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오토의 성스러움(Das Heilige) 이해

 

 

 

 

 

 루돌프 오토의 성스러움(Das Heilige) 이해

루돌프 오토의 Das Heilige와 화이트헤드의 Process and Reality를 중심으로

 

전 철

 

 

           

 

 

들어가며

나는 루돌프 오토를 1994년 성스러움의 의미를 통하여 만났다. 그리고 1995년 2학기에 짬을 내어서 독어판 Das Heilige를 참조하여 다시 독서 한 기억이 있다. 1년 전의 기억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독어의 분명한 사유구조와 엄격한 격의 언어구조에 기인하였는지, 오토의 성스러움의 내용과 의미는 더욱 분명하고 강한 색조로 나에게 다가왔었다. 또한 원서 뒷표지에 선명하게 인쇄된 루돌프 오토의 사진은 아주 분명한 느낌으로 나의 기억 안에 자리잡았다. 짧은 머리와 긴장이 서린 얼굴의 근육, 그리고 무엇인가를 사유하고 있는 장성의 서늘함이 서로 아우러진 묘한 느낌을 루돌프 오토는 던져주었다. 차가운 이성의 빛으로 지적인 여정을 거니는 지식인의 크로테스크한 면을 엿보았다. 하지만 글을 읽어나가면서, 그가 깊이 관심을 가졌던 성(聖)에 대한 지적인 편력을 이해하면서, 그의 마음 안에서 피어나는 청순함과 정열을 느꼈다. 그것은 길희성 교수가 번역한 본문 가운데 영역자가 체험한 오토에 대한 커멘트[1]에도 아주 적절히 지적되었다.

저자와의 씨름, 특히 오토와 같은 사상적 거인의 책에 고여있는 호홉을 엿본다는 것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 밖에 없거나 아니면 나의 치기에 불과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만나는 사상가의 사유는 그를 만나는 독자의 실존영역과 이해의 지평과 무관하게 독자(讀者)에게 독자(獨自)적으로 전개될 수가 없다. 모든 학문은 그 개인의 실존적 사유의 영역에서부터 전개되기 대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모한 행위라 할 지라도 아직은 전적인 타자의 지평에 놓여있는 오토의 '그' 세계를 독자의 입각점에서 소화하고 수렴하고 비판하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독자가 간직한 사유의 영향사(Denkenswirkungsgeschichte) 위에서 사상과 사상가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과정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 논문은 오토의 개념 <성스러움>에 대한 이해, 특히 <성스러움의 의미>에 대한 주해를 기본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동시에 화이트헤드의 사상과의 관련성과 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 글은 전개될 것이다.

제1장 합리와 비합리

본 장에서는 '전적으로 생경한 세계'에 대한 합리적 해석과 합리적 이해를 가하는 작업을 종교적 작업이라고 주장한다. 생경한 세계에 대한 합리적 이해의 과정이 바로 신비의 세계를 합리의 세계로 끌어내리는 종교의 역할이다. 특히 루돌프 오토는 서구기독교의 서클 안에 이미 자신의 사유가 서있기 때문에, 서구기독교가 갖고 있는 비교적 전투적인(?) 합리화의 성격에 대하여 매우 강조한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그리스도교가 갖고 있는 설명의 체계나 이해의 체계는 분명한 개념과 명료한 개념을 추구하는 체계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긍정신학' 모티브는 기독교의 특징적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기독교역사에서의 '부정신학'의 모티브는 어쨌건 기독교의 정통성의 세례와는 비교적 거리가 먼 자리에 있다고 할 때,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아이디어는 긍정신학의 아이디어가 주류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듯 하다.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에서 이러한 이해의 근본적인 양식을 긍정적 파악Positive prehension과 부정적 파악Negative prehension이라고 범주화하였다. 사실 서구문명의 모티브는 이러한 긍정적 파악을 그 문명 안에 깔고 전개한 것은 아니었을까. 오토의 이야기를 직접 듣도록 하자.

그리스도교가 개념들을 갖고 있다는 사실, 그것도 월등히 분명하고 명료하고 풍부하다는 사실은 실로 다른 발전 단계와 형태들의 종교들에 대하여 그리스도교가 갖는 유일하거나 주된 우월성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주 본질적인 우월성의 표시이다. 이 점은 처음부터 아주 단호하게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2]

하지만 합리적 설명의 체계로서 종교의 카테고리를 규정하는 것이 종교의 최종적인 임무는 아니다. 종교는 그러한 설명의 체계의 내용과 체계의 섬세함과 실증을 구현해 나아감을 주요 임무로 한다. 그것은 오토에 의하면 "보람있는" 작업이다.

종교란 합리적인 언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종교가 갖고 있는 여러 특징들의 관계를 해명하여 종교 자체의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자극하는 것은 언제나 보람있는 일이다.[3]

제2장 누멘적인 것

성스러움은 종교의 특징이다. 종교는, 세계는 성스러움의 무대임을 증명하는 일련의 인류의 노력이다. 그리고 그 성스러움이 일상과 아주 가까이 닿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해도 되겠다. 종교는 성(聖)의 세계를 속(俗)의 세계에 끌어내리는 과정이라고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토의 역저 Das Heilige는 성(聖), 혹은 성스러움에 대한 인간의 합리이고 진지한 설명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성스러움은 세계에서 현현된다는 단 한 마디의 종교적 언명으로 종교적 과제를 마감하는 한계에서 벗어나서, 그 성스러움은 도대체 어떤 느낌인가? 혹은 그 성스러움은 어떤 과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포촉되는가? 아니면 그 성스러움이 일으키는 일련의 감정적 색조는 우리의 현실과 어떤 관련성을 맺고 있는가? 하는, 성스러움에 대한 언어화의 작업이 바로 오토의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작업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를 엿볼 수 있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어떤 것을 '성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종교적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하나의 고유한 가치평가의 행위이다"[4]

서양 정신사라는 빛나는 건축을 구축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재료는 바로 '개념화(conceptualization)'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루터의 신비주의 계열에 위치한 듯한 오토의 자리를 일면 고려한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안목 속에서는 오토도 개념화를 통하여 성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천착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이것은 위에서 이야기하였던 그리스도교의 '긍정신학적 측면'의 예증인 것이다. 우선 나는 다음과 같은 오토의 내용을 통해서 개념화의 문제와 유명론의 문제, 그리고 명제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었다.

