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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04 (16:26) from 129.206.82.102' of 129.206.82.102' Article Number :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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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08. 30]  8. 과정과 실재에서의 Creaitivity












여덟번째, 과정과 실재에서의 Creativity


0.


창조성을 둘러싼 질문은 시간이 지나면서 몇 가지로 조금씩 어느 방향으로 요약되며 구체화 되는 듯 하다. 일단 새로움, 창조라는 것이 진정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디에로부터 그 창조성은 세계로 흘러 들어오는가? 창조성은 신과 어떠한 관계인가? 그저 창조는 신에 능력에 귀속되는 것들인가. 혹은 창조성과 악은 어떠한 관계인가? 그리고 창조성과 창조는 어떠한 관계인가? 그리고 세세한 관련성으로는 창조와 사랑, 창조와 시간, 창조와 정신성에 관한 짤막한 물음들이다. 그럼에도 질문은 여전히 분명한 타격의 대상을 향해 방향잡혀져 있지 않은 인상이다.

내가 왜 이전 글에 다음 생각해야 할 것들로 Creativity를 염두 했는지 후회를 많이 하였다. 펑펑 놀아도 분에 안찰, 금싸라기 같은 방학시간의 2주일을 이 문제 때문에 옴짝달싹도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과정과 실재에 제시된 창조성에 관련한 본문을 원서와 번역서를 찾아서 읽고 입력하면서 30여 페이지로 정리한 성과는 건졌지만 말이다. 독일어 PR은 부분적으로 첨가했지만, 앞으로 다 첨가해야 하리라. Creativity에 관한 원서 본문이 일본 화이트헤드학회 인터넷에 있었다는 사실이 작업 말미에 번뜩 생각이 났지만, 직접 입력하면서 시간들이면서 생각하는 기쁨에 만족해야만 했다.

1.

일단 과정과 실재 전편에 흐르는 <창조성>을 읽으면서 생각이 들었던 것은 역시 화이트헤드의 개념군들은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구도와 바탕 위에서 축조된 일련의 구상들이라는 점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화이트헤드의 창조성이라는 개념과 신학에서 언급하는 창조라는 개념이 직접 일대일로 상응되거나 쉽사리 연결될 수 없다는 점이다. 창조자 하느님 신앙에 대한 진술과 해명이 창조에 관한 신학적 접근이라 한다면, 내가 PR에서 읽으면서 느꼈던 창조성이라는 개념은 이 구체적인 실상에 대한 지극히 진지하고도 치밀한 형이상학적 진술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가 뿌리내리고 사는 현실 속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진통하면서 신음하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그 진전과 모색을 멈추지 않으려 하는 우리 우주시대의 자화상 앞에서, PR의 창조성에 관한 논의는 상당히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설명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PR의 다음과 같은 근거에 기인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내장의 통증이나, 시신경의 작용이나, 텔레파시나, 돌의 존재양식은 어떠한가 하는 이딴 식의? 현실에 굳건히 바탕을 두고 있는 아주 구체적인 인식의 관심부터 큰 종교적 형이상학적 사유를 PR은 아우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나는 글들을 읽으면서 몇 년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은 은퇴하신 오영환 교수님과, 문창옥 박사님의 배려로 연대 대학원 과정철학 세미나를 참여하였었다. 그 두세 시간의 세미나에 참여하면 좋지 않은 나의 시력이 금새 2.0으로 예민해진다는 인상을 나는 종일 받았었다. 사실 우리 우주시대의 인류가 발견하고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자그마한 요소보다 더 작은 관념인 actual entity의 운동에 관한, 대단히 마이크로한 설명과 섬세한 기술들에 대한 논의에 완전히 나의 사유가 말려들어가다 보니 이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길게 자 란 손톱 아래에 기생하는 손톱 때들도 수 십개의 마이크로한 군단들이 이합집산하여 자기의 세력을 시간을 거쳐 성공적으로 재생산하는 Society로 보이니 말이다.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 세미나를 마치고 백양로를 가로질러 버스를 타고 학교 기숙사로 돌아오는 와중이었다. 버스는 여전히 많은 이들로 붐비고 있었고 나는 햇살이 비치는 창가편 좌석에 앉아 있었다. 버스는 빠른 속도로 가로수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 버스 안에서 조용히 지나가는 가로수의 그림자와 그 그림자 사이에 햇살이 서로 경합하듯 내 어깨에 지긋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눈에 보이는 저 풍경, 그리고 도시 전체, 혹은 우주 전체의 스케일이 바로 actual entity들의 창조적 약동들임을 생생하게 느끼게 되었다. 지금도 잘 잊지 못할, 그 장엄한 순간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생각보다 복잡한 맥락과 연루되어 있는 듯 하다. 다시 말해서 화이트헤드가 새롭게 구상한 대단히 마이크로한 관념과 명제를 통하여, 이전의 언어로는 아직 새롭게 해석해내지 못하였던 경험의 생생한 의미를 성공적으로 구출시켜 준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2.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PR의 창조성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가장 구체적으로 틀리면 복잡하지 않은 경로를 통하여 오류를 쉽게 수정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하기에 되도록이면 복잡한 관념과 문제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내적으로 설명할수록 거기에서 야기되는 어려 비정합적인 문제들을 나중에라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특히 이는 추상적인 관념들에 대한 이해를 시도할 때에 매우 중요한 방법론이 아닌가 여겨본다. 틀려도 구체적으로 틀리는 것,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PR 본문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배경에 대한 전체적인 고려와 더불어 가장 구체적으로 행할수록 유용한 방법이리라 생각해본다.

