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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5/06/18 (10:28) from 129.206.196.75' of 129.206.196.75' Article Number : 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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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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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Evolution)

                                                                                      최재천

       창세기 제1장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날은 그가 생명을 창조하기 시작하신 지
다섯째 날이나 되어서였다. 따라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도 자신이 태어나기 전 5일 동안에
벌어진 일들을 직접 목격할 수는 없었다. 다만 하나님으로부터 설명을 들었거나, 아니면 하
나님이 해놓으신 일을 보고 스스로 느껴야만 했을 것이다. 생명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종교
적 해답이 어쩔 수 없이 믿음에 의존해야 함은 이렇듯 지극히 간단한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진화론-창조론 논쟁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그저 자기 주장만을 관철하
려는 태도 때문에 거의 예외 없이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만 낭비한 채 끝나고
만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노력과 태도의 문제가 아닐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거듭 강
조하건대 진화론과 창조론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출발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진화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늘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한 사실을
설명하고 분석하는 과학적 이론과 믿음에 기초한 종교적 강령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수준에
서 비교하거나 분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진화론에 대한 그릇된 이해는 우리 나라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서양 학계도 오랫
동안 다윈Charles Darwin의 이론에 대한 오해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더브
잔스키Theodosius Dobzhansky와 마이어Ernst Mayr 등의 연구를 바탕으로 1960년대부터
시작된 해밀튼William Hamilton, 윌리엄즈George Williams, 랙

David Lack, 트리버즈Robert
Trivers 등의 다윈 이론 재조명 덕으로 이제 진화론은 생명현상을 설명하는 가장 논리적이
고 강력한 이론으로 확고한 위치를 잡아가고 있다.


1.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1) 자연선택설의 역사적 배경

       다윈의 자연선택설theory of natural selection이 등장하기 전 거의 2천년 동안 서양의 자
연과학을 지배해온 사상적 토대는 플라톤의 이른바 본질주의essentialism 또는 예표론
typology이었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 세상은 영원불변의 완벽한 진리 또는 전형ideal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러한 전형으로부터의 변이는 진리의 불완전한 투영에 불과하다는 것이
다.  따라서 생물의 종들은 영원불변의 존재들일 수밖에 없다.  금이 은으로 변할 수 없듯이
한 종이 다른 종으로 변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관념은 훗날 기독교 신학에 의해 더욱 굳건히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게
된다.  창세기 제1장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이 우주는 물론 그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생물
체들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믿음은 기존의 종불변성과 자연스럽게 부합하는 개념이
었다.
       생물의 불변성에 처음으로 이견을 제시한 이들은 18세기 프랑스의 생물학자 뷔퐁
George-Louis Leclerc de Buffon과 라마르크Jean Baptiste de Lamark였다.  이들 중 라마
르크는 특히 인간을 위시한 모든 생물종들이 모두 다른 종들로부터 파생되었으며 생물은 모
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스스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생명력을 갖고 있다고 주
장했다.  이른바 용불용설이라 불리는 그의 이론에 따르면 쓰임이 많은 구조는 계속 발달하
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퇴화하기 때문에 각 생명체가 당대에 얻은 좋은 형질이 다음 세대로
전달되어 진보적인

진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일테면 기린의 목은 더 높은 가지에 매달린
이파리를 먹기 위해 끊임없이 목을 늘이려고 노력한 개체들이 보다 목이 긴 자식들을 낳음
으로써 점점 더 길어졌다는 것이다.
       다윈은 모든 생물종들이 다른 종들로부터 진화했다는 점에서는 라마르크와 의견을 같이
하나 그 같은 변화를 일으키는 기작에 관해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론을 제시했다.  다윈에
의하면 기린의 목이 길어진 것은 몇몇 개체들의 노력에 의해 얻어진 이른바 획득 형질이 유
전되어 발생한 현상이 아니라 목의 길이가 조금씩 다른 개체들 중 더 긴 목을 가진 개체들
이 더 많은 먹이를 취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자손을 낳을 수 있었기 때문에 세대
를 거듭하며 점점 더 목이 긴 개체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개체군내에 이미 존재하고 있
었던 변이 중 생존과 번식에 이득이 되는 것이 자연선택되어 그 빈도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2) 자연선택의 조건과 기작

       진화란 한 마디로 변화를 의미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세대간에 일어나는 생물체의 형
태와 행동의 변화를 뜻한다.  다윈은 이를 '수정된 상속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 표현
했다.  DNA의 구조로부터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생물의 형질은 세대를 거치면서 조상의
형질로부터 변화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가?  1858년 다윈과 월
리스Alfred Russel Wallace는 영국 린니언 학회Linnean Society에서 진화는 자연선택의 결
과로 발생한다고 발표했다.  다윈과 월리스는 각각 독립적으로 진화를 일으키는 기작이 바
로 자연선택이란 이론을 정립했는데 자연선택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으로 그들은 다음의 네
가지를 들었다.

