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icle Bank

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4/03/04 (22:04) from 80.139.172.122' of 80.139.172.122' Article Number : 290
Delete Modify 류종렬 Access : 6409 , Lines : 149
베르그송의 자유, 그리고 들뢰즈의 반복
Download : berg-del.hwp (48 Kbytes)
새한철학회 학술발표회 논문집
2002년 11월 16일




베르그송의 자유, 그리고 들뢰즈의 반복

류  종  렬(경희대)


1-1. 이미 설정된 또는 이미 주어진 단위는 경험적 단위이든 관념적 단위이든, 베르그송이 지속이라는 새로운 내용(시간=질료)을 제기하기 전까지는 형이상학이란 이름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천상의 철학에 빗댄 고대 철학은 기하와 논리의 단위로서 불변의 부동의 자기 동일적 단위를 선전제로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근대철학은 지상과 천상을 두 개의 단위를 구분하면서도, 지상에서 다양한 단위들도 천상과 마찬가지의 논리가 성립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지상의 단위도 고대의 단위와 마찬가지로 불변 부동 자기 동일적이나, 지상으로 내려오게 하기 위하여 경험적 세계에 적용에 맞게 단위를 구체화하였다. 물체에게 적용한 단위의 구체화는 그 한계상으로 물체의 형식에 머물 수밖에 없다. 형식의 문제를 보완하는 작업이 물체의 내부(내용)에 대한 문제제기로 바뀐다. 그 내적인 것은 절대적 등질도 자기동일적도 아니며 이질적이면서 자치적이며, 부동도 아니고 운동이며, 불변이 아니라 변화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관념론에서 사유의 단위의 불변성과 유물론에서 물체의 단위의 불변성, 즉 이데아의 불변성과 아톰(원자)의 불변성은 형이상학적 논리상 원리와 법칙을 만들어 냈다고 하나, 사실은 거울을 마주보고 있는 것과 같다. 이 둘과 다른 단위의 성질을 지닌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수학의 발전과 과학의 발전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반성이 인간 자신의 내부에로 관심을 전환하는 경우에서이다. 사실, 고대와 근대에서 인간이 천상에 심정적 의탁과 지상의 여러 물체들에 대한 지배와 방어가 절실했던 것은 그 만큼 과학의 발전이 모자랐고, 그리고 인민이 질적으로 편안하고 자율적인 삶을 살 수 있는 토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전과 생산력의 발전은 일부의 인간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라기보다, 인민의 일반의지를 반영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그리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장이 열리기도 하였다. 프랑스 대혁명은 그 실례 중의 하나이다. 인민의 의사 즉 일반의지의 실현 가능성은 하부의 내재적 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한다. 공동체에서 내재성은 새로운 조직화의 문제를 야기한다. 이런 발상은 물체의 내재성과 생물의 내면성의 차이 이상으로 다른 차원이며, 공동체의 조직화에 대한 단위 설정은 다른 방식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예고한다. 조직화의 문제는 인류의 공동의 경험 즉 베르그송이 말하는 총체적 경험에 대한 반성을 의미한다. 이런 반성에서 실재성의 근원을 외부 또는 천상에서 찾아야 할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찾아야한다는 새로운 형이상학 즉 질료 형이상학이 등장할 수 있다.베르그송의 자유, 그리고 들뢰즈의 반복


이런 단위에 대한 반성을 제기하면서, 베르그송은 ― 훗설이 대상에 대해서 말하는 엄밀성과 달리 ― 서구 철학사에는 정확성이 없었다고 한다. 진정으로 정확성이 있었다면, 물체조차도 운동하지 않는 또는 진동하지 않는 물체가 없다는 문제 제기를 모호하다고 부정하고 무화시키려 했을까? 철학의 단위를 다루면서 외부 대상으로부터, 그리고 철학사가 말해주듯이 외부로부터, 내면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인간의 삶의 양식과 인식의 한계가 있다. 이는 베르그송이 지적하듯이, 그 시대의 과학, 상식(일반적 인식능력), 보편적 또는 일반적 언어의 개념화에 기인한다 또한 그는 PM에 실린 글 「형이상학의 입문(1903)」에서 지금까지의 철학이 사물의 바깥을 돌고 있는데 반하여, 자신의 새로운 형이상학은 사물의 내부에서 시작할 것을 말하고 있다.
베르그송이 제기한 문제는 지금까지의 철학사가, 자아에 관한 한, 외부에 비추어서 내부를 파악하는 방식이었다 것이다. 그는 철학사의 전개과정을 “전도된 심리학”으로 보고 있다. 말하자면 동일자나 동일성이라는 것도 자아 동일성을 다루기 전에 대상(물체)에 대한 동일자를 규정하고, 그리고 대상에 대한 자기 동일성이 있다고 선전제로 확보하고 난 뒤에 타인에게 적용하고, 그리고 자신에게 적용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자신의 동일자나 동일성을 확보해주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런 대상의 동일성과 유사하게 타인의 동일성, 타인의 동일성과 유비로 자아의 동일성을 확보하는 유비이 논리일 뿐이다. 이런 문제를 들뢰즈는  ꡔ차이와 반복(1969)ꡕ 제3장에서, 베르그송의 철학적 방식에 따라 다루고 있다.