3. 창조성과 궁극자의 범주
PR에서는 4개의 범주가 나오고 창조성은 이 4개의 범주영역 가운데 궁극자의 범주에 속해 있다. 궁극자의 범주는 창조성, 다자, 일자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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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성, 다자, 일자는 동의어인 사물, 있는 것, 존재의 의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궁극적인 개념이다. 이 세 개의 개념은 궁극자의 범주를 완결지음과 동시에, 보다 특수한 모든 범주의 전제가 되고 있다. PR. 7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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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성>은 궁극적인 사태를 특징지우는 보편자들의 보편자이다. 그것은 이접적 방식의 우주인 다자를, 연접적 방식의 우주인 하나의 현실적 계기로 만드는 궁극적 원리이다. 다자가 복잡한 통일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사물의 본성에 속한다.
<창조성>은 <새로움>의 원리이다. 현실적 계기는 그것이 통일하고 있는 <다자>에 있어서의 어떠한 존재와도 다른, 새로운 존재이다. 그러므로 <창조성>은 이접적인 방식의 우주인 다자의 내용에 새로움을 도입한다. <창조적 전진>이란 그 원리가 그 창조성이 만들어내는 각각의 새로운 상황에 적용되는 것을 말한다.

<공재적>이란, 여러 종류의 존재가 임의의 한 현실적 계기 속에 공재하는 여러 특수한 방식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일반적인 술어이다. 따라서 공재적이란 개념은, <창조성>, <다자>, <일자>, <동일성>, <다양성>의 개념들을 전제하고 있다.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원리는 이접적으로 주어진 존재들과는 다른 또 하나의 새로운 존재를 창출해 내는, 이접에서 연접으로의 전진이다. 이 새로운 존재는 그것이 찾아내는 <다자>의 <공재성>인 동시에, 또한 그것이 뒤에 남겨 놓는 이접적인 <다자> 속의 일자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그 자신이 종합하는 많은 존재들 가운데 이접적으로 자리하게 되는 새로운 존재인 것이다. 다자는 일자가 되며 그래서 다자는 하나만큼 증가된다. 존재들은 그 본성상 접합적 통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는 이접적인 <다자>인 것이다. 이 궁극적인 것의 범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실체>라는 범주를 대체한다. PR 7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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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궁극자의 범주인 창조성, 다자, 일자는, 우리 세계가 과정적이며 진행한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이해하게 한다. 이 범주에 대한 이해를 진행함에 있어서 몇가지 필요한 사변적 도구가 있다면 첫째는 철저한 동시적 현재의 세계, 혹은 우주의 횡단면인 지속의 세계에 대한 상상이 요구된다고 보여진다. 이는 어거스틴의 순수한 현재의 시간이라는 관념과도 유사한 맥락을 타고 있다.
