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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6 (22:46) from 84.173.75.126' of 84.173.75.126' Article Number : 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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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노문화'의 '이중구속': 에콜로지와 사이버네틱스의 유토피아/디스토피아




'테크노문화'의 '이중구속': 에콜로지와 사이버네틱스의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심 광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객원교수, 미학.문화이론


1. 문제설정

1) 세계화, 지방화와 정보화의 지형
오늘날 세계가 대대적인 이행기에 처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한때 '근대화'의 논리를 앞세우며 전사회적 변화를 주도했듯이 이번에도 역시 정부와 기업이 앞장서 '세계화', '지방화', '정보화'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가속화되는 국제경쟁 속에서의 생존전략 수립과 '국가경쟁력 강화'를 강조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이같은 양상은 6-80년대에 걸친 세계적 차원의 다양한 형태의 '반체제운동'들의 쇠락과 현실사회주의의 결정적 붕괴라는 세계사적 '사건'의 복합적 산물이라는 점 역시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은 이 복합적 과정 속에서 '정보화'라는 용어가 함축하고 있는 과학기술공학적인 변화가 다른 과정들에 미치는 결정적 역할의 문제이다. 이는 분명 오늘날의 세계적 이행의 '새로운' 성격과 특질을 시사하고 있는데, 실제로 '정보화'라는 용어에는 컴퓨터과학으로 무장한 극소전자기술, 이를 바탕으로 한 원거리공학과 뉴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사이버네틱스와 생태공학 등의 비약적인 발전, 나아가 '시공간의 압축기술'(데이비드 하비)의 문제가 함축되어 있고, 이를 매개로 한 '세계화'('범지구화'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의 과정은 과거 19세기말 전기와 동력기관의 발달에 힘입은 세계적 교류의 팽창과는 양과 질의 면에서 거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지방화'의 과정이 촉진되고 있다는 사실도 원거리공학의 발달로 인한 공간적 탈중심화의 확산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세기적 이행을 '정보화'의 문제로 환원하여 설명하는 것은 새로운 기술결정론을 주장함에 다름아니며,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런 관점에 빠져 '테크노피아'를 강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기술결정론을 경계한다는 것과 과학기술의 새로운 발전이 사회 전체의 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중시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기술결정론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오늘날의 사회변화와 문화변동 과정을 오직 사회과학적인 또는 인문학적인 차원에서만 분석,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 아닐까 싶다. 실상 이제까지 거시적 사회변동과정을 설명하려는 데 주력해왔던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대개는 본래 마르크스가 {자본}을 저술하던 당시 과학기술의 발전과의 연관관계를 주목하면서 19세기 사회변화의 총체를 분석하던 것과는 달리, '계급투쟁'의 개념만으로 현대사회의 변화과정을 기술해온 '관성'에 매몰됨으로써 오히려 현실의 복잡성에 대해 '맹목'의 상태에 빠져들어갔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 같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라는 낡은 테제를 반복할 필요는 없지만, 이미 6-80년대를 거쳐 확인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테제들, 이후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 과정들은 이런 문맥에서 볼 때 커다란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 따라서 '테크노피아'를 강변하는 기술결정론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과학기술의 발전과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인 변동 사이의 내재적인 연관관계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려는 새로운 자세가 절실한 것 같다.
사실 '정보화'의 문제는 단지 정보과학기술의 발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로 인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시스템과 문화적 생산/유통/소비과정 전반의 변화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말하자면 본격적인 '테크노문화'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에) 인문사회과학의 입장에서도 결코 간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들뢰즈/가타리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이미 자본주의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일정한 시공간에 뿌리를 내린 '농경민적인 존재'로부터 이탈하여 도시와 도시 사이를 유랑하는 '유목민적인 존재'로 변모해왔지만, 이제 '시공간 압축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통신위성을 통해 전지구를 마음대로 가로지르는 본격적인 '유목민적 존재'의 출현을 가속화하고 있는 셈이다.1) 이런 상황에서는 주체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와 주체의 위치, 주체의 관점 등이 모두 변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새로운 정보기술의 확산이 '주체의 탈안정화'의 일반화 과정을 의미한다면, 주체와 세계의 관계를 다루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이론틀, 나아가 예술과 철학의 '틀' 전반에 걸쳐 상당한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8-90년대를 풍미한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서 이와 같은 문제들이 부분적으로 다루어져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내의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은 이런 문제를 대체로 인문학, 예술문화의 맥락에 국한시켜 다룸으로써 일종의 '문화주의적' 설명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태반이었으며, 일부에서는 새로운 과학기술의 발전과 정보공학의 성과에 무비판적으로 열광하여 '포스트모던한 테크노피아주의'에 함몰되어 왔던 것 같다. 물론 한편에서는 '모더니티-포스터모더니티'라는 토픽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문화예술의 차원을 넘어선 근대세계 전체에 대한 논쟁으로 확산시켜 왔지만, 여기서도 논쟁의 지형은 정치경제, 문화예술과 과학기술 사이의 내재적 상호연관의 입체적인 동학을 충분히 포괄해낸 것은 아닌 듯싶다.
그렇다고 이같이 확장된 문제틀 전반에 대한 분석이 곧바로 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며, 이는 필자의 역량을 넘어선 일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다만 그간의 논쟁으로부터 교훈을 얻자는 것이며, 토픽의 위상을 다시 한번 변화시킴으로써 '기술결정론', '문화주의', '계급환원론'과 같은 종래의 편협한 관점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따름이다. 필자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오늘날과 같은 세기적 이행의 과정 속에서 문화변동의 문제를 비환원주의적으로 다룸과 동시에 문제설정의 지형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정보화와 문화과정의 주요 테마를 '절합'하는 학습이 필요하다고 본다. 여기서 필자는 '테크노문화','에콜로지', '차이', '결연'과 같은 토픽들을 이와 같은 이론적 '절합'을 위한 화두로 선택하고자 한다.      

