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icle Bank

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6/02/14 (11:05) from 129.206.196.86' of 129.206.196.86' Article Number : 461
Delete Modify 소광섭 Access : 6288 , Lines : 408
자연철학으로서의 현대 물리학




자연철학으로서의 현대 물리학


소광섭(서울대학교 물리교육과)



1. 시공간과 상대성 이론


a. 시간과 공간


일상 생활에서 경험적으로 아는 시간과 공간을 정식화한 것이 고전역학(뉴턴역학)적 시간과 공간이다. 이들의 특성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관찰자와 독립하여 존재하는 실재로서, 절대적 시간, 절대적 공간이다.

2. 시간과 공간은 상호 독립적이며, 상호 연관된 작용이 없다.

3. 시간은 일직선적으로 (1차원) 한쪽 방향으로만 (일방향성) 흐른다.

4. 물질과 상태 변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난다. 시간은 전 우주 공간에 걸쳐

동일하게 흐르는 보편적 존재로 우주내 물질의 운동이나 상태의 변화에 영향

받지 않고 일정하게 흐른다.

5. 물질과 사건은 공간에서 일어나며, 공간은 이들이 존재하는 배경이며 이들에

의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6. 공간은 3차원이며, 유크리드 기하학으로 정확히 기술된다. 예를들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며, 이는 우주내 어떤 곳에서나 꼭같이 성립하는 보편적

이고 필연적인 진리이다.


우리의 일상적 활동은 이러한 시간과 공간개념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전제로 삼고 있다. 예외적인 경우로는 꿈, 심리학적인 경우 (무의식, 잠재의식등 정신분석학), 예술(초현실주의 미술, 문학등), 종교적인 증언 (예언등)이 있으나, 이러한 현상들이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기본 규칙에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점은 다음의 상대성 시공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상대성 이론의 출현은 일상적 시간과 공간의 관념과는 아주 다른 세계를 열어 주었다. 그 특성을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1. 시간과 공간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4차원 연속체인 시공간으로 보아야 한다.

2. 시공간은 관찰자의 운동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3. 시간과 공간이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것이 아니고, 빛의 속력이 불변적인 요소이다.

시공간의 변환적 특성은 광속 불변에 의해서 결정된다.

4. 시공간은 물질의 상태와 분포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한편 만유인력(중력)은

시공간의 휘어진 상황을 나타내는 것이다.


고전적 시간.공간 관념에서는 세계는 물질(물체 또는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의 운동을 기술하는 것이 과학적 법칙의 역할이다. 물질은 불변적 요소로 여겨진다. 상대론적 시공간에서는 세계의 기본적 구성 요소는 '사건'이며 물체는 유도된 부차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물질은 불변적일 수 없으며, 생성과 소멸이 오히려 더 일반적이다.


(가) 상대론과 인과관계


두 사건사이에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은 여러가지 있을 수 있겠는데

여기서는 시간과 공간의 측면에서 이를 논하고자 한다. 어떤 한 사건 R이 지금 (t=o)여기

(공간상의 위치 x를 x=0로 잡자) 에서 일어났을 경우, 그 원인이 될 수 있는 사건

C의 시간과 공간상의 위치는 어떤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가?

상대성 이론이 나오기 이전에는 R보다 과거의 사건은 무엇이든지 R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간략히 표현하면

t(R) geq

t(C)

라 할 수 있다. 즉 원인(C)가 일어난 시각 t(C)이 결과(R)이 일어난 시각 t(R)보다 늦으면 원칙적으로 인과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 이를 좌표계를 써서 도표로 그리면 원점에











어떤 사건 R이 일어났을 때 그보다 과거의 모든 사건들(빗금친 영역)은 원인이 될 수 있다.

상대성 이론의 출현은 두 사건의 인과 가능성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 그 이유는 빛보다 더 빠른 속력으로 인과관계가 전달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과 함께 공간이 인과 관계에 들어오게 되었다. 사건 C가 사건 R의 원인이 되려면 두개의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첫째는 C가 R보다 먼저 일어나야 하고, 두째는 두 사건 사이의 거리가 빛으로 전달되는 거리보다 짧아야만 한다. 이를 수식으로 표현하면,

rm t(R) geq t(C)



rm | x(R) - x(C) | leq ( t(R) - t(C) ) V



이다. 여기서 V는 빛의 속력이다. 달리 말하면 한 사건(C)이 일어난 것이 원인이 되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는 광속으로 제한된다는 것이다.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원점에서 일어난 사건 R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사건은 빗금친 부분으로 제한된다. 이 영역의 가장자리는 광속으로 영향이 전달되는 극한적 경우들이다.

이상의 분석을 유사하게 확장하면 두개의 사건 A와B 사이의 인과 가능성을 3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1) A가 원인이고 B가 결과 (A는 B보다 과거의 사건)

(2) A가 결과이고 B가 원인 (A는 B보다 미래의 사건)

(3) A와 B 사이에 인과 관계가 없음 (A와 B는 일정한 과거나 미래의 관계가 없고, 보는 관측자에 따라 달라진다.)

이를 시공간 좌표계상의 영역으로 표시하면, A 사건을 원점으로 할때










(1)은 A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미래 사건들의 집합이고,

(2)는 A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과거 사건들의 집합이다. 나머지 영역은 A와 인과 관계가 없는 사건들의 집합을 나타낸다.