1-2. 단위 설정에 대한 반성에서, 형상에서 질료로 전향하는 해명 방식이 우리에게 생소한 것은 아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미 생성에는 두 번의 반복이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리고 들뢰즈가 재해석한 류크레티우스의 다양체(divers)에 대한 분석을 하면서, 에피큐로스의 원자에는 이미 공간상으로 사물로서 최소의 너비(부피, étendue)가 있으며, 시간상으로 사물의 내재적으로 지속(durée)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베르그송도 스피노자의 자연에서 이미 너비와 지속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영향을 입은 피히테의 자아, 셀링의 절대자, 헤겔의 관념에는 이런 실체성이 있다고 보았다. 게다가 그는 라이프니츠의 미분학에서 도함수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단자들 각각이 에너지의 양과 방향이 다르다는 점에서, 이미 사물의 강도의 차이가 있음을 보았다는 것을 주목하였다. 그러나 라이프니츠가 질료가 생명화(hylozoïsme)되는 관점에까지 나아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철학의 단위에 대한 문제제기는 소박한 관념론이나 통속적 유물론에 머물고 있는 자들이 단위를 부동, 등질, 불변이라는 형상 형이상학의 선전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이다. 이런 선전제의 수용은 데카르트 이후로 근대 철학이 고대의 형상론에서 벗어나려고 두 가지 실체성을 인정하면서, 사물의 특이성과 자아의 독자성을 확보하려고 하였지만, 선전제에 대한 비판 없이는 논리의 극한에서 이원적 단위의 실체성은 다시 고대의 형상론으로 이끌려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ꡔ창조적 진화(EC, 1907)ꡕ 제3장에서 근대철학이 형상형이상학에 굴종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두 가지 선전제 미해결의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고, 들뢰즈도 ꡔ차이와 반복ꡕ 제3장에서 대한 인식능력에 대한 재검토를 하고 있다.
베르그송이 지적한 두 선전제란 다음과 같다. 하나는 자연에는 제일성(l'unité)이 있고 그리고 이 제일성에 따라 학문에도 제일성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런 제일성을 탐구하는 지성(순수이성)이 인간에게 있다는 믿음이다. 우선, 제일성의 주장이란 우주에 보편적인 하나의 원리에 의해 모든 사물과 자아도 설명되고 해명될 수 있다는 인간의 바램을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배경에는 우주가 혼돈이 아니라 질서 지워져 있다는 것에 대한 놀람에서 철학을 시작하는 플라톤의 관점의 연장이며, 그 배경으로 형상형이상학화한(플라톤화된) 크리스트교의 입장에서 신이 세계를 창조하고 질서 지웠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질서는 만화경을 흔들다가 멈추면 보여지는 아름다운 질서에 반하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니다. 왜 다음 흔들기에서 보이는 세상은 앞에서 보았던 세상과 다른가에 대한 의문을 배제한 것이다. 이 두 흔들기에서 등장하는 광경은 하나와 다른 하나 사이에 어느 하나가 배제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사물의 질서와 생명의 질서는 같은 방향의 질서인가라는 문제가 열역학 제2법칙 이후로 제기 되었다. 물체의 평준화의 질서와 달리 생명체의 생명활동은 엔트로피의 역행이 있다는 것이다. 관념의 질서와 물체의 질서 사이에 거울효과가 있다면, 전자의 질서들과 생명의 질서 사이에는 방향의 역전을 넘어서, 소박한 유물론자가 보는 평행성과 다른 비대칭성이 있다. 들뢰즈는 ꡔ의미의 논리(1969)ꡕ에서 과학(사물)의 탐구와 철학(자아)의 탐구가 같은 기반임에도 서로가 다른 계열을 형성하면서, 과학의 (진리라고 말할 수 없기에)독사와 다른 철학의 파라독사가 형성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제일성에 대한 비판적 견해 보다 더 신중히 생각해야 할 것은 인간이 제일성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일성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제일성이 있고 그 것을 파악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순수 논리의 입장에서 인간이 선전제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그 정의에 맞게 추론을 전개하는 경우에 추론에, 그 추론에서만, 오류가 있을 수 없다. 말하자면, 맞는 것만을 말하자, 그리고 그 말들은 모두 맞는 것이라는 순환 논증의 오류에 빠진다. 문제는 제일성이라는 등질적 완전성이 정의상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완전성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인식의 능력이 당연히 있는 것으로 출발하기 때문에 잘못을 범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인식 능력에 맞는 부분만을 선택하여 정리하고 나머지를 배제하고 난 뒤에, 선택된 완전한 전체(그것은 부분일 뿐인데)로 인정하여, 그것을 인정하는 인식 능력이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순환논법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지성(순수 이성)과 다른 인식의 능력으로서 직관을 본능을 근거로 끌어내고서, 전체가 이미 동적이고 변화 중에 있기 때문에, 운동하고 변화하는 실체성을 인식하는 상호침투의 공감의 능력으로 직관이 종의 진화과정에서 내재적으로 깊은 자아 속에 있다고 보았다. 이 깊은 자아의 능력(권능)은 들뢰즈에 있어서 내재성, 강도성, 잠세성으로 다루어 질 것이다. 문제제기는 이제 움직이고 변화하는 실체성에 대한 구체적 경험을 찾아내는 것이다.