2) '테크노문화'와 욕망구조의 재편  
90년대에 들어 서구 문화담론의 주요한 쟁점으로 등장하고 있는 '테크노문화'(technoculture)라는 용어는 우리에게는 아직 낯설다. 그러나 낯설음과 친숙함의 차이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오늘날, '낯선' 것은 거의 '리얼타임'으로 친숙한 것으로 변모해버리는 최근의 문화정세에 비추어 보면, 바로 그 정세의 구조를 만들어가는 것이 곧 '테크노문화'가 아닐까 싶다2). '테크노문화'는 문자 그대로 '테크놀러지'와 '문화'의 합성어이다. 이는 좁은 의미에서는 테크놀러지 자체의 구성과 사용에서 나타나는 문화적인 관행과 제도, 용법 등을 뜻한다. 이럴 경우 '테크노문화'는 '예술문화', '종교문화', '대중문화' 등과 같이 다양한 문화영역이나 층위들로 구성된 문화 전체의 부분집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보면 이는 특정한 시대에 테크놀러지의 발전이 문화과정 전체지형내에서 지배적인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결과적으로 이전과는 다른 차원과 성격을 띠게 된 문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윌리엄즈의 용법을 빌어 오늘날 지배적인 문화가 곧 '테크노문화'라 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경우에는 '테크노문화'는 아직 '대두하는 문화'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을 지나고 있는 현시점에서는 이미 대개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테크노문화'가 지배적인 문화로 그 위상을 바꿔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해부터 유난을 떨며 모든 언론과 방송, 일상의 담론을 주도하고 있는 '정보화', '영상문화'와 같은 토픽들이 바로 실제적 변화를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나아가 20세기 전체가 '테크노문화'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테크노문화'란 곧 '과학문화', '과학기술문명'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나, 단순 기계복제의 차원을 넘어서는, 일종의 사이버네틱스적 기술복제, 전자복제 차원으로 들어선 오늘날의 과학기술문명은 과거와는 그 성격을 분명히 달리한다).
'극소전자기술', '시공간압축기술', '사이버네틱스' 등을 핵으로 삼는 새로운 테크놀러지와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은 세계의 구성과 세계에 대한 주체의 관계, 주체형태와 주체화과정 전반에 대대적인 변화를 야기한다. 기존의 문화가 한정되고 고정된 시간과 공간이라는 좌표축과 그 위에서 사고하고 행위하는 안정된 주체들을 가정하고 움직였다면, '시공간압축기술'로 무장한 '테크노문화' 속에서 고정된 좌표축과 중심을 지닌 주체들은 탈안정화되고 탈중심화된다. 현상적으로 보면 이는 세계와 주체의 해체에 따른 혼란과 동요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세계는 코스모스에서 카오스의 상태로 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후기구조주의나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담론의 중심축을 차지했던 탈중심화, 주체의 해체, 텍스트의 해체 등과 같은 개념들이 이론적 혼란을 야기했던 것도 이런 토픽들을 기존의 문화적 콘텍스트 안에서만 이해하고자 했던 데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토픽 대신에 '테크노문화'의 확산이라는 문맥에서 바라보게 되면 해체와 탈중심화라는 주제들이 인과론적인 설명의 틀 속에 자리잡을 수 있다. 이를테면 '테크노문화' 속에서는 시공간압축기술로 인해 뉴턴식의 고정된 시공간의 좌표가 상대론적으로 다변화하는 복합적인 좌표축들의 그물망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아인슈타인 시대에는 이론과학의 틀과 실험실내에서 개념적으로만 가능했다면, 오늘날 그것은 전지구적인 차원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이를테면 개념적일 뿐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이런 변화가 나타남으로써 오늘날 '문화변동'의 현상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특수한 '문화변동'이 통상 인류학에서 말하는 여러 지역문화간의 접속과 충돌이라는 차원만이 아니라 동일한 시대와 지역내에서 기존의 문화와 대두하는 새로운 문화 사이의 충돌과 접속이라는 차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테크노문화'에서는 여러 문화들의 시간적 차이(전통과 현대)와 공간적 차이(서구문화와 동양문화, 각 지역의 문화적 특수성들)가 접속되고 충돌할 뿐아니라, '압축'됨으로써 문화적 복합화 현상을 야기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오늘날 '복합문화주의'(또는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3)라는 문제가 여러 지역에서 큰 쟁점으로 떠오르는 것도 바로 이런 거시적 변화의 문맥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개별 주체들은 이전에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넓고 빠른 시간적, 공간적 체험의 스펙트럼을 지니게 되며, 주체의 고정된 중심축이 복합적인 경험의 그물망으로 대체되는 현상이 동반된다. 말하자면 주체는 어떤 고정된 캐릭터를 지닌 닫힌 집합이 아니라 다양한 차원에서 중층적으로 얽혀진, 일종의 열려지고 무한하게 자기증식하는 열려진 매트릭스와 같은 형상을 취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럴 경우 주체-주체의 접촉은 자기증식적이며 개방된 매트릭스들간의 중첩과 상호작용의 양상을 띠며, 그 결과 다양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누적되었던 경험과 정보들의 교류를 통해 욕구와 욕망의 운동이 다층화되고 유동하게 된다. 이를테면 과거의 고정된 시공간의 좌표축에 갇혀있던 욕망의 '브라운 운동'이 좌표축의 중층적 개방 상태 속에서 무한한 확산운동을 개시한다는 얘기다. 이 욕망의 개방된 운동들은 주체의 위치를 더욱 탈안정화시키면서 주체-주체, 주체-세계의 접촉면적을 확산시킨다. 과거에 주체를 특징지우던 계급, 직업, 성, 인종, 세대와 같은 지표와 매개변수들 자체가 중첩되면서, 욕망의 굴절과 주름을 강화하며, 일종의 카오스적인 운동상태로 이끌어가게 된다. '테크노문화'가 근본적으로 새로운 문화변동을 야기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맥락에 이르게 되면, 근대세계에서 일정한 패턴으로 짜여져온 자연과 문화, 자연과 인간, 인간과 기계, 자연과 기계, 육체와 정신, 감성과 지성의 관계망 전체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3) 희망의 문화정치를 위한 갈등의 지형학과 새로운 학습의 필요성
이런 점에서 필자는 '테크노문화'라는 새로운 현실이야말로 오늘날의 세기적인 이행과정 속에서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과학기술과 전지구적 자연의 이용 등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이 뒤엉켜들게 만드는 하나의 거대한 용광로를 구성하고 있다고 본다. '모더니티-포스트모더니티' 논쟁의 중핵에는 실제로 그 논쟁지형을 형성해온 구성적 메커니즘인 '테크노문화'라는 실제적 장치가 존재하는 셈이며, 이는 곧 세기적 이행과정에 농축된 새로운 희망과 절망, 해방과 억압의 가능성들의 변증법을 동시에 작동시키는 세기적인 '화두'라고도 말하고 싶다. 이와 같은 변증법의 핵심에는 적어도 3가지 이상의 대당, 모순들이 존재한다. 첫째, 전통적인 물질-정신 대당의 변형으로서 육체의 현상학과 사이버네틱스의 인식론간의 새로운 대당이 그것이다. 둘째, 자연-기계의 전통적인 대당의 변형으로서 에콜로지 대 테크놀러지 사이의 새로운 대당이 그것이다. 셋째, 이와 같은 새로운 대당과 모순들에 의해 과잉결정된 계급, 성, 인종, 세대간의 갈등과 적대의 포괄적인 그물망이 초래할 세계사적인 변혁의 차원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 이같은 문제들을 어느 정도 심도있게 접근해 들어갈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다. 다만 현재의 세기적 이행의 핵심적 메커니즘과 그에 내재한 갈등의 지형에 대한 인식론적 지도를 그려봄으로써 새로운 세기를 위한 '희망의 문화정치'를 구성할 수 있는 학습을 시작해보자는 것이 필자 나름의 욕심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지도와 과제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새로운 '교육학'의 단초를 그려보고 싶다. 그 새로운 교육학의 명칭을 현재로는 붙일 수 없으나, 현재까지 이에 걸맞는 용어가 있다면, 여러 차원에서 제기되고 있는 '통합학문적 시도'들이 이에 근접할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결국 이를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차원에서 새로운 접근과 검토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1) 우선 이제까지 서구에서 진행된 이론적 탐구 중에서 이런 노력에 버금가는 작업에는 서로 다른 경로와 방향에서 진행된 두 가지 시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출발하여 독일과 프랑스를 축으로 형성된 '비판이론'(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후기구조주의까지를 포괄하는 범주)을 거쳐 8-90년대에 확산되고 있는 '문화이론', 또는 '문화연구'(앞선 두 범주의 연구를 바탕으로 영미권에서 확산되는 작업)로 이어지는 이론적 시도들이다. 다른 하나는 68년의 서구사회의 변혁적 경험에서 촉발되어 7-80년대에 들어 꽃피기 시작한 '신과학운동'이 그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신과학운동'은 한편으로는 '녹색운동'과 맞물려 정치적 운동으로까지 발전하기도 했지만, 그 저류를 흐르고 있는 것은 현대과학의 제반 이론적 혁명의 성과들을 일종의 '생태학적 사고와 세계관'으로 전환시키려는 탐구나, 혼돈이론이나 시스템이론, 동양사상의 오랜 전통과의 새로운 '이론적 대화'를 모색하고 있는 끈질긴 탐구들이다. 물론 '신과학운동'은 아직 맹아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 시야의 방대한 스펙트럼에 비해 이론적, 방법론적 결실은 아직 당위적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작업의 실질적인 지향점이 역사시대 전체에 대한 깊은 반성과 이를 통해 역사시대의 제2차 전환을 준비하려는 방대한 문명사적 연구과제를 설정하고 있는 일종의 '대안적 과학' 운동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와 같은 두 갈래의 흐름은 사회문화적 갈등과 자연의 무제약적 착취에 따른 생태적 위기가 가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까지 상호접합점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세기적 전환에 걸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구성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단지 현재까지의 성과만을 보기보다는 만일 이런 넓은 문맥을 중시한다면 통합학문적 연구를 위해서는 '신과학운동'의 넓은 스펙트럼과 앞서 말한 '문화연구'의 심층적이고 미시적인 분석의 만남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고 본다. 물론 이 글에서 이와 같이 방대한 이론적 작업을 수행하는 것은 필자의 능력 밖이지만, 어디에서 시작하든 이와 같은 과제는 현 시기의 모든 이론적 탐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거대한 화두가 아닐까 싶다.

2)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 같이 추상도가 높은 이론적 통합 작업을 수행하기에 앞서,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현재 시점에서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사회적 갈등과 적대, 차이들의 문제이다. 그리고 필자는 '테크노문화'라는 토픽이 곧 이와 같은 적대와 차이들이 현재 시점에서 수렴되고 응축되는 하나의 깊은 계곡이라고 본다. 이 계곡 속에서 에코토피아와 테크노피아의 전망이 함께 마주치는가 하면 동시에 전지구적 생태위기와 오웰적인 디스토피아의 위험이 현실화되는, 혼돈스러운 운동이 요동치고 있는 것 같다. '신과학운동'의 기수의 한 사람인 프리쵸 카프라와 같은 이들은 반생태적인 하드테크놀러지와 에너지 개발정책 대신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프트에너지 통로의 개발이며, 소프트테크놀러지의 개발과 여성운동, 인간잠재력운동 등이 곧 태양시대로 가기 위한 새로운 사회경제적, 정치적 선택을 마련하는 데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4) 그러나 오늘날의 요동현상을 가속화하고 있는 촉매제 중의 하나가 곧 극소전자기술에 의거한 정보기술과 컴퓨터과학으로 무장한 사이버네틱스의 기술공학이다. 그리고 중동전쟁에서 위력을 발휘했던 미사일과 시뮬레이션 기술을 조작하는 극소전자기술은 작고 소프트한 것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위험하다는 점을 새롭게 환기시킨다. 말하자면 극소전자기술의 발달로 점점 더 소프트해져가고 있는 현재의 과학기술공학에 비하자면 과거의 하드테크놀러지가 오히려 더 '소프트'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이런 문맥에서 보자면 카프라나 리프킨 등이 주장하고 있는 새로운 문명과 기술로의 전환(즉 에코토피아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새로운 도덕, 정신재무장운동과 같은 것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오히려 현재 확산중인 극소전자기술과 정면으로 맞대면해야 하며, 이 기술과학에 대한 일종의 '역동일시' 관계를 통해, 이를 활용하면서도 이를 넘어서야 하는 힘겨운 상황에 처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에코토피아로 가기 위한 길을 현실적으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극소전자기술혁명의 시련을 적극적으로 가로지르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얘기다.