상대론에 의하면 관측자에 따라 시간의 흐름이 다르고, 따라서 과거.미래가 제멋대로 변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인과 관계가 있을 수 있는 두 사건의 과거 또는 미래의 관계는 어느 누가 보아도 바뀔 수 없는 불변의 관계이다. 꿈이나 무의식의 세계에서 미래의 사건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이러한 불변의 인과 관계와 어긋나기 때문이다. 왜냐면 인과 관계로 연결될 수 있는 사건들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나아갈뿐 그 반대로 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편 인과 관계가 있을 수 없는 두 사건의 과거 미래의 관계는 일정하지가 않다. 예를 들어 지상의 정지한 사람에게 서울과 부산에서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 사건을 로켓트로 달리는 사람이 볼 때는 동시가 아닌 즉, 과거 미래로 나뉘는 사건들로 보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과 관계가 성립할 수 없는 사건들의 과거와 미래는 서로 뒤바뀔 수 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1995년 1월 1일 이전에 일어난 사건들"이란 진술은 성립하지 않는다. 사건이 일어난 공간적 위치와 관찰자를 정해줘야만 의미있는 진술이 되기 때문이다.


(나) 상대론과 윤리규범


미래의 기술 사회에 관해 한가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우주여행이 빈번해질 것이란 점이다. 그리고 비행 속력이 광속에 가까워서 상대론적 시공간을 일상적인 다반사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미래기술 시대에 예상되는 큰 사회 문제의 하나로 전통적 윤리규범의 붕괴를 들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전통적 윤리규범은 년령에 따른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하는 인간 관계의 규정들을 의미킥다. 장유유서, 부모와 자식, 형제, 부부등의 관계는 일종의 불변적 질서인 나이에 근본적으로 바탕하고 있다. '나이의 차이'로 성립하는 관계가 제멋대로 변한다면 지금의 많은 윤리규범은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상대론 이전의 세계관에서는 시간의 흐름은 보편적인 것이 없고, 따라서 나이도 보편적 불변성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상대론의 세계에서는 시간과 나이의 관계가 간단한 비례관계가 아닌 복잡한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편의상 시공간 도표를 사용해 보겠다.











이 그림에서 점선은 지상에 정지해 있는 물체(또는 사람)을 나타내고, 실선(휘어진)은 지상으로부터 다른 별까지 빠른 속도로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지구로 돌아온 물체 (또는 사람)을 나타낸다. A점에서 서로 갈렸다가 B점에서 서로 다시 만났다고 하자.

시간이란 것은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것보다는 상당히 복잡한 면이 있다. 먼저 이 그림에 세로축의 끝에 써있는 t는 '좌표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겠다. 이 좌표시간은 관찰자가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질서있게 기록하는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시간좌표를 도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표준이 되는 규칙에 따라 시계를 써서 사건들의 위치를 결정해야 한다. 점 A는 일정한 시간 좌표값 t(A)가 정해지며, 점 B도 마찬가지로 t(B)가 정해진다. 그리고 t(B)-t(A)는 두 사건간의 시간 차이이다.

일상 생활에서는 t(B)-t(A)가 흘러간 세월이요 이것이 곧 사람이 나이먹게 되는 것이란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상대성 이론에서는 이것이 성립하지 않는다. '나이 먹는 것'은 몸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과정 (즉 물리적 현상)들이 일어남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것은 정지해 있는 사람이나 달리는 사람이나 꼭 같은 빠르기로 일어날 것이 틀림 없다. (상대성 원리에 의함)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기가 차고 있는 시계로 볼 때 일년이 지나면 주름살이 한 개 더 생긴다'면, 이 사람이 로켓트로 여행을 할 때에라도 '자기 시계로 일년 지날때 주름살 하나 더 생긴다.'라는 현상은 꼭 같이 일어난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어귀는 '자기의 시계로' 보는 시간이란 것이다. 이 시간은 앞서 말한 좌표시간과는 다른 것이며, 이를 구분하는 용어가 '고유시간'이다. 사람이 '나이'를 따지는 것은 이 고유시간을 가지고 논하는 것이다.

윗 그림에서 좌표시간은 t에 의해서 바로 읽는 것인데, 고유시간은 경로에 따라 달리 계산을 해야 한다. A에서 두 사람이 헤어져서 B에서 다시 만날 경우 정지해 있는 사람 (점선)과 여행한 사람 (실선)은 경로가 다르다. 고유시간은 경로가 구불거린 것이 더 짧다. (시각 상으로는 더 긴 경로를 달린 것으로 보여 더 오랜 고유시간이 걸린 것처럼 보이면 자연스럴 텐데, 수학적 이유로 이 직관과는 정반대로 된다.)

널리 알려진 얘기로 쌍둥이가 A점에서 헤어져 '쌍'은 지상에 머물러 있고, '동'은 여행을 하고 왔다면 B점에서 다시 만났을 때 '동'이가 더 젊은 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 사람으로 실험해본 적은 없지만,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정밀하게 입증된 현상이다.

윤리규범이 나이에 바탕하고 있을 때 심각한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 A에서 형과 아우의 관계가 B에서는 나이가 역전될 터인데 이 때 누구를 형이라고 해야 하며 그 판정 규준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단지 두사람만을 비교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나 어느 한 자리에 여러 사람이 다양한 경로의 여행을 한 후 만나고, 또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등이 일상 다반사로 일어날 때 나이란 것은 인간관계의 중요한 규준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부모가 자식보다 나이가 더 많다는 것은 만고 불변의 원리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주 시대에는 자식보다 실제로 나이가 더 젊은 부모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런 경우 오이디푸스 신화는 실화로 될런지 모든다. 이러한 시대에도 프로이드의 심리학은 계속 성립할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효'라는 윤리 규범을 어떻게 규정할 것이며, 어디에서 그 가치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지, 새로운 윤리관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지 등의 문제가 야기된다.