"우리가 듣는 이로 하여금 그것을 이해하도록 돕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규명을 통하여 그 자신 안에서 누멘적인 것이 자극을 받아 살아 움직이고 의식될 때까지 그를 이끌어 주려고 시도하는 일 뿐이다.[5]

오토는 개념화를 하나의 학문적 방법론으로 전개한다. 이 개념화는 다른 말로 하면 어원의 고고학적 탐구이다. 실로 희랍적 전통 안에서는, "사물의 진실은 말logos에 있다." 현대의 일상 안에서 통용되는 언어적 표현의 근원적인 뿌리를 탐구해 들어가는, '어원의 고고학적 탐구'의 모든 배경은 바로 사물의 진실은 말에 있다는 주장의 순응이다. 그래서 오토의 Das Heilige에서는 어느 누구의 저작보다 어원에 대한 깊은 이해와 탐구를 시도하고 있음은 너무나 쉽게 볼 수 있는 특성이다. "말의 의미에 정통하면 사실에 정통하게 될 것으로 그들은 생각하기 때문이다."[6] 이렇게 볼 때 개념화를 하나의 학문적 방법론으로 전개한다는 것의 의미는, 개념을 하나 둘씩 새롭게 구축해 나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어원의 추적과 서로 유사한 개념들 사이의 경합과 비교를 통하여 우리의 느낌과 감정의 색조를 정확하게 담아낼 수 있는 일련의 개념을 추려내는 작업을 의미한다.

또하나, 나는 오토의 전통이 유명론과 실재론의 끊임없는 긴장관계 속에서 유명론의 수맥에 서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 유명론에 있어서 명제는 느낌에 우선한다. 그리고 명제는 느낌의 발현과는 별개의 독자적이고 원초적으로 카테고리화된 영역이다. 오토는 듣는 이의 느낌을 촉발하고 이해를 촉발하고 자극을 촉발하는 매개를 '우리의 규명'이라고 고백한다. 또한 우리의 규명에 대한 일련의 시도는 어원과 개념의 이해와 분류를 통하여 전개해 나아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오토의 개념화는 없는 개념의 창조가 아니라, 있는 개념의 발견이다. 그것은 "명제를 통한 느낌의 분류화"이다. 또 위의 본문에 숨겨 있는 또 하나의 뜻은, 의도적이건 그렇지 않건, 아마도 "명제는 느낌을 유혹한다"는 주장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명제는 추상의 영역이고 느낌은 구체적 실존의 영역이다. 명제가 느낌을 만드는가, 느낌이 명제를 만드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가장 치열했던 유명론과 실재론의 문제인식이고 오토의 위의 문장은 어쨌건 유명론의 흐름에 더욱 닿아있다고 볼 수 있겠다.[7]

제3장 피조물적 감정

오토는 누멘적인 것의 요소를 6가지로 구분한다. 그 첫째 감정인 피조물적 감정, 즉 누멘적 대상에 대한 느낌의 주관적 반영에 대하여 이 3장에서 언급한다. Das Heilige의 두 기둥은 멘적인 대상과 주체이다. 본인이 볼 때에는 3장에서부터 9장까지의 오토의 분류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직접적인 느낌에서부터 대상에 대한 주체의 추상화된, 혹은 일반화된 느낌까지의 순서에 따라 분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피조물적 감정이라 하는 것은 누멘적인 대상을 주체가 만날 때 감정적으로 발현되는 가장 직접적인 계기에 관해서 다룬다고 할 수 있겠다. 누멘적 대상에 대한 주체의 강렬한 정서는, 오토에 의하면, '피조물적 감정'이 된다. 나는 오토의 Das Heilige라는 저서가 매우 현상학적이고, 매우 실존적인 문제제기 위에 서 있음은 인지하였지만, 성스러움에 대해서 경험을 하지 못한 독자는 이 책을 읽지 말라는 오토의 강한 어조에 나는 새삼 오토에 대한 묘한 감동과 그 진지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만큼 오토의 강한 어조에는 자신의 치열한 문제제기를 통해서 이 책이 잉태되었다는 점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아까 명제와 느낌의 관계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아무리 명제의 세계에 대한 웅장한 건축물이 이 책 안에 열려있다 하더라도, 그 건축물에 적절하게 배치될 수 있는 '가구'라는 느낌이 없다면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오토의 묘한, 혹은 사려깊은 관심에 다른 책에서 엿볼 수 없는 솔직한고 진솔한 고백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원서 뒷표지에서 보았던 오토의 엄격하고 장중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선언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독자들을 향하여 강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순수한 종교적 흥분의 순간에 대하여 숙고해 볼 것을 촉구한다. 이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이나 그러한 체험이 전혀 없는 사람은 부디 더 이상 이 책을 읽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다.[8]

오토가 강조하는 체험과 얼마나 가까이 다가간 체험인지는 모르겠으나 나 또한 그와 비슷한 체험을 한 기억이 있다. 나는 아직도 그 체험이 도대체 어떤 체험인지 확실히 판단하지 못한다. 그 체험은 나의 짧은 인생에 있어서 두 번 다가왔다. 첫 번째는 가난한 군대시절을 지내는 여정에서 잠시 짬을 내어 휴가기간에 학교를 들른 때의 체험이다.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텔레스처럼 "나는 고뇌하는 영혼(Geist)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음험한 회색빛 한신이었지만 그래도 나의 희망과 기대가 거기엔 고여있었다. 유난히 빛나는 하늘. 류동운 열사비 앞에서 광활한 양산리 들녘을 향해 기쁜 마음으로 시선을 모으는 중에, 마치 하늘에서 빛이 내려오는 듯한 그 광경을 나는 경험하였다. 영혼은 마치 하나의 가느다란 숨결으로 화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묘하게도 옆에 앉아있던 친구의 삶의 고통과 고민이 그대로 나의 가슴으로 전해져 옴을 느꼈다. 그리고 우리 친구들을 만나러 교실로 가는 길목에, 내 어깨를 스쳐 지나가는 전적인 타자들에 대한 마음의 슬픔과 고통의 결이 나에게 명증하게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결국 만우관 4층 베란다에서 구석에서 그 황홀함과 슬픔의 말할 수 없는 느낌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그 기묘하고 황홀한 느낌에 한 1시간 정도 사로잡힌 후에 다시 본래의 의식으로 돌아오니 경미한 신체적인 체증이 몇 분 정도 몸 전체에 확 달라붙었다.

그 경험은 참으로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온 우주의 의식이 내 안에 포촉된 듯한 느낌. 슬픔과 기쁨, 삶과 죽음, 하늘과 땅이 서로 우르렁거리며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뿜어내고 있는 우리의 서글프고도 환희로운 이 세계에 대한 직시. 바로 이러한 일관되지 않은 모호하며 현란한 느낌이었다.