2. 정보화와 극소전자기술의 사회문화적 함의

1) 새로운 기술공학문화
그 극소전자기술혁명의 시련이란 어떤 것일까? 앞서 말했듯이 그 시련은 주체형태, 주체-주체의 관계, 주체-대상, 주체-환경간의 관계의 새로운 변화에서 야기된다. 생태학적 사고는 환경의 파괴를 염려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극소전자기술로 인해 인간의 주체형태와 사회문화적인 차원에서 나타나는 대대적인 변화의 문제는 아직까지는 본격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것 같다. 단적으로 극소전자기술과 멀티커뮤니케이션 체제, 사이버네틱스의 발전은 한편으로는 도시와 산업의 인텔리전트화와 에너지의 과용을 강화하며 완결된 형태로의 단일하고 구심적인 주체형태를 해체하여 탈중심적이고 다중적인 새로운 주체형태를 생산한다(물론 극소전자기술의 발달은 다른 한편으로는 환경보호적인 재생기술의 발달을 촉진시킴으로써 생태론적 전망을 앞당길 수도 있다).5)
마크 포스터는 이와 같은 변화를 두고 마르크스가 생산양식의 변형이라는 개념을 축으로 역사적 시대구분을 시도했던 것과 비슷하게 상징적 소통구조의 변형방식에 따른 시대구분도 가능하다고 보고, 대면적이고 구어적으로 매개된 의사소통의 시대에서 인쇄를 매개로 글로 쓰여진 의사소통의 시대를 거쳐, 오늘날에는 전자적으로 매개된 의사소통의 시대로 진입했다고 본다.6) 그리고 각각의 경우, 특징적인 의사소통수단은 상징적 유사물, 기호의 재현, 정보적 시뮬레이션이 된다고 할 때, 첫단계에서는 자아의 발화가 정보의 소재지라면, 둘째 단계에서는 자아는 가상적인 합리적 자율성을 중심축으로 주체로 자처하나 실제로는 주어진 기능의 수행자로 구성되는 데 반해, 셋째 단계에서는 자아는 끊임없는 불안정 상태 속에서 탈중심화되며 여럿으로 불어난다고 본다. 포스터에 의하면 이상의 각각의 단계마다 언어와 사회, 생각과 행동,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가 변화하며, 각 단계는 연속적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서로 경계를 접하면서 중층적으로 상호작용한다. 그리고 그 각 단계는 이후의 단계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현 시대를 다양한 요소들이 내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담론적 총체화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22-3). 이런 시대 구분 속에서 오늘날 삶의 열쇠로 기능하는 것은 '정보'다. 사회는 '정보부자'와 정보빈자'로 나뉘어지고, 정치와 지역사회, 경제체제의 제형태들이 통신매체에 의해 통합조정되는데, 포스터는 풍차와 증기기관이 봉건주의 양식과 자본주의 양식에 대응했듯이 오늘날의 전자통신은 정보양식에 대응하는 기술체제라고 보고 있다(25).
필자는 포스터의 이런 분석이 '사이버네틱한 기술공학문화시대'의 현재적 특성을 분석하는 데 매우 유효적절한 시각을 제공한다고 본다. 그러나 사실 포스터의 이같은 시대구분 그 자체는 새로운 것은 아니며, 정보양식을 생산양식에 대한 대체개념으로 보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오히려 정보양식의 개념은 마르크스적 의미에서의 생산양식 편성의 새로운 방식의 하나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정보기술'의 급속한 발달은 노동대상과 노동, 노동수단의 결합과정 속에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결합비율의 변화로 야기됨과 동시에 그 변화를 촉진하는 것은 사실이며, 이에 따라 노동과정과 생산-유통-소비-재생산의 제과정의 구성에 대대적인 변화가 야기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소거되거나 해체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늘날 정보기술의 발달은 오히려 자본주의의 범지구화를 촉진하며, 자본의 집중에 유리한 방향으로 노동과정의 재편성을 촉진시키고 있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이는 폭력, 자본, 지식을 축으로 사회적 권력이 이동한다고 보는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 이론이나, 포스트모더니티의 근거로서 '지식생산'의 지배적 역할을 주장하는 리오타르의 시대구분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면서도, 이러한 변화가 자본의 운동과 맺는 새로운 관계를 주목하지 못함으로써 범하게 되는 맹점을 재생산할 수도 있다고 본다. 이런 문맥에서 보자면 오히려 포스터가 '정보양식'으로의 전환이라고 부르는 오늘날의 변화는 차라리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 발전의 새로운 특질로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할 듯싶다. 말하자면 폭력적인 원시적 축적의 초기 단계와 육체노동(의 잉여가치 착취)에 기초한 산업자본주의의 단계를 거쳐 정신노동(의 잉여가치 착취)에 기반한 후기산업자본주의, 또는 '정보자본주의'로의 이동(만델과 제임슨이 말하는 '다국적 자본주의'를 촉진하는 것이 곧 커뮤니케이션의 범지구화이다)이 그것이다.7)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내에서 극소전자기술에 입각한 정보기술체제가 야기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강화와 범지구적 확산과정(세계자본주의)이며, 이것이 야기하는 새로운 문화정치적인 변화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산업자본주의'가 기계기술체제에 육체노동을 포섭하는 '신체정치'(근거리통제공학)를 구사함으로써 자본-권력의 생산-재생산체제를 구축해왔던 것에 반해 '정보자본주의'가 극소전자기술체제에 정신노동을 포섭하는 '탈신체정치'(원거리통제공학)를 구사하는 새로운 지배과정을 통해 자본-권력-지식의 새로운 생산-재생산체제를 구축해가는 과정이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새롭게 주목되는 '테크노문화'라는 현상에 대한 심도있는 분석이 필요한 것도 바로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기술공학-문화의 새로운 결합방식이 지닌 문화정치적 가능성과 전망 때문이다.  

2) 근거리공학의 '신체정치'에서 원거리공학의 '탈신체정치'로
오늘날 전자통신망과 데이터베이스는 일종의 초판옵티콘으로서 벽과 창문, 망루나 감시자가 없는 새로운 감시체제를 구성한다. 이를테면 극소전자기술은 권력의 미시물리학과 거시물리학을 통합적으로 완성한다. 개인들은 모든 거래행위에서 카드를 사용하며, 각종 거래는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되고, 부호화되고 저장된다. 개인들의 생산행위와 소비행위 자체가 데이터베이스의 내용을 채워나가며, 그에 따라 개인들이 정보의 원천이자 기록자가 된다. 포스터는 이와 같은 변화가 단순히 경제적인 효율성의 극대화를 도모하거나, 소비사회로의 변화, 부유하는 기표들의 기호학적 세계로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사회성원 상호간의 통제방식의 변화, 즉 정치적 변동을 야기한다고 본다(177). 말하자면 전자기술공학의 확산은 사회경제적인 변동을 야기할 뿐만이 아니라,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변동을 야기한다. 이런 문맥에서 보면, 푸코가 발견했던 근대사회의 판옵티콘적인 통제가 사실상 기술상의 한계로 말미암아 '근거리공학적인 신체정치'의 차원에 머물고 있었다면, 20세기 후반의 극소전자기술의 발달은 판옵티콘적 모델의 기술적 실현과 그것의 전사회적 확산을 실질적으로 가능케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원거리공학적인 탈신체정치'의 지평을 개방한다는 새로운 사태에 주목할 수 있다. 실상 마크 포스터가 주장한 '정보양식'의 개념 자체에는 문제가 있지만,그가 후기구조주의적 방법, 특히 푸코를 수용하면서도 이를 비판적으로 극복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던 핵심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태의 이같은 변화는 사실상 푸코를 위시한 이제까지의 근대적, 탈근대적 비판이론의 문제설정의 틀 전체에 상당한 변화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사실상 푸코의 '신체정치'라는 개념은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근대사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역사시대 전반에 걸친 사회적 지배메커니즘의 일반적 특징을 포괄하는 것일 수 있다. 다만 푸코의 개념화는 물리적 폭력 대 지배이데올로기라는 개념틀이 지닌 설명력의 한계를 넘어서서 일상생활 전반에 걸친 지배의 메커니즘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며, 특히 도시화, 대중화, 포드시스템의 등장이라는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근대적 군대, 감옥, 학교, 병원과 같은 대규모 인구동원체제의 상설화와 같은 새로운 근대적 인구통제의 메커니즘과 정치적 지배의 내적 연관관계를 새로운 각도에서 가시화한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푸코의 '신체정치' 개념이나 '무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라는 알튀세르의 문제설정은 그 이전까지 데카르트적인 시공간의 고정된 좌표축 위를 움직이는(육체-정신, 물질-의식으로 구성된) 인간의 개인적, 집합적 행동을 의식-행동이라는 문제틀로 설명하려던 고전적 이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원거리공학'과 '시공간압축기술'의 등장은 이같은 근대적 인구통제와 지배메커니즘에 대대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음을 예시하며, 각각 단위중심을 가진 일관성 있는 의식-행동의 연속체로서의 주체가 한정된 2차원의 시공간 좌표축을 운동한다고 보는 고전적 가정을 무너뜨린다. 이런 과정에서 압축되거나 팽창하는, 상대론적으로 연동된 시공간의 중층적인 지형 속에서 단위중심을 지닌 의식-행동의 연속체로서의 개인이라는 표상 대신에 시공간압축 또는 팽창의 메커니즘과 매체가 탈중심화된 의식-무의식-행동-비행동의 불연속적인 그물망이라는 표상이 등장한다. 필자가 보기에 사이보그의 등장이 지닌 문화적, 시대적인 함축이 바로 이와 같은 새로운 표상이다. 이와 같이 좌표축 자체의 위상학적(topological) 변환은 인간-기계, 인간-자연이라는 고전적인 평면적 대당관계를 아래와 같은 그레마스 사각형과 같은 복합적인 관계망으로 변형시킨다.

  (고전적)인간(1)------(고전적) 기계(2)..........육체/정신---물질/무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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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기계(자연)(4)------비인간(3).......................육체/무정신--물질/정신
                       (사이보그,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매체)   

고전적 이론에 의하면 인간(1)은 기계(2)와 대립하며, 자연(3)의 일부로서 자연(3)과 대립한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기계(2)의 팽창으로 기계에 대한 예속화 현상이 가속되어 자연적 속성을 점차 상실함으로써 소위 '소외현상'이 심화된다. 근대적, 현대적 비판이론들이 문제삼았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기계에의 예속화에 따른 자연과의 모순관계의 심화였으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꾸준히 모색되어 왔던 것은 (1)-(4)의 새로운 협조관계, 동화관계의 구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달리말하면 근대화를 둘러싼 대부분의 논쟁들은 따라서 (1)-(2)의 새로운 친화관계를 강조할 것인가 아니면, (1)-(4)의 관계의 복원인가라는 방향으로 크게 대별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3)의 등장과 확대, 가속화된 발전은 이와 같은 근대적인 대당관계를 새롭게 변형시키며, 인간 개념 자체의 새로운 개념화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다만 이론적으로나 가능했던 (3)의 현실화는 경우에 따라서는 (1)-(4) 대 (2)-(3)의 대립과 적대라는 극한적 상황을 야기시킬 수도 있다(에콜로지 대 테크노피아의 대결). 그러나 만일 협소한 의미의 고전적 '인간' 개념을 확장하여 (1)-(3)-(2)-(4) 사이를 운동하는 관계론적 장 전체를 새로운 인간개념으로 설정한다면, 사태는 크게 달라지게 된다. 말하자면 고전적인 인간개념의 축을 이루는 생체-의식이라는 구성요소를 특권화하는 대신, 생체-물체-의식-무의식의 전체적인 상호연관의 차원에서 인간개념을 재구성하자는 얘기가 된다. 이럴 경우 인간개념을 둘러싼 모든 내러티브의 구성방식과 그 전개방식이 변하게 된다. 고전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의식정치'에서 '신체정치'를 거쳐 '사이보그 정치'로의 개념적 이행은 바로 이에 따른 의미론적, 인식론적, 존재론적인 구성체의 변화를 함축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확장된 개념으로서의 '사이보그 정치'는 아직까지는 단지 존재론적인 구성축의 변화과정을 포괄적으로 함축하고, 이를 통해 인간개념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을 시사하는 것일 뿐이다. 아직까지는 문자 그대로 사이보그의 등장이라기보다는 확장된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기술이 인간, 자연, 기계의 상호관계에 미치는 현실적인 변화를 조사하고, 그것이 점차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사이보그 기술과 그에 따른 문화정치적 함축을 예측해보는 것이 가능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이행과정에서 인간-기계간의 전통적인 이항대립이 자연-비기계의 새로운 이항대립으로 대체될 수 있는 오류가 문제가 될 것 같다. 우선 기계화를 통한 자연파괴에 맞서는 생태학적 운동은 극소전자기술혁명을 통한 새로운 기계화, 곧 사이보그적인 커뮤니케이션 그물망과 대립관계에 놓일 수 있다. 또한 인식론적인 차원에서는 자연을 상징하는 아날로그적 체제와 사이버네틱스를 추동하는 디지탈 체제와의 대립이 예상되며, 이는 철학적으로는 새로운 현상학과 새로운 기호학의 대립으로 표현되는 것 같다. 또한 사회문화적으로는 에코토피아와 테크노피아의 세계관적 대립도 예상된다. 물론 이와 같은 대립들은 아직 잠재적이며, 부분적이며, 무의식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나 환경파괴와 사이버네틱스의 진전이 가속화될수록, 그 잠재적 대립이 현재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 같다.
물론 이와 같은 대립들만을 보는 것은 문제를 국지화시켜 보기 때문인데, 실제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4가지 항 사이의 관계망은 단순히 반대적인 대립만이 아니라 모순, 협력이라는 다른 관계망을 포함하며, 나아가 각항간의 영향관계를 통한 각 항 자체의 특성의 변화와 힘의 이동이라는 동학(動學)(dynamics)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후자의 맥락에 주목하게 되면, 오히려 사이버네틱스의 등장은 인간-기계, 인간-자연, 자연-기계간의 해결불가능한 평면적 적대와 대립을 입체적인 동학으로 전위시키고, 이 과정에서 다차원적이고 중층적인 매개와 변환관계를 성립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속화한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사이버네틱스와 원거리공학적 커뮤니케이션은 국지적으로 고정된 대립과 적대를 탈국지적인 매개로 전환시킬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이 중층적이고 역동적인 가능성을 다시금 고전적인 국지적 대립으로 고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항존한다. 이런 가능성들의 그물망 속에서 푸코가 얘기한 생권력의 새로운 재생산과 편성의 문제가 나타난다. 앞서 말한 그레마스 사각형식의 새로운 그물망의 편성 속에서 각항의 힘과 위치는 불균등하며, 육체에 각인된 다양한 억압과 폭력의 흔적들이 가진 역사적 기억, 실제적인 물리적 억압과 제도, 기구, 장치, 관습들의 잔존, 정신분석학적 왜곡을 통한 무의식의 침전과 억압된 것의 '회귀'라는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사이보그적 주체의 탄생은 이 때문에 역사적 갈등들의 짐을 끌어안고 있는 자연적-주체의 인력과 척력이라는 낡은 벡터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기능이 형성되더라도 그것을 낡은 이분법적 패러다임 속에 가두는 일이 언제든 가능하다는 얘기가 된다. '테크노문화'라는 새로운 상황은 그와 같이 전진과 퇴행의 가능성을 동시에 안고 있다.