       1) 자연계의 거의 모든 개체군에는 각 개체들간에 변이가 존재한다.
       2) 어떤 변이는 유전한다.
       3) 생물은 환경이 뒷받침할 수 있는 이상으로 많은 자손을 낳는다.
       4)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형질을 지닌 개체들이 보다 많이 살아남아 더
          많은 자손을 남긴다.

       진화생물학에서는 이 네 가지를 묶어 흔히 자연선택을 위한 필수적이고도 충분한 조건이
라 부른다.  왜냐하면 이 네 가지 조건이 모두 함께 갖춰져야 자연선택이 일어날 수 있고
또 모두 갖춰지기만 하면 자연선택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첫째 조건인 변이에 관하여 잠시 살펴보자.  자연계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형질들에는
대체로 변이가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만일 변이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선택의 여지도 없음을
의미한다.  형질이 동일한 개체들간에 아무리 선택을 한다해도 아무런 변화를 기대할 수 없
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선택은 변이를 가진 형질에만 일어날 수 있다.  플라톤의 예표론이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변이를 전형의 불완전한 투영으로 보는데 반해 다윈의 진화론은 그
변이 자체가 바로 변화를 일으키는 실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변이들 중 유전하는 것만이 자연선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둘째 조건이다.  다
세포생물은 기능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가지 종류의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몸의
구조를 이루는 체세포이고 다른 하나는 번식을 위해 만들어지는 생식세포이다.  한 생명체
가 생애를 통해 아무리 많은 변화를 겪는다해도 그것이 생식세포내의 변화가 아니면 다음
세대로 전해질 수 없다.  체세포의 변화는 당대에만 나타날 뿐 자손에는 전달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라마르크의 획득형질 유전의 맹점이다.
       사실 다윈은 현대 생물학적 관점으로 보아 매우 그릇된 유전기작을 구상하고 있었다.  
다윈은 부모의 서로 다른 형질들이 마치 물감

이 섞이듯 혼합되어 자손에 발현된다고 믿었
다.  붉은 꽃과 흰 꽃을 교배했을 때 때로 분홍색 꽃이 나오듯 말이다.  현대 생물학에서는
이 같은 예가 멘델의 유전법칙을 따르지 않는 이른바 불완전 우성의 경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염색체의 존재가 밝혀지지 않았던 시절에 살았던 다윈에게는 혼합적 기작이 보편적
인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다윈과 거의 같은 시기에 지금의 체코 지방인 모라비아에서는 멘델Gregor Mendel이라는
승려가 수도원에서 완두콩을 기르며 유전의 기작을 밝히는 실험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 역
시 염색체의 존재를 모르고 실험을 수행했지만 그의 연구는 이른바 입자설 유전기작의 기초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다윈의 서재에서 훗날 멘델의 논문이 실린 책이
발견되었는데 다른 논문들에는 다윈이 읽은 흔적들이 남아 있으나 유독 멘델의 논문에는 아
무런 흔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수학을 어지간히 싫어했던 다윈이라 숫자가 지나치게 많이
나온 멘델의 논문은 그냥 지나쳤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조건은 다윈이 경제학자 맬서스Thomas Malthus의 인구론을 읽고 깨달은 개념이
다.  다윈이 태어나기 이미 10여 년 전에 발표된 이 논문에서 맬서스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집단은 환경적인 제한요인이 없다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 성향을 지닌다고 설명했
다.  유명한 생태학자 먹카서Robert MacArthur는 생물의 성장속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계
산을 한 적이 있다.

매 20분마다 세포분열을 하는 박테리아의 경우 불과 36시간이면 지구의 표면 전
체를 한 자 깊이로 덮을 것이고 한시간만 더 지나면 우리 키를 훌쩍 넘을 것이
다. 또 어느 동식물이건 일단 태어나면 죽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그저 수천 년
이면 그 집단은 저 끝없는 우주를 향해 빛의 속도로 팽창해 나갈 것이다.