두 번째는 1996년 11월 5일의 경험이었다. 11월 4일은 나의 생일이었다. 우리 사랑하는 3학년 친구들의 고약스러운 치기에 저녁부터 그 다음날 늦게 까지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천근의 무게를 지닌 육신을 거닐고 7교시 수업을 받던 도중에 느낀 묘한 경험이었다. 마치 유체이탈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할 만큼의 피지컬 리얼리티로 그 경험은 다가왔다. 낮익은 세상이 그렇게 낮서보일 수가 없었다. 열심히 수업을 하시는 교수님, 그리고 무엇인가 끄적거리면서 앉아있는 학생들, 그리고 지저귀는 새소리, 침침한 교실의 형광등, 모든 것이 낯선 세계로서 육중하게 다가왔다. 나는 깨달았다. 바로 몇 년 전에 경험한 그 카이로스의 느낌이라는 것을. 옆의 모든 마음마음이 이렇게 분명하게 느껴질 수 있다니. 불교의 공안 가운데 이심전심(以心傳心)이 바로 이런 것을 염두하고 말한 것이었나.

수업이 끝나고 정처없이 이쁘게 물든 황금빛 노을과 들녘을 바라보며 거닐었다. 나는 이러한 카이로스의 느낌은 분명히 일상과 다른 느낌이고 몇 시간 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걸음을 걷는 와중에서 바로 내가 지금까지 받아왔던 고귀한 사랑의 경험들이 하나 둘 씩 의식의 세계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체험을 인과적 유효성의 감각이 상실된 강렬한 정서라고 말하였다. 당시 이미 나의 의식은 인과적 유효성이 파탄난 의식이었다. 어디에서부터인가 등장하는 현란한 사랑의 편린들이 하나 둘씩 나를 사로잡았고 나는, 그 귀한 사랑에 흐느껴 가눌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또한 백년의 삶을 잠시 왔다 간 수많은 영혼들의 슬픈 자욱들이 끊임없이 나의 혼미한 의식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저 생명의 낙조와 죽음의 포말, 삶과 죽음의 끊임없는 무대인 우리의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직증을 몸소 체험하였다. 하나님이 주시는 카이로스의 경험도, 예상했듯이, 약 두 시간동안 지속된 후에 결국은 원래의 의식으로 되돌아 왔다. 이러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루돌프 오토의 저 문장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오토는 이후에 피조물과 피조물을 초월한 존재의 관계에 대하여 논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빚어지는 강렬한 정서가 바로 '피조물적 감정'이라고 말한다. 나는 오토가 누멘적 감정에 대하여 다양하고 섬세하게 분류한 노력에 대하여서는 매우 의미있고 유용한 작업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오토의 도식은 독일관념론의 전통의 도식을 한 치 앞으로 넘어서지 않은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것은 헤겔의 동일성의 원리위에서 도식이나, 혹은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의 도식과 거의 일치되는 페턴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 존 재 

Methode

← 창작작용

음악 

Vermittelung

← 진리현상

진 리 Wahrheit

→ 관조작용

→ 진리인식

  ■ 진리와 현존재의 매개로서의 음악

 

위의 도식은 음악이 진리와 현존재의 관계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나 하는 문제제기에서 쓴 의 일부 내용이다.[9] 이 도식에 의하면 현존재는 오토에 의하면 피조물이다. 거기는 가다머에 의하면 방법의 세계(Die Welt der Methode)이다. 진리는 오토에 의하면 누멘적 감정을 산출하는 그 무엇이다. 그리고 Vermittelung은 진리의 테오파니, 혹은 진리의 현현의 장소이다. 오토에 의하면, 틀림없이 이 자리를 피조물이 경험하는 '피조물적 감정'의 자리라고 말하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존재와 진리의 도식, 실존과 본질의 도식, 유한자와 무한자의 도식, 다자의 일자의 도식, 동자와 부동자의 도식과 매우 유사한 듯한 도식을 오토는 전제하고 그의 사유를 전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토는 현존재가 무한자를 만날 때 피조물적 감정이 유발되고, 더 나아가 그 피조물적 감정은 무(無)로 함몰되고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즉 피조물적 감정은 피조물이 그 무한자에 의해 수렴되고 무화되는 감정이라고 그는 지시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정신사적인 전통 속에서 널리 알려지고 일반화 되어진 도식과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토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도대체 누멘적 감정을 느끼게 하는 그것은 무엇이고, 도대체 그 감정의 색조는 우리가 어떻게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는가?" 하는 치열한 문제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말한다.

" 그렇다면 이렇게 나의 밖에서 객관적으로 느껴지는 누멘적인 것 그 자체는 무엇이며 어떠한 것인가? "

제4장 두려움과 신비

오토의 탁월한 점은 바로 성스러움의 감정적 색조에 대한 섬세한 구분과 유형화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기존의 그리스도교에서는 성스러움을 단지 성스러움이라는 한 마디로 가볍게 처리하였는지는 몰라도, 혹은 슐라이어마허는 대상에 대한 감정의 그림자에만 얽메여 단지 피조물적 감정이라고 한 마디로 치부하였는지는 몰라도, 오토는 "대상에 관계된 일차적인 특정한 감정 그 자체를 찾고자 하는"[10] 진지한 시도를 하고 있다.

개념적으로 '신비'라는 말은 숨겨진 것, 즉 공개되지 않은 것, 파악되거나 이해되지 않는 것, 일상적인 것이 아닌 것, 친숙하지 않은 것을 그 자체가 무엇인지를 좀더 정확하게 나타냄이 없이 단지 지칭하는 것 뿐이다.[11]

오토에 의하면 신비는 낯선 것으로 이해된다. 신비 그 자체는 가치개념이 아니다. 단지 낯선 세계에 대하여 '신비'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다. 그것은 낯선 세계이다. 낯선 세계와의 최초의 접촉점은 감성이다. 낯선 세계에 대한 최초의 접촉점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왜냐하면 추상화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이성의 영역은 감성의 영역의 후기위상이기 때문이다.[12] 오토도 그 점을 직시하였던 것이다.

이후에 그는 감정에 대한 구분을 두려움의 요소, 압도성의 요소, 활력의 요소, 신비의 요소로 구분한다.

제5장 누멘적 찬송들

언어의 소통은 추상을 필요로 한다. 추상은 이성의 영역이다. 결국 언어의 소통은 이성을 수반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시는 이성을 매개하지 않는다. 시는 감성을 통한 직접적이고 파격적인 소통의 전략을 함의하고 있다. 그리고 시를 통하여 전달된 정서는 매우 강렬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감성과 직접적으로 닿아있기 때문이다. 오토가 5장에서 시를 통하여 누미노제의 감정의 미세한 부분을 구분한 의도는 바로 거기에 있다. 몇 편의 시를 통해서 드러나는 누미노제적 감정의 차이를 오토는 지적하고 있다. 그 차이는 '합리적'인 찬송과 '두려운 신비'의 차이이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서 누미노제의 감정은 두려움을 동반한다는 것을 그에 걸맞는 시를 통하여 드러내준다.