3. '테크노문화'의 새로운 인식론과 존재론  

1) 멀티커뮤니케이션과 하이퍼텍스트
이와 같은 문제들을 파고들기 위해서는 갈등의 양상 자체를 실체적인 것으로 단정하고 난망해할 것이 아니라 보다 입체적인 분석틀을 통해 갈등의 중첩과 융합의 과정 자체를 분석하기 위한 새로운 작업에 착수할 필요가 있다. 데리다가 발전시킨 해체적 텍스트 이론들은 그 자체로는 생산자에 의해 닫혀지고 완결된 텍스트의 개념을 거부하고 텍스트와 콘텍스트, 생산자와 수용자의 상호작용을 통해 미완의 열려진 유동하는 텍스트라는 개념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이 과정은 모두 일방향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전통적인 좌표축내에서 상정된 분석틀이라고 할 수 있다. 푸코 역시 모든 형태의 언어사용과 지식생산의 방식이 일련의 사용규칙과 체계, 제도들을 따라 일정하게 배열되고 편성되는 방식을 '담론'이라고 지칭하고 각 시대와 영역에 걸쳐 나타나는 담론들의 특성과 그 상호작용과 충첩의 형식들을 연구하기 위해 고고학적 방법을 활용했지만, 이 역시 지식생산자와 언어사용자의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일방형적인 사용의 규칙을 전제한 담론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두 이론가 모두가 문자화된 텍스트나 행위를 주요 분석대상으로 삼았을 뿐아니라, 분석의 수단과 도구로 사용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컴퓨터공학으로 무장된 멀티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의 확장적 발전을 통해 쌍방형, 다중적 커뮤니케이션의 실현과 문자 텍스트를 넘어선 복합적 텍스트의 상호적, 다중적 구성의 실현이라는 과정에 이르고 있는 오늘날, 푸코나 데리다가 사용했던 담론분석이나 해체적 텍스트의 틀은 분석을 위해 제한적인 지평만을 보여줄 따름인 것 같다.
우선 담론분석은 다음과 같은 전자언어, 전자적 커뮤니케이션의 특성을 고려하는 일이 필요할 것 같다. 마크 포스터 같은 이는 디지탈부호화는 정보를 이진법의 논리에 맞추어 조정하기 때문에, 과거와 같이 지시대상을 재현하거나 모방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이 점이 바로 아날로그부호화와 구별되는 점인데, 아날로그부호화는 물질형태의 직접적인 모방이다(지도, 오디오테이프 녹음, 사진, 영화 등). 아날로그부호화는 문화적 맥락 안에 새겨진 내포적 의미들에 기반한 문자언어가 대상물을 부호화하는 능력이 무한한 것처럼 대상물의 미세한 변이를 연속적으로 모방한다. 그러나 디지탈부호화는 그런 능력이 없는데 반해, 그것이 의미를 제한하고 모호성이나 잡음을 제거한다는 장점을 지닌다. 글이 어떤 식으로든 경험을 단순한 것으로 바꾸어 자신의 내적 구조에 따라 표현하는 반면, 디지탈부호화는 창살같은 격자를 씌움으로써 대상을 샘플링한다(179). 따라서 포스터는 새로운 디지탈 기술은 과거기술의 오류와 결함을 단순히 제거하고 의미의 손실이나 텍스트의 훼손없이 지식 및 데이터의 복제의 투명성을 제공한다고 보는 것은 오류라고 본다. "구텐베르크의 발명은 필사본과 비교할 때 이득만큼이나 손실도 가져왔다. 인쇄술의 도입과 함께 실수와 고의적인 (원문)변조는 제거되기는커녕 오히려 증가했다...게다가 텍스트의 복제가 인쇄로부터 전자식 장치로 바뀜에 따라 불완전한 복제의 가능성은 더욱 확대된다는 것이다"(180).
물론 디지탈/아날로그의 개념을 이와 같이 적용할 수도 있지만, 굿맨에 의하면 디지탈과 아날로그의 개념적 사용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된다. 굿맨은 디지탈 시스템의 원리와 디지트, 아날로그 시스템의 원리와 아날로그는 특별한 관계가 없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디지탈 시스템은 통사론적으로 의미론적으로 불연속적이라면,아날로그 시스템은 통사론적으로 의미론적으로 연속적이다. 그에 따라서 그림은 아날로그적(시스템)이라면 텍스트는 디지탈적(시스템)이다. 가령 다이아그램은 부분적으로는 아날로그적이고 부분적으로는 디지탈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분도 상대적이며, 결과적으로는 관습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하나의 문장은 반전되어 도시의 스카이라인으로 "읽혀질" 수 있는 데 반해, 하나의 그림은 알파벳문자로 수수께끼화될 수 있다.8) 굿맨의 이런 구분에 따르면, 디지탈부호화라는 메커니즘을 거친 결과물(이미지 또는 텍스트)은 필요와 관습에 따라 아날로그적으로 이해될 수도 디지탈적으로 독해될 수 있다(컴퓨터그래픽 이미지는 롱샷으로 조망하면 아날로그적으로 보여지나 클로즈업시키면 디지탈적으로 보여질 수 있다). 굿맨의 구분을 매개로 하게 되면, 포스터가 강조한 디지탈부호화는 단지 컴퓨터 커뮤니케이션의 등장으로 처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드웨어적인 제작메커니즘과 통사론적이고 의미론적인 사용과 독해의 차원을 혼동하지 않는다면, 과거의 아날로그적 부호화 속에서도 디지탈적 시스템의 작동을 발견해낼 수 있다(굿맨에 의하면 텍스트는 아날로그적일 수도 디지탈적일 수도 있다). 단지 전자적 부호화의 등장이 가속화시키는 것은 모든 종류의 이미지와 텍스트, 기호들의 디지탈적 생산과 조작 메커니즘의 편리성이며, 이와 같은 하드웨어적인 조작의 차원을 독해의 지평으로 오해할 경우에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주목해야 할 문제는 아날로그/디지트의 대당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자적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나타나는 의미론적 연속성/불연속성 원리의 교착관계에 따른 인식론적 혼란, 텍스트의 형태변화, 서사담론의 구조변화와 같은 문제들인 것 같다. 컴퓨터 글쓰기는 중심화된 주체로서의 저자를 교란시키는 한편(저자의 죽음), 집단적 저작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도입한다. 컴퓨터는 집단적 저자들에게 비동시적인 동시성을 제공한다(1986년 리오타르가 조직한 '비물질성' 전시회에서 26명의 작가가 진행한 컴퓨터를 이용한 집단적 글쓰기). 이럴 경우 언어는 합의를 지향하기보다는 정의들의 증가와 그들의 손쉬운 수정 등과 같은 방식에 의해 리오타르가 '분쟁'이라고 부른 쪽으로 방향을 바꾸기 쉽다(215-6). 이럴 경우 텍스트의 의미는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 쓰여진 것과는 달리 일정방향으로 고정되거나 선택되지 않고, 종자가 씨뿌려지듯이 흩어지며 산포된다(데리다). 전자통신망으로 뒤덮인 오늘날의 비선형적인 시공간의 그물망 속에서 의미망은 분산되고, 의미의 사용자인 주체와 정체성도 분산된다. 포스터는 이런 맥락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컴퓨터의 글은 포스트모던 주체의 제조공간, 비동일적 주체를 구성하는 기계, 서구문화의 심장부에 타자의 각인 등을 구축한다. 이를 가리켜 혹자는 괴물이라고도 부를 수 있지만 말이다"(243).
문학이론과 문화이론 분야에서는 이미 '저자의 죽음'과 같은 해체주의적 주장에 의해 전통적 글쓰기에서와 같은 닫힌 텍스트, 천재적 작가의 개념은 붕괴된 지 오래이다. 하지만 생산자만이 아니라 수용자의 능동적 독해를 강조하는 수용미학이나 후기구조주의적 해석학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독자가 재창조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은 작가가 창작과정에서 일련의 물질적으로 완결된(의미론적으로 닫혀졌다는 뜻이 아니라) 텍스트를 구성해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쌍방형(이보다는 다중적이라는 용어가 더욱 적절할 것이다), 다중적 글쓰기의 입장에서 보자면 작가의 개념이 모호해질 뿐아니라, 텍스트는 독자의 구성적 참여에 의해 물질적으로도 열려질 수밖에 없다. 이런 문맥에서 보면 후기구조주의적이고 해체주의적인 텍스트가 비록 개념적으로는 열린 텍스트이면서도 물질적으로는 닫힌 형식을 취한 데에 반해,새로운 다중적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구성되는 텍스트는 개념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열린 형식을 취한다. 바로 이와 같이 개념적/물질적으로 열린 텍스트의 구성원리를 하이퍼텍스트(Hypertext)라는 개념으로 총칭할 수 있을 것 같다. 전통적 텍스트에서는 작가가 일정방식으로 선정한 질서에 따라 구성된 통합축(syntagmatics)과 일련의 계열축(paradigmatics)의 교직을 독자는 따라가야 된다.물론 독자는 나름대로의 독해방식에 따라 통합축과 계열축의 교직의 콘텍스트, 약호화와 탈약호화의 방식을 바꿀 수 있지만, 그것은 일련의 주어진 생산자의 텍스트적 질서라는 한계를 기초로 가능해진다. 그러나 새로운 텍스트에서는 가령 작가가 a방향으로 수평적인 통합축을 구성한다 해도, 텍스트의 구성에 동시에 참여하는 독자는 이 갈래를 a'의 방향으로 수정가능하며, 작가는 이를 다시 b의 방향으로 수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과정은 무한히 반복되어 통합축의 도달방향은 예측불가능하게 되어버릴 수 있다. 이와 같은 양상은 계열축의 선택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이 경우 작가의 역할은 다양한 갈래의 선택의 상한선과 하한선을 설정하는 역할로 변하거나, 또는 통합축과 계열축의 양자 중의 하나 또는 양자 모두를 완전히 개방하여, 작가와 독자가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완전히 열려진 서사구성의 한 동반자에 불과해질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개방성은 서사구성의 내용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표현층위에서도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 문자언어만을 사용하는 텍스트보다도 이미지와 문자언어, 사운드를 동시에 사용하는 영상텍스트(이때 텍스트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직물'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의 경우 이와 같은 순열조합의 가능성은 더욱더 중층화되고 확률적 분포의 범위도 더욱 넓어지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일방통행형 커뮤니케이션 체제 속에서 형성된 텍스트 구성의 원리와 쌍방향(다방향) 커뮤니케이션 체제 속에서 형성된 텍스트 구성의 원리가 구별된다. 전자의 경우가 물질적으로 닫혀진 단일매체체제에 걸맞는 서사(narrative)의 구성원리라면, 후자는 물질적으로 개방되어 있고 복합매체적인 인터액티브, 멀티커뮤니케이션 체제에 걸맞는 새로운 서사(hypernarrative)의 구성원리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하이퍼텍스트적이고 하이퍼내러티브적인 멀티커뮤니케이션의 체제는 '노동'의 의미와 노동과정의 구성원리 역시 크게 변화시킨다. 이와 같은 방향으로 정보화과정이 확대되면, 노동은 더 이상 물질적 행위라기보다는 모니터 위에 나타난 기호들을 인식하고 편집하고 구성하는 인식행위, 정보가공과 생산, 유통, 소비행위가 된다(이에 동반하여 육체적인 노동은 기호해석장치인 사이보그적 로봇으로 대체된다). 이럴 경우 전통적인 의미에서 행위중심적인 숙련노동에 대한 의존도는 줄어들며, 지식은 경험론적 지반을 이탈하게 되며, 확실성, 수행능력, 통제능력 등은 지적 숙련도와 기호, 그리고 리얼리티를 결합시키는 창조적 기획능력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컴퓨터 글쓰기는 펜이나 타자기, 인쇄기와는 달리 생각과 문장의 수정과 삭제를 가능케 하며, 개념적인 조작을 풍부하게 만든다. 이런 과정이 기술적으로 더욱 발전하면 사고와 문자표현의 연결경로가 거의 동시적이라는 의미에서 문어적 과정은 거의 구어적인 과정에 근접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기록자와 글, 주체와 객체는 서로 근접하며, 글쓰기와 말하기가 거의 같은 것이 되어버리며, 객체인 화면-주체인 글쓰기-말하기-사고하기의 제과정의 융합, 또는 혼합, 대체 현상이 나타난다. 시공간압축기술로 인해 변형된 좌표, 즉 포스트데카르트적인 세계 속에서는 한편으로는 단순한 기계장치가 다른 편에서는 사람들이 자리하고 그 사이에 컴퓨터가 그리고 안드로이드, 로봇, 사이보그(이 셋은 모두 인조인간을 지칭한다) 등이 연속적으로 배열된다.