(다) 상대론과 언어


일상적인 경험으로 볼 때 자연 현상은 물체들의 이합 집산으로 보인다. '물체'가 자연을 구성하는 기본적 요소로 생각되며, '사건'이란 것은 물체들이 만난다든가 부서진다든가 하는 현상으로 물체들에 부수하는 이차적 개념으로 보인다. 물체들이 있은 연후에 사건이 있을 수 있는 것이지, 물체는 없는 데 사건만 있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일상 생활의 언어와 사고 관습은 '물체중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언어와 사고 관습으로는 상대성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상대성 이론에서는 '사건'이 자연 현상의 기본 요소이고 '물체'는 오히려 부수적인 개념이 되기 때문이다. 옛날 언어로는 물체가 일으키는 것이 사건인데, 새 언어에서는 어떤 연속적인 사건의 집합을 물체로 본다. 아래 시공간 그림에서 물체는 선으로 표현된다.











이 선은 무수히 많은 점의 집합인 바 각 점은 사건을 나타낸다. '사건의 언어'에서는 물체가 영원히 지속하는 것은 무한히 긴 선으로 나타내지는 특별한 경우들이고, 어느 시점(A)에서 생(生)했다가 다른 시점(B)에서 멸(滅)하는 것이 더 일반적인 현상이다. 실제로 상대론적인 고에너지 물리학에서는 입자들의 생멸에 따르는 법칙을 찾는 것이 연구의 주 목표가 되고 있다.

상대론에서는 얼핏 생각하기에 모순되어 보이는 역설적 상황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시공간상의 사건을 기본 요소로 하여 상황을 진술하지 않고, 공간상의 물체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혼란들이다. 따라서 상대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첫 걸음은 현상을 기술하는데 시공간과 사건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라 하겠다.


b. 우주


자연에서 인간의 위치를 궁극적으로 파악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신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결국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떤 모양이며,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뉴턴 역학적 시공간을 가지면, 우주는 무한히 광막한 공간에 떠 있는 별들의 집단으로 구형과 같은 존재로 상상된다. 이러한 우주는 유한하면 불안정성의 문제가 있고, 무한하다면 올버스 파라독스와 같은 문제가 생긴다. 또 별들의 생성과 소멸 및 그들의 에너지 방출등을 이해할 수 없다.

과학적 우주론이 가능해진 것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 이후이다. 시공간과 물질(별 또는 은하)의 분포가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는 물리적 우주를 수리 과학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주가 유한하면서 끝(경계)이 없는 것이 가능하며, 이것은 리만 기하학과 위상 수학에 의하며 수학적 기술이 된다. 유크리드 기하학적 사고 관행으로는 상상할 수 없다.

우주가 매우 빠른 속력으로 팽창한다는 것은 은하들의 운동을 관찰함으로써 밝혀졌으며, 아인시타인의 일반상대론과 합치되는 결과이다.

우주는 태초의 순간이 있었으며 (약 200억년전), 그 직후부터 현재의 순간까지의 우주의 물리적 상태를 이론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데, 이는 소립자 물리학의 이론에 의해서 가능하다.

우주의 미래는 충분한 관측자료가 아직 없어서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3가지 가능성으로 분류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결정돼 있다.

이 글에서는 현대 우주론에 대한 설명보다는 우주론과 우리의 사고 행태와의 관계에 촛점을 맞추어 논하고자 한다. 먼저 뉴턴적 우주 모형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다음에 상대론적 우주가 왜 이해하기 어려운가를 알아보겠다.


(가) 일상적 우주 모형의 문제점


일상적 우주모형이란 3차원의 무한히 광막한 공간에 별 또는 물질들이 펼쳐 있다고 보는 모형이다. 이 모형은 상대성 이론이 나오기 전에는 물리학자들도 이 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는 모형이었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상상해 봄직한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일찌기 뉴턴도 지적한 바 있다.

먼저 무한한 공간에 별들이 어떤 유한한 영역에 몰려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것은 유한 우주론이 되겠는데, 뉴턴이 그의 중력이론으로 증명한 바에 의하면, 이 우주는 모든 별들이 결국에는 중심으로 떨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우주는 안정성이 없어 실제로 경험하는 우주의 존재와 모순된다.

다른 한편 우주가 무한하다면 올버스가 보인 파라독스가 있게 된다. 무한히 많은 별들이 우주 전체에 평균적으로 균일하게 퍼져 있다면 우주의 모든 곳은 밤낮없이 밝아야 한다. 그 이유는 멀리 있는 별의 빛은 이곳에 약하게 도달하지만, 별의 숫자는 그만큼 늘어나서 결국 한개의 별이 가까이에서 보내는 밝기와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재 우주는 그렇게 밝지 않기 때문에 이를 올버스 파라독스라 한다.

따라서 우주(별들의 집합)는 유한할 수도 무한할 수도 없다는 문제에 봉착한다. 이 문제는 일반 상대론이 나오기 까지는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한편 칸트는 그의 순수이성비판의 이율배반 에서 우주의 유한과 무한의 대립적 모순은 이성이 경험의 세계를 초월하는 부당한 추리를 하는데 기인한다고 인식론적 측면에서 해결을 제시하고 있는데, 위에서 논한 물리적 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의 논의는 일상적 우주 모형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론적 우주론에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


(나) 상대론적 우주 모형의 난해성


현대 우주론의 표준모형은 지금부터 약 백억 내지 이백억년 전에 한 점의 작은 우주가 대폭발하여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팽창 우주모형이다. 여기서는 이 모형의 물리학적 이론을 설명하려 드는 대신에 이 모형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갖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밝히는데 주안점을 두려한다.

