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iothek zum Wissen





2001/11/05 (21:05) from 129.206.82.104' of 129.206.82.104' Article Number : 99
Delete Modify 전철 Access : 5328 , Lines : 277
[2001. 10. 08] 10. 시각화, 창조성, 불멸





열번째, 시각화, 창조성, 불멸


시각은 한 고등한 유기체 앞에 펼쳐지는
자연과 세계에 대한 접촉과 수용과
판단의 결정체이다.

일단 비동시적인 계기들을 품고 있는
저 자연의 다양한 사태를 동시적 국면으로
유입시키는 시각화 자체가
창조적 메카니즘의 힘겨운 산물이다.

창조의 여러 기능의 하나가
비동시성의 동시화임을
여기서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창조는 비동시성의 동시화이며
소멸은 동시성의 비동시화이다.

또한 위의 경우와 같은 시각화에 대한
이미지 데이타들의 처리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그 평면적 이미지를 나름대로 독해하고 해석하며
거기에서 입체적 의미를 생산하는 또 다른
정신의 활동도 매우 창조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비동시성의 동시화라는
대단한 압축방식을 동반한 내 앞의 평면적 이미지와
내 안에 다른 방식으로 시공의 역사가 저장된
입체적 이미지들과의 매핑의 과정 속에서
현재의 의미는 창발적으로 출현하는 것이다.

나의 실존은 나의 과거의 시공적 기록이다.
나의 시각은 내 주위의 다차원적 세계에 대한
시각을 매개로 한 주도적 해석이다.

나의 현재는 실존과 시각이 만나는 필드이며
이 현재의 의미는 시각과 실존의
다층적 교감에서 출현하는 산물이다.

이 프로세스는 한 계기에 대한 서론적 분석이며,
만약 이 계기의 지속에 대한 분석을 가한다면,
실존은 시각을 만나 의미를 생성시키며
의미는 또 다른 방식으로 실존의 기억을 구축해낸다.

또한 비동시적 세계의 동시화의 기능 가운데
실존은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동시화를 구현해 낸다.

개인에 있어 기억은
실존의 주관적 혐의와 의도가
진하게 묻어 있는 한 개인이
자신의 시공간의 역사를 다른 방식으로
가공하고 저장한 산물들이다.

이 기억은 굳어있고 화석과 같지만,
여전히 시각화의 과정에 개입하며,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공간을 시간을
매개로 하여 확보해 나아간다.

개인적 기억은 심리학의 영역에 많이 접촉하는
부분이 있지만 인류의 기억은 정신과
문명에 깊은 연관을 간직하고 있다.

인류는 기억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것에 대하여서는
비교적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는 문명 자신에게 저장되어 있지 않은
새 것에 대한 두려움일런지도 모른다.

문명이 그 문명 밖에 있는 비동시적인 다층적 세계상을
동시화 해내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길일런지도 모른다.

자연과 정신의 일치라는 도식은 적어도 종말에 가서야
그 의미를 확보할 수 있는 가설로 보여진다.
또한 정신의 끝은 결국 자연을 향해 간다는 가설은
대단히 목적론적이기에 그 사이에
많은 현상과 경험들이 의미를 제대로
찾지 못하거나 그저 아쉽게 버려질 뿐이다.

만약 우리가 정신과 자연의 저울재기를
한번 용기를 가지고 시도해 본다면
거기에는 창조라는 매개가 요구되리라 보여진다.
창조라는 매개 없는 정신과 자연 사이의 논법이란
논리학은 될 수 있어도 살아 있는 몸과 생생함을
온전히 건져 올릴 수 있는 현실학은 될 수 없으리라.


시간과 공간은 그저 우리가 헤엄쳐야 할
수영장의 영원한 네각 모서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무한에서 유입되어 창조된
순간의 결정체들이다.

사건에서 시공이 나오지
시공에서 사건이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서 아르키미데스 점의
딜레마가 있다.

