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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30 (17:36) from 147.142.196.118' of 147.142.196.118' Article Number :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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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08. 12]  7. 창조성과 하나님에 대하여








일곱번째, 창조성과 하나님에 대하여

0.

저번 글의 말미에 남겼던, 앞으로 생각해야 할 것들의 하나로 생각하였던 창조성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링크 교수는 Schoepfung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개혁신학의 전통에 입각해서 창조신학에 대한 폭넓고 개괄적인 이해를 시도하였다. 두 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루터 캘빈부터 바르트 틸리히에 이르기까지, 어림잡아 내가 보아도 개신교의 창조신학에 관련한 논의를 폭넓고 충실히 담아내고 정리한 대작으로 판단된다. 나는 링크 교수를 2년전 한국 방문 때 정미현 박사의 도움으로 인사를 드렸고, 그 후 독일에 와서도 연락을 못 드리다가 며칠 전 늦게나마 편지를 드렸다. 이곳에서의 모든 논문에 대한 준비와 여유가 형성이 되면 잠시 보훔대학에 가서라도 링크의 신학과 사상을 한 두학기 가까이서 접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리고 다른 창조성, 창조, 창조신학에 관한 몇 권의 책을 만나고 읽고 있다. 벨커 교수의 하나님의 영Gottes Geist는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책이며, 창조와 현실성Schoepfung und Wirklichkeit은 아직 번역이 안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몰트만의 Schoepung in der Gott이라는 책을 다시 보고 있는데, 이 책도 결코 간단한 책이 아니라고 보여진다. 거기에서 펼쳐지는 여러 창조신학에 관련한 전통신학적 논쟁의 과정들, 그리고 신학적 상상력을 통한 새로운 구상들은 해가 지나도 의미를 잃지 않는 것들로 보여진다. 그리고 창조와 자기조직화 - 창조신학과 자연신학의 대화를 위한 논문집Schoepfung und Selbstorganisation-Beitraege zum Gespraeche zwischen Schoepfungstheologie und Naturwissenschaften, Ferdinand Schoenigh, 1999. 이라는 책에서는 창조신학과 카오스이론, 자연과학, 생물학적 진화 등등, 흥미를 끄는 많은 주제들이 논문으로 묶여져 있다. 그리고 벨커 교수가 발표한 바르트신학과 과정신학의 관계 문제등등, 이러한 분위기의 글들을 접하고 읽고 있다. 가면 갈수록 자료와 자료가 서로 링크되면서 더욱 더 많은 자료가 밭에 엉킨 고구마 뿌리들처럼 끝도 없이 펼쳐지는 와중이라 난감해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며칠 전에 만난 기독교사상 전 자료와, 독일의 신학종교백과사전RGG의 자료들 앞에서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1.

자료를 이해해야 하는 것도 큰 과제이지만, 그 자료에 대한 접근의 자세도 그만큼 중요하리라 보여진다. 내 주관적인 인상은 창조Schoepfung, 특히 창조성Kreativitaet에 대한 논의는 비교적 우리시대에 있어서 온전히 신학적 논의의 지평 안에 흡수되어 평가되거나 혹은 철저하게 비판되고 있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이는 우리의 사유방식이 관계론적 사고 혹은 상대론적 사고에 대하여 비교적 친화력을 갖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근본적인 물음과도 관련되어 있고, 여하한 일자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신이라는 관념과 다자적 특성을 가지고, 혹은 산출해 나아가는 창조, 창조성이라는 관념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추출과 해석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신학은 구라까지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현실의 여러 문제들을 자족적인 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포괄해 내고 해석해낼 수 있는 건강한 구라적 자생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예를 들어 유태인 학살이나, 세계대전의 엄청난 문제들 앞에서, 도대체 신학의 어떠한 신정론과 창조론의 논의로 이 엄청난 비극의 현실을 구출해내고 정합적으로 해명해 낼 수 있느냐에 관하여는 조금은 회의적이기도 하다. 이 유태인학살과 세계대전의 발생은 정말 우리가 잘 생각할 수 없는 접경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에 남아 있는 전쟁의 참화에 무참히 폭격당한 흔적들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수십년이 지났어도 유태인학살에 대한 원죄의식에서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는 이 독일을 보면서 느낀 것들이었다.

2.