오늘에 있어서 두려움으로서 다가오는 신의 감정은 아주 일상적으로 이해되지만, 당시의 지적인 분위기나 상황에 있어서 두려움으로서의 신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가능했는가에 대해서는 본인은 분명한 추측을 할 수가 없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감정의 신학(Theologie des Gefuhl)을 통하여 신과 인간의 접촉점으로서 감정의 영역에 대한 새로운 개척을 시도하였다. 오토는 슐라이에르마하를 통하여 환히 열린 보고와 같은 감정의 영역에 신은 두려움의 감정을 통하여 다가온다는 점을 주도적으로 강조한 시대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

제6장 매혹성

누멘적인 것의 내용은 한 편으로는 이미 우리가 상설한 바 있는 위압적이고 압도적인 두려움(tremendum)의 요소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다른 한 편으로는 분명히 독특한 힘으로 끌어당기며, 매료하며, 매혹하는 어떤 것으로서, 이제 위합적인 두려움의 요소와 더불어 하나의 묘한 대조적 조화를 이루게 된다.[13]

역설은 참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 어린 시절에 있어서 역설은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자가 세계를 향해 던지는 유일한 표징이 '역설'이라고 이해한 적이 있었다. 역설은 분명하지 않다. 역설은 논리적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함과 논리를 추구하는 유년시절의 지적인 상황에서 역설은 게으른자의 표징이었고, 궤변론자의 자기방어라고 이해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역설의 깊은 면은 점점 더 구체적인 실재로서 인지된다. 오히려 역설의 전략이야말로 무엇인가 더욱 논리와 깊이를 갖고 있는 시스템으로 이해되고 있다.

역설은 무엇일까. 한 논리계형에서 더욱 더 근본적인 논리계형으로 진입해 들어갈 때 깨닫게 되는 매우 근본적인 세계의 구조라고 할까. 예를 들어보자. 어떤 한 남자가 한 여자만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놀랍게도 그 둘만의 사랑이 세계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하는 역설적인 계기가 된다. 역설은 가장 본질적인 기독교의 진리와도 닿아있다. "낮아지는 자가 높아지는 자",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 "목숨을 버리는 자는 얻을 것이요, 목숨을 구하는 자는 잃을 것이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어진 것이 없다", "심판 자이면서 심판받는 자" 등등 역설의 진리가 매우 다양하게 등장한다.

놀랍게도! 심지어, 신에 대한 우리의 정서 조차도 이 묘한 '역설'의 집중포화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오토는 다양한 성서와, 시와 이야기를 통해서 끈질기게 보여주고 있다. 그 두 모습은 <두려움>과 <매혹>이다. 틀림없이 오토는 우리의 이러한 상호 배타적인정서로서 신의 현현은 이해된다고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토는 심리학자가 아니라 종교학자이자 신과 피조물 사이의 감정의 소통이 가능하게 되는 근본구조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다음과 같이 역설이 가능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장은, 한 편으로는 탁월성과 인과성의 길에 따라 신이란 사람이 사유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것, 가장 강한 것, 가장 좋은 것, 가장 아름다운 것, 그리고 가장 사랑스러운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부정의 길에 따라서는, 신은 단지 모든 사유가능한 것들의 근거요 최상급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에 있어서 스스로를 위한 한 실재라는 것이다.[14]

여기에서 신은 두 가지 양태로 등장한다. 하나는 파악 가능한 신과 파악 불가능한 신이다. 전자는 나의 사유로 포촉되는 신이다. 후자는 나의 사유의 포촉의 영역을 넘어버린 신이다. 오히려 나의 사유의 근거가 되는 신이다. 우리는 부동의 동자라는 파피루스 향내나는 고전적인 언명을 기억하고 있다. 전자의 신이 동자이고 후자의 신이 부동이다. 실로 우리에게 있어서 신은 이 두 가지 양태로서 다가온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 문제는 진정으로 신의 비의(秘義)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져본다. 우리는 하나인데 하나님의 양태가 둘인가. 아니면 하나님은 하나인데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양태를 동시에 두 개를 사용하는 것인가. 헤겔은 후자를 옹호한다. 그리고 헤겔에게 있어서 인간의 감성은 어쩔 수 없이 이 두 양태를 동시에 사용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헤겔에 있어서는 감성의 영역을 넘어선 진리의 세계, 초감성적인 세계의 문호가 열리는 과정에서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요소가 바로 역설이라는 것이다. 모순관계와 대립은 결국은 지양된다고 헤겔은 이해한다. 또한 그 대립의 지양은 이성의 왕국에서만 열린다.[15]

우리에게 체험되는 신은 신 그 자체는 아니다. 화이트헤드의 표현에 의하면 신은 변환의 범주(Category of Transmutation)[16]를 통하여서만 인지된다. 즉 주체가 품고 있는 느낌의 객체적 여건 위에서 신은 체험된다. 칸트 식으로 말하자면 신이라는 물자체는 직접 인간에게 반영될 수 없는 운명이 신의 체험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문제는 변환의 범주를 통하여 변해버린 신이건 물자체가 뒤틀린 변형된 신이건 간에 우리는 신을 체험한다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것은, 오토의 표현대로, 인간은 신을 "사유할 수 있"다는 측면이다. 그것은 신에 대한 긍정적 파악(Positive prehension)[17]이다. 그 파악은 낯선 정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토가 말한 매혹성의 정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오토는 단지 신이 인간에게 사유되는 측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사유되지 못하는 측면, 오히려 인간의 사유의 근거가 되는 신의 측면을 강조한다. 그 측면은 바로 오토가 말한 "신은 단지 모든 사유가능한 것들의 근거"가 된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그 신의 측면은 공포의 정서, 피조물로서의 유한성을 느끼게하는 정서이다. 그것은 두려움이라는 정서를 동반하며 우리에게 체험될 찌라도 그 안에 이미 신의 보편성의 근거를 간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토는 두려움의 색조 또한 신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제7장 어마어마함

희랍어의 deinos는 신의 누멘적인 특성을 잘 드러내 준다고 이 7장에서는 기술하고 있다. 어마어마함은 미학적인 측면으로 이해하자면 숭고(崇高)가 된다. 숭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7장에서는 숭고를 "아름다움이란 크기와 질서에 존립한다"고 설명한다. 실로 숭고는 유한자의 무한자에 대한 인식이다. 자연의 한계, 우주의 끝에서 정신이 사유하는 무제약자의 이념이란 사실 얼마나 공허하고 빈곤한가. 무한과 유한은 필연적으로 숭고를 매개로 관계된다. 그렇다고 해서 무한이 유한으로 흡수되거나 유한이 무한으로 편입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결코 양자가 합일되고 화해되는 것은 아니다. 본문에서 오토는 어마어마함이라는 감정이 어떠한 미학적 지평에서 전개되는가에 대하여서는 많은 관심을 할해하지 않았다. 또한 어마어마함이 인간의 미적 카테고리에서 정식화된 숭고라는 개념과 어떤 관련성을 맺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할애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토에게 그 영역은 미학의 과제로 비추어졌을런지도 모른다.