그리고 actual entity를 인간 뿐만이 아니라 모든 미시적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양식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독일기준으로 2001년 8월 24일 오후 1시 5분 12초에는 동시적으로 이 우주의 수많은 현실적 존재들이 이 현재라는 아주 날카로운 칼날 위에 한 줄로 쭉 서 있다. 나의 가족, 부모님, 친구들, 동료들, 아는 이들이 이 순간에 동시에 우주에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동시적 존재이기에 서로가 서로를 파악할 수 없다. 동시적 존재 사이의 파악은 시간의 소요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내가 태양을 이해하려면 8분 30초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고 현재의 태양은 8분 30초 전의 태양인 것이다. 내가 한국의 가족과 전화를 하면 영점 몇 초의 시간차가 소요되는 것이며, 가족의 목소리는 영점 몇 초의 과거의 목소리가 현재로 유입되어 들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시적 존재들 사이에는 연대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시간을 타야만 연대성이 성립되는 것이다. 철저한 동시적 세계에 놓인 지속의 모든 구성원은 서로가 서로를 파악할 수 없는 완벽한 따로국밥들이다. 이는 이접적이면서 <다자>적 상황이다. 그저 현실적 존재들이 존재의 감옥 안에서 바글바글 자기목소리만 내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원리인 창조성을 바탕으로 한 미래로의 전진은 이러한 <다자>적 상황을 여하한 <일자>적 상황으로 바꾸어 놓는다. 나라는 현실적 존재는 내적으로 나의 다자적 과거를 주체적으로 파악하고 받아내어 새로운 <일자>를 이 순간 구현해 내고 있다. 외적으로 나라는 현실적 존재는 나의 주변의 사회와의 교류를 통하여 그것을 주체화하고 다시 <일자>화 하여 구현해 내고 있다. 이렇듯 우리 우주는 순간 순간 다자적 국면에서 일자적 국면으로 전진되는 상황이고, 그것은 과거의 것이 현재에서 받아 안으면서 과거와는 새로운 방식으로 현재를 경험하고 현재에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돌도 자기를 끊임없이 시간속에서 와해하지 않으면서 저렇게 자기를 지켜내는 것이다. 내 옆에서 어제 밤에 나를 괴롭혔던 파리 한 마리는  창조성을 기반으로 한 시간을 통한 주체적인 존속에서 비교적 실패를 경험하고 더욱 큰 창조성의 원리에 포섭되어 지금은 저렇게 말라 비틀어져 책상 앞에 죽어 있다. 며칠 있으면 더욱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해가면서 앞으로는 대기의 먼지로 사라지고 말겠지.

이 창조성, 일자, 다자의 관념은 PR 구상의 전체적인 관계성에 거의 완벽하게 맞물려 들어가고 있으며, 우리의 현실세계의 원리를 일반적으로 표현해 줄 수 있는 궁극적인 개념으로 보여진다.

사실 현재 출현하는 존재들은 새롭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고등한 유기체의 고도의 정신작용을 통한 지성의 단순화의 작업에서는 요즘 우리 한국을 종일 시끄럽게 하는 거지같은 언론사와 같은 패거리 집단에 대하여서는 아주 간단하게 그들에게는 새로움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고 또 이게 가능한 언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등한 유기체인 인간 이성이나 뇌의 복잡다단한 매커니즘을 거친 짜증스러운 평가와는 달리 형이상학적 가정 하에 그 거지같은 넘들을 본다면 그들도 결국 건강하든 망칙하든 모종의 새로움을 끊임없이 부단히 창출해 나가는 현실적 존재들이라고 말하여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심지어 날파리들이 저렇게 시간과 더불어 날라다니는 것도 엄청난 활동성을 바탕으로 한 창조성의 산물인데 말이다. 그렇게 좋게 봐주자. 이렇게 언론 패거리들처럼 ‘윤리적으로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계속 재생산하고 복재하는’ 존속하는 Society에 대한 해석은 이후의 문명론과 관련하여 해석해야 할 여지들로 보여진다.