       자연선택의 넷째 조건은 셋째 조건의 자연스런 귀결로 나타난다.  어느 집단이건 태어나
는 모든 개체들이 다 번식의 기회를 갖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개체들은 번식기에 이르
기 전에 죽어 사라지고 주어진 환경에 보다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형질들을 지닌
개체들만이 살아 남아 자손을 남기게 된다.  아무리 변이가 존재하고 또 유전한다고 하더라
도 모든 개체가 다 번식기에 이르러 똑같은 수의 자손을 남긴다면 그 개체군의 유전자 빈도
에는 아무런 변화도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진화란 간단히 말해서 유전자들이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개체들의 번식을 도와 자신들의 복사체를 보다 많이 퍼뜨리려는 경쟁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2. 진화의 단위는 유전자

       1960년대에 접어들며 진화생물학은 커다란 개념적 혁신을 맞게 된다.  진화생물학이 그
논리적 기초를 다윈의 자연선택설에 둔다고는 했으나 많은 생물학자들은 자연선택의 단위
및 대상에 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생물은 모두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이나 종의 보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도록 진화했다고 믿었다.  이 같은 '종의 이익을
위하여'식의 논리는 스스로 번식을 자제하는 집단조절기능을 가진 종들만이 이 지구상에 남
아 있고 그렇지 못한 종들은 자원고갈로 인해 멸종했다는 이른바 집단선택설theory of
group selection에 입각한 것이다.  이 같은 집단선택설적 자연선택 이론은 다윈의 개체중심
적 이론에 어긋나는 것으로 특수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 한 실제에 적용되기 어렵다.
       가상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바닷가 벼랑 위에 서식하고 있는 어떤 갈매기 집단을 상
상해 보자.  갈매기는 대개 암수가 한번 짝을 지면 평생토록 같이 사는 전형적인 일부일처
제 동물이다.  이 갈매기들은 모두 한 쌍 당 해마다 알을 둘만 낳아 기르고, 따라서 자원을
지나치게 고갈시키는 일도 없다고 하자.  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대대로 유전된다고 하자.  
그러나 이 집단에 세 개의 알을 낳는 돌연변이가 발생했다고 하자.  자원을 고갈시키지 않
는 집단이므로 먹이가 부족할 것도 없으니 알을 셋이나 낳은 쌍도 세 마리의 새끼를 키우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이 새끼들이 다 잘 자라 각자 또 번식을 하게 되고, 또 그 새
끼들이 또 번식하고 하는 식으로 몇 세대를 지나게 되면 이

집단엔 세 알 유전형genotype
이 원래의 두 알 유전형보다 훨씬 많게 될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 네 알 유전형도 생겨날 것이다.  알을 더 많이 낳으면 낳을수록 더 많
은 새끼들을 키워낼 수 있다면 갈매기들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점점 더 많은 알을 낳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알의 수는 부모가 키울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조절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에서 관찰하는 알의 수는 부모의 부양능력과 여러 환경요인의 영향아래 가장 많
은 새끼들을 배출하도록 자연선택된 적응의 결과이다.  개체가 집단의 존속을 위해 자발적
으로 산아제한을 하는 체제는 결코 진화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체들을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다윈에게도 몇 가지 풀기 어려운 고민들이 있었다고 한다 (Cronin 1991, Choe and
Crespi 1997a, b).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했던 문제는 바로 몇몇 사회성 동물들이 나타내는
자기 희생self-sacrifice 또는 이타주의altruism적 행동이었다.  다윈의 철저하리 만치 개체중
심적인 이론으로는 남을 돕기 위해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희생하는 행동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었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특히 개미나 벌과 같은 이른바 사회성 곤충social insect들
의 집단에서 벌어지는 일개미나 일벌들의 번식 희생은 다윈을 무척이나 괴롭혔던 불가사의
한 생명 현상이었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번식을 위해서 행동하도록 진화했다는 다윈의
이론으로는 각기 다른 생명체들로 태어나 스스로 번식을

억제하고 오로지 여왕으로 하여금
홀로 번식할 수 있도록 평생 봉사하는 일개미나 일벌들의 헌신적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윈은 끝내 이 문제에 관한 한 아무런 답을 얻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타주의적 행동이 어떻게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개체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진화할 수 있
는가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처음으로 제공한 사람은 영국의 생물학자 윌리엄 해밀튼이었
다.  두 편의 연속 논문(Hamilton 1964)으로 발표된 그의 이론이 나온 것은 다윈의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1859)>이 출간된 지 무려 100년이 넘게 흐른 뒤였다.  포괄
적응도설inclusive fitness theory 또는 혈연선택설kin selection theory로 알려진 해밀튼의
이론은 개체 수준에서는 엄연한 이타주의적 행동이 유전자 수준에서 분석해보면 사실상 이
기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해밀튼의 이론에 의하면 번식이란 결국 유전자들이 자신들의 복사체들을 퍼뜨리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하버드대학의 사회생물학자 윌슨Edward Wilson은 버틀러Samuel
Butler의 표현을 빌어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얻기 위해 만들어낸 매개체에 불과하
다”고 설명했다.  더킨스Richard Dawkins(1976)에 의하면 긴 진화의 역사를 통해 볼 때 개
체는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덧없는 존재이고 영원히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손
대대로 물려주는 유전자라는 것이다.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의 경우, 사실상 개체들이 직접