팽창 우주론은 흔히 고무 풍선에 바람을 넣어 부풀리는 것을 유추하여 이해하도록 설명하곤 한다. 우주내 은하들의 상호거리가 서로 멀어져 가는 것은 고무풍선위에 찍힌 점들이 풍선이 부풀릴때 서로 멀어져 가는 것과 유사하고, 둥근 풍선이 유한하면서 특별한 경계가 없는 것처럼 우주도 유한하면서 어디나 같은 모양이라고 설명한다. 즉 우주에는 가장 끝자리라 부를 곳이 없고, 바깥이라 할 곳도 없다고 한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 곧바로 떠오르는 의문이 "풍선의 바깥이 있으니까 풍선이 팽창할 수 있듯이, 우주도 팽창하는 바깥이 있을 터인데 그 진공의 자리는 무엇이냐? 거기에 도달했을 때 돌맹이를 던진다든가, 목을 내밀어 본다면 어떨까? 풍선의 중심이 있듯이 우주의 중심이 있을 것아닌가? 풍선의 겉면을 따라 여행하지 말고, 풍선 속을 뚫고 직진할 수 있지 않을까?" 등이다. 또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서 얼마나 가면 우주의 끝에 도달할까? 그 끝 다음은 무엇인가?" 라는 의문도 생긴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 그런 질문은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잘못된 것들이므로, 답이 있을 수 없다." 라고 하겠다. 따라서 여기서 할 일은 이런 류의 질문이 성립하지 않는 것을 밝히는 일이다. 이를 위하여 좀 더 간단한 상황을 생각해 보자.

아래 그림과 같이 평면 위에 그려진 원을 머리속에 그려보자. 이것은 지극히 간단한 일이므로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원이 놓인 평면은 없는데 원만 혼자 존재하는 경우를 머리속에 그려볼 수 있겠는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보편적 사고 능력의 제한일런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원이 놓인 평면을 수학적으로는 "포함공간(embedding space)"이라 부른다. 관건이 되는 요점은 원은 이 평면 즉 포함공간이 없이도 홀로 있을 수 있는데, 사람은 그러한 상황을 그려볼 수 없다는 것이다. 원을 생각하면 반드시 그것을 포함하고 있는 포함공간을 동시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포함공간은 평면 뿐만 아니라 3차원 공간일 수도 있다.

풍선의 경우로 돌아가서, 풍선을 포함하는 포함공간을 함께 생각하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틀린 질문들이 나오는 것이다. 포함하는 공간은 없이 그저 풍선만 머리속에 그리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풍선이 팽창한다면 포함공간상의 빈자리로 풍선표면이 움직이는 것을 상상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림 그리기식 사고는 수학적 사고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다. 포함공간이 없는 풍선 단독의 존재는 수학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기에 말이다. 단독의 풍선만이 있는 경우, 윗 그림 '틀린 생각'에서 보였듯이, 풍선 밖이나 내부를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우리의 머릿속에만 나타나는 허상을 가지고 씨름을 하는 셈이다.

우리의 그림 그리는 상상력의 또다른 제한 점은 3차원 이상의 공간을 그려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무한히 가다보면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은 이 공간이 풍선의 표면과 유사한 성격이 있음을 말해준다. 우리가 4차원의 포함공간을 그릴 수 있다면, 우주 공간을 그 안에 들어있는 3차원 풍선으로 상상할 수 있을 터인데 이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실재 우주에는 4차원 포함공간이 없는 것이므로 이런 식의 상상은 틀린 것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인간의 그림 그리는 상상력은 내재적인 제한이 있는 듯 싶으며, 이것이 상대론적 우주 모형을 이해하기 어렵게 하는 원인이다. 이러한 제한이 두뇌 세포의 생리적 기능상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경험과 교육에서 오는 후천적 요인인지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 문제라고 본다.


(다) 태초의 문제


태초의 존재 여부와 그 순간의 우주의 물리적 상태에 관한 연구는 현대 우주론의 가장 중요한 문제중의 하나이다. 이 문제는 신과 우주의 창조와 관련해서 일반인의 관심도 큰 편인데, 일상적으로 생각하듯 무한히 흐르는 시간상의 어느 한 시점에서 우주란 것이 생겨났거나 만들어졌다는 식의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상대론적 우주는 시간과 공간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므로 공간적 우주가 어느 시각에 생겼다는 식의 진술은 성립될 수가 없다. 시간 자체도 공간과 함께 생성됐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확실한 진술은 "일반 상대론으로는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알 수 없다."라고 하겠다. 그 이유는 일반상대론에 의하면 팽창하는 우주는 태초라 할 수 있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데(Hawking라 Penrose의 특이점(Singularity) 정리), 이 상황에서는 일반상대론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일반상대론이 자체 모순성을 포함하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왜냐면 그 이론이 적용될 수 없는 상황을 그 이론이 예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태초에 일반상대론이 적용될 수 있어야 그 다음 상황의 전개를 논할 수 있는데, 적용할 수 없으므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경우로 된다.

그러므로 일반상대론은 태초를 논할 수 없고, 물리학자들의 기대는 양자물리와 일반상대론이 결합된 새로운 이론이 나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적인 시간 공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양자역학보다도 더 심한 개념적 대변혁을 거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짐작이 든다. 태초라든가 하는 개념은 처음부터 성립조차 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우주의 기원은 물리만의 문제가 아닐런지도 모른다. 철학.신학.물리학.수학의 공통 관심사이듯이 함께 풀어야 할 문제일런지도 모른다.



2. 물질의 구조와 양자역학


(가) 인식의 문제 : 이중성


물리학에서는 자연현상을 기술하는데 '물체'와 '좌동'이라는 두가지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물체'는 크게는 해와 별 지구등 천문학적 존재로부터 지상의 돌맹이, 자동차, 나무등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상은 물론 작게는 현미경으로나 겨우 보이는 박테리아나 분자 원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상을 구성하는 요소를 이루고 있다. 물체들은 그것이 속한 물리계의 크기에 따라 취급방식이 달라진다. 예를들어 지구는 일상 생활에서는 끝이 안 보일 정도로 큰 물체이지만 천문학적 운동의 기술에서는 하나의 점으로 취급된다. 돌맹이는 자유 낙하운동을 애기할 때는 마치 하나의 점인양 다루어도 괜찮다. 이와 같이 물체를 공간상의 한 점으로 취급할 때 이를 '입자'라고 부른다.