2-1. 인간의 삶에 대한 반성에 맞는 철학적 경험의 단위를 설정하는 것은 주요한 문제제기이다. 새로운 단위가 외적으로 형상을 갖추고 있지만 내재적으로 동질이 아니라 이질이며, 불변이 아니라 변화이며, 그 자체가 외적으로도 정지가 아니라 운동이며, 내재적으로도 정지가 아니라 진동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단위는 무엇인가? 베르그송은 일단 DI에서 “인격”을 그 다음 심리학적 작품 MM에서 “기억”을, 생물학적 작품 EC에서 “생명”을, 그리고 사회학적이고 종교적인 작품 MR에서 “인류”(새로운 공동체)를 꼽고 있다. 이에 비해 들뢰즈는 모든 생성하는 사물에도, 그리고 생명 있는 존재에도 이 단위를 인정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실제로 우리가 마주쳐 분석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이미 사회의 관습과 습관에 젖은 성인 개인이 아니라, 분열이 진행중인 유아(18개월 미만)에서 탐구하고, 그리고 인간의 시간지속에서 삶 자체가 분열과 수렴의 연속임을 말하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베르그송과 들뢰즈에 공통하는 단위로서 생명의 단위(나아가 조직화의 단위)를 설정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베르그송은 ꡔ창조적 진화ꡕ 제4장에서 인간의 착각에 대한 3가지를 설명한다. 하나는 무로부터 존재를 생성할 수 있다는 착각이다. 베르그송은 존재로부터 시작한다. 그 대신 베르그송의 존재는 형상존재와 달리 생성하는 존재, 질료의 존재이다. 둘째는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만든다는 착각이다. 베르그송은 질서를 파악하는 두 개의 속성이 있다. 기하(논리)질서와 생명질서가 있다. 이 두 질서는 같은 뿌리지만 방향이 다르다. 그래서 무질서란 한 질서가 다른 질서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정지로부터 운동을 설명하고 해명하려는 착각이다. 이에 대해 정지는 없다. 모든 것은 움직인다. 언어가 주사, 동사, 속사로 각 움직임을 일반적 개념으로 형성하면서, 이에 습관적으로 익숙해진 상식이 과학의 힘을 빌어서 세 가지 방식의 개념들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주사에 속하는 실체도 움직이고 있다. 속사에 속하는 성질들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진동하고 있다. 동사는 행위하는 것으로 당연히 움직이고 있다. 결국 모든 것은 움직이고 있다. 나아가 과학적으로 해명해도, 일반적으로 사물이 정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물은 지구의 공전속도 자전속도로 움직이고 있으며, 그들의 미세한 입자는 1초에 3조의 진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는 점을 예로 들고 있다. 또한 베르그송은 이 움직이는 단위로서 신체를 지닌 자아를 MM에서 이마쥬라고 가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런 세 가지 방식의 설명을 들뢰즈의 ꡔ의미의 논리ꡕ 제1-3장에서, 구체성으로서 특이성이 있는 사물이 지칭화(désignation)에서 양의적 파라독스가 있고, 표출화(manifestation)에서 다른 방향으로 드러나는 파라독스가 있으며, 의미화(signification)에서 여러 계열들 사이의 파라독스가 성립할 것이라고 말하고, 마지막 장에서 세 가지는 사물(세계), 자아, 신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보기에 베르그송과 관련하여, 사물(대상), 자아(질서, 표피적 자아), 신(깊은 자아)으로 대체하면 두 철학자는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이 단위 설정에서 실체로서 명명되는(지칭)방식에서 사물은 이름을 불러서 성립하기도 하기만 자신의 위상에 따라 달리 불리어진다. 예를 들면 변소에 변기이지만 화랑의 벽에 걸린 변기는 작품이다, 이보다 인간은 불리어진 이름과 불리기를 바라는 이름은 다르다. 드러나는 방식은 명명하는 방식과 유사한 듯하지만, 이들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 내면에서 드러나는 것은 다르다. 사물에서 겉보기에 같은 철이라도 그 강도가 차이가 예라고 하면, 인간의 삶의 과거의 두께에 따라 10년 전의 자아와 현재의 자아는 드러나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 게다가 삶의 실천적 행동에서 대상에 따라, 지위에 따라, 과거의 기억의 연관에 따라, 타인과의 관계에 따라 달리 의미를 생산한다. 이런 단위가 신체를 지닌 자아이다. 이자의 근원은 기억을 지니고 시간적으로 연속된 한 덩어리라는 점에서 베르그송에서는 심층 자아 자체가 자유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들뢰즈가 이것을 영겁회귀의 개념, 즉 지속적 확장의 반복의 개념으로 풀어보려고 했다는 것만을 언급만 하자.