4. 창조성과 신의 문제

내가 처음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창조성은 모든 신의 산물이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본문의 논의가 흥미롭게 제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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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철학이론에는 우유성에 힘입어 현실적인 것이 되는, 어떤 궁극자가 존재한다. 그것은 오직 그 우유적인 것들의 구현을 통해서만 그 특성이 규정될 수 있는 것인데, 그러한 우유성으로부터 단절될 때 그것은 현실성을 잃게 된다. 유기체의 철학에서는 이런 궁극자를 가리켜 창조성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신은 그것의 원초적인 비시간적 우유성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이나 절대적 관념론 등의 일원적 철학에서는 이런 궁극자가 신이며, 이와 동등한 의미에서 <절대자>라고도 불린다. 그러한 일원론적 도식에 있어서는 궁극자 속에, 우유성에 돌려야 할 것을 초월하는 최종적인 어떤 <탁월한> 실재성이 부당하게 허용되어 있다. 이와 같은 일반적 관점에서 본다면 유기체의 철학은 서아시아나 유럽의 사상보다는 인도나 중국의 사상의 기조에 더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후자 쪽에서는 과정을 궁극자로 보는데, 전자 쪽에서는 사실을 궁극자로 보고 있다. PR 56(7) * 오영환 역, 괄호 안은 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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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언급되는 accident의 번역인 우유성은 논리적 개념이니 우리의 일상적인 용어로 바꾸어본다면 우연성, 혹은 우연이 될 것이다. 요는 우연에 힘입어 현실적으로 되는 측면이 있고, 이러한 궁극자를 화이트헤드는 창조성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연적 사태로 책임을 돌려야 할 것을  일원론적 도식에서는 신에게 모두 지급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대비되는 것은, 일원론적 철학에서의 궁극자가 신이라면, 유기체의 철학에서의 궁극자는 창조성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신은 창조성의 비시간적 우유성>God is its primordial, non-temporal accident이라는 점이다. 신은 창조성에 기인한 원초적인 무시간적인 우연의 산물이라. 신학도인 나에게는 정말 기막힌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몇 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지만 가장 나에게 중요하게 다가오는 시사점은 일단, 화이트헤드가 PR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창조성과 신을 일단 따로 떼어놓고 이 둘의 관계에 대하여 고찰해 보자는 시도로 보여진다. 이에 대해서는 몇 년전 Process Studies에서 읽었던 데미우르구스 신화와 관련된 논문과도 연결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 보여진다.

나는 화이트헤드가 왜 창조성과 신의 긴밀한 관계, 혹은 신의 질료라 그저 단순히 동의할 수 있는 창조성을 이렇게 다시 배치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오랫동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PR은 수학과 물리학의 긴 연구 여정을 거쳐 하버드에 돌아온 후 거의 70의 나이에 그의 모든 학문적 연구와 경험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산물이기 때문에 어느 한 잣대로 간단히 도식화 할 수 없는 면이 있다고 보여진다. 그럼에도 내 자리에서는 창조성, 신에 관한 논의를 주관적으로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세상은 어떠한 논리와 이름으로도 가두어 둘 수 없는 궁극적인 새로움, 창조성, 이러한 것들이 근원적으로 밑바탕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생성의 철학이 근거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일런지도 모른다. 이는 직관적인 발견일런지도 모른다. 근본적으로 존재는 다름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화이트헤드의 발상과 정확히 맞물린다. 그에게 창조성은 신만큼 원초적이면서, 혹은 신보다 더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질료들이다. 화이트헤드에서 신은 존재의 범주이고 창조성은 궁극자의 범주로 설정해 놓았을 만큼 말이다.