'입자'는 달리 말하면 물체라는 것들의 이상화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입자가 갖는 중요한 성질로 (1) 공간의 국소적 점유와 불가 공유성 (2) 서로들 떼어서 낱 알갱이로 셀 수 있는 성질(discrete countability)을 들 수 있겠다. 즉 입자들은 공간을 차지하면 그 자리에 다른 입자가 들어설 수 없고, 서로 떨어져 있으므로 낱낱이 셀 수 있다.

물체에 비하여 파동은 그리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일상적 경험으로는 수면위에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물결파나 바다의 파도 정도가 가시적인 예이고, 소리가 가장 전형적인 파동의 예가 되겠다. 그런데 이들은 물체 입자들의 특수한 운동에 불과하므로 입자와 대등한 기초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부차적 또는 이차적 개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자연현상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있는 빛이 또한 파동임이 알려졌는데, 빛은 어떤 물질 입자의 파동이 아닌 순수한 파동 자체란 점이 아인시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밝혀졌었다. 따라서 파동은 입자와 다른 자연현상의 기본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파동이 갖는 특성으로는 (1) 동일한 공간에 두개 또는 그 이상의 파동이 겹쳐질 수 있으며 (2) 공간에 퍼져 있으므로 낱낱으로 나누어 세는 것이 불가능한 연속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파동의 성질은 간섭과 회절이라는 독특한 현상으로 나타남으로 실험적으로 검증이 가능해진다.

여기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점은 입자와 파동은 그 개념이 상호 배타적이어서 어떤 현상이 동시에 파동이고 입자라면 논리적으로 모순이란 점이다. 낱낱으로 나누어 셀 수 있는 것(discreteness)과 연속성(continuity)을 동시에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에 물리학자들이 당면했던 실제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해서 살펴보자. 여기 x-선이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새로운 무엇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인체의 뼈까지 사진찍는 대단한 성능을 갖는 어떤 것이다. 이 X-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하여 이것이 입자인가 파동인가를 실험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만약 입자라면 계수기(counter)로 그 숫자를 셀 수 있을 것이고, 파동이라면 간섭이나 회절의 무늬를 관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실험은 실제로 수행되었고 결과는 잘 알려진대로 계수기를 갖다 데면 입자성이 뚜렷이 나타났고, 간섭-회절 장치로는 파동성이 명백히 나타났다. 따라서 X-선은 입자요 파동이란 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사실이 일어났다.

이 입자-파동의 이중성은 X-선 뿐만 아니라 전자, 원자등 모든 극미 현상에는 공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한가지 주의할 점은 입자성과 파동성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자나 원자같은 극미 현상이 인간적 사고의 논리를 특별히 존중해 주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입자성과 파동성이 동시에 나타나지 않는 원인은 그들을 동시에 측정하는 실험장치를 꾸밀 수 없다는 있는 것이다. 논리적 배타성이 적용되는 곳은 극미 현상 쪽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 행위 (즉 관측 행위) 쪽인 것이다. 이는 매우 자연스럽다 하겠다. 인간의 논리와 인간의 인식 활동이 서로 읏나지 않고 함께 어울린다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닐까?


(나) 언어의 문제 I : 상태


앞에서 논한 X-선이나 전자 같은 극미 현상은 그 본성이 입자인지 또는 파동인지 둘중의 하나로 결정할 수 없는 이중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계수기를 갖다 데면 입자로 행동하고, 간섭계로 보면 파동성을 나타낸다. 그러면 전자라는 존재를 입자란 말로도 파동이란 말로도 기술할 수 없으며, 입-파동이라 부른다면 유무( )자 처럼 말이 안되는 용어가 된다.

수소 원자가 어떻게 생긴 것이나고 묻는다면 으레껏 중심부에 핵이 있고 그 주위를 전자가 돌고 있다고 설명한다. 아래 그림과 같이 상상토록 하는 이 원자의 모형은 물체 또는





입자의 언어에 젖어있는 우리의 사고 관행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일 뿐 원자의 실제와는 거리가 매우 먼 것이다. 대학생 수준의 양자역학 강의에서는 파동의 언어로 원자 모형을 제시하는데, 이는 원자의 여러 성질을 상당히 잘 들어내 주지만, 그 파동을 공간상에 실제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면 역시 틀리게 된다.

물리학자들은 전자라는 존재를 기술하는 데는 입자나 파동이란 용어는 관용상 써을뿐 거기에 구애되지 않고, 새로운 언어를 써서 이들이 야기시킬 수 있는 혼란을 피해간다. 그것은 '상태'란 개념이다. 전자가 입자라면 입자로서 어떤 상태를 가질 수 있고, 파동이라면 파동으로서 가능한 상태들이 있다. 그러므로 상태는 입자나 파동으로부터 유도되는 이차적 개념으로 도입된다. 그런데, 상태란 개념을 더 근원적인 것으로 잡아서 물리현상을 기술하는 것이 가능하다. 즉 상태란 개념이 생겨난 역사적 기원을 무시해 버리고, 즉 입자니 파동이니 하는 언어를 쓰지 말고 곧바로 상태란 용어를 사용하고, 이 용어만을 쓰도록 고집하면 된다.

그러면 수소한 원자의 기술을 하는데 핵 주위를 전자간 입자가 어떻게 돌고 있는 상태인가라든가 또는 전자란 파동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가란 진술을 피하고, 수소원자의 전자는 어떤 상태에 있는가라고 직접 묻는다. 수소 원자에 관한 물리학적 과제는 '가능한 상태 전부의 집합'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 이런 상태에 있을 때 미래에는 어떤 상태로 옮겨 가는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상태 전부의 집합'은 일반적으로 힐버트 공간(Hilbert Space)이라고 수학적으로 잘 알려진 이론으로 기술되며, 상태의 시간적 변화는 유명한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기술된다.