그럼 저 사건화된 시공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시공과는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만약 지금까지 힘겹게 끌고 오는 시각화의 과정을
이 문제와 연결시킨다면,
나의 영혼은 사건화된 시공을
다시 시각화를 매개로 사건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 도식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 사건화의 계기를 기술하면,
이는 존재론적 사건을
인식론적 사건으로 변환시키는
과정일런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이 영혼이라 하는 것,
딱딱히 굳어진 교리적 관념어로서의
영혼이 아니라,
비동시성의 동시화,
말과 사물의 접속,
시각과 실존의 교접의
자리에 존재하다 홀연히
사라지는 그 영혼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의 문제이다.

기껏 영혼도 하등의 유기적 조직의
점진적인 창발과 상승을 통하여
출현하는 잠정적 계기라고
보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정 문제가 되는 것은
영혼의 자리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
신의 자리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
도대체 우리가 잡아다 쓰는지
우리가 잡혀서 쓰여지는지 모르겠지만
시각화, 공간화
사건화, 동시화의
각 계기들을 장악하는
창조성이라 하는 질료들은
정말 더 이상 물을 수 없는
궁극자의 영역인가.

옛날에 대학시절 신앙수련회를
보내기 위하여 기도원에 있을 때
자연과 세상이 하도 경이롭고
신기해서 눈물이 났다.

그때 한 물음이 들었다.
내 눈에, 아니면 내 영혼에 보이는,
저 소나무와 저 공기 사이의
그 접점은 소나무의 것인가, 공기의 것인가.

나는 너와 악수를 한다.
그러나 내 손과 너 손 사이의
그 살도 아닌, 대기도 하닌
그 접촉점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금테 안경을 잠시 벗고
저 자연을 바라보다
안경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이게 특정한 지금의 형태를 누리면서
저렇게 존재하는데
저 안경이 폐기가 되고
녹으면 다른 방식으로
안경의 형태가 변화되겠지.
그러나 인간은 안경의 형태를 변화시켜도
안경과 대기 사이의 그 경계의 존재
마저도 변화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나무와 손과 안경 사이의 그 경계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 듯 하면서도
엄연하게 존재한다.
심지어 시각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모든 것이 창조적 프로세스로
생성하고 소멸한다 할 지라도
마치 내가 경험한, 경계는 변화할 망정
소멸하지 않듯이 영혼과 신은
불멸하는 것들은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정리해 보자.

시각화(공간화)는
자연의 비동시성에 대한
영혼의 동시화이다.
나의 과거의 시공적 기억은
이 시각화에 기여한다.
시각화와 실존의
교감에서 의미는 출현한다.
의미는 다시 나의 과거의
그 저장고로 유입되어 들어가고
새롭게 덧붙여진 실존은
새로운 시각화의 프로세스에
다시 개입된다.

등치가 큰 문명은
집단적 기억에 대한
변화의 속도가 대단히
둔감하며 새로움에 대한
변모과정이 지난한 듯 하다.
그러나 한 번 기억의 빗장에
닫힌 문명적 실존의 정보는
쉽게 상실되지 않는다.
동시에 새로움에 대한
처리방식이 대단히
폭력적이기도 하다.

문명의 문제를
자연과 정신 사이의
양상논리로만 처리하는 것보다
창조의 문제로 연결하는 것이
훨씬 더 유용한 방식으로 보인다.

시공은 자연의 창조이다.
시각화도 나의 창조이다.
그럼 나는 자연의 창조인가.
자연이 나의 창조인가.
영혼이 자연의 창조이면
신도 자연의 창조,
영혼이 신의 창조이면
자연도 신의 창조.
답이 없을 때에는
돌아가야 한다.

모든 존재는 경계가 있다.
심지어 존재가 허물어져도
그 경계는 허물어지지 않는다.
경계는 변모될지언정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실루엣일런지 모른다.

적어도 불멸은 변화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소멸하지 않음을 여기에서는
지시하고 있다.

시각화, 창조성, 불멸,
대단히 노곤한 물음이면서도
대단히 중요한 물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창밖에 노란 낙엽이 하나 둘씩
눈이 내리듯 떨어지고 있다.
나는 변화 하는 모든 것
앞에 서 있다.

낙엽은 흙과 닿아 말라도
그 경계는 사라지지 않듯,
이 질문 또한 시대가 변하여
질문의 방식이 바뀌어도
질문이 소멸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멸하는 존재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불멸의 세계는
알고 있기나
한 것인지.


2001.10.8.










Backward Forward Post Reply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