제8장 유추적 감정들

오토는 이번 장에서 미학에서 다루고 있는 숭고의 문제를 접근한다. 그러나 오토에게 있어서 미학적 개념은 일단은 유추적인 개념이고 상당히 추상화된 개념으로 이해된 듯 싶다. 또한 오토에게 있어서는 종교적 감정과 미학적 감정을 8장에서 분명하게 구분한다. 오토에게 있어서 숭고한 것의 감정은 종종 누멘적 감정을 일깨워 주는 바로 그러한 자극 중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종교적 감정이 숭고한 것의 감정보다 더 긴 역사성을 소유하고 있음을 오토는 강조한다. 또한 이 양자는 서로 항구적인 관련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숭고성을 성스러움의 진정한 도식 가운데 하나로 이해한다.[18]이후에는 종교적 감정에 있어서 합리적 요소와 비합리적 요소가 서로 얽혀있는 실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코 종교적 지평은 합리적 지평으로 온전히 환원활 수 업는 잉여가 계속 등장한다는 것을 계속 설명해 나아간다.

제9장 누멘적 가치로서의 거룩함

제9장은 누멘적 감정에 대한 여러 양상을 전개하는 장이다. 저자의 종교적 체험의 축적을 통한 구체적이고 분명한 감정의 색조의 분류를 아주 명증하게 엿볼 수 있는 장이다. 지금까지 읽은 장 가운데에서 저자의 흐름을 읽어내는 데 가장 많은 긴장과 응시가 필요했던 백미의 9장이 아닌가 생각한다. 실로 위에서도 말하였듯이 기독교의 진리가 역설적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더 나아가 누멘적 가치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제시된다는 점이야말로 오토가 절실히 체험한 자명한 사실이 아닐까. 오토의 냉철한 시선과 깊이있는 시선을 엿볼 수 있는 아래의 문장은 9장 전체를 대표하는 귀결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스도교로부터 이러한 역설적 감정을 빼어 버리는 것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천박하게 만드는 일이다.[19]

제10장 '비합리적'이란 무엇인가?

오토가 말하려는 바를 비교적 자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장이 바로 이 10장이 아닌가 생각한다. 오토가 말하는 '비합리적'이란 것은 합리적인 것에 반하고, 합리성을 파괴하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합리성의 근거가 되면서, 결코 합리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궁극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영역을 말하는 것이다. 그 영역은 사유로는 잡히지 않고 오히려 감정을 통하여 잡히는 세계이고 신비에 가득찬 세계이다.

제11장 누멘적인 것의 표현수단

모든 존재는 누멘적인 것의 현현의 자리이다. 그리고 누멘적인 것의 현현은 개념이나 설명을 통하여 인지되는 것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방식으로서 감정적으로 다가온다. 그 감정은 또한 주관적 환상에 기인한 객관적인 리얼리티가 아니다. 누멘적인 것은 매우 자명한 객관적 리얼리티이다. 그리고 그것은 직접적인 강도를 가지고, 혹은 간접적인 강도를 가지고 현존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그것은 또한 예술을 통하여서도 진입해 들어온다. 모든 존재는 진리에 대한 경험을 수행한다. 왜냐하면 존재는 진리의 탈은폐이기 때문이다. 땅을 통하여 있는 모든 존재는 진리의 간접적 자기계시이다.[20]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는 누멘적인 것에 대한 경험을 수행한다. 그것은 예술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예술이야말로 누멘적인 것에 대한 감격과 환희 가운데서 창작을 시도하는 세계이고 그 창작물은 소멸할 수 밖에 없는 누멘적인 것의 개인적인 체험을 영원한 예술작품을 통하여 세계에 잉태시킴으로서 누멘적인 것의 영원성을 세계에 붙박아 놓는다. 또한 예술작품에 스민 누멘적인 것은 구체적이고 피지컬한 리얼리티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누멘적인 감정을 유발하고 강도를 끊임없이 제공한다. 누멘적인 것은 말로써 묘사될 수 있는 것도 아니요[21] 오히려 침묵을 통하여 현시될 수도 있는[22] 상이하지만 아주 분명한 존재양식인 것이다.

제12장 구약성서에 있어서의 누멘적인 것

오토는 누멘적인 것의 감정적 색조가 엿보이는 구약본문을 통하여 그의 누멘적인 것에 대한 예증을 쉼없이 시도한다. 그에 있어서 구약성서는 분노와 사랑의 하느님이 더욱 극명하게 부각되는 세계이다. 철학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의 장렬한 무대가 바로 구약의 역사이고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누멘적인 색조의 분명한 형상들이라고 계속 전개한다.

제13장 신약성서에 있어서의 누멘적인 것

구약성서를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누멘적인 요소는 지극히 다양하고 일반적으로 구약 전체에 하나의 토양으로 깔려있다는 점은 우리의 상식으로도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신약시대는 헬레니즘화된 신학이 그의 정서를 구약에 비해서 상당수 전개되고 있는데 오토는 신약성서 안에서 누멘적인 것의 현현을 어떠한 본문과 어떠한 상황을 통하여 제시하고 있을까 하는 물음을 가졌었다. 그의 주장은, 신약성서에 있어서는, '하느님나라의 복음'이라는 신약성서의 아우라가 바로 누멘적인 것이라고 밝힌다. 또한 바울의 육신에 대한 강렬한 거부의식과, 요한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고백이 누멘적인 것과 닿아있다고 강조한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육신에 대한 강렬한 거부의식을 나타내지 않은 그리스도교가 어디 있으며, 그리스도교를 빛과 생명으로 고백하지 않은 성서기자들이 어디 있을까. 이런 의미에서 성서에 있어서의 누멘적인 것, 특히 신약성서에 있어서의 누멘적인 것에 관한 주장은, 누멘적인 것을 모든 시대와 역사를 통하여 예증하려는 과신(過信)을 슬프게나마 발견할 수 있다면 오토에 대한 일방적인 오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히브리적 사유와 누멘적인 것의 함수관계, 혹은 헬라적인 사유와 누멘적인 것의 함수관계를 깊이 천착하여 자신의 논지를 주장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면서, 동시에 정신사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양대 사유구조와 누멘적인 것의 역학관계를 규명하게 되는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제14장 루터에 있어서의 누멘적인 것