자신들의 복사체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후손에 전달되는 실체는 다름 아닌 유전자이기 때
문에 적응형질들은 집단을 위해서도 아니고 개체를 위해서도 아니라 유전자를 위해서 만들
어지는 것이다.  이에 더킨스는 개체를 ‘생존기계survival machine’라 부르고, 끊임없이
복제되어 후세에 전달되는 유전자 즉 DNA를 ‘불멸의 나선immortal coil’이라 일컫는다.  
개체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은 수명을 다하면 사라지고 말지만 그 개체의 특성에 관한 정
보는 영원히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결국 유전자도 개체의 번식을 통해야만 자신의 복사체들을 퍼뜨릴 수 있다.  한
개체내의 유전자들의 운명은 그 개체에게 달려있다.  다윈의 고민 두 가지에 대한 분석을
다룬 저서 <개미와 공작The Ant and the Peacock (1991)>에서 크러닌 Helena Cronin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전자들은 스스로 발가벗고 자연선택의 심판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은 꼬리
나 가죽, 또는 근육이나 껍질을 내세운다.  그들은 또 빨리 달릴 수 있는 능력
이나 기막힌 위장술, 배우자를 매료시키는 힘, 훌륭한 둥지를 만드는 능력 등을
내세운다.  유전자들의 차이는 이러한 표현형phenotype의 차이로 나타난다.  자
연선택은 표현형적 변이에 작용함으로써 유전자에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
서 유전자들은 그들의 표현형적 효과의 선택가치selective value에 비례하여 다
음 세대에 전파된다.

       자연선택은 유전자, 개체, 집단, 그리고 심지어는 종의 수준에서도 일어날 수 있지만 적
응은 주로 개체, 즉 표현형 수준에서 형성되기 때문에 개체선택이 가장 강력한 진화적 요인
이라고 간주해야할 것이다.  자연선택은 표현형에 작용하고, 그 결과로 후세에 전달되는 것
은 유전자이다.

3.  자연선택은 눈먼 시계공

       생명의 기원을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30 내지 40억 년 전 지구
의 표면을 덮고 있던 원시바다 속에서 각종 유기물들이 태양으로부터 내리쬐는 자외선 등의
에너지에 의해 점점 더 커다란 분자들로 결합되는 과정에서 우연히 자신의 복사체들을 만들
어내는 능력을 지닌 분자 즉 DNA가 탄생함으로써 이 지구상에 생명현상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후 지금으로부터 약 6백만 년 전쯤 DNA는 자기 복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해
줄 근육, 심장, 눈 등의 생존기계들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태초에는 보잘 것 없이 단순한
화학물질에 지나지 않았지만 단세포생물을 거쳐 급기야는 인간을 비롯한 복잡한 다세포생물
들이 분화되어 나온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복잡한 생물들이 보다 단순한 생물들로부터 진화한
것은 사실이나 모든 단순한 생물들의 구조가 다 복잡해지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은 아니
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보다 복잡한 생물들도 등장한 것이지 모든 생물들이 좀더 복잡
하게 변화하는 방향성을 지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세포생물 중에도 태초에서 지금까지
이렇다할 변화도 겪지 않고 살아 남은 것들이 있는가하면 비교적 최근에 분화된 것들도 있
다.  이렇듯 진화에는 목적성도 없고 방향성도 없다.  하버드대학의 고생물학자 굴드
Stephen Jay Gould는 그의 저서 <훌륭한 세상Wonderful Life (1989)>에서 만일 우리가 지
구의 역사를 담은 영화를 다시 돌린다고 할 때 마지막 장면에 우리 인간이 또다시 등장할
확률은 거의