창조신학이 기껏해야 하나님의 현실에 대한 창조적 능력과 출현을 증명하기 위한 백그라운드로서만 이해된다면 이 비극의 문제들을 어떻게 해명해야 할 것인가. 물론 이는 신정론의 문제와 악의 문제와도 연관이 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창조신학이 기껏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통하여 이 세계에 대한 낙관적 희망의 방향으로 전개되는 식의, 이러한 방식의 창조신학의 방향성 자체에 대해서는 비교적 설득력이 없는 것이 신학적 구상이 아닌가 판단이 든다.
첫째,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에 대한 증빙자료, 둘째, 미래를 그저 낙관적으로만 그려내는 창조신학의 유아적 옹호성이 지닌 여러 오류적 가능성을 어떻게 배재하면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관건이라고 보여진다. 누구는 전쟁도 창조적 미래를 향한 중요한 계기라고 말하였는데, 그럼 전쟁도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그리고 미래는 점점 더 나아진다고 하는데, 우리의 현실을 정말 고려해본다면 나아지는 것인지 더욱 비참해지는 것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는 구석이 너무나 현존하지 않는가?

3.

창조 논의가 정말 간단하지 않은 복잡한 여러 문제들을 안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게 보인다. 특히 많은 신화와 형이상학은 이 창조의 문제를 가지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나름대로의 대답을 표현하지 않았었는가. 크라우스는 창조의 문제를 이렇게 접근하였다.

“창조”라는 주제는 조직신학의 한 분과를 일컫는다. 그러나 그 내용은 창조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신앙은 성서적 구약의 사건에서 단호하며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창조론의 시작점과 출발점은 회귀적 사변적 사상과 다신론적 혹은 유신론적 우주생성론에 대한 신화적 창작들을 마감케 한다.
Mit der Ueberschrift >Die Schoepfung< wird ein Themenbereich systematischer Theologie bezeichnet. Inhaltlich aber geht es nicht um den Glauben an die Schoepfung, sondern um den Glauben an Gott den Schoepfer. Der Christliche Glaube an Gott an den Schoepfer hat seine festen und unabdingbaren Vorasussetzungen im biblisch-alttestamentlichen Geschehen. Dieser Aufangs- und Ausgangspunkt der Schoepfungslehre setzt dem regressiv-spekulativen Denken und den mythologischen Kreationen polytheistischer oder theistischer Kosmogonien ein Ende. S.126.

즉 그리스도교 창조에 관한 논의의 출발점은, 이 세계의 창조에 대한 여러 우주생성론적 가설, 혹은 형이상학적인 물음의 영역의 출발점과는 다르다는 것이며, 동시에 창조는 그 자체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며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래서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서 질문을 해본다.

첫째, 모든 창조는 하나님의 영역의 산물이란 말인가?
둘째, 하나님과 창조의 관계를 묻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신학에 위배되는 질문인가?

4.

글로 표현해보니 첫째, 둘째 질문은 동일한 문제설정의 다른 표현 같기도 하다. 창조와 하나님을 여하간 따른 방식으로 이해해보자는 시도가 질문에 숨겨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이해해보자’는 표현은 정말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표현으로 상기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창조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한 창조신앙에서, 창조와 하나님의 관계를 묻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 질문인지를 나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질문을 던지려는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의 몇 가지의 근본적인 관심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보인다.

첫째, 모든 창조는 선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전쟁도 새 창조를 위한 과정이니 기껏해야 세계대전과 엄청난 피비린내 나는 인류의 참사를 결국 하나님의 뜻으로 돌릴 수 밖에 없는 신학적 상상력을 우리가 그냥 곧이 곧대로 받아 안야아 하는 문제인가 하는 점이다.

둘째, 제1원인에 대한 모든 신화론적, 형이상학적인 물음이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별로 관련성이 없다는 크라우스의 지적을 옹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여러 창조를 위한 진통의 과정을 그저 단순히 원인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없이 단순히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으로 나아간다고 보는 발상은 비교적 설득력이 없는 유약한 신앙고백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진통을 앓고 있는, 창조를 향해 몸부림치는 이 피조세계가 결국은 하나님의 그 큰 뜻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신앙적으로 고백하면서도 그 고백과 상응하는 우리의 이해 또한 중요하리라 보기 때문이다.

셋째, 어느 때보다 창조에 대한 과학적, 생물학적, 철학적, 형이상학적 관심과 성과가 진행되는 때라고 이해한다면, 이러한 일반과학의 창조에 대한 논의와 창조신앙에 대한 고백은 불가피하게 어떠한 정합성을 갖게 되고, 그리고 그 고백이 진리라면 모종의 정합성을 갖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학의 영역의 창조신학, 그리고 다른 영역의 창조성, 자기조직화에 관한 성과의 관련성을 탐구하는 것은 오히려 창조신학의 영역이 더욱 구체성과 설득력을 얻게 되는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여러 지엽적인 질문 다 떼고, 더욱 더 근본적으로 나에게는 도대체 이 세상에서 양으로 음으로 피어오르는 새로움, 창조에 대한 근본적 신학적 이해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그전 단순률의 논리처럼 보이는, 모든 창조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을 그저 어느 시점부터는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5.