둘째, 흥미로운 것은 궁극자의 범주로서의 창조성이라는 도식 자체가 바로 자기의 형이상학을 지탱해주는 궁극적인 근거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말장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의 우주에는 새로움이 끊임없이 제공된다는 저 사변적 발상의 근거를 추적해 들어가면서 우리는 몇 단계를 돌파하게 된다. 현실적 존재, 신, 명제, 등등, 그리고 결국 맞닥뜨리게 되는 지점은 바로 궁극자의 범주, 즉 존재도 아니고 오히려 모든 존재들이 관여하고 있는 근본적인 관계성의 기술이라 할 수 있는 다자, 일자, 창조성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과정형이상학이 증명해야 할 내용이 아니라, 이 형이상학의 궁극적 근거가 되는 지점의 것으로 보인다.

셋째, 신이 창조성의 비시간적 우유성이라는 것은, 뒤집어 보면 신은 창조성을 제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신과 창조성의 관계에서도 존재론적 원리를 조심스럽게 요구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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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 원리는 결단의 상대성을 주장한다. 여기서 결단의 상대성이란, 그것에 대해서 결단이 내려지는 현실적 사물과 그것에 의해서 결단이 내려지는 현실적 사물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PR 1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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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 의하여 제약된 신 배후의 창조성은 신 앞에 대칭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와의 관련성을 신을 매개로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는 창조성의 영역을 신에게 모두 돌리거나, 혹은 세계의 창조적 전진의 영역을 신에게 모두 돌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특히 궁극자의 범주의 요소인 ‘다자’가 ‘일자’의 통일속에 결합해 들어가는 ‘창조적’ 과정을 화이트헤드는 합생Concrescence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현실적 존재의 합생의 과정에서 신의 역할과 창조성의 역할을 아래와 같은 긴 구절을 통하여 설명하고 신과 창조성에 관련한 오해의 소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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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생 과정의 근거 내지 기원은 우주 내의 다수의 여건들, 즉 현실적 존재, 영원적 객체, 명제 그리고 결합체이다. 그 합생에서의 각각의 새로운 위상은 느낌의 실재적 통일성의 지배적 증대에 따르는, 단순한 명제적 통일성의 후퇴를 의미한다. 잇따라 일어나는 각각의 명제적 위상은, 그 실현을 촉진하는 느낌의 창조를 위한 유혹이다. 어떤 의미에서 각 시간적 존재는 신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 정신적 극에서 생긴다. 그것은 신으로부터 자신의 토대를 이루는 개념적 지향 ? 그 현실 세계에 관련되어 있지만 그 존재의 결단을 기다리는 미결정성을 수반한 개념적 지향 ? 을 이끌어낸다. 이 주체적 지향은 그 존재의 계속되는 수정 속에서, 물리적 느낌과 개념적 느낌간의 상호 작용의 계속되는 위상들을 지배하는 통일화의 요인으로 남는다. 존재의 그러한 결단은, 그 합생의 위상에서 새로움이 생기기 이전, 발생의 초기 단계에 있는 피조물에게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은 그 나름대로의 부연 설명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부연 설명으로 시간적인 현실적 존재의 최초의 위상은 물리적이라는 학설이 회복된다. 여기서 <물리적 느낌>은 다른 현실태에 대한 느낌으로 정의된다. 만일 이 다른 현실태가 자신의 개념적 느낌에 의해 객체화되고 있다면, 문제되는 주체의 물리적 느낌은 <혼성적>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최초의 위상은 그 합생에 대하여 <주어진> 우주에 직접 관련되는 신의 개념적 느낌을 통한, 신에 대한 혼성적인 물리적 느낌이다. 이로부터 개념적 평가의 범주, 즉 범주적 제약 IV에 따라, 그 주체에 있어서 신의 개념적 느낌의 여건과 평가를 재현하는 파생된 개념적 느낌이 있게 된다. 이러한 개념적 느낌이 앞의 진술에서 언급한 최초의 개념적 지향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은 각각의 시간적인 현실적 존재의 창조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우주의 궁극적 창조성이 신의 의지에 돌려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PR 408(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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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서 우주의 궁극적 창조성을 과다하게 이전에서는 신에게 부과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창조성은 존재가 아니고 현실적 존재들의 궁극적인 사태를 특징짓는 보편자들의 보편자이다. 도대체 그렇다면 저 창조성은 어디에서부터 출현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화이트헤드도 사실 창조성을 자신의 사변의 궁극적인 물음의 영역인 궁극자의 범주에 묻어버렸기에 이러한 것들은 질문이 될 수 없는 것들인가. 그리고 아주 거칠게 궁극자의 범주와, 신과 관계한 창조성의 문제를 스케치 해 보았는데, 이러한 당당하게 현대의 사고로 부활한 고도의 고태적 신화적 상상력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가면 갈 수록 쉽게 도달할 수 없는 먼 길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특히 우리의 신론, 창조론과 어떻게 연결시켜서 재음미 할 수 있을 것인가.  