2-2. 이제 생명있는, 기억 있는 우리의 신체를 단위로 설정하고 시작하자. 이 신체도 다른 물체와 마찬가지라고 할 때, 데카르트의 동물-기계처럼 기계(machine)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기계가 물체 기계나 다른 동물 기계와 차이는 시간-지속에서 인간으로서 인격을 지닌 자아라는 것이다. 이 물체(le corps)로서 우리 신체(notre corps)는 기하적 산술적 단위와 다른 방식으로 다른 어떤 것을 생산하는 능력이 있다.
베르그송은 이런 신체가 단속적으로 반복하는 사실을 주목하면서 기억의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달달 외워서 언제나 어느 곳에서 똑같은 사실이 반복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한번 외웠으나, 그것이 필요에 따라 생겨날 수도 있고 생겨나지 않을 수도 있다. 간략하게 전자를 신체의 기억, 후자를 인격의 기억으로 구분한다. 이런 구분은 우선은 물질성이 지니는 반복성의 의미를 인정해주고, 그리고 자아 즉 생명 있는 존재의 반복은 다른 반복임을 설명하기 위한 방식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소박함 유물론의 관점이 성립하는 한계를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 관념론이 생각하는 인격이 선전제로 있는 것과 달리 생명존재의 인격은 항상 변화 발전하는 자아. 즉 “부풀어 가는 자아”를 구출하고자 한다. 이 후자에서 확장되는 자아가 확장되지 않고서 주저하는 것은 도약을 위한 한 방편이다. 그러나 이 확장적 자아가 되로 되돌아보며, 생명력 있는 자아의 필연적 발전을 거스를 때는 탈인격(déspersonaliser)으로 나타난다.
들뢰즈는 물체의 반복을 다루기 위하여, 우선 시계의 타종소리를 예로 든다. 틱-택, 틱-택, 이들 사이의 간격을 줄이면 그냥 틱, 틱 이다. 일정한 반복 사이에 인과성이 없다는 것은 흄이 말한 ‘불을 때니 연기가 난다’는 것, 우리말로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것만큼이나 연속성이 없다. 단지 이 종소리의 단위들은 하나 다음에 하나를 병치시키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니다. 산술적 단위의 계속에서는 단지 ‘다음’이라는 것이 있을 뿐 둘 사이의 내재적 연속도 인과성도 없다. 베르그송도 ‘틱’들이라는 요소들의 합(총합)이 공간적 나열이며, 시간-지속이라는 전체의 덩어리(총합)가 아니라는 것을 누누히 말하고 있다.
습관이라는 반복은 단지 반복이 아니라, 동일자의 자기 단위를 산술적 단위를 계속적으로 나열하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신체가 행하는 습관도, 한 습관 다음에 한 습관은 동일자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신체의 습관이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하게 반복하고 있다는 것은 물체적 기계가 반복하는 것과 닮은 것이다. 이 점에서 베르그송과 들뢰즈는 소박한 유물론이 주장하는 인간의 신체가 물체적 방식으로 유기화되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이 습관의 반복만으로 생명있는 존재의 활동과 능력, 나아가 새로운 조직화의 방식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시간이란 지속 내에서 자신의 모습을 부풀리지도 변화하지도 또한 발전하지도 않는 그 존재야말로 습관의 반복적 존재이다. 한 인간을 다른 인간이 만나고 난 뒤, 그 다음에는 전자를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은 상태에서 후자가 떠올리는 재인식의 작업에서 어떻게 변화하거나 변모한 그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회고적 입장에 그는 영원히 “이미 본” (심리학적)사실로서만 남아 있다. 그가 동일자로 “다시(반복)” 오시네의 종교에서 예수를 대하는 관점도 회고적이다. 이미 보았던 대로, 보고 있을 뿐이다. 만일 그가 다른 시간지속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온다면 알아볼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2-3. 문제는, 반복되더라고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 무엇이 있기는 한가? 우선 앞에서 습관의 반복에서 지난 사실과 현재의 사실 사이에서 둘 사이가 동일하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두 번 사물(사건)이 있었다는 점에서 보자.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이에 사물의 보는 시점과 시각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두 사물이 동일하다는 것은 사물에 대한 지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물이 같은 것이었다는 즉 언어의 규정에서처럼 같은 이름을 부르듯이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말했듯이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지각했던 것, 즉 추억의 대상, 그것이 있고, 그 다음 대상을 첫 대상(회상)과 같은 대상으로 여기는 어떤 반복이 있는 것은 아닌가?
단순한 습관적 반복이 마치 현재의 계속이듯이, 이 과거의 대상에 대한 이해로서 지각(또는 감각)은 과거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우승컵이 있다고 하자. 일년 전에 기념관에 놓인 것에 대한 지각이 일년이 지난 오늘에도 같은 지각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내용과 세월의 변화에 대한 모든 것을 추출(추상)하고 남은 이름과 같은 이데아를 닮은 형상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산술적 단위가 항상 기하적 단위의 원리(개념 정의)의 정합성에 이끌리어 가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지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표상(추억의 재현représentation)에 대한 재인식일 뿐이다.