영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더킨스의 표현을 빌면 진화란 자연선택이라는 눈이 먼 시계공에게 맡겨진 시계의 운명과
도 같은 것이다 (Dawkins 1986).  늘 차고 다니던 시계가 고장이 나서 시계방에 가지고 갔
는데 시계를 고쳐 주겠노라는 시계공이 눈먼 장님이라고 상상해 보라.  그 시계가 제대로
고쳐지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금 지구상에 현존하는 엄청난 생물다양성도 그
동안 이 지구에 살았다 멸종한 모든 종들에 비하면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선택은 비록 눈은 멀었으나 매우 끈질긴 시계공이다.  지금 지
구상에 현존하는 종들 중에는 이 눈먼 시계공의 실수로 멸종의 길을 걷고 있는 것들도 있지
만 그 눈먼 시계공이 어쩌다 운 좋게 조금이나마 기능을 향상시킨 후 끈질기게 붙들고 고친
덕분에 변화하는 환경에도 비교적 잘 적응하며 살고 있는 종들도 적지 않은 것이다.
       생물체의 여러 적응 현상들은 물론 자연선택의 결과이나 그렇다고 해서 자연선택이 궁극
적으로 생물체를 완벽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우선 자연선택이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충분한 유전적 변이가 있어야 한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라 했지
만 사슴이 기린만큼 목이 길어지지 않은 이유는 자연선택이 지속적으로 벌어질 수 있도록
충분한 변이가 항상 존재하지 않았었을 가능성이 크다.  변이가 없는 상황에서는 선택의 여
지도 없는 것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 했지만 그저 필요하다는 것만으로 진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유전자가 다 제가끔 한 가지 일에만 관여하는 것도 아니다.  분자유전학의 발달과
더불어 명확하게 밝혀지고 있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많은 유전자들은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
한다.  사고로 뼈가 부러졌을 때 캘슘의 대사를 왕성하게 하여 뼈가 빨리 붙도록 도와주는
유전자를 상상해 보자.  그러나 이렇듯 뼈의 생장에 기여하는 유전자가 한편으로는 동맥 내
벽에 캘슘을 축적시키는 일에 관여할 수도 있다.  한 몸으로 서로 상반된 결과를 가져오는
유전자들을 가지고 어떻게 자연선택이 생물체를 완벽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설령 자연선택이 변이도 많고 그 효과도 일정한 유전자들만 다룬다고 하더라도 환경이
계속 변한다면 그 모든 환경에 다 적합한 생물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생물체를 둘러싸
고 있는 물리적인 환경 요인들은 늘 변하기 마련이고 지구의 역사를 통해 늘 면해왔다.  어
느 특정한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한 개체가 전혀 다른 환경에도 완벽하게 적응한다는 것은
실제는 물론 개념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환경에는 기후조건이나 서식지 등의 물리적 환경 외에도 생물적 환경이 있다.  생물은
누구나 다른 생물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기 때문에 생물적 환경도 진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생물적 환경은 물리적 환경과 달라서 그 자체 또한 끝없이 변화하기 때문
에 어느 종의 진화든 같은 생태계에 공존하는 다른 종들의 진화와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
한 관계를 갖고 있다.  육상동물 중 가장 빠른 동물로 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치타를 꼽지만
그들이 주로 잡아

먹고 사는 영양들의 속력도 사실 만만치 않다.  오랜 세월 동안 치타는 영
양을 더 잘 잡을 수 있도록 진화해왔고 영양은 나름대로 치타로부터 더 잘 피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마치 구 소련과 미국이 오랜 냉전시대를 걸쳐 벌였던 군비
경쟁과도 같이 자연계에는 치타와 영양간의 관계, 즉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 외에도 식물
과 그들을 먹고사는 초식동물, 숙주와 기생충간의 관계 등 여러 모습의 '진화적 군비경쟁
evolutionary arms race'이 벌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쫓고 쫓기는 진화적 군비경쟁을 시카고대학의 진화학자 밴 베일른Leigh Van
Valen은 ‘붉은 여왕 효과Red queen effect’라고 부른다.  우리에겐 <이상한 나라의 앨리
스Alice in Wonderland>로 번역되어 알려진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의 소설에는 앨리스
가 붉은 여왕을 만나 그에게 손목을 붙잡힌 채 정신없이 시골길을 달리는 대목이 있다.  그
러나 그들은 아무리 빨리 달려도 제자리걸음을 할뿐이었다.  의아해 하는 앨리스에게 여왕
은 “이 곳에선 있는 힘을 다해 달려야만 제자리에 머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생
물들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상태에서 도태되지 않
으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 존재했다 멸종한
그 모든 생물들은 다 붉은 여왕을 미처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란 철저하게 상대적인 개념이다.  생물은 결코 절대적인 수