2) 욕망의 지형 변화와 탈주의 문제설정  
그런데 들뢰즈에 의하면, 글(텍스트)은 이미 자본주의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자본주의는 글을 많이 이용해왔고, 또 지금도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글은 자본주의 속에서 구식양식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오히려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탈규준화에 상응하는 새로운 언어는 전자언어이다. 정보과학은 음성도 글도 없이 일을 해나간다. 컴퓨터는 순간적이고 보편적인 탈규준화 기계로서 흐름의 언어학을 생산한다. 들뢰즈는 이와 같은 변화를 시니피앙의 언어학을 정초한 소쉬르와 흐름의 언어학을 정초한 옐름슬레브의 언어학의 차이를 통해 설명한다. 옐름슬레브의 언어학은 특권적 좌표를 모두 버리고 시니피앙-시니피에의 종속관계를 표현-내용의 상호적 전제관계로 대체하며, 분열들, 기호-점들, 흐름의 절단들이 시니피앙의 벽을 뚫고 형상들에 이르는 언어들의 탈규준화된 이론화에 이른다.9) 들뢰즈는 리오타르가 이와 같은 새로운 언어학을 '형상형태'의 개념으로 훌륭하게 포착하여 기술하고 있는 점을 칭찬한다. 리오타르는 형상들이 시니피앙과 그 효과에 의존하는 대신, 시니피앙의 연쇄가 형상형태의 효과들에 의존하고 있다고 보며, 그 자체가 비시니피앙적인 기호들로 구성되어 있는 시니피앙의 연쇄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모두 파괴하고, 낱말들을 물건들처럼 다루며, 새로운 통일체를 만들어내며, 형상적인 것이 아닌 형상들이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심상 속의 모습이 되게 한다(361-2). 이와 같이 흐르고 분산되고 다시 모이는 형상들의 탈주적인 흐름은 인터액티브하고 멀티커뮤니케이션적인 하이퍼텍스트의 노마드적인 흐름과 정확히 일치한다. 들뢰즈는 이와 같은 흐름들을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정신분열증의 흐름과 비교하며, 이 흐름들이 한편으로는 정신분열자들을 만들어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과 과학에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와 같은 탈규준화된 흐름의 이중성은 앞서 말한 '테크노문화'의 카오스적인 흐름들과 상응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자본주의가 이와 같은 정신분열증적인 흐름들의 절대적 극한에는 결코 도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를 자본주의에 내재적인 상대적 극한들로 대체하고 이 극한들을 확대된 규모로 재생산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자본주의는 한 손으로 탈규준화시키는 것을 다른 손으로 공리계화한다(365). 들뢰즈는 이와 같은 특성화가 사회적으로는 자본주의가 과거의 다른 모든 사회체들과는 달리 불변자본으로서 기술기계들을 부품으로 가지고 있지, 인간을 부품으로 갖지 않는다는 사실로 나타난다고 본다. 그 결과 불변자본은 사회체의 충만한 신체에 달라붙어 있고, 인간은 기술기계들에 달라붙어 있다(372-3).
그러나 들뢰즈는 인간이 기술기계의 노예가 되었다고 보는 것은 아닌데, 오히려 인간은 사회기계의 노예이며, 기술기계는 보다 거대한 사회기계의 한 장치로서, 자본주의에서는 오직 하나의 기계와 오직 하나의 계급만이 존재한다고 본다. 오직 하나의 기계란 재화로부터 절단되어 탈규준화한 돌연변이하는 큰 흐름의 기계요, 오직 하나의 계급이란 종들의 계급, 즉 탈규준화하는 부르주아 계급이다. 이 흐름 속에서 임금과 이윤은 일체를 이루며, 이론적 대립이란 두 계급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과 계급 바깥 사이에 있다고 본다. 즉, 기계의 종노릇을 하는 사람들과 기계나 톱니바퀴 장치를 폭파하는 사람들 사이에, 사회기계의 체제와 욕망하는 기계들의 체제 사이에, 상대적인 내적 극한과 절대적인 외적 극한 사이에, 자본가들과 정신분열자들 사이에 진정한 대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양자는 탈규준화된 흐름의 차원에서는 친밀한 관계에 있지만, 공리계의 차원에서는 근본적으로 적대관계에 있다"(378). 여기서 들뢰즈가 욕망의 문제를 끌어들이는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그는 계급의 선의식적 이익들과 집단의 무의식적 욕망을 구분하는데, 이익이란 잘못 생각될 수도 있고, 인지되지 않거나 놓치는 수도 있지만, 욕망이란 절대로 속는 법이 없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가 보기에 대중은 속은 것이 아니라 파시즘을 욕망했다는 라이히의 주장은 정당하다. 사람들은 자기 이익에 반대되는 것을 욕망하는 수가 있으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당과 지도층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한다(381). 들뢰즈는 현대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욕망의 흐름이 한편으로는 전제군주적인 시니피앙-기호의 극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탈규준화된 흐름의 통일체로서의 정신분열자의 형상-기호, 즉 반동적이고 편집병적인 위로부터의 짐(큰 덩어리를 이루는 몰적이고 통계적인 집합)과, 혁명적이고 정신분열증적인 아래로부터의 짐(분자적이고 미시적이며 탈가족화하고, 탈외디푸스화하고, 탈거세하고, 탈남근화하고, 탈규준화하고, 탈영토화하는 분자적 도주선을 따른 흐름)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고 본다(384-5).
바로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자본주의의 산물인 '테크노문화'는 한편으로는 몰적(molar)이고 통계적인 규준화를 다른 한편으로는 분자적(molecular)인 도주선을 따르는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을 이중적으로 생산한다. 컴퓨터과학으로 무장한 극소전자기술공학의 기술기계들에 의해 실현되고 있는 이와 같은 이중적인 욕망의 흐름으로 인해, 전자기술복제 시대의 욕망의 지형도는 그 이전 시대의 욕망의 지형도와 크게 구별된다. 들뢰즈는 이와 같은 욕망하는 생산의 지형 속에서 인간-기계의 연쇄고리의 의미를 새롭게 파악하기 위해 그가 사용하는 '사회기계'라든가 '욕망하는 기계'라는 용어가 '은유'가 아님을 강조한다. 그는 "임의의 요소들이 기계가 되도록 결정하는 것은 회귀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가설"(560)을 중시한다.그는 도구와 기계를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구별한다. "도구는 접촉의 동인이요, 기계는 커뮤니케이션의 인자이다. 도구는 투사적이며 기계는 회귀적이다"(562). 그는 삐에르 오제를 따라 "실제로 구별되는 두 부분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있게 되자마자 거기에 기계가 있다...그래서 우리는 도구에 선행하는 기계가 언제나 있다고, 즉 일정한 시점에 어느 도구, 어느 인간이 문제되고 있는 사회체제 속의 기계부품으로서 들어가는가를 결정짓는 문들이 언제나 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한다(562-3). 이런 방식으로 보면, 인간-기계-사이보그-자연이든, 인간-컴퓨터-기계-사이보그이든 이것들이 하나의 전지구적 커뮤니케이션 과정 속으로 통합되는 한 이것들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거대한 사회기계의 부품으로서 회귀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은 문맥에서 보면 다너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를 위한 선언문](1985)은 단순한 선언적 의미 이상을 지니는 것 같다. 그녀에 따르면, "20세기 후반, 이 신화적 시대에 이르러 우리 모두는 키메라이다. 이때의 키메라는 기계와 유기체가 이론화되고 가공되어진 혼합물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사이보그다. 사이보그는 우리의 존재론이며, 우리의 정치학이다. 사이보그는 상상력과 물질적 실재 양자가 농축된 이미지이며,이 양자는 역사적 변혁의 가능성을 구조화하고 결합시키는 두 중심축이다."10) 스스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불경죄를 자행한다고 주장하는 해러웨이의 이와 같이 아이러니칼한 혼합의 전략은 기본적으로는 정신/육체, 동물/기계, 관념론/유물론의 이분법을 심화시킴으로써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낡은 유기체적 정치학에 머무는 기존의 모든 좌파 전략에 반대하고자 하며, 그 대신 다형태의 정보체계로 이해하는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정치학의 구성을 전망하기 위한 것이며, 이와 같은 새로운 문화정치에 걸맞는 정체성이 곧 잡종, 키메라, 모자이크인 사이보그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기술문화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자연주의를 테크노리얼리즘(techno-realism)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11)