물체의 재인식에 대한 설명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의의를 제기한다. 사물이 변하였다고 하더라도 우승컵이라는 고유한 의미를 지닌 컵은 불변이다. 그 불변이 세월이 지나 색이 바래고 풍화에 의해 변한 것을 지각인식의 오류이지, 추억에 있는 관념(이데아) 또는 정의상으로 전개된 개념과 무관하게 하거나, 또한 그 변화에 따라 상대적으로 인식을 달리할 때마다 이름과 대상을 달리 규정하는 상대주의에 빠질 때, 진리는 어떻게 성립하는가 라고 한다. 우리가 습관의 현재가 통속적 유물론의 입장이 일리(raison)가 있다(일리가 있다는 말은 진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듯이, 소박한 관념론도 일리가 있을 뿐이다. 물론 이데아로서 또는 개념으로서 그 추억의 형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순수공간에서 설명하고 확장하는 수학이 성립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순수공간의 생성과 확장은 질료-시간의 확장과 도약과 평행도 대칭도 아니라는 것을 말할 뿐이다. 말하자면 순수공간의 확장을 질료시간에 확장하여 적용하려하거나, 대체시켜 설명하려는 방식은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과거에 회상으로서 되돌아 볼 수 있게 하는 부동으로 이데아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이 신[물]체 속에 있지 않다고 보는 점에서, 관념론자들은 이미 신체와 다른 초월성을 인정하면서 추억을 다시 위치시키려하고 있다. 다른 한편 절대적 관념으로서 어느 곳에도 어떤 시기에도 있지 않지만 보편적으로 실재하는 그 관념이 있다고 할 때, 그 관념이 현재의 대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위치와 크기가 없는 점(기하적 점)이 구체적 실물로 너비와 지속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은 자기 모순이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기하적 단위거나 산술적 단위가 자기 동일성으로 한계 내에 머물면 어떤 너비도 지속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면서, 생명있는 나의 신체라는 단위로서, 즉 “현재의 추억”과 같은 짧은 지속과 두께를 지닌 너비로서 단위로서, 이마쥬를 제시하였다. 이 이마쥬가 현재 속에 과거를 지니고 미래를 잠식하는 단위이며, 구체적으로는 나의 신체이다. 여기서 이마쥬가 사진이나 화면의 이미지로 착각해서도 안되며, 사유의 과거 표상으로서 관념으로 또는 심리학적으로 환각이나 환영을 생산하는 상심의 상징으로서 이미지로 보아야 아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나의 신체라는 이마쥬는 변화하면서 발전하는 ― 그렇지 않다면 습관적 물체처럼 다시 하강의 길에 빠지게 될 ― 도약(élan)하는 존재이다. 또한 이 존재들은 서로 침투하는 존재들이다. 이 존재들이 필연적으로 부풀어가고 또한 확장해 가는 경험의 위상에서 보면, 생명과 기억을 지닌 시간지속의 총체적 존재는 (베르그송도 말하지만 부를 수 있다면 신이라고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자기 생성이고 창조이다. 이런 점에서 베르그송에게는 지속 자체가 근원적 자유의 필연성이며, 끊임없이 도약한다는 점에서 낙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베르그송에서 질료 측면이 기억과 생명에서 도약(상승)하지 않으면, 물체로 되돌아가는 망각의 길(하강)이라 하면서 개체의 죽음을 인정하고 개체의 불연속을 인정한다. 그러나, [질료]형이상학적으로 지속, 기억, 생명, 조직화 등의 실질적 기반(인식에서 공감)이 개체의 깊이에 자리한 종의 차원으로 보면 지속하고 살아서 진행되고 있기에 연속적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의 관점으로 보면, 인류의 미래에 대한 도약과 개방성을 인정하면서 개방된 사회와 종교도 도래할 것이라 여실 수 있다. 이 점에서 베르그송 철학이 [질료]형이상학적으로 장점이지만 약점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보았던 것은, 우리가 보기에, 들뢰즈의 장점이며, 또한 베르그송 사상의 발전으로 보인다.
여기서 질료로서 과거의 추억들의 총체는 기억이라는 측면에서 형이상학적으로 미래에 연결하는 것이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들뢰즈는 알았다. 그는 과거(추억)가 공간적으로 배열되지도 않고 순서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어떤 인식적 종합이 있다는 것을 베르그송처럼 인정한다. 또한 현재의 지각처럼 과거(기억)들이 현재에 실재적으로 지속하며 미래를 잠식하는 [의지적(욕망적)] 종합도 인정한다. 이 과거들에 대한 두 종합의 방식에서 무의식이 실재성이라는 것을 수용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베르그송의 비자발적 무의식과 프로이트의 (성관심의) 무의식의 위상(구조)은 같다. 나아가, 기억이 ‘과거를 지니고 있는 현재’로서 너비와 지속으로 연속되듯이 가까운 미래를 여는 작용(행위)의 양태로 너비를 늘어나게(prolonger)하고 또한 지속한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도 베르그송이 말하는 예참(예상참여)을 인정한다. 이러한 연장이 얼마간에 지속이 될 것인가? 베르그송이 비결정적이라고 하듯이 인류 앞에는 알 수 없는 위험과 급변이 있을 수 있듯이, 신체를 지닌 인격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이 과제를 단지 열려진 세계, 자아의 지속으로 풀 수 없는 난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미래의 조직화는 낙관만이 아니라는 것을 들뢰즈는 프로이트의 ‘죽음의 원리’ 제기에서 보았다.