준에서 미래지향적인 진보를 거듭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제한된 자원을 놓고
경쟁하고 있는 다른 개체들보다 조금이라도 낫기만 하면 선택받는다는 다분히 상대적인 개
념이 진화의 기본원리다.  친구와 함께 곰을 피해 달아나던 한 철학자의 이야기가 좋은 비
유가 될 것이다.  “소용없는 일일세.  우린 결코 저 곰보다 빨리 달릴 수 없네”라고 말하
는 친구에게 그는 “난 저 곰보다 빨리 달릴 필요는 없네.  그저 자네보다 빨리 달리기만
하면 되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다윈의 자연선택 기작을 설명할 때 흔히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란 표현을 쓴다.  
그런데 이 표현은 다윈 자신은 한 번도 사용한 일이 없다.  스스로 '다윈의 불독'이라 칭했
던 스펜서Herbert Spencer에 의해 만들어진 이 말은 영어 표현 그대로 '최적자의 생존'이라
해석해서는 옳지 않을 듯 싶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는 될 수 있으나 상
대적으로 보다 적자인 개체가 생존하리라는 의미에서 'survival of the fitter'라는 비교급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생물의 설계가 근본적으로 완벽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종의 역사적 배경, 즉
고유한 진화의 경로 때문이다.  사람의 눈을 예로 들어보자.  그림 1에서 보듯이 사람과 오
징어는 진화적으로 별로 가까운 관계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비슷한 눈의 구조를 지니
고 있다.  사람은 포유류에 속하는 척추동물이고 오징어는 연체동물문 Phylum Mollusca에


하는 무척추동물이지만 진화의 역사를 통해 대단히 비슷한 시각기관을 갖게 되었다.  그
러나 그림에서 보듯이 사람의 눈과 오징어의 눈은 시신경의 연결 면에서 결정적으로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  오징어의 시신경들은 망막retina의 뒷면에 자연스레 연결되어 있는데 비
해 우리 인간의 시신경과 그에 관련된 혈관들은 다발로 묶인 후 눈의 내부로 들어가 망막의
앞면에 연결되어 있다.  이런 묘한 설계가 가져오는 기능적인 불합리를 몇 가지만 살펴보자.
       인간은 누구나 시각적 맹점을 갖고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시신경 다발이 눈 속으로 들
어가기 위해 뚫어 놓은 구멍에 간상세포와 원추세포들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우개
가 달린 연필을 눈 높이에 들고 왼쪽 눈을 감고 오른쪽 눈으로만 지우개 끝에 초점을 맞춘
다음 눈의 방향을 고정시킨 채 연필을 서서히 오른쪽으로 움직여 보라.  연필이 시선 방향
으로부터 약 20도 정도 움직인 시점에서 지우개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왼쪽 눈도 마찬가
지로 중앙선에서 약 20도 왼쪽 지점에 맹점을 가지고 있다.
       망막 위에 분포하는 혈관들도 그들의 그림자 때문에 여러 작은 맹점들을 만든다.  이 문
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눈은 매순간 조금씩 다른 각도를 보려고 끊임없이 가볍게 흔들리
고 있다.  이같이 엄청난 양의 정보가 두뇌에 전달되어 끊임없이 분석 종합되는 덕분에 우
리는 우리 시야에 있는 영상을 지속적으로 보고 있다고 느낄 뿐이다.  물론 우리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가볍게 떨리고 있는 것이지만 잘못된 설계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진 못하고 그


저 보완책을 강구한 것이다.
       이 같은 이른바 역망막inverted retina 현상은 단순한 시각감손은 물론 각종의 심각한 임
상적 문제들을 일으킨다.  대수롭지 않은 출혈도 망막에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 수 있어 심
각한 시각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또 간상세포와 원추세포들이 망막으로부터 쉽게 분리되
어 눈 안으로 떨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일단 이런 증상이 발생하면 그 진행속도가 점진
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수술을 받지 않으면 시각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
다.  이런 여러 설계 상의 문제점을 고려해볼 때 오징어의 눈은 인간의 눈보다 훨씬 더 합
리적으로 설계되어 있는 셈이다.
       왜 인간의 눈은 이렇게도 불합리하게 만들어졌는가?  자연선택은 왜 좀더 완벽한 설계를
만들어내지 못했는가?  문제는 바로 인류가 거쳐온 진화의 역사에 있다.  뒤집힌 망막의 설
계는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거의 모든 척추동물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이다.  
척추동물의 눈은 작은 조상동물들의 투명한 피부 밑에 있었던 빛에 민감한 세포들로부터 발
달되었다.  이 세포들에 자연스레 혈관과 신경들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상태에서는 다분
히 합리적이었던 설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수억 년이 흐른 오늘에도 빛은 어쩔 수 없이 혈
관과 신경들을 지나쳐야만 시각세포에 도달할 수 있다.
       인간의 눈은 아무리 정교하게 제작된 그 어느 사진기와 비교해도 월등한 기능을 갖춘 기
계임에 틀림이 없다.  사진기는 찍으려는 대상이 바뀔 때마다 번번이 새롭게 초점을 맞춰야


하고. 일단 한 곳에 초점을 맞추면 그 밖의 물체들은 모두 흐리멍텅하게 보인다.  기독교인
들은 우리 눈을 오로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걸작품이라 믿는다.  생
물학자들도 또 나름대로 오랜 세월 동안 자연선택에 의해 다듬어진 우리 눈의 기가 막힌 성
능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하지만 우리들 중 대부분이 근시로 고통을 겪는 것만 보아도 쉽
게 알 수 있듯이 인간의 눈은 불완전한 걸작품이다.  경제적인 문제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
면 무슨 재료라도 가져다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기계를 만들 수 있는 공학자와는 달리
자연선택은 이처럼 주어진 재료만을 가지고 어떻게든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내야 한다.