수많은 그의 설교와 서한들과 탁상담화 가운데 이러한 배경이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근거 위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가 얼마나 '말씀'을 귀중히 여겼는가를 이해할 수 있으며, 말씀과 말씀에 '계시된' 하느님에의 거의 경련적인 그의 집착을, 그리고 그가 왜 이러한 어두움과 무서움 속을 단순한 호기심으로 들어가 보려는 사람들에 대해서 계속 경고하고 있는 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23]

루터는 틀림없이 사유를 통하여서가 아니라 누멘적인 것에 대한 강렬한 체험을 그의 삶 안에서 경험하였다. 친구와 비오는 날 밤에 들판을 지나가다 벼락맞은 충격적인 사건, 그리고 에트푸르트의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서 철저한 금욕생활을 통하여 자신을 단련시켰던 기간, 그리고 그의 전 신학의 삶을 통하여 전개한 행적들을 보건데 그의 모든 삶을 움직이는 강력한 요인은 바로 그 공포로서의 누멘적인 감정과 피조물로서의 유한적인 감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루터는 그의 출발에 있어서 누멘적인 감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의 온 존재를 신학의 삶에 불태웠다.

고등학교 시절 루터에 심취하여 나의 실존이 새롭게 번뇌와 환희에 휩싸였던 기억이 새롭다. 만약 오토가 누미노제를 일종의 주관적 환상에 기인한 객관적 실재로 인정하지 않고 자명한 현실적 리얼리티로 전제한다면, 루터를 통하여 내가 느낀 누미노제의 감정 또한 자명한 현실적 리얼리티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토는 이후의 루터교파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것은 명상과 경건이 제거되었고 개념과 교리가 감정을 압도하여 이제는 '오성의 조그마한 틈바구니'[24]안에 신과 교회의 메시지를 가두게 되었다.

제15장 두 가지 발전과정

누멘적인 것의 심화와 누멘적인 것의 합리화와 윤리화는 상호 개별적으로, 혹은 서로 조화롭게 발전해 왔다는 점을 오토는 여기에서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합리화와 윤리화가 구원사Heilsgeschichte, 그리고 신의 자기계시로서 확대되어간다는 점을 오토는 주장한다.

제16장 선험적 범주로서의 성스러움(I)

놀랍게도 오토는 여기에서 '영혼의 근저'(Seelegrund)를 주장한다. 감각적인 소여와 경험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누멘적인 감정은 등장한다고 오토는 주장한다. 본인이 보기에 오토가 고민하고 안고 있는 이 지점은 가장 치열한 논박이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매우 명쾌하게 해결하기 어려운 지점인 듯 하다. 오토는 여기에서, 아주 절묘하게도,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을 통하여 그 위에 자신의 영혼의 근저를 말한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두 지평을 언급한다. 하나는 객관적 리얼리티로서의 경험의 지평, 다른 하나는 주관적 카테고리로서의 선험적 지평을 언급한다. 칸트에게 있어서 내 밖의 세계와 내 안의 세계는 통합과 화해의 대상이었다. 오토는 이러한 칸트의 범주를 인정하고 이 위에서 누미노제를 감(感)할 수 있는 카테고리를 내 안의 세계로 두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명명을 영혼의 근저라고 하였다. 결국 오토 또한 칸트의 세례를 받은 독일관념론의 첨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보는 화이트헤드는 문명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 널리 보급된 고질적인 사유의 병폐를 9가지를 들고 있다. 그중에 하나가 일곱 번째, <순수한 주관적 경험으로부터의 이론적 구성물로서의 객관적 세계에 대한 칸트적 학설>이다.

{순수이성비판}은 주관적 여건이 객관적 세계의 현상 속으로 이행해 들어가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유기체의 철학이 기술하려는 것은 객체적 여건이 어떻게 주체적 만족 속으로 이행해 들어가는가 하는 것, 그리고 객체적 여건에 있어서의 질서가 어떻게 주체적 만족에 있어서의 강도를 제공하는가 하는 것이다. 칸트에게 있어 세계는 주관으로부터 출현한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에 있어서는, 주체가 세계로부터 출현한다. 주체라기보다는 그의 용어에 따르면 <자기초월체>Superject가 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객체>란 말은 느낌의 구성요소가 될 가능태로서의 존재를 의미하며, <주체>란 말은 느낌이 과정에 의해서 구성되고 그 과정을 포함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즉 느끼는 자란 그 자신의 느낌들에서 출현한 통일체를 말하며, 느낌들은 그 통일체와 다양한 여건 사이를 매개하는 과정의 세밀한 부분들이다. 여건은 느낌을 위한 가능태로서의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객체이다. 과정은 느낌의 미결정성을 하나의 주체적 경험의 통일성으로부터 제거해 가는 것을 말한다. 여건에 있어서의 질서의 정도는 객체적 유혹에 있어서의 풍부성의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 달성된 <강도>는 만족의 주체적 형식에 속한다.

오토는 칸트가 구축한 범주 위에서 자신의 선험적 범주를 새롭게 전개한다. 더 나아가서 칸트도 엿보지 못한 '영혼의 근저'라는 개념을 독특하게 구상한다. 그렇다면 칸트의 세례에서 한 발짜욱 더 나아간 오토의 개념인 '영혼의 근저'가 갖고 있는 카테고리에 대하여는 분명 더욱 더 치열한 검증의 과정을 거쳐야 하겠다. '영혼의 근저'라는 개념은 분명히 오토의 체계에서나 칸트의 체계에서 어떠한 의미와 가치를 차지하는지, 혹은 화이트헤드의 맹공에 대한 비판을 오토와 칸트의 체계에서는 어떻게 대응하고 피해갈 수 있는 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제17장 그 역사적 출현

제 17장은 영혼에 근저를 통하여 느끼는 누미노제적인, 혹은 맹아적인 공포의 감정이 역사를 통하여 어떻게 종교로 정형화 되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을 전개하고 있다.

제18장 '조잡성'의 원인들

종교적 감정의 초기위상은 조잡성을 발생시킨다. 하지만 점진적인 역사의 흐름을 통하여 그 조잡성은 극복되고 합리적 요소들에 의하여 조정된다.

제19장 선험적 범주로서의 성스러움(II)

본인이 보기에, 오토는 여기에서 칸트가 선험적 범주를 통하여 정식화 하였던 선천적 종합판단의 문제를 가지고 성스러움의 이해와 종교의 이해를 설명하려 한다. 즉 이미 종교와 성스러움은 선험적 범주를 통하여 이해되고 발현된다는 입장을 오토는 견지한다. 더 나아가서 합리적 요소가 선험적 원리를 통하여 비합리적 요소를 도식화시킴으로서, 선험적 원리는 합리적 요소와 비합리적 요소의 매개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나는 어떻게 선험적 원리가 매개의역할을 수행하는가에 대한 관심이 등장한다. 선험적 원리가 어떻게 합리와 비합리의 매개의 역할을 수행하는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결여된 듯 하다. 또 후반부에 그는 기독교를 합리적 측면과 비합리적 측면이 서로 적절하게 조화된 우월한 종교로 인정하고 있다.