2-4. 베르그송이 열려진 미래에 대하여도 비결정적이지만, 개방되고 열려진 조직화에서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수 있고, 또한 그 공동체에서 인민은 누구나 자유를 누리고 단순하게 자기의 권능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에 희망을 걸지만, 우선은 이를 실행할 특권을 지닌 자들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의미에서 신비주의자들에게 실천적 구원을 청하는 셈이다. 이런 배경에서 인민이 누구나 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열어놓고서도, 그래도 기존의 저항하는 지층 뚫고 솟아오르는 도약(élan)은 어떤 특권적 권능을 행사하는 사람에게 기대한 것은 아직도 인간의 삶의 영역이 단순한 작용(행위)으로 넓어(연장)지고 지속하는 사회(공동체)로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기보다, 우리가 보기에, 베르그송 시대의 한계일 것이다.
이에 비해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습관과 기억에 관한 관점을 그대로 따르면서, 또한 무의식의 실재성과 그 권능이 현재뿐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다른 한 측면에서 미래는 다른 양태로서 인간에게 작용을 하고 있음을 정신분석학적 견해로부터 보았다.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생명의 긴 역사에서 도약을 인정하며, 도덕적 영웅과 종교적 신비가에서 등장한다하더라도, 역사의 다음 반복에서 왜 실천적 도약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을 수 있다. 물론 긴 역사에서 프랑스 혁명이나 산업 혁명은 도약일 수 있다. 그리고 한 개체의 인격에서 삶의 과정에서도 도약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한 개체가 살아가면서 역사 속에서 겪는 공동체에는 반복이 과거의 총체를 지닌 현재가 미래를 뚫고 나가는 것이라기보다, 먼 미래를 과거로 치환하고, 그 먼 미래를 과거의 총체로 삼아, 다시 미래를 투영하여 미래에 대한 확장과 지속을 지탱하려고 하는 형상적 원리의 지배를 이데올로기라고 젖혀두기에는 선전제로서 이미 주어진 미래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이 선전제는 이미 과거를 지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를 넘어서 영원한 미래까지 예측하고, 그 미래의 삶을 이룩한 공동체를 이미 제시했다고 한다. 천국이 그것이다. 우리가 환상이라고 불렀던 그 미래가 자아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선미래가 현재를 지배하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중요하게 제기되는 것는 ‘인간은 죽는다’는 것이다. 죽고 난 뒤에 인간이 갈 곳이 있다고 여기는 것과 확장적 반복으로 (다시 돌아갈 과거) “괴물같은 덩어리”가 있다는 것 사이에는 다른 관점을 형성한다. 전자는 행복하다고 할까? 후자는 그 고뇌와 고통의 삶을 다시 산다고 할까? 쾌락의 원리와 죽음의 원리라고 말하는 프로이트는 어느 것을 말하고 있는가? 실재성으로 덩어리는 반복하여 살아가는 것으로 행복보다 고통의 산물이 아닌가? 이에 대해 베르그송은 우리가 보기에 답이 없다. 들뢰즈는 미래에 대해 단지 열려 있고 그 길을 가는 것으로 생명있는 존재가 자유이며, 도약이 행복 또는 스스로 되어 가는 과정을 환희이라고 받아들이기에게는 미래 또는 영원에 대한 인간의 소망(욕망)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에게 죽음 또는 인류에게 종말이 없으면서도, 과거를 현재 속에 지니듯이 미래를 현재 속에 포함하여 살아가는 양식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들뢰즈는 모리스 블링쇼의 견해를 받아들이면서, 우리가 보기에 고대 회의론자의 논법을 받아들이면서, 그 완결된 미래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고 아직 행동으로 실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한편으로는 완전한 종말로서 미래는 우리가 말해봐야 소용도 없고 행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한편 그 영원한 미래는 베르그송 식으로 결정되지도 않았으며, 그것을 결정할 우리의 어떤 행위방식도 인식방식도 없다. 그래서 그런 미래에 대해서 탐험이나 논의라는 것은 우리의 범위를 벗어나기보다, 그 미래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미래는 이미(도대체) 결정 난(주어진) 것이라면, 인간이 논의할 대상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 먼미래(종말)를 죽음으로 대치해보면, 죽음에 대한 논의는 허구이다. 자아라는 개체의 죽음이든 인류라는 종 전체의 죽음이든, 종말로서 죽음에 대한 논의는 생명있는 존재로서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베르그송의 방식으로 보면, 죽음은 단절로서 단위의 넓힘과 지속이 단절되는 장면으로, 더 이상 생명있는 존재의 논의 대상이 아니다.
