마나 자기네의 사상을 풍부하게 알고 있기에 저렇게 섬세한 도식을 가지고 나의 생각을 난도질하는가 의아해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너가 생각하는 동양의 시간관은 무엇인가? 서양문명의 근본적 형성에 기여한 서구의 일직선적 시간관이 너가 알고 있는 동양의 시간관 가운데 존재하느냐? 하고 나도 질문하였다. 자기의 조상이 많은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 대한 이해와 자기의 조상의 사상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것과는 별개이다.
동료의 대답은 ... 일직선적 시간관이 동양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동양의 시간관은 철저한 현재의 시간관이다 ... 그 정도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인 것을.

그래서 말 잘했다고, 너가 말한 시간관이 철저한 현재로 존재하는 시간관 그러나 과거와 미래를 대치해도 하나 끄떡없는 이 시간관이라면, 나는 내가 동양에서 왔어도 도저히 이해못할 것 같다고. 어찌 나의 어제와 나의 내일이 같을 수가 있냐고. 나는 어제와 내일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오늘이 철저히 다르다는 것을 체험하고 있다고. 너의 주장으로 나를 설명해보라고. 그리고 난후 난 해석학과 융의 동시성 개념과 화이트헤드의 지속개념을 다시 말하였다.

나는 후회하였다. 나에게 말을 천천히 하라며, 그러면서 하버마스는 사회학자이지 해석학자가 아니고, 동시성 현상을 하나의 종교적 엑소시슴의 현상으로 이해하고, 지속은 신학적인 개념이 아니니 별로 말할 거리도 없다는 식의 이해를 가진 동료에게 이야기를 했으니, 아니 짖어댔으니....

3.

나는 한시간여의 대화를 통하여 몇 가지를 주관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첫째, 한 개념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 개념의 맥락과 적용수위 그리고 현대적 해석의 요청까지고 고려하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성서문자주의를 많이 비판하지만, 학문의 문자주의도 상당히 경계해야 할 것들이라는 것을 지극히 실감나게 비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개념에 충실하다는 것은 그 개념에 대한 정보를 머리에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이 다른 장에서는 어떻게 번역될 수 있는지, 호환가능성은 있는지, 그리고 그저 단순한 상호호환으로 와해될 수 없는 그 개념만의 고유한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폭넓게 이해하는 것이리라.

둘째, 현재의 개인은 과거의 선현의 개념을 습득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한 개인의 내적인 의미구조에는 선현의 개념으로 번역될 수 있는 의미의 공간과 지분을 적극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잠정적으로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선현의 개념에 대한 수용을 통하여 사유의 내적 구조의 상응성 및 선현과 개인의 거리를 재단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선생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자기보다 더 훌륭한 선생은 없으며, 자기의 텍스트가 없이 어찌 그 훌륭함을 인식할 수 있는 장이 열리겠는가.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가 있기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지가 있기에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사실 정신과 의미의 세계조차도 상당한 권력작용의 장 아래에서 우리가 많이 휘둘리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지식은 지식을 통해서만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그러나 원천이야 어떻든 권력화된 지식이 자신의 본령을 망각할 때 그 의미없는 권력의 폐혜는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런 지식권력의 컴플랙스에 사로잡혀야만 하는 것일까. 이런 의미에서 나는 그 동료가 권력화된 파시즘적 지식에 상당한 피해를 입은 피해자라는 인식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다시 그 피해는 언제든지 가해의 반경을 추구하는 모종의 악순환을 겪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석화된 권력의 캠프에 은근히 안주하고자 하는 학파주의에는 정말 이가 갈리는 경험을 우리는 많이 해오지 않았는가. 더군다나 우리나라가 신학의 종주국이 아닌 변경국에 기인한 나머지 든든한 처마를 찾는 와중에 벌어지는 우리나라 학파간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이곳에 와서 나는 새삼스럽게 느꼈다. 여기는 학파도 많고 저변에 다양한 방식으로 유지되기에 그저 자기의 분야에서 열심히 파면 그만이다. 그리고 동시에 상호대화도 한편으로는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종주국에서도 별로 존재하지 않는 도 아니면 모라는 학파주의간의 저돌적 발상이 우리나라와 같은 변경국에서는 기세를 치고 있으니.