사실 창조신학에 대한 논의는 이전에는 별로 중요하게 처리되지 않은 걸로 보인다. 몰트만의 피조물 안에 계신 하나님Gott in der Schoepfung의 서문에서는 히틀러시대에는 주로 자연신학과 역사신학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고, 창조신학은 별로 주목받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에 새로운 문제의 출현 앞에서 창조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불가피하게 요청되었고 이 맥락에서 창조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인식의 작업을 몰트만은 진행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몰트만의 제자이자 저 책에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아는 벨커 교수는 창조의 문제를 전통적인 신학논의의 지평에서 바라봄과 동시에, 흥미롭게도 화이트헤드의 주요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새로운 시대의 창조신학에 대한, 혹은 성령론에 대한 논의의 착상을 얻고 있다는 판단이 든다.

예를 들어 Gottes Geist의 전반적인 모티브로서 기능하는 에메르겐쯔(Emergenz, 번역하면 창조적 진화) 개념에 대한 그의 언급은, 아직은 분명하지 않지만 이 에메르겐쯔 개념을 앞으로 신학작업 가운데 해명해야 할 중요한 개념으로 상정하고 있다. 그는 이 Emergenz 개념이 화이트헤드, 알렉산더, 모건에 의하여 소개되었으며, 특히 신학적으로 틸리히는 그의 조직신학 3권에서 이러한 Emergenz 현상과의 대화를 시도하였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Gottes Geist, S.38).

특히 루만이라는 독일 종교사회학자도 이 개념을 중요하게 자신의 이론 가운데 적용해 나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벨커는 이미 루만의 조직이론에 대한 세미나를 저번학기에 개설한 바 있고, 신학과 기능조직이론Theologie und funktionale Systemtheorie (Suhrkamp, 1985) 이라는 책의 출간을 통하여 루만의 종교사회학을 신학과의 관련성 속에서 나름대로 관심을 표명한 바가 있다. 나는 아직 벨커가 편집한 저 조그만 책을 구하기만 하였지, 루만의 이론에 대한 논의를 직접 탐독하지는 못하였다.

6.

내가 보기에 벨커의 Emergenz 개념은 여러 곳에서 착상을 얻기도 하였겠지만 화이트헤드의 개념인 Creativity에서 많은 영감을 얻은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독일어의 번역어 Kreativitaet를 쓰지 않은 이유를 아직은 잘 모르겠다. 저 개념보다 더욱 무채색적이지 않으면서 구체적으로 활동하는 특성을 Emergenz로 표현한 것은 아닌지 짐작은 해본다. 여하간 저 Creativity 개념은 화이트헤드의 중요한 개념군 가운데 하나로 판단이 되면 또한 신과 창조에 대한 여러 생각들의 유용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창조신학이라는 독일어의 표현은 Schoepfungstheologie인데 이 창조의 Schoepfung과 Kreativitat은 비교적 많은 유사성과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는 꼭 한국어의 창조성과 창조라는 단어의 차이로 보여지기도 하며,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위의 질문, 즉 창조와 하나님의 관계를 질문하는데 있어서 이 Kreativitaet라는 개념은 많은 대답을 제공해주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Schoepfung은 하나님의 창조능력의 활동 및 그의 산물 피조물에 관련된 개념의 지평이고, Kreativitaet는 저 창조활동의 배후에서 기능하는 근원적인 원천과 관련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화이트헤드의 Creativity의 개념에 대한 기록들을 Process and Reality 및 주요 저작을통하여 다시 이해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여유가 된다면, 고대 사상부터 이 창조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었는지를 읽어보고, 그리고 도대체 기독교신관에 있어서 이 창조성의 영역은 어떻게 접맥되어 있는지, 그리고 자연과학 및 일반과학에서 주장하고 있는 Kreaitiviat는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는지를 읽어보아야겠다는 판단이 든다.


7.

아래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료 보라님이 지적한 세 가지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이렇게 고민하고 싶다.