의도적인 이유도 있지만 PR에 대한 신학적 반성과 비판을 시도한 세컨더리한 신학논문 및 작업을 아직 접해보지는 않았다. 아직은 때가 이르다는 생각에. 시간이 지나면서 저러한 논의들이 신학적 사고와 일말이나마 연결이 맺어질 수 있으려면 PR에 대한 대단히‘창조적’인 연결고리를 적극적으로 구축해야 하든지, 아니면 양쪽에서 서로 반대쪽으로 끌고 가려는 힘에 의하여 내 사유의 몸뚱아리가 가운데서부터 쫘악 찢어지든지, 아니면 그저 쓸데없는 형이상학적 사고라고 간단히 폐기처분 한 후 안심을 하든지 하는 방법 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여하간 앞으로 갈 수 있는 한 가보도록 해야겠다.

탄피 1

오늘 링크 교수님으로부터 반가운 답장이 왔다. 이 답장은 창조에 관련한 링크의 사상과 대작들에 대하여 아주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하는 신선한 촉발점이 되었다.

탄피 2

조선일보가 이제는 망령든 일부 종교계를 거점으로 핵분열을 가하려는 사아가지 없는 처사에 분노하였다. 거기에 편승하는 그 집단들도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근본주의의 근본적인 씨앗들을 뿌렸던 백년 전 원조 미국과 못난이 부시를 같이 놓고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여나쁜넘들~ 게다가 요즘에는 주5일 근무제를 반대하고 있다는 소식에 정말 시계를 꺼꾸로 돌려도 너무나 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조금 잘하자는 일에 이렇게 맨날 발목만 붙잡고 있으니...

탄피 3

의승이의 배려로 Hirschberger의 Geschichte der Philosohie CD를 구했다. 이제 이 자료도 지금 자료와 병행하여 같이 탐독해야겠다. 바르트의 KD CD가 독일 어느 구석엔가 존재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전집보다는 CD가 훨씬 자료검색에 유용하니 언젠가는 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탄피 4

융의 전집 번역서 [정신요법의 기본 문제]가 한국에서 한권 출간되었다. 정말 기쁜 소식이다. 이를 계기로 전집이 빠른 시간 내에 온전히 출간되기를 바란다. 바르트의 KD도 번역이 되면 한국 신학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오리라 생각한다. 요즘 나도 딱딱한 낮과는 달리 밤이면 융을 보고 있는데, 어찌 보면 융도 만만치 않게 딱딱하다. 그러나 대단히 진지하고 겸손하다. 아니 내가 알고 있는 이들 중에 가장 진지하고 겸손한 사람 같다. 맨 날 모른다는 이야기만 매일 밤 나에게 하고 있으니.

탄피 5

방명록에 정형주 목사님 교회에서 봉사하셨던 전도사님의 글을 보고 돌아가신 목사님 생각에 목이 잠겼다. 햇살 따스한 날, 이 햇살 선생님도 같이 나누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우리도 언젠가는 목사님께로 가서 반갑게 만날 수 있겠지.

탄피 6

두어달 방학이 남았다. 한국은 개학이 며칠 안남았겠군. 학교의 동료들은 방학 잘 마무리 하고 다시 힘써 일하자. 그리고 교회와 사회에 있는 동료들도 뜻하는 바의 선한 일들이 하나님이 주신 창조성을 바탕으로 하여 생명력 있게 전진하기를.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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