3) 신과학운동 대 테크노리얼리즘의 '절합'
그러나 이와 같은 테크노리얼리즘은 한편으로는 테크노피아의 이데올로기와 경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 '테크노문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신과학운동'과 일정하게 충돌한다. 해러웨이는 '신과학운동'의 신비주의, 초월주의에 반대하며, 유일신교에 반대하여, 유물론과 다신교를 주장한다. 그녀에 의하면 모든 초월주의적 사고는 치명적이다.12) 그녀는 테크노포비아가 오히려 문제이며, '테크노문화' 속에서 성숙해지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그녀는 더  보호받고자 하는 파라노이드의 성급함을 문제삼으며, 그대신 쾌락과 위험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모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입장은 표면적으로 보면 '테크노문화'가 야기하는 환경파괴, 생태파괴에 맞서려는 생태학적인 '신과학운동'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물론 모든 신과학운동이 소박한 자연주의, 또는 신비주의적인 정신주의, 도덕주의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신과학운동'은 일종의 '문화운동'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프리쵸 카프라나 그레고리 베이트슨과 같은 이 운동의 선구자들은 한편으로는 20세기의 과학혁명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6-70년대에 발생한 서구의 다양한 사회운동들의 영향 속에서 '신과학운동'의 자양분을 이끌어내 왔다. 카프라 같은 이들에 의하면 오늘날 우리가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환경적 현상이 상호의존하는 전체적으로 연결된 세계에 살고 있으며, 각 부문에서 심각한 위기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음에 반해, 여전히 낡은 데카르트-뉴턴적인 모형이나 낡은 사회이론의 틀에 사로잡혀 있음으로 해서 이와 같은 위기를 전일적으로 진단하고 이를 극복할 새로운 모형을 발견하는 데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들은 이 새로운 모형을 '태양시대를 준비하는 생태학적 세계관'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와 같은 모형이 아직도 개별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그들의 의도가 어떻게 상호연관되어 있는지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다양한 사회운동들에 일관된 공통의 목적과 개념구조를 설정하는 데 도움을 주고, 이를 통해 사회변혁을 위한 강력한 힘이 형성되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13)
실제로 80년대에 들어 '신과학' 운동의 이같은 의도는 널리 호응을 받게 되었고, 이제는 과학연구의 지배적인 흐름의 하나로까지 위상이 상향되고 있다고 한다. 다양한 갈래로부터 시작되어 이제 큰 물결을 이루고 있는 이 운동도 크게 보면 3가지 부류로 나뉘어지는데, (1) 동양사상과의 접목을 통한 현대과학의 재해석, (2) 환원주의를 대치하려는 새로운 사상이나 철학의 제안, (3) 시스템이론, 비평형 개방체계의 열역학, 가이아 등 전일적 과학관의 출현 등이 그것이다.14) 그런데 혹자는 이같은 신과학운동 역시 대체로 기존의 서구과학의 물리주의, 환원주의적 입장에서 궁극적으로 벗어나지 못했으며, 오히려 보다 정교한 체계로 이를 강화한다는 역설에 빠지고 있다고 주장한기도 한다. 이런 입장에 의하면 새로운 이론들의 발전은 종래에는 생명체에만 있었던 고유한 현상이라고 생각되었던 것들, 목적지향성, 항상성, 등종국성, 자가규율성, 성장발달, 자극과 반응 등 많은 것이 실은 물질로 구성된 시스템의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물체라는 것도 결국은 물질 이외에는 아무 것도 다른 것이 없다는 환원주의적 생명관만을 더욱 복잡하고 오묘하게 강화시켜주고 있다는 것이다([물리학에서 기리학으로], 14-5쪽). 따라서 이런 이들은 서구의 신과학운동이 많은 새로운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나, 서구의 신과학이 물리주의와 환원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동양사상과의 올바른 만남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본다.
물론 '신과학운동'의 전모를 소개하거나 논평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신과학운동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의 한계에 대해 성급한 논평을 내린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만일 기철학이나 동양사상의 입장에서 물리주의, 환원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이론적 성과를 도출해낸다 해도, 여전히 물질의 세계, 현대의 과학기술 세계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고, 그럴 경우 다시금 서구과학기술의 성과를 수용하고 포괄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신과학운동이 종래의 서구과학의 한계와 그 기술공학적 성과가 만들어내고 있는 문제점과 위험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광범위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고, 또한 이를 위해 서구문화가 무시하고 배제해온 동양문화와 사상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역시 어떤 점에서는 새로운 '오리엔탈리즘'의 부흥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를 의심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의 발달이 절정에 달했고, 오히려 그것이 더욱 심화된 '사이버테크노문화'의 전개가 가속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물질세계에 대한 보다 심화된 이해 없이 현 문명의 위기를 통과할 수 없다는 것도 자명해 보인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그것이 서구에서 시작된 것인가 아니면 우리쪽에서 시작된 것인가에 따라 우열을 가리고자 하는 일종의 사상적 '신원주의'를 통해 정체성의 우위를 따지기보다는, 현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방책을 부분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실제적인 이론적 탐구들간의 긴밀하고도 섬세한 '절합'의 작업들이다.
이와 같은 '절합'의 입장에서 보자면, 해러웨이나 들뢰즈의 입장이 생태론적 세계관과 반드시 충돌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의 전략은 생태학적 사고가 소박하게 '소프트테크놀러지'를 강조하며, 신비주의적 낭만주의로 퇴행할 위험을 경고하면서, 생태와 자연의 문제를 사회나 기계의 문제와 새롭게 '절합'시켜 주는 것 같다. 해러웨이는 이와 같은 '절합'의 관점에서 오히려 세계와 인간의 유머감각을 분리하는 대신 통합한다. 그녀는 브루노 라투어의 '행위자-그물망 이론'을 따르면서, 언어를 가진 행위자만이 주체라는 사고를 벗어나 모든 것이 행위자라는 생각을 지지하며, 인간적인 언어에 대한 특권부여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에 의하면 서양의 사고를 지배해온 능동/수동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일이 문제이며, 자연은 '그/그녀도 그것도 아니다. 물활론이나 범신론을 동시에 피해야 하며, 식민주의자, 제국주의자, 오리엔탈리스트가 되지 않고서도 브리콜라쥬를 행위할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할 것을 제안한다. 이와 같은 방법의 하나가 주체들은 사이보그이며, 자연은 코요테이고, 지리학은 그밖의 것이라고 보는 방식으로의 사고의 적극적 전환이다. 이럴 경우 포스트모더니스트적인 시니시즘을 피하는 일이 문제인데, 그녀는 우연성을 주장하면서도 시니시즘을 피하는 태도를 설정하기 위해, 역사를 선택할 수는 없으나 역사를 변화시켜 간다고 보았던 마르크스를 상기시킨다. 이런 입장에 의하면 자연은 기술로부터 면제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공포에 질린 자연주의를 기술-리얼리즘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으며, 위험한 곳 내부에서 일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스피박이 말하듯이 안과 밖 사이를 움직이는 셔틀의 이미지를 수용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제치기 위해 안과 밖의 고정된 경계를 탈구화시킬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15)

5. 결연의 문화정치와 '차이의 미학'   