첫째, 일단 창조성Kreativitaet은 어느 범주에 속한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해명이다. 분명 창조는 인간의 지성을 포함하여 자연 전체를 관통하며 진행되는 현상이며 그리고 심지어 화이트헤드의 발상으로 보면 신마저도 창조성과 같이 한다, 혹은 산물이다?라는 표현까지도 극단적으로 써버리니 여기에 대단한 난점이 있으리라 보여진다. 이는 창조는 하나님의 산물이자 능력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어쩌면 긴장관계로 보여지기도 한다. 물론 하나님의 창조와, 창조성을 동일화 해서는 안되지만 말이다.

둘째, 특히 창조성과 관련하여, 창조성과 맞물려 있는 존재들의 개인적인 정체성을 어떻게 확보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이 개인적인 정체성에 관하여는 상당히 머리가 아픈 문제라고 보여진다. 모든 존재들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발상이 미시적 차원에서는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가. 그러나 이러한 차원이 거시적으로 종교적인 지평, 그리고 사회적인 지평, 그리고 집단적인 지평으로 확대가 되면 쉬이 말할 수 없는 면이 연결이 된다고 보여진다.

특히 종교적인 지평에서 논의를 할 때 이는 종교의 정체성과 관련한 종교다원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나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보면 종교다원론의 기본구도는 해석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타자(타종교)에 대한 건강한 배려, 그리고 나의(우리의) 구원은 결국 하나님의 몫이라는 신앙고백의 결합형태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혼합주의와 다원주의,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를 구분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여겨진다.

또한 사회적인 지평에서 모든 이들에게 가치를! 이라는 발상과 그로 인한 개인주의(개별자의 옹호)와 민주주의적 양식(다수적 개별자의 옹호)의 출현을 우리가 역사적으로 인정하고 그 가치는 인류의 고귀한 성과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인식론적 특권을 지닌 이들, 그들은 시대의 예언자 그룹일 수 있고, 고난 받는 민중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그리스도교 공동체일 수도 있다. 이러한 가치는 전근대적인 산물인 소수의 권력집단이나 권력형태를 인류가 돌파하고 얻은 성과인 개인주의나 민주주의가 지닌 또 다른 어두운 그림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니 다원주의는 잘못 나가면 케세라세라의 부정적 담론으로 역할할 소지가 충분히 있다고 보여진다.

어쩌면 이러한 길들을 피하면서도 타자의 얼굴을 통하여 초월자의 얼굴을 발견해야 한다는, 모종의 수평적 다원론과 수직적 계시론의 결합형태로 보여지는, 레비나스류의 논의는 존재론적 다원론Sein 안에서 새롭게 지향해야 할 가치Sollen의 의미도 잃지 않으면서 나아가는 또 다른 길이라고도 여겨진다.

셋째, 신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냐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나름대로 잠정적 결론을 이런 방식으로 구상하는 것,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를 떼어네고 신의 배후에서 기능하는 영원한 질료적 성격으로 설정하면서, 동시에 세계로부터 하나님의 긴밀한 관계를 떼어내어 세계의 상대적-창조적 자율성을 바탕으로 그의 가치를 구현해 나아간다고 구상하면, 창조성과 신과 세계의 삼각관계에 대하여 우리는 비교적 다른 유용한 발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세계의 모든 비극의 원인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또 다른 신학적 비극으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성서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의 행위를 보시고 심히 탄식하시거나, 피조물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배신의 기록이 표현되고 있다.

주께서는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 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렇게 하겠다.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되는구나" 하고 탄식하셨다.  (표준새번역 창 6:7)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가 서로 배신하느냐? 어찌하여 우리는, 주께서 우리 조상과 맺으신 그 언약을 욕되게 하고 있느냐?  (표준새번역 말 2:10)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실로부터 인간의 모든 선함과 완전함을 보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자유의지와 인간적, 소극적 창조성의 산물로 인하여 저렇게 하나님이 노여워할 정도 까지도 말이다.

만약 이러하다면, 적어도 창조성을 신의 산물로 보는 구도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불가능하기에 창조성과 신과의 관계를 또 다른 관계로 가정해야 한다고 보여진다.

8.

인류의 소망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잃지 않고 그가 주신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버린다는 것은 피조물의 가장 큰 책임적 과제의 망실이다.“너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고생스러운 날들이 오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할 나이가 되기 전에,  (표준새번역 전 12:1)

동시에 피조물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성서의 가장 중요한 모토이다. 창조주는 창조주이고 피조물은 피조물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새롭게 그의 나라를 구하는 생동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오히려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여라. (표준새번역 눅 12:31a)