들뢰즈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미래, 그 미래 이전의 삶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들뢰즈는 프랑스어의 문법에 있는 ‘전미래’의 예를 든다. 지속으로서 인격은 인간의 종말이라는 먼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궁극) 이전의 전미래에 대해 행동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의 실체성을 말한다. 이 실체성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속하는 신체로서 운동도 있고 시간으로서 지속을 내재하고 있다. 여기서 그것은 신체로서 운동을 지니고 한계를 넘어서는(transcendantal), 그럼에도 시간-지속 속에서 확장하는, 그 괴물 같은 덩어리이며, 생성하고 있다. 이 생성은 정지하지 않고 또한 공간의 어떤 위치를 지니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구조 없는 구조이며, 의식의 차원에서 표면적 자아 의식의 한계에서 불연속이지만 깊이 있는 자아의 무의식에서 연속하는 기억이며, 생명의 차원에서 개체로 보면 단속적 계속이지만 종의 차원에서의 내재적 연속이며, 사회적으로 (정치)체들 사이의 관계에서 체들 사이의 집합으로 총합이라기보다, 기관 없는 체(결사체 없는 실체성으로서 주권성, 루소의 일반의지, 니체의 권능)로서 총체이다. 이 생성이란 지속하는 방식에서 자신의 과거의 총체를 지니고 현재에서 미래에 연속하는 ― 베르그송의 용어로 예참하는 또는 잠식하는 ― 그 무엇이다. 그것을 들뢰즈는 단독자(singulier)라고 한다. 단독자는 종말로서 미래가 아니라 전미래를 향하여, 지금까지 지니고 왔던 기억을 현재에 실어서 미래에 투여한다. 이 미래의 투여는 어제의 자아를 오늘의 자아에 부풀리듯이 내일의 자아로 부풀리어 간다. 이 어제의 자아가 오늘의 자아로 그리고 미래의 자아로 가는 ‘현재의 자아의 반복’이 니체의 표현을 빌어 초인(surhomme)이다. 여기서 세 번째 반복은 습관이 보여주는 현재의 반복도, 과거의 종합으로 반복도 넘어서는, 미래에 도약을 하는 반복이다. 이 반복의 초인은 자유이다. 이점에서 베르그송의 도약하는 신비가는 니체의 초인과 같은 의미이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에서 내재적(깊은) 자아의 자유를 죽음이전에 전미래에도 연속적으로 실현을 노력하는 반복의 자아로 확장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베르그송이 전미래에 대한 길을 열면서 인간의 미래에 대한 낙관론으로 일관했다면, 들뢰즈는 먼 미래에 지쳐(허상에 매여, 게다가 미래가 멀어서) 자기 파괴적인(타인에게는 폭력적인) 인간의 한 심성에서 먼미래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전미래에 대한 인간의 노력으로 새로운 조직화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인간은 미래를 예측하려하고, 그 미래를 바라며(욕망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 미래 중에서 그 종말(결말)을 현재화하려는 환상은 결과가 이미 주어진 것으로 파악하고, 그 원리로부터 사실들을 규정하려했던 형상철학의 선전제 오류일 뿐이다. 미래는 베르그송의 견해로 보아 비결정이며, 그리고 인간이 현실화시키려 노력하는 과정의 열려진 장이다. 들뢰즈로서는 그 미래가 영원한 미래가 아니라 ― 프랑스어 문법적으로 뿐만 아니라 구체적 현실에서 ― 전미래이다, 인간의 노력은 이에 대한 인간의 욕망(소망)을 현실화하려는 작업이다. 이 현실화 작업의 한 단면이 사건(evenement)이다. 순수 사건은 깊이에서 연속되는 생성 덩어리의 권능(미친 생성), 즉 내재성, 잠세성, 강도성이다.
<질료형이상학과 형상형이상학의 이해를 위한 도표> 존재론
 인식의 대상들
인식론
 인식의 작용들
인식론
 인식의 성격
인식론
결과에 대한 가치
이데아
관념들[원의 성격
(circulrite)]
노에시스
 예지 작용
 [직관 순수작용]
<형상형이상학>