제20장 성스러움의 현현(顯現)과 직감의 능력

오토에게 있어서 인간을 향한 성스러움의 현현은 보편적인 양태로서 제시되고, 또한 그 현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규범적인 범주 안에서 수행되어진다. 그 인식은 선험적 범주 안에서 자명하게 이루어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 그가 내적으로 하나의 관념, 즉 하나의 척도를 지니고 있는 바 바로 그것이 실제로 '현현되고' 있는 외적 사물들을 아름답다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성스러움을 그 현현 속에서 진정으로 인식하고 인지할 수 있는 그 어떤 능력을 우리는 직감(Divination)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25]

그는 성스러움의 현현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직감이라고 지시하고 있다. 그리고 슐라이에르마하의 긍정적인 주장과 그의 한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마력에 대한 괴테의 이해와 주장에 대하여 내용을 매우 길게 할애하고 있다. 그는 슐라이에르마허와 괴테의 직감을 비교적 과소평가한다. 특히 괴테의 직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주저하지 않는다.

괴테의  직감은 예언자들이 파악하는 것과 같이 누멘적인 것을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며, 비합리성과 신비성을 가장 심오한 가치로서, 그리고 성스러움 자체의 권리로서 체험하고 찬양하는 욥의 체험이 지닌 높이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26]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테의 체험 가운데에는 '단순한 감정', 즉 하나의 어두운 선험적 원리에 의하여 있도되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한다.[27]

제21장 원시 그리스도교에 있어서의 직감

이 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예수가 갖고 있는 누멘적 감정에 대한 고찰을 시도하고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직관의 적용사례인 종교와 성인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었다고 오토는 비판한다. 슐라이어마허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미는 "본질적으로 그가 '우리를 그의 신의Gottesbewu?sein)의 힘과 행복 속으로 받아 주신다'[28]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오토는 예수의 신성에 대한 고찰을 누멘적 감정이라는 측면에서 기술한다.

그는 신비에 찬 경이적 존재이며, 어딘가 모르게 사물의 보다 높은 차원에 속하며 누멘 자체의 편에 서 있다. 그가 자신을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체험되는 것이다. 그리고 조잡하고 때로는 자기기만일 수도 있지만, 오직 이러한 강하고 깊은 체험으로부터만 종교적 공동체는 성립되는 것이다.[29]

오토에 있어서 인간의 누멘에 대한 선험적 인식능력을 보편적인 능력으로 규명되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인식은 록크의 백지이론과 같은 입장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인상을 받는다는 것은 오히려 그 사람에게 있어서 어떤 고유한 의의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그것에 의하여 사로잡히고 그 앞에 머리숙인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우리들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오는 인식과 이해와 가치 평가의 요소, 즉 '내면적 영'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제22장 현대 그리스도교에 있어서의 직감

현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내적인 원리는 '함께 증언해주는 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은 합리적인 소통에 있어서의 장애를 극복하는 근본적인 영역이 된다. 그것은 성스러움에 대한 체험을 이해하고 포촉하며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오토에 의하면 구속의 종교이다. 그는 말한다.

"휴식을 모르는 종말론적인 충동, 곧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구원을 향한 충동, 계속적으로 전진하며 그 출발점을 벗어나고 초월하는 것, 바로 이런 것이 종교적 충동의 특징적 표현들이며 그 내적 본질을 밝혀 주는 것이다. 종교적 충동의 본질은 다름아닌 진정한 구속을 향한 충동이며 직감에 의하여 포착된 '전혀 다른' 선(善)의 예감이며 선취이다.[30]

또한 예수는 성스러움의 현현을 신의 세계 섭리에 대한 예감으로 파악하였다. 오토는 예수를 교회의 권위와는 별개로, 우리들의 직관을 통하여 누멘적인 감정이 극도로 발현되는 존재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감정은 성스러움의 범주를 가장 생동적으로 적용하고, 이와 더불어 일찍이 종교사의 영역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가장 심오한 종교적 직관을 산출하였다고 이해한다.

"우리가 종교들을 서로 비교하고 측정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러한 기준에 의하여 어느 것이 그 가운데서 가장 완전한 종교인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문화에의 공헌, 우리가 이미 종교 없이도 정할 수 있다고 믿는 이성의 한계나 인간성의 한계와의 관련, 그리고 종교의 그 어떤 외적인 것도 한 종교를 종교로서 평가하는 궁극적인 척도가 될 수는 없다. 오로지 종교의 가장 본래적이고 내면적인 것, 즉 성스러움의 관념만이, 그리고 하나의 종교가 얼마나 완전하게 그것에 충실하고 있는가만이 그 척도를 제공하는 것이다."[31]

오토에게 있어서 그 종교의 종교성과 깊이의 표징은 성스러움에 대한 강도에 비례한다. 또한 종교적 직관의 보편성은 성스러움에 대한 강조를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는 구조가 된다. 실제적인 누멘의 감정, 그리고 성스러움에 대한 객관적 정서, 또한 종교성의 선험적 범주의 해명과 규명은 오토를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제23장 종교적 선험성과 역사

무시간적인 종교적 선험성과 시간적인 역사의 길항관계에 대하여 오토는 마지막으로 정리한다. 오토는 여기에서 종교적 선험성은 종교를 역사를 통하여 전개시키는데 매우 중요하고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이해한다. 종교는 의미없는 것들의 이합집산이 아닌 선험적 원리와 본질 위에서 등장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종교가 역사에 전개되는 데에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첫째는, 자극과 소질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진행되는 인간의 영의 역사적 전개 가운데서 소질 자체가 현실화되고 그러한 상호작용을 통하여 그 형태가 규정되는 일이다. 둘째로는, 소질 자체에 의하여 역사의 특정한 부분들이 성스러움의 현현으로서 예감적으로 인식되며, 이 인식이 첫 번째 요소, 즉 소질의 현실화에 대하여 질과 정도에 있어서 영향을 미치는 일이다. 세 번째로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소를 근거로하여 인식과 감정과 의지에 있어서 성스러운 것과의 교재가 생기는 일이다.[32]

그리고 선험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가 다 소유하는 본유적 관념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험적 인식의 소질의 깊이는 상이한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영의 단계, 예언자의 단계,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아들의 단계로 이해한다.
 