그렇다면 피조물의 창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또 다른 방식의 창조의 작업이다. 그러나 그 창조는 하나님의 창조를 답습한다는 것보다는 시대 시대마다 하나님의 배후에서 시대를 위하여 하나님을 통하여 추출된 창조에 대한 인간의 반응과 재창조인 것이다. 만약 창조가 그저 하나님의 속성에 불과하다고 가정한다면 시대마다의 창조의 과제는 단지 피조물의 반응에 기인한 피조물적 독해에 불과한 것이며, 또한 신은 그저 영원히 얼어붙은 곳에서 얼어붙은 창조를 세계에 부여하기에 결국은 얼음의 신을 우리는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창조가 창조주 하나님의 큰 빛에서 비추어 볼 때 그것을 창조라 말할 수 있는 것인지, 그저 피조물의 책임적 과제를 뜻하는 것인지, 그리고 모든 과제의 노력이 하나님의 선한 뜻의 섭리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인지 나에게 아직 분명하게 인지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적 맥락에 근거한 최종적으로 보이는 신학적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잠정적으로 유보 하면서 현대의 여러 창조와 창조성에 관한 신학적, 이론적, 미시적 논의를 접근하면서 이에 관한 대답을 찾고자 한다.


앞으로 생각해야 할 것들

화이트헤드의 Creaitivity 개념,


탄피 1

어느 선배님의 여러 조언에 대하여 정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내가 몇 주전에 쓴 글 글을 쓰는 자와 읽는 자 때문에 선배님의 이름이 "어느선배"로 낙인이 찍혀져서 계속 그 이름으로 글을 올리고 계신데, 나라도 이름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벌써 아는 분들도 있겠지만, 독일 마부르크에서 경제윤리를 전공하고 계시는 신원일 선배님이시다. 내가 독일에 와서 선배님을 통하여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아직 기회가 되지 못해서 한번도 만나지 못하였지만, 조만간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러한 충고와 비판이 얼마나 사람을 생동감 있게 하고 눈을 틔우게 하는 것인지 실감나게 느끼고 있다. 한국에 있었을 때에는 나를 눈물 핑돌 정도로 아주 따끔하게 비판해준 몇몇 선배와 선생님들이 있었다. 행복하게도 여기에 와서도 이렇게 선배님을 만날 수 있어서 대단히 기쁘다. 나는 메저키스트가 아니다. 그저 생이 뿌리에서부터 흔들리는 경험, 예를 들어 주위의 친구들과 지인들의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한 나머지, 학문의 과정에서 그리고 생활의 과정에서 여러 부족한 것에 대한 비판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조금은 헤아리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학문의 그 길은 어정쩡한 친교동호회의 성격만이 결코 아니리라. 조만간 신 선배님을 꼭 만나뵙기를 바라면서.

탄피 2

위의 글에 대한 더 근본적인 속이야기를 해야겠다. 앞으로의 신학작업에서 신과 자연과 인간의 ‘친교동호회’적인 기술로서 대충 창조신학과 창조론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근본적으로 창조와 신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피비린내나는 역사에 대한 점검, 그리고 별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사실적인 접근을 시도하고자 하는 노력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일단 링크의 대작 창조를 속속들이 탐독하는 작업, 그리고 바르트의 창조론을 탐독하는 작업, 그리고 창조에 관한 여러 신학적인, 철학, 자연과학적인 학위논문과 단행본을 탐독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것은 바로 나 자신의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문제제기 없는 독서라 하는 것은 관성적인 지식의 습득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나의 문제제기와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매우 필요한 것이라 생각하여 이렇게 글을 남기는 지도 모른다.

탄피 3

어제는 독일의 제1방송 ARD에서 미국최신외화와 독일영화를 연속적으로 방송해 주었다. AV 시스템은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큰 모니터와 오디오, 스피커가 그럭저럭 구비된 것도 모르고 그저 옆의 구식티브이만 주로 보다하다가 오늘은 두 편의 영화를 허접 AV 시스템으로 접하였다. 영화관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감동은 사실 상상 이상으로 컸다. 헐리우드식의 그 큰 스케일에 비하여 유럽영화는 작은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아기자기한 정서의 변용과 탄탄한 스토리 전개에 상당히 매력을 느꼈다. 흥미로운 것은 전의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그 큰 비행기가 통째로 사고나는 스케일이었지만, 어제 본 유럽영화에서는 자동차 사고도 부딪히는 시늉만 내고 음향효과만 동원하지 접촉사고를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었다. 앞으로 주말의 좋은 영화는, 특히 유럽 영화는 의식적으로 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들의 영화는 감정 선의 흐름도 어찌 보면 대단히 논리적인 맥락을 가지고 특이하게 운용되고 있다는 인상도 받았다. 그러기에, 머리를 요구하는, 게다가 외국어로 된 영화였지만, 여러모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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