일반인이 양자물리를 이해하기 어려운 점의 하나는 원자 현상이 입자란 언어로 기술되지 못한다는 점과, 입자나 파동의 상태가 아닌 그냥 상태 자체가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상태들이 힐버트 공간이란 수학적인 이론으로 기술된다는 점이라 하겠다.


(다) 언어의 문제 II : 이분법(二分法) 논리의 오적용


앞서 말했듯이 상태란 개념은 양자역학 이해의 핵심이 된다. 여기서는 상태 개념의 잘못된 적용에서 오는 혼란의 한 예를 고려해 보겠다. 전자는 '스핀'이란 상태를 갖고 있는데, 스핀에 해당하는 일상 생활의 예가 없기 때문에 이것을 설명하기는 쉽지가 않다. '혼자 돌고 있는 상태 (자전의 상태)'라고 입자의 언어를 빌려 설명하는 것은, 약간의 유사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엉뚱한 것을 상상케 하여 오해만 불러 일으키게 된다.

스핀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 스핀 상태의 집합' (힐버트 공간)을 파악하는 것이다. 전자의 스핀 상태는 대체로 말하여 '윗상태'(up state)와 '아랫상태'(down state)라는 두가지 상태의 조합으로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위-아래'라는 것을 예를들어 동전의 앞면과 뒷면에 비교해 보자. 동전의 앞-뒤는 서로 배타적이어서 앞상태로 놓인 동전이면 동시에 뒤로 놓인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이고 실제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스핀도 측정하면 반드시 '위'로 나오든지 아니면 '아래'로 나오고 그 중간의 다른 어떤 것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이런점에서 스핀의 위-아래 상태는 상호 배타적인 면이 있으며, 따라서 이분법( )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스핀 상태의 미묘한 점은 측정 결과는 위-아래 둘 중 하나만 나오는데, 상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즉 이분법의 논리가 상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점이 동전의 비교가 전혀 들어 맞지 않는 측면이다. 스핀상태는 윗상태와 아랫상태의 모든 조합이 가능하다. 이것의 일상적 비유는 기러기가 앉아 있는 방향이 그럴듯한 예가 될 것 같다. 두가지 독립된 방향 즉, 동향과 남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서향은 동향의 반대, 북향은 남향의 반대에 불과함으로 독립된 방향이 아니다.) 기러기의 앉음상태는 두개의 기본 상태 즉 동향상태와 남향상태가 있을 수 있다. 물론 기러기는 이 두 상태의 적절한 섞인 상태인 동남, 동동남등 얼마든지 많은 방향으로 앉을 수 있다.

스핀 상태는 상태 집합의 측면에서는 기러기의 방향처럼 윗상태와 아랫상태의 적절한 조합의 상태에 있을 수 있다. 반면에 스핀 상태를 측정하여 기술코자 하면 동전의 앞-뒤처럼 위-아래 둘 중 하나만 나올 뿐이다.

이분법의 배타적 논리를 적용할 때 혼란이 야기되는 많은 경우는 이를 상태 공간에 적용할 때이다. 전자의 스핀은 위나 아래 둘 중 한 상태에 있을 수 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예에 속한다. 올바른 적용은 측정과 인식의 측면에 이 배타적 논리를 쓰는 것이다. 즉 전자의 스핀을 측정하면 둘 중의 하나만 나오며 이분법의 논리가 일상 생활의 경험과 꼭 같이 적용된다는 점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살아있느냐 죽었느냐"하는 궤변같은 문제는 '생과 사'라는 배타적 개념을 측정 결과에 적용하는 것이냐 상태 공간에 적용하는 것이냐를 먼저 유의해야 한다. 고양이가 '생의 상태와 사의 상태'의 두 상태로 구분된다는 것은 양자적 의미의 상태로 잘못 이해될 때 해결할 수 없는 수렁에 빠지고 만다.


(라) 인과의 문제 : 결정론과 확률론


양자물리에서는 인과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을 가끔 보는 수가 있는데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며, 물리학자들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로 보지 않는다. 인과는 시간상에서 먼저 일어난 현상이 원인이 되어 나중에 일어난 현상을 결과로 결정짓는 것이라고 하자. 고전물리의 경우 어느 시각에 물리계의 상태를 정확히 알면 그 후의 모든 상태는 방정식에 의해 완전히 결정되므로 결정적 인과론이 성립한다. 이때 상태란 말이 쓰임에 유의하자. 이 경우 상태는 입자들의 상태 또는 파동의 상태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들은 직접 측정되고 인식할 수 있는 종류의 상태이다.

양자 물리에서의 복잡성은 상태와 측정.인식이 직접 관련되지 않은 점에 기인한다. 인과의 문제에 있어서도 어느 쪽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먼저 양자적 상태공간에서 상태의 시간적 진행을 논해보자. 이 경우 어느 한 시각의 상태가 주어진다면 그 후의 모든 상태는 슈뢰딩거 방정식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다. 그러므로 결정론적 이론이며, 뉴턴의 경우와 꼭 같이, 미래의 모든 상태는 계산이 가능하다.

문제는 측정이다. 앞에서 논한 스핀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스핀의 상태는 시간의 함수로 슈뢰딩거 방정식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한 예로 어느 순간에 윗-상태와 아랫-상태가 각각 반이 섞인 상태(동남향으로 앉은 기러기에 비유)에 있다고 하자. 아직까지는 확률이란 말이 전혀 쓰이지 않고 있음을 유의하자. 이제 이를 측정하려들면 위 또는 아래 둘중의 하나로만 나온다. (동전의 앞-뒤면에 비유) 이 경우 위로 나올 확률이 반 아래로 나올 확률이 반이 된다. 측정에서 비로소 확률성이 등장한다.