1) '노마디즘'과 결연의 문화정치
해러웨이의 말대로 우리는 후기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형식으로 거대하게 군사화된 기술과학에 기초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계곡 속에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이보그의 세계는 철저한 통제의 쇠창살이 될 수도 있고, 방어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수행되는 별들의 전쟁의 최종적인 묵시록이 될 수도 있으며, 남성본위의 난장판 전쟁에서 여성의 육체가 전유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사이보그의 세계는 인간이 동물과 기계와 친척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사회적, 육체적 실재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정치적 투쟁은 이 양자의 관점을 동시에 보는 것이다...현재의 정치적 상황에서 저항과 재결속의 신화 이상으로 더 절실한 희망은 없다"([사이보그를 위한 선언문]). 이와 같은 저항과 재결속의 신화란 어떤 형태를 띠는 것일까?
들뢰즈는 세르쥬 끌레르를 따라 그와 같은 새로운 결속의 형태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요컨대 문제는 그 요소들이 바로 모든 유대의 부재 때문에 서로 결합하고 있는 체계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유대란 것으로서 내가 이해하는 것은 자연적, 논리적, 혹은 의미적 유대이다"(573). 그렇다면, 모든 유대의 부재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들뢰즈는 '연상'(또는 '자유연상')을 재도입하는 초현실주의식의 방식을 거부하면서, 그 대신 회귀의 수법으로서 일종의 '뒤틀리게 하는 일'의 원리를 사용하는 팅겔리의 사례를 이용한다. 또는 '미친 벡터'라 부르는 벡터를 따라, 실제로 구별되는 요소들간에, 자율적인 구조들간에 유대가 없이 연결을 확실하게 가지는 그런 관계들로서의 '우연한 관계', 단순한 기억회로 혹은 사회회로를 미친 벡터를 따라 욕망하는 기계로서 작동하는 하나의 집합으로 대체하는 그런 우연한 관계의 실현을 예로 든다(575-6). 들뢰즈는 이러한 상태를 반욕망적이고 반생산적이고 큰 덩어리를 만들어내는 거시물리학의 결정기관에 맞서는 참으로 기쁨에 넘쳐있는 기계, 자유롭고 생산적이며 정신분열증적인 분자적 욕망의 상태라고 본다(580). 이와 같은 상태는 분명히 자연적, 논리적, 의미론적 유대를 추구해온 혈연, 지연, 학연, 또는 계급적, 성적, 인종적 유대(연대)와도 다른 차원을 지칭한다. 어쩌면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결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새로운 결속을 가능케하는 작동의 원리는 '미친 벡터'를 따르는 '우연한 관계'이다.
통상적으로 보면 '미친 짓'에 불과한 이와 같은 실천들의 무더기를 들뢰즈/가타리는 '공식 역사'가 아닌 다른 역사 속에서 찾아낸다. {천의 고원}에서 들뢰즈/가타리는 공식역사는 통일적인 국가장치에 의해 항상 기술되어 왔으며, 이 때문에 역사의 반대항인 '유목학'(Nomadology)이 배제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유목학'은 과학도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쌍블라쥬'로서, 욕망의 기계적 아쌍블라쥬이자, 발화행위의 집합적 아쌍블라쥬이다.16) 이들에 의하면 이와 같은 장치의 방법이 곧 '근경'(rhizome)이다.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언제나 중간,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터메조'(intermezzo)이다. 나무가 '기원으로부터의 파생'(filiation)이라면 '근경'은 '사생아적 출생'(affiliation)이다. '근경'은 '그리고'의 논리(logic of conjunction)를 세우며, 존재론을 전복하며, 기초를 제거한다. 중간에 있다는 것은 평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사물들이 벌이는 진자운동의 중앙에서 속도를 취하는 지점이다17)
그러나 이와 같은 개념들은 하나의 수사학적 은유가 아닌가? 분명히 '근경'의 개념은 '근경' 자체는 아니다. 그것이 복잡한 형상, 형태를 취한다는 것, 그것이 열려진 그물망이라는 것, 그 속을 관통하는 욕망하는 생산은 빠른 속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들을 '심상화'할 수는 있다. 이를 들뢰즈/가타리식으로 말하자면 욕망의 철학은 '근경'과 '노마드'의 개념을 작동하면서, 무한속도로 카오스를 통과한다.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도 언제나 무한속도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특히나 문화적 관습과 제도들이 중첩된 역사적 중력의 장(場) 속에서 우리의 사유와 행위의 속도는 평균적으로 감속된다. 이와 같은 일상의 제도 속에서는 들뢰즈/가타리가 구분하는 카오스에 한계와 질서를 부여하는 과학의 감속운동이 필요하다.18) 이와 같은 문맥에서 보자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근경'의 운동을 감속시키고, 그것에 형태를 부여할 필요가 있으며, 우리가 '결연'이라고 부른 것의 내적 형태학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그와 같은 '결연의 형태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르네 톰의 말대로 "힘이 형태보다 원칙적으로 더 근본적인 존재론적 지위를 가진다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19)면, 또한 "힘에 형태보다 더 근본적인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할 경우, 이는 의심할 바 없이 소박한 인간중심주의에 기인하는 것"(177)이라면, 여기서 들뢰즈/가타리의 노마디즘과 욕망하는 생산의 이론을 단지 '힘의 이론'으로 한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그들이 이를 일종의 존재론적인 실체, 형이상학적 본질로 전제했던 것은 아닌지를 질문할 필요도 있다. 이 지점에서 지식대상/실재대상의 차이에 기반한 '유명론적 유물론'(알튀세르)이라는 테제를 다시 한번 환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마치 지도가 땅이 아니듯이 개념들은 작동가능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실재적인 힘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야 하며, 개념들은 일종의 오캄의 면도날과도 같이 경계를 구분하며, 형태를 생산하지만, 실재대상의 경계와 형태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이런 문제는 운동의 연속성과 형태의 불연속성간의 차이로 설명할 수도 있다(앞에서 말한 아날로그와 디지탈의 차이를 상기할 것). 르네 톰에 따르면 규칙적인 공간의 구조적 안정성과 이 내부에서의 급작스러운 변화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불연속성의 특이점, 즉 카타스트로프의 점의 문제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때 카타스트로프의 점은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로 넘어가는 형태발생을 구성한다(23).
카타스트로프 이론에 의하면 부서지는 바닷물, 분열하는 세포, 노인의 얼굴 위의 늘어가는 주름살 등 우리가 뚜렷한 형상을 발견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운동들 속에서 일정한 개념적 형상을 발견해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가장 불안정적인 것 속에 내재하는 안정적인 질서와 안정적인 구조 속에 내재하는 카타스트로피적인 특이점의 '혼합형상'이 문제가 된다. 개념의 구성적 질서와 현실적 사건들의 불확정적 운동은 이런 점에서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형상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와 같은 뫼비우스 띠가 곧 '결연의 문화정치'를 형태화할 수 있을 새로운 교육학의 이미지이다. "카타스트로피 이론은 바로 우리가 보는 모든 사물들이 단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존재 자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보조공간을 통해 추상적 공간을 복수화시켜야 하며, 또 이 생산된 공간내에서 가장 간명한 존재(투사에 의해 관찰된 형태학에서 그의 시원을 제공하는)를 정의해야 한다"(140쪽) 이런 문맥에서 볼 때 '테크노문화'에 대한 카타스트로피 이론의 적용과 매개, 분석이 필요한데, 이는 '테크노문화'의 위상학적 공간 내부에 존재하는 연속적 공간과 불연속 특이점들, 그리고 각각의 국지적 영역의 '근방'들 사이에 존재하는 가족적 유사성의 연쇄고리와 차이들의 매트릭스를 지도화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형학의 당면한 과제는 생태계-생물계-인간-기계-사이보그의 중층적인 연결망으로 구성되어 있는 '테크노문화' 시대의 새로운 행동이론, 즉 '사이버네틱스'의 인식론, 윤리학, 미학, 정치학을 새롭게 구성하는 일이다.

2) 새로운 교육학과 부정의 미학
이런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재검토하는 데에는 '재정의 전략'을 채택했던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방식이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는 비유물론자들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과학자들은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랑'이니, '지혜', '정신', '신성한 것'과 같은 용어와 개념들을 사이버네틱스의 개념적 도구를 이용하여 재정의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엄격한 재정의 전략을 통해 그가 도달하고자 했던 것은 다양한 자연현상의 밑바닥에 깔린 기초적인 것, 즉 제 기능을 다하는 생명의 틀, 살아서 진화과정에 있는 지구 전체의 생명시스템이었다.20)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생태학적 세계와 사이보그의 세계는 적대적 대립의 세계가 아니며, 양자는 일종의 순환적 인과관계와 다단계논리계형으로 짜여져 있다(28). 그가 다단계논리계형이라는 부른 것은 메시지와 메타메시지의 구별, 컨텍스트와 메타컨텍스트의 구별, 커뮤니케이션과 메타커뮤니케이션의 구별을 의미한다. 한 컨텍스트에서 다른 컨텍스트로의 이행, 컨텍스트에서 메타컨텍스트로의 이행의 문제가 곧 논리계형 사이의 이행의 문제인데, 이들간의 구별과 이행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생물체나 인간은 상황 속에서 적절한 커뮤니케이션에 이를 수 없고, 정신분열증적 상태에 빠지게 된다.21) 반대로 컨텍스트에서 보다 넓은 컨텍스트로의 이행이 이루어지게 되면, 즉 '학습의 학습'을 거듭하게 되면 자기조정적인 시스템이 가능해진다(이런 문맥에서 보면 선불교에서의 '화두'는 통상적인 컨텍스트를 흔들어 놓음으로써 컨텍스트와 메타컨텍스트의 관계에 대한 학습의 원리를 이해케 하는 정신과정의 작동원리이다). 베이트슨은 이를 생명과 정신의 진화라고 부른다. 이는 하나의 컨텍스트와 다른 컨텍스트 사이의 불연속성을 이해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며, 일종의 '자기수정적 회로의 관계를 규정하는 패러다임'의 형성가능성을 지칭한다(193). 이를 달리 요약하면 정신작용과 과정에는 틈이 존재하며, 그 틈은 동시에 연결가능하다(200).  
이런 과정을 총괄하면 앞서 말한 도표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구성해볼 수 있다.인간의 개념은 사람-기계-컴퓨터-인조인간의 그물망으로 확장되며, 여기서 컴퓨터가 확장의 운동을 촉매하며, 이 확장의 운동은 각 항 사이의 일정한 불연속성에 의해 근본적으로 개방성을 지니며, 이 개방성은 생태계와의 일정한 연속성을 허용한다. 확장되는 집합은 새로운 컨텍스트를 구성하며, 컨텍스트에서 컨텍스트로의 이행은 베이트슨이 말하는 커뮤니케이션(인적, 물적 교류) 체제상의 논리계형의 이행을 의미하며, 여기서 인식론적 확장이 이루어지며, 정신세계와 물질세계는 마치 E=mC2의 공식과 같이 유동적인 경계를 이루는 것처럼 무한속도로 운동하는 개념적 사유(들뢰즈/가타리)를 통해 상호전화되듯이 맞물린다.
  