그 동료가 아무리 칼빈의 이마고데이를 머릿속에서 많이 갖고 있을 지라도, 칼빈에게 이마고데이로 불리워진 그 인간 사유의‘자리’에 대한 진지한 숙고를 가지고 있는 이라면, 심지어 그가 칼빈의 카도 모르는 자라 하더라도 그의 정신은 이미 칼빈의 이마고데이와 정신사적으로 교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 삶에서 학문도 나오고 진리도 나오고 예술이 나오지 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학문과 진리와 예술은 다시 삶으로 안착되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 문자에서 저 문자로 튀는 무한한 징검다리의 삶도 그 자체의 삶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모든 이론은 회색이요 삶은 푸른 생명나무라는 선현의 이야기가 그저 이론에 대한 경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에 대한 연구를 하는 자일 수록 이론의 허상에 조심하라는 경구로 들린다.

넷째, 이론은 여지없이 시간의 종말과 함께 그 역사적 의미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 읽고 있는 기독교사상의 그간의 글들을 보면서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였다. 50년을 보내고 60년을 맞이하는 옛적 선배들은 그 60년을 생전 처음 맞이하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새로운 밀레니움을 인생에서 두세번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미래로부터 유입되는 시대에 대한 경험은 유일회적이면서, 그러하기에 영원한 경험일는지 모른다.

이론은 바로 유일회적으로 유입되어 들어오는 시대에 대한 책임적 해석이다. 이론은 어짜피 현실에 대해서 말을 하는 운명을 갖고 있다. 아무리 이론에서 이론으로 점핑하다가 끝을 이론으로 마무리 해도 거기에는 그가 서 있는 현실과의 맥락과 밀물썰물의 무의식적인 흔적이 남겨 있는 것이다. 사회사적 성서해석이 저자와 텍스트가 품고 있는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지형을 독해해 내듯이 말이다.

그런데 시대에 대한 책임적 진단으로서의 이론이 상당히 지금 눈에서 보면 많은 오류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추억이 깃든 흑백사진과 같이 수십년 전에 기독교사상에 쓰여진 새로운 시대를 진단하는 신학적 반성과 전망을 보고나면 한편으로는 그 진지함에 탄복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적지 않은 어설픈 오류도 품고 있다는 것에 신기해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면 사이비 점장이나 점꽤나 시대를 진단하는 이론이 지닌 오류의 확률도 별반 차이 없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어쩌면 실상 그들을 그리 나무랄 근거도 없는 것이다. 실로 역사의 변화와 진보 자체가 그간 저지른 오류투성이를 안고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 말이다.

만고불변한 이론이 없다는 늙은이의 태도로 말을 하고 싶지는 않고, 현실과 미래를 재는 이론 또한 현재를 향해 철렁거리면서 유입되어 들어오는 미래 앞에서 그리 공고한 완장이나 콘크리트 벽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론의 자의식으로서 몇 가지가 더욱 첨가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자기는 지금을 비켜난 시간에서는 언제든지 쓰레기가 될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여 책임적으로 현실을 구원하자는 태도인 것이다.

다섯째, 아르키미데스의 점을 바라보는 우리의 하나님은 그 움직이는 점의 선율과 운동이 학문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든, 존귀하게 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단 김재준이 바르트를 소개했기에 바르트가 욕을 많이 얻어먹는다고 말하는 분이나, 몰트만의 신학과 해방신학을 간단히 한 마디로 해치울 수 있는 동료나 다 그 점의 운동에 기인한 창조적 활동으로 나로서도 이해되기에 별반 거기에 내 발뿌리가 걸려 넘어질 것들은 아니라고 일단 생각한다. 저기 바람에 흔들리는 풀 한포기에도 다 하늘의 뜻이 있거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직된 것은 경직된 것이고, 머물러 있는 것은 머물러 있는 것이다. 머물러 있는 것에 대한 가치를 말하기에 우리는 가야할 길이 많지 않는가. 내가 머물고자 하는 순간 나는 거기에서 삶을 마감하리라! 하는 비장한 각오까지는 필요없지만, 그래도 대가리 심층에까지 뿌리를 내린 어설픈 문자주의, 혹은 권력에 취해 있는 세포들을 하나 둘씩 깨우고, 그리고 이렇게 미래에서 유입되어 들어와 현재의 자리에서 매시간 새롭게 출현하는 사건에, 그저 낙관이나 비관만 하지 않으며 대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생각한다. 아직은 주먹의 힘을 빼거나 긴장 풀지 말고 말이다. 이렇게 살다, 책 읽다, 생각하다, 대가리에서 감전되는 것이 있으면 그것에 솔직하게 반응하고 토해내면서 말이다.

앞으로 생각해야 할 것들

창조성,


8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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