4. 자연선택은 중용의 덕을 행한다

       미국 자동차 산업의 선구자 격인 헨리 포드Henry Ford에게는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
나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포드 회사가 만들어낸 차 중 가장 성공한 것은 아마도 모델 T일
것이다.  포드 회사는 19년 동안 무려 1천5백만 대의 모델 T를 만들어냈다.  얘기인즉슨 어
느 날 포드는 자기 회사의 기술자들에게 폐차장에 버려진 모델 T를 모두 점검하여 그 부품
중에 전혀 망가지지 않는 것이 있는지 찾아보도록 했다.  조사를 마친 기술자들이 거의 모
든 부품들은 다 고장나 있었으나 핸들의 중심 핀인 킹 핀king pin만큼은 절대 망가지지 않
는다고 보고하자 포드는 “그렇다면 우리는 킹 핀을 만드는데 지나치게 많은 돈을 쓰고 있
군.  다른 부품들처럼 적당히 망가지도록 다시 만들도록 하게”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자연선택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움직인다.  만일 우리가 제주도 조랑말의 사체들을 해부
하여 몸의 여러 기관과 조직들의 노후 정도를 조사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조랑말의 거의
모든 기관과 조직들이 고르게 노화한데 비해 유독 허벅다리의 뼈인 대퇴골만 전혀 노화의
징후를 보이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하자.  헨리 포드가 만일 자연선택의 임무를 맡고
있다면 조금도 주저 않고 대퇴골을 약하게 만들도록 지시했을 것이다.  자연계에서도 만일
대퇴골이 다른 부위와 같은 속도로 노화하는 돌연변이 조랑말이 탄생한다면 대퇴골에 투자
했던 과잉 에너지를 다른 부위에 투자할 수 있는 이점 때문에 훨씬 더 유리할 것이다.
       포드의 이론은 사실 자동차 부품보다 생물체의 구조에 더 잘 적

용된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자동차의 부속 중 가장 먼저 고장이 나는 것은 아마도 머
플러일 것이다.  그러나 머플러는 비용이 드는 것을 제외하고는 간단히 새 것으로 교체할
수 있다.  물론 요사이는 의학의 발달로 인해 우리 몸의 많은 부위에 다른 사람의 조직이나
기관 또 심지어는 인공으로 제작된 부품을 이식할 수 있지만 자동차의 부품을 가는 것만큼
간단하지는 않다.  자연선택은 인간이 자동차를 만들어온 역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오랜
세월 동안 몸의 모든 부분이 고른 효율성을 지니도록 조율해 왔다.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바르게 중용의 덕을 행해 온 셈이다.
       자연선택이 중용의 덕을 행한다는 것은 늘 산술적 평균을 취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행위자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올바르고 적절한 길을 택하는 것이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중
용의 진정한 의미인 것처럼 자연선택도 무조건 적당히 중간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조건에서 보다 효율적으로 유전자를 후세에 퍼뜨릴 수 있도록 여러 요인들의 타협의 결
과로 나타난다.

5. 진화생물학적 질문과 적응주의적 강령

       생물학에는 ‘어떻게How’와 ‘왜Why’라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  ‘어떻게’는 생명
현상의 요인, 기작, 발달 등을 묻는 것이고, ‘왜’는 궁극적인 목적이나 가치를 묻는 질문
이다.  따라서 '어떻게'라는 질문을 해결하려면 대체로 생리학, 내분비학, 신경생물학 등의
기능생물학적 방법이 필요하고, '왜'라는 질문을 푸는데는 생태학, 행동생물학 등의 진화생
물학적 방법이 유용하다.
       철새들이 왜 가을이 되면 강남으로 떠나느냐는 질문에 어떤 이는 먹이가 더 풍부한 곳을
찾아서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이는 낮의 길이가 짧아져 생리적인 변화가 일어나
떠나는 것이라고 설명한 후 서로 자기가 옳다고 논쟁을 벌인다면 사실상 시간 낭비다.  생
명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두 가지 답에 대한 연구가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다.  처음 대
답은 생존가치나 기능에 관한 설명이고 나중 대답은 생리적 요인에 관한 설명이다.  다시
말하면, 전자는 궁극적인 원인을 다루는 문제이고 후자는 근접적인 원인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 몸의 구조와 기능들은 우리로 하여금 처해진 환경에 잘 대처하도록 유전자들이 만
들어낸 적응adaptation의 결과이다.  하버드대학의 집단유전학자 르원튼Richard Lewontin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가진 것이나, 수생 포유류들의 발이 지느러미
모양의 물갈퀴처럼 변한 것이나,...심지어는 물뱀이 비록 지느러미는 없어도 좌우로 납작해진
것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특성들이 수중운동에 대한 적응임은 너무도 명백하