에피스테메

(개별과학의 성립)

   [소박한 관념론]
진리

 [-진실]

 (사실 - 정합성)

         [실재론]
수학적 대상들
 도형들
  [삼각형 원뿔]
디아노이아
추론적 사유
  [추론과 증명]
감각적 사물의
 이미지-모델 형태
 [개별 사물들]
피스티스
(설득의 수단, 신념)
[습관 전승]
독사
(견해) [의견]
  [통속적 유물론]
진리도 허위도 아님
(개별적 사실들)
         [현상론]
감각적 사물들 모습
 동굴의 그림자
 [색갈 재료]
에이카시아
감관의 작용
 [오관]
무지
[18세기까지 학문의
관심 대상이 아님]
거짓[수용 불가능]
우발사건(단일사실)
         [가상론]
우연(hasard)의 세계 - 부조리(까뮈), 애매성(메를로퐁티)
분출의 세계, 분화의 세계 - 단일 사실들의 조합들 - 특이성(singulier)
사건들(les Evenements) - [표면 효과, 겉모습]
사물내부, [몸 내부]
(베르그송 이마쥬)
작용하는 그림자
(l'ombre agissant,
 mana)
표층자아
[성향 경향 욕망]
(moi의 발생)
<원본없는 생성>
기호작용 -표출,
의미작용 -의미화
[꿈의 형성-Eros]
<조직없는조직화>
형상 없는 구조
의미의 계열 분화
[원본 없는 상징]
빈상자(라깡)
기관 없는 생성체
 [정령, 영혼]
<지지점없는 철학>
    [실질 존재론]
심층자아
지지점 없는 기억
(작용하는 권능)
 자의식[Moi]
무의식
영원 회귀(니체)
지속
미친 생성(들뢰즈)
이드,충력(프로이트)
비결정 (베르그송)
인식과 별개로, 독사에 대해 파라독사를 생성하려는 세계(들뢰즈) - 괴물
엔트로피에 역행하는 위상 세계 (베르그송) - 자유
“하나”, “신 즉 자연”, 즉 “미친듯한 괴물스런 존재”.
“하나”, 즉 변화하고 있는 질적 반복, 생명 있는 한 반복 (내재적 반복).
<질료형이상학>, 변장된 범신론, 범자연내재주의
(Le retour eternel de l'ame aupres de ‘Hana’, Dieu.)



Backward Forward Post Reply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