슈뢰딩거 방정식에 의해 스핀 상태가 완전히 결정되어 있지만, 이를 측정하여 알고자 할때 위로 나올지 아래로 나올지는 (이 둘 밖에 달리 나올 수는 없다.) 오직 확률적으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예측은 확률적이라고 하는 것이며, 따라서 확률적 인과가 운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양자 물리에서의 인과론은 결정론적 측면과 확률적 측면이 다 있게 되며, 둘중의 어느 하나로 말하는 것은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 시키는 일이 된다.


(마) 양자 물리의 난해성 - 주역과의 비유


양자물리는 수식을 다좇아 계산한다 해도 그 의미가 잘 잡히지 않는 수수께끼같은 측면이 있다. 이 난해성의 기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상태와 측정.인식의 관계에 이는 것이 아닌가 한다.

상태는 보통 라는 희랍 문자로 표현하며 를 '상태함수'라고 부른다. 이 상태함수들은 서로 더하거나 ( ) 뺄 수 있고, 두배 세배 곱셈도 되며 (3 등), 또 시각적인 변화를 미분 형태로 계산하여 ( ) 슈뢰딩거 방정식을 쓸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상태에 관하여 인식하고자 측정을 하면 어떤 량이 얻어질 터인데, 그것은 가 아니라 에서 얻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상을 파악하고 예측하고 하는 등의 경험적

인식의 문제는 에 관련된 것들이다. 그래서 고전물리와 일상생활의 언어와 개념은 가 아닌 의 기술에 적절한 것들이다.

양자역학의 난해성은 현상에서 직접 얻어진 의 언어들을 가지고 -상태계의 기술에 적용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본다. 한가지 흥미로운 일은 양자 물리 못지않게 난해하고 수수께끼 같은 주역에 유사한 구조적 특성이 있다는 점이다.

주역은 태극 (1=2 ), 양의 (2=2 ), 사상 (2 ), 팔괘( )의 순으로 2의 진법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다음에 2 인 십육진괘로 되는 것은 아니라 (8) 인 64궤를 논한다. 주역 64괘의 기본은 8괘이다. 8괘는 복희씨가 만물을 상징하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8괘만으로는 무궁무진한 현상 세계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다시 겹쳐서 64괘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제 주역의 8괘를 양자 물리의 -상태와 대응시키면 주역의 64괘는 8괘의 제곱으로 형성된 만큼 에 대응시키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면 에 해당하는 64괘는 직접 인식되는 현상계를 표현할 것이고, 에 해당하는 8괘는 그 속의 상태계를 상징하는 기호가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8괘의 명칭과 그 자신들의 제곱의 명칭은 그럴듯하다고 하겠다.







에서 볼 수 있듯이 , , , , , , , , 은 모두 현상적으로 인식되는 것을 지칭하는 반면, 이들의 제곱근이라 할 수 있는 , , , , , , , 은 한결같이 그 상징성이 불확실한 것들이다.

이상의 주역과 양자물리의 비유는 타당성이나 논리적 근거가 전혀 없는 상상에 불과하다. 다만 현대 서구 과학과 동양의 오래된 상징체계간의 관련성을 아주 엉뚱하게 시도해 봤다는 점에서 흥미있는 애기꺼리는 될것으로 보인다. 라는 것은 주역의 괘사나 호사가 전혀 이해할 수 없게끔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 아닐까?


3. 관찰의 문제

(가) 상대성 원리와 관찰자의 운동

관찰이 심각한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주로 양자역학과 그 해석에 관련되어서 였으나, 그 이론의 구조상 관찰자와 관찰과정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먼저 상대성 이론에서 관찰의 역할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상대성 이론"은 "상대성 원리"와 "광속 일정의 원리"를 공리로 하는 연역적 이론체계로 볼 수 있다. 상대성 원리는 두 관찰자가 동일한 현상을 관찰할 경우, 그 두 사람 각각의 관찰에 동등성을 인정하는 원리이다. 즉 모든 관찰자는 동등하며 그 어느 누구도 특별한 지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상대성 이론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두 관찰자가 "상호 운동 관계"에 있을 때에 이 원리가 무엇을 함의하는가를 고찰하는 것이다. 우선 두 관찰자중 어느 쪽이 정지해 있고 어느 쪽이 운동하는지를 결정할 수 없음을 즉 운동은 상대적 임을 이 원리는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운동관계 있는 두 사람이 하나의 현상을 각기 자기에게 보이는 그대로 묘사할 경우, 그 묘사 내용이 달라 보여도 물리적 법칙은 동일함을 의미한다. 달리 표현하면 누구나 자기 자신을 정지한 기준계로 잡을 수 있음을 말해준다.

이 상대성 원리는 갈릴레오가 이미 알고 있던 것으로 뉴턴 역학도 상대성 원리를 만족시키는 이론체계이다. (뉴턴 역학을 상대성 이론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시간과 공간을 관찰자에 무관한 절대적인 것으로 삼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상대성 원리는 '관찰자의 운동'에 관한 진술이란 점, 즉 '관찰자'가 역학이론체계의 최상위 원리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역학에서 다루는 자연현상이나 방정식 등에서 '관찰자'가 명시적으로 나타나는 일이 드물더라도, 그 이론 체계 자체의 성립의 바탕에 '관찰자'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나) 상대성 이론과 빛(관찰수단)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인 것에서 상대적인 것으로 격하된 것은 '동시성(simultanerity)'을 어떻게 측정하느냐 하는 '관찰'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을 알려면 '빛'을 써야 한다는 것과, 빛의 속력이 유한하며 일정하다는 사실이 동시성의 정의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 아인시타인의 큰 업적이라 하겠다. 동시성의 관측적 정의 (operational definition)에서 관찰 수단인 빛이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로부터 i 동시성을 관찰자의 운동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며 ii 따라서 시간도 상대적임을 보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 자체가 빛에 의하여 정의된다고 볼 수 있다.예를들어 블랙홀(black hole) 주위에서는 빛의 진동이 느려지므로 따라서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고 하는 것이다.