다”는 것이다.  진화생물학자들은 특정한 환경에서의 특정한 생활방식에 대한 생물체가 지
니는 적응의 모든 면이 다 자연선택의 산물이라 가정한다.  자연선택에 의해 생물은 처해진
환경에 보다 훌륭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조율되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진화생
물학자들은 현존하는 생물들이 오랜 진화의 역사를 통해 최적에 가까운 적응을 갖추고 있다
는 전제하에 가설을 수립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른바 ‘적응주의적 강령adaptationist programme’이라는 연구 방식은
생물의 형질들이 자연선택에 의해 언제나 완벽한 적응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서 때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 진화생물학자들은 그렇게 무분별하게 자
연선택설을 남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느 특정한 적응에 대한 가정들을 세울 때 기각시킬
수 있는 작업 가설을 수립하지 결코 적응의 보편성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을 언명하지 않는
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단 하나의 가설만을 세워 놓고 검증을 하는 것이 아니라 흔히
둘 이상의 대안 가설alternative hypothesis들을 동시에 검증한다.  부당한 가설들은 검증을
통해 기각되며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형질의 진화에 대한 보다 궁극적인 원인을 추적해 가
는 것이다.

6. 맺음말

       지면 관계 상 진화의 증거 및 속도, 또는 자연선택의 비도덕성(정확히 말하면 무도덕성)
등의 주제들에 관한 논의는 생략하기로 한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최소한 자연선택이 어
떤 목표를 향해 합목적적으로 진행되는 미래지향적 과정이 아니며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모든 합리적인 해결방법을 총동원할 수 있는 공학적인 과정도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기 바란
다.  그래서 적자생존의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고 난 결과는 어쩔 수 없이 완벽한 인간의 등
장일 수밖에 없다는 식의 지나친 인본주의 또는 인간중심주의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 바란
다.  진화는 결코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과정은 아니었다.  진화의 결과 중 하나로 인간이
탄생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화석 증거에 의하면 지구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거나 이미 사라져간 모든 생명체
들 중 인간은 거의 제일 막둥이 격이다.  분자생물학적 유전자 분석 결과에 따르면 인류와
침팬지가 하나의 공동조상으로부터 분화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500만년 전의 일이다.  
500만년이란 시간은 진화사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지구의 역사를 하루
에 비유한다면 1분도 채 되지 않는 지극히 짧은 시간이다.  현대 인류(Homo sapiens)가 탄
생한 것은 그보다도 훨씬 최근인 15만 내지 23만년 전의 일이고 보면 인간은 그야말로 순간
에 '창조'된 동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선택은 그저 당면한 상황에서 주어진 재료들만 가지고 가능한 최적의 방법을 찾는
어찌 보면 다분히 소극적인 과정이

다.  생명은 이처럼 지극히 낭비스럽고 기계적이며 미래
지향적이지도 못하고 비인간적인 과정에 의해 창조되었다.  하지만 그처럼 부실해 보이는
과정이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단계들을 거듭하며 선택의 결과들을 누적시킨 끝에 오늘날
이처럼 정교하고 훌륭한 적응 현상들을 낳은 것이다.  자연선택은 근본적으로 지극히 단순
하고 기계적인 과정이지만 이 엄청난 생명의 다양성을 탄생시킨, '자연이 선택한' 가장 강력
한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Choe, J. C. and B. J. Crespi, eds. 1997a. The Evolution of Social Behavior in Insects
and Arachnid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Choe, J. C. and B. J. Crespi, eds. 1997b. The Evolution of Mating Systems in Ins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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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nin, H. 1991.  The Ant and the Peacock.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Darwin, C. 1859.  On the Origin of Species.  London: Murray.

Dawkins, R. 1976.  The Selfish Gen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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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uld, S. J. 1989. Wonderful Life. New York: W. W. Norton.

Hamilton, W. D. 1964.  The genetical evolution of social behaviour, I & II. Journal of
Theoretical Biology 7: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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