글을 마감하며

오토는 성스러움에 대한 감정의 색조를 섬세한 언어와 뉘앙스를 통하여 분석하여 우리들에게 제시하였다. 또한 비합리적 요소의 측면을 청순한 어조와 지조를 가지고 끄집어 올림으로서 종교의 올바른 위치와 기능을 새롭게 전망할 수 있는 중요한 사명을 펼쳤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선 오토 자신이 누멘적 감정에 대한 센시티브한 영혼을 지닌 존재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성스러움에 대한 깊은 관심과 자신의 조그마한 학문적인 노력을 통하여 세계를 구원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오토는 그의 독창적인 개념인 누멘적 감정을 역사와 종교, 그리고 문헌을 통하여 예증하려는 시도를 일관되게 이 책에서 보여주었다. 그 시도는 의미가 있도 매우 놀라울 만한 스케치와 구도로 전개한 모습이 엿보인다. 그러나 간혹 누멘적 감정의 예증에만 관심을 둔 나머지 논리적인 맥락이 끊기는 듯 한 지점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성서적인 맥락 안에서 필자의 주장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다른 부분에 비해서 빈약한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보는 화이트헤드와 Process and Reality와의 관련성 속에서 서로 상이한 체계와, 어쩌면 결코 만날 수 없는 결별의 지점까지도 알게 되는 흥미로운 지적인 여정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러한 서로 얽힌 지점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앞으로 천착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오토의 체계가 화이트헤드의 체계와 어떤 관련성과 도구연관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앞으로 꼭 한 번 이해해보고 싶은 애착이 생겼다. 또한 화이트헤드의 {형성도상의 종교}Religion in the Making에서 보여주는 종교론의 전체구상을 더욱 깊이 이해하여 도대체 오토를 위시한 종교학자, 종교현상학자들의 이해와 어느 부분에서 상이하고 동일한지 알고 싶은 의지도 나에게 다가왔다.

실은 독일 관념론, 그리고 신비주의 전통과 영미 분석철학의 전통의 역사안에서의 끊임없는 갈등과 대립의 양상이 도대체 어디에서 종말을 고해야 될런지는 나에게는 진정 미지수로 남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앞으로 이 서로의 비교적 상이한 세계관이 어디에서 교차하고 어디에서 중첩되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더더욱 갖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칸트의 세례를 받은 오토이기에, 칸트와 독일 관념론 계보와 정신사를 추적해 나가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왜냐하면 그들의 논점과 자신감은 적어도 이 책 안에서는 매우 크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의 영적 감수성을 더욱 투명하게 하는 귀한 책이 되리라고 짐작해본다. 나는 읽으면서 나의 세계와 닿아있는 그 지점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경험도 갖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종교인의 서클 안에서 성(聖)을 속(俗)으로 끌어내리는 작업에 삶을 헌신해야 할 숙제를 더욱 구체적으로 꿈꿀 수 있는 귀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참여의 원리를 강조하는 서구기독교전통의 부산물인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의 감정과, 동일성의 원리를 강조하는 동양종교전통의 신과 자아의 '합일의 기쁨'의 감정 사이에는 결코 쉽사리 화해할 수 없는 거리가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결국 그의 성스러움에 대한 고찰이 종교 일반에 까지 육박하는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거리를 어떠한 방식으로 좁혀 나아가느냐 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다. 물론 화이트헤드의 신 이해 또한 서구사상의 온전한 세례 속에서 등장하였다. 그러나 '신과 세계의 상대성'이 함의하는 바는, 바로 이 양자가 낯선 타자가 아니라 상호 수렴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오토와 화이트헤드와 동양종교전통은 신과 세계, 성과 속을 관계시키는 세 차원의 유형과 방식이다. 성과 속(오토), 성을 향한 속 혹은 속을 향한 성(화이트헤드), 성으로서의 속 혹은 속으로서의 성(동양종교전통)이라는 세 차원의 관계방식의 논의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이해하고 조명해야 할 영역으로 남는 것이다.
 

각주

1) 루돌프 오토(길희성 역), {성스러움의 의미}, (서울:분도출판사, 1991), p.19. 이하 DH로 약칭.

2) DH, p.34.

3) DH, p.36.

4) DH, p.37.

5) DH, p.39.

6) J. S. Mill, {논리학 대계}Logic, 제5권, 제3장. 화이트헤드(오영환 역), {과정과 실재} (민음사, 1991), p.63. 이하 PR 표기.

7)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유명론과, 언어적 표현에 대한 과신(過信)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PR pp.63-64에서 자세하게 언급한다.

8) DH, p.41.

9) 전 철, "음악의 현상학적 이해", {한신교지 12호} (한신대학교, 1996), p.138.

10) DH, p.47.

11) DH, p.48.

12) "진리의 직시에 대한 근거는 느낌이다. 우리는 객관적 인식은 지성(Intelligence)에서만 열린다고 오해한다. 그러나 지성은 느낌의 후기위상이고 느낌의 합리화이다. 사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느낌의 합리화이다. 지성과 이성은 그 느낌의 합리화를 도모해 주는 기능일 뿐이다. 느낌의 후기위상이 지성이고, 지성의 초기위상이 느낌이다" ; 전 철, "음악의 현상학적 이해", p.144. PR, pp.219-235.

13) DH, p.79.

14) DH, p.91.

15) G.W.F. Hegel, Phanomenologie des Geistes (Suhrkamp Verlag Frankfurt am Mein, 1970), p.107.

16) 화이트헤드는 궁극자의 범주 3개, 현존의 범주 8개, 설명의 범주 27개, 범주적 제약 9개를 정의하고 그 범주를 통하여 현실세계의 갖가지 경험적인 내용에 대하여 해석을 웅장하게 구축해 나아간다. 변환의 범주는 이 9개의 범주 가운데 6번째에 속하는 범주이다. PR. 87

17) 현실적 존재에 대한 어떤 존재의 <긍정적 파악>은 완전한 거래행위이며, 거래행위는 이 후자의 존재가 느낌의 여건으로서 진입ingression 내지 객체화objectification되어 가는 것으로, 그리고 그 여건을 주체적 만족으로 흡수하는 느낌으로 분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PR. p.132.

18) DH, p.104.

19) DH, p.117.

20) Jurgen Moltmann, Gott in der Schopfung (Munchen:Chr. Kaiser Verlag, 1985), p.226. 전철, {음악의 현상학적 이해}, p.142. 재인용.

21) DH, p.135.

22) DH, p.137.

23) DH, p.181.

24) DH, p.189.

25) DH, p.234.

26) DH, p.244.

27) DH, p.245.

28) DH, p.247.

29) DH, p.250.

30) DH, p.260.

31) DH, p.266.

32) DH, p.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