 +----------------------------------------+
 |   +---------------------------------+  |
 |   |                                 |  |
 |   |   +--열린집합의 인간개념--+     |  |
 |   |   |   사람----------기계  |     |  |
 |   |   |     |              |  |     |  |
 |   |   |     |              |  |     |  |
 |   |   |  인조인간-------컴퓨터|     |  |
 |   |   +-----------------------+     |  |
 |   |       생태계                    |  |
 |   +-------------------CHAOSMOS -----+  |
 +-----------자연--------CHAOS------------+


그러나 베이트슨도 인정하듯이 그 틈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한다. 나아가 정신작용이 이룩해내는 연결패턴, 다단계논리계형을 형상화하는 형태화작용의 극한점 바깥이 문제가 된다. 리오타르가 주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갈등이다. 리오타르는 칸트의 '숭고이론'을 재구성하여, 상상력이 형상화능력의 한계에 도달했을 때 이성이 부딪치는 무기력의 문제를 파고든다. 칸트에 의하면 '미'는 자연과 정신 사이의 화합상태에서 나타나는 감정이라면, 이 화합의 상태는 숭고에 의해 파괴된다. 그런데 리오타르에 의하면 칸트를 포함한 서구의 모든 사상이 바로 '미의 상태'를 추구해왔던 데 반해, 숭고의 이론 이후 서구의 모든 예술은 질료와 형식의 자연스러운 적합성을 포기하고 오직 질료에 접근하게 되었을 뿐이라고 한다.그리고 이와 같은 질료는 형상화하는 적극적인 정신이 부재한 상태에서 그대로 현존한다. 여기서 질료는 합목적성을 상실한 채 존재한다. 리오타르는 이것이 바로 숭고이론 이후의 현대예술의 역설이라고 갈파한다.22) 이와 같은 상태는 쾌감이 아니라 '고통'의 쾌감이다. 이와 같은 '고통의 쾌감' 속에서 현대예술은 '현시할 수 없는 것'을 현시하고자 하는데, 리오타르는 이를 '부정적 현시'(negative presentaion)라고 부른다.23)
오늘날 모든 것을 정보화하고, 영상화하고, 표현가능하게 만드는 '테크노문화'의 상황에서 다시 한번 환기해야 할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바깥'을 사유하는 '부정의 미학'인 것 같다. 물론 이때의 '부정'이란 단순히 거부의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바깥'과 '고통'과 '타자'와 '차이'와 '간극'과 '심연'을 긍정하는 것이며, 차라리 손쉬운 '동일성'과 부가된 '통일'과 고정된 '전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친숙한 '유기체주의'와 '인간중심주의', '가족주의'와 '남근주의'의 '바깥'을 사유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곳에서는 다만 다성적인 차이들의 가족적 유사성의 연쇄고리만이 불균등하게 유동하며 분포되어 있다. 시공간의 압축기술이 만들어낼 새로운 조작적 동일화의 위험에 맞서기 위해, 차이와 간극, 배리의 논리를 작동시키는 '부정의 미학'은 오직 가족적 유사성으로만 연결될 뿐인 차이들로 가득찬 다중적 대중의 다성적인 문화정치를 위한 새로운 교육학의 전제조건이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교육학의 형성을 시도하는 어떤 형태의 통합과학도 단지 '근방'에서만 가족적 유사성으로 연결되는 수많은 불연속적인 분과들간의 가변적인 그물짜기를 지칭하는 잠정적인 용어일 뿐이다. 또한 '복잡다단한' 문화정치의 지형을 개념화하려는 모든 지형학적 연구는 오직 이와 같은 가변적 그물짜기의 정세적 효과로서만 '테크노문화'의 불균등한 유토피아/디스토피아의 절합점을 횡단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물짜기를 구성하고 횡단하는 이론적 실천이 문화정치적 실천의 중핵이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문맥에서이다.


1) 마크 포스터,  {뉴미디어의 철학},  민음사,  1994,  38-9쪽. 이하 이 책에서 인용하는 것은 괄호 속에 그 쪽수만을 표시한다.
2) Constance Penley & Andrew Ross, ed., Technoculture,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1, 서문 참조.
3) '복합문화주의'는 이제는 단지 미국과 같은 다인종사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국사회와 같은 단일민족국가에서도 영상정보매체를 통해 일상의 생활양식 속으로 파고든다. 들뢰즈/가타리의 용법이라면 민족, 인종의 문제는 영상정보매체를 통해 '탈영토화'된다. 우리의 경우 이런 과정은 다가올 통일시대의 '민족문화' 개념을 새롭게 사고할 필요성이 제기되는데,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한반도라는 영토를 넘어서 있는 일본, 연변, 중앙아시아, 미국 등지에 산재한 동포들을 포괄하는 탈영토화된 민족문화는 필연적으로 복합문화적일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민족문화적 정체성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가족적 유사성'의 형태로만 공통성을 지닐 뿐이다.
4) 프리쵸 카프라,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 범양사, 1994(17쇄), 379-97쪽.
5) 태양에너지의 개발과 재생기술이 생태계와의 피드백과 자기조정적 과정을 바탕으로 삼아야 하는 한, 카프라 등이 주장하는 소프트테크놀러지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사이버네틱스의 발전을 전제로 삼아야 가능하다는 얘기도 된다. 이런 점에서 사이버네틱스(단순히 인공지능공학만이 아니라 재귀적이고 자기조정적인 제반 과정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는 한편으로는 생태학의 발전을 다른 한편으로는 생태파괴의 과정을 이중적으로 촉진시킨다고 할 수 있다.
6) 레지스 드 브레, {이미지의 삶과 죽음}, 시각과 언어, 1994, 248-56쪽 참조. 드 브레는 매개론이라는 용어로 설정한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발달 단계를 문자발명에서 인쇄술의 발명에 이르는 시기인 로고스페르(logosphere), 인쇄술에서 컬러텔레비전의 등장 시기에 해당하는 예술시대인 그라포스페르(graphosphere), 오늘날의 비디오스페르(videosphere) 시기로 구분하며, 이 각 시기는 신권통치, 인권통치, 기술통치의 3단계와 상응한다고 본다. 이미지의 발달 단계에 초점을 둔 이런 구분은 언어의 차이에 기준을 둔 마크 포스터의 3단계론(구어, 문자언어, 전자언어)과는 차이가 있는데, 드브레의 구분이 관심을 끄는 것은 현단계가 영상이미지와 정보기술에 기초한 '기술통치'의 시기라는 해석이고, 이는 필자가 '테크노문화'라고 총칭하는 오늘날의 문화적 특성과도 상응하는 표현이다.
7) '정보자본주의', '다국적 자본주의'의 확산에 따라 민족국가의 경계가 불안정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민족국가의 역할이 소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민족국가는 '정보'의 통제를 통해 새로운 기능과 역할을 수립하고자 하는데, 여기서 국가들과 자본들 사이에서 새로운 '정보전쟁'의 문제가 야기된다.
8) W. Tmitchel, "Pictures and Pharagraphs: Nelson Goodman and the Grammar of Differnce" in Iconology: image, text, ideology,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68-70쪽  
9)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앙띠 오이디푸스}, 민음사, 1994, 357-61쪽. 이하 이 책에서 인용하는 것은 괄호 속에 그 쪽수를 표시한다.
10) 다너 해러웨이, [사이보그를 위한 선언문], {문화과학} 이번 호,  
11) "Cyborgs At Large: Interview with Donna Haraway", in Constance Penley & Andrew Ross, ed., 위의 책, 6쪽.
12) 같은 책, 15-6쪽.
13) 카프라, 위의 책, 18쪽.
14) 소광섭, [물리학에서 지리학으로], {과학사상}, 1992년 겨울, 5쪽.
15) Constance Penley & Andrew Ross, ed., 위의 책, 3-6쪽.
16) Gilles Deleuze/Fe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lation & Forward by Brian Massumi,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7, 22-3쪽. '아쌍블라쥬'는 불어판에서는 'agencement'으로 나오지만 영어판에서는 'assemblage'로 번역되어 있다. 두 표현 다 '배열', '조립' 등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미술용어로도 사용되고 있는 '아쌍블라쥬'라는 표현을 쓴다.
17) 같은 책, 25쪽.
18) 들뢰즈/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현대미학사, 1995, 290쪽 이하 결론 부분 참조. 들뢰즈/가타리에 의하면 철학, 예술, 과학은 카오스와 투쟁한다. 그러나 그 투쟁은 투쟁과정에서 카오스로부터 무기를 차용하여 그 무기들을 천박한 '견해들'(doxa)을 향해 겨누기 위해서이다. 철학자는 카오스로부터 변주(variation)를 가져오며, 예술가들은 다양성들(varietes)을, 과학자들은 감속에 의해 독립되어진 변수들(variables)을 가져온다. 이들은 이 무기를 통해 카오스를 가로지르며 하나의 분할구도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카오스를 물리치며, 일종의 카오스모스(chaosmos), 즉 구성된 카오스를 구축한다(이런 맥락에서 들뢰즈는 컴퓨터를 진보시키기 위해서 정작 필요한 것은 형식인지의 논리학이 아니라 카오스적인 혹은 카오스화하는 체제를 수락하는 방향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아날로그 시스템을 내장한 디지탈 컴퓨터 같은 것을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철학과 예술은 무한속도의 운동을 통해 재편된 카오스(chaoldes)를, 과학은 감속운동을 통해 재편된 카오스를 창조하며, 객관화가 불가능한 두뇌에서 뉴런이 결합된 사이의 틈새들, 간격들, 중지들, 그리고 시간-사이들 가운데 가장 심원한 곳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그에 의하면 이 3가지 구도들이 집합(단일성이 아닌), 그것이 곧 두뇌인데, 이 3가지 구도들은 객체화된 두뇌의 정신적 대상들이 아니라, 두뇌가 주체 즉 사유-두뇌가 되는 세 양상들이며, 두뇌가 카오스에 잠겨 카오스와 대적하기 위해 타고가는 3개의 뗏목들, 3개의 구도들이다. 이것은 대지와 맞닿은 간격없는 조감의 상태, 어떤 심연도 주름도 틈새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자체-조감이다. 그것은 모든 추가된 차원과는 무관하게 스스로를 조감하며, 따라서 어떤 초월성에도 구원을 청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3가지 구도들은 두뇌 속에서 서로 간섭한다. 들뢰즈/가타리에 의하면 이 간섭에는 외재적, 내재적, 그리고 위치시킬 수 없는 간섭이라는 3가지 방식이 존재한다. 이들은 철학이 비철학을, 예술이 비예술을, 과학이 비과학을 필요로 하는 이 3번째의 간섭 속에서 3개의 구도는 더 이상 구별되지 않으며 두뇌는 카오스로 침잠하며, 이 침잠 속에서 '다가올 민중', 대중적-민중, 세계적-민중, 두뇌적-민중, 카오스-민중이 카오스로부터 간신히 빠져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들뢰즈/가타리가 생전에 지속적으로 강조했던 탈근대적 사유의 분자적 탈주의 포괄적 지평이 시사하는 바가 곧 대중적-민중 전체가 카오스를 통과하는 이와 같은 전망이 아닐까 싶다.            
19) 르네 톰, {카타스트로프의 과학과 철학}, 솔출판사, 1995. 이하 이 책에서 인용하는 것은 괄호 속에 그 쪽수만 표시한다.
20) 그레고리 베이트슨, 메리 캐서린 베이트슨, {마음과 물질의 대화}, 고려원 미디어, 1993, 18-9쪽. 이하 이 책에서 인용하는 것은 괄호 속에 그 쪽수를 표시한다.
21) 베이트슨, {정신과 자연}, 까치, 1990, 141-54쪽.
22) Jean-Francois Lyotard, The Inhuman: Reflections on Time, Translated by Geoffrey Bennington and Rachel Bowlby, Polity Press, 1991, 135-43쪽.
23) 같은 책, 1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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