빛은 자연을 관찰하는 물리적 수단에 불과한데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식의 기본 형식이 이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은 어떤 함의가 있는가? 우선 시공간에 담겨진 이 세계는 관찰 수단인 빛에 의하여 그러진 또는 투영된 세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이 세계의 전부일 수도 있지만 그 일부만을 파악한 것일 수도 있으며, 심한 경우에는 실재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 아닐까하는 의구심까지도 가질 수 있다.

최근에 개발되기 시작한 가상시재(virtual reality)는 지각, 청각, 촉각등 우리의 감각을 빛과 전기적 장치로써 완벽하게 사실처럼 꾸며댈 수 있는 장치인데, 이것의 초보적 단계에서는 실재와 가상실재의 구분이 쉽게 되겠지만 미래에 아주 발달된 기술사회에서는 구분이 매우 어렵게 될런지도 모른다. 여기서 제기할 수 있는 문제로는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실재와 가상 실재는 어떻든 구분할 수 있다는 어떤 원리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또는 그와 반대로 어떤 수준 이상의 기술이냐 상황에 따라서는 실재와 가상실재의 구분이 원리상 불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앞서 말한대로 우리가 실재라고 믿는 이 모든 세계가 실은 하나의 거대한 가상실재에 불과할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빛에 의하여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식의 틀이 결정지어졌다는 것의 또 다른 함의는 만약 빛에 의하지 않는 (이 말을, 필자는, 우리의 5감에 의한 것이 아니란 말과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다른 사물 인식의 길이 있을 경우 시간과 공간의 틀 밖의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현몽이나, 직감이나, 예언, 텔레파시등 초자연적 현상이나 또는 기( )에 의해서 본다는 것등은 이런 측면에서 접근할 때 합리적 이해의 가능성이 열릴지도 모른다. 빛을 통하여 보는 이 세계는 빛으로 창조된 세계이고, 이와는 전혀 달리 전개되는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현대 물리학은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물리학은 관찰 가능한 세계를 다루는 것으로 스스로를 엄격히 한계짓고 있는데, 관찰은 빛 (좀 더 정확히 전자기적 상호작용)의 매개를 통하여서 이루어 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 빛으로 관찰 가능한 세계만을 다룬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빛에 의한 관찰(즉 5감)외에 다른 관찰 방법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 한 시간과 공간의 세계 밖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 불확정성 원리와 관측행위

예를들어 전자라고 하는 물리계의 상태는 상태함수에 의해서 완전히 기술 된다. 그러나 이 상태를 우리가 알고자 한다면 관측이라는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때 측정 결과를 기술하는 언어는 상태함수가 아니라 일상 생활의 언어인 입자(또는 파동)의 술어들이다. (입자와 파동은 상호 배타적인 개념이므로 둘을 동시에 쓸 수는 없고, 둘중의 어느 것이든 동등하다. 여기서는 좀 더 친숙한 입자쪽 기술만을 쓰기로 하겠다.)

전자의 상태를 측정하려는 관측장치의 구성과 관측과정 그리고 측정결과의 기숭에 있어서 '전자라는 입자'의 관념을 가지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인식구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입자의 '위치'와 '빠르기'를 측정함으로써 상태를 알고자 한다. 물론 상태함수 자체가 위치나 빠르기로 기술되지 않음을 유의해야 한다. 위치나 빠르기는 우리의 측정 행위 즉 정보를 얻기 위하여 상태에 가하는 관측 행위를 나타내는 연산자(operator)로 기술된다. 즉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는 것은 상태함수에 위치 연산자를 적용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전자라는 입자'의 위치와 빠르기를 측정하는 행위는 예를들면 빛을 써서 할 수 있다. 이때 빛이 전자에 미치는 영향을 가능한 최소화해야 위치와 빠르기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원하지 않는 영향을 마무리 줄이려해도 원리상 줄일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하이젠버그가 처음 알게 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불확정성 원리이다. 위치와 빠르기를 동시에 한없이 정확하게 잴 수는 없고, 각각의 불확정도의 곱이 플랑크 상수보다 작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강조할 점은 전자의 상태함수의 면에서는 불확정성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상태 자체는 불확정성이란 것이 없고 이의 측정.인식을 기술하는 언어인 입자의 위치와 빠르기에 불확정성이 있는 것이다. 그 원인은 관측 매체 (예를들면 빛)의 영향을 어느 한계 이하로 줄일 수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관측행위가 관측 대상의 상태에 교란을 일으키는 것을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불확정성 원리 때문에 우리가 전자의 상태를 완전히 알 수 없고 무엇인가 불가지한 신의 영역을 남겨 놓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상황의 미묘한 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하겠다. 예를 들어 수소원자의 바닥 상태에 있는 전자를 생각해 보자. 이 겨우 전자의 상태함수는 이론적 계산으로 완벽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측정해야 '알수'있는데, 이것은 계산상으로나 실험상으로나 확률적으로만 그 값이 주어진다. 그리고 위에 말한 불확정성에 적용된다. 우리는 측정해 '알 수' 있는 것은 모두 계산해 낼 만큼 상태에 대해서 '완전히 알고' 있는데, 그 측정으로 아는 양들은 오직 확률적으로만 주어진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신은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히 알고 있는데 우리는 측정해야 하므로 불확정성이 있다."란 진술도 정확하지 않다. 이것은 '전자는 입자'란 것을 전제한 진술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전자의 상태함수라는 추상적인 힐버트 공간으로 기술되는 어떤 것이지 입자나 파동이란 것이 아님을 늘 주의해야 한다.

Backward Forward Post Reply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