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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6 (07:15) from 84.173.190.39' of 84.173.190.39' Article Number : 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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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철학의 학파들


          
      
    
    
    
   







  
3. 불교철학의 학파들  
ll야뇌ll  03.02.25 00:42  




3. 불교철학의 학파들


1) 소승-대승의 구분

붓다의 열반 직후에 라자그리하에서 승단의 규율 vinaya을 확립하기 위해 첫 번째 불교회의가 열렸다. 거의 백 년 후에 건에 관한 격렬한 논쟁의 결과로 승단은 상좌부 Sthavira-vadin와 대중부 Mahasamghika, 둘로 갈라졌다. 논쟁점을 다루기 위해서 두 번째 분교회의가 와이샬리 Vaisali에서 열렸다. 그 후 아쇼까 황제 주최로 세 번째 불교회의가 빠딸리뿌뜨라 Pataliputra에서 열렸다(B.C.249년경). 약 천여명의 승려들이 참석했고, 그 주요 목적은 장로 Sthavira를 따라 교리를 체계화하고 명료히 하는 것이었다. 추측컨대, 빨리 경전으로 알려진 것은 이 회의의 소산이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교리나 계율에 대한 견해차로 인하여 상좌부와 대중부 모두에 분열이 발생했고, 마침내 이십여 개의 부파로 갈라졌다. 이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심적 물적인 제요소 dharma들의 실재를 주장하는 설일절유부는 Sarvastivada이다. 네 번째 회의는 까니쉬까 왕이 AD.1-2세기에 소집했고, 설일절유부의 기본교설을 체계화했다. 설일절유부는 후에 경량부 Sautrantika를 생성시켰으며, 이 학파는 경장 Sutta-pitaka의 권위를 강조한다는 뜻에서 그같이 불리웠다. 각 부파의 기원과 발전사를 여기서 자세히 다루기에는 너무 큰 주제이므로,33) 크게 소승 Hinayana과 대승 Mahayana의 둘로 갈라졌다는 것만 말하면 족하다. 소승은 또한 장로부 Theravada라고도 부르며, 이들은 스스로를 장로 Thera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장로부는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에서 지배적이므로 남방불교라고도 불리운다. 그리고 대승불교는 티베트, 몽고, 중국, 한국, 이본 등지에서 성행하므로 북방불교라고 호칭된다. 소승과 대승 하에 적어도 서른 개의 주요 학파들이 있다.

이 두 승 사이의 주요 차이는 이와 같다. 대승은 이웃에 대한 관심 없이 자신만을 위해 열반을 추구하는 아라한 Arhat의 협소한 이상 때문에 소승을 비판한다.34) 그것이 아무리 숭엄하고 고상한 것일지라도, 자신이 구원을 위한 아라한의 일방적 관심은, 모든 중생들에 대한 무한한 자비 mahakaruna와 깨달음을 지양하는 대승의 입장에선 이기적이고, 저급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대승은 아라한의 개념을 보살 Bodhiattva의 이상으로 대치했다.35) 보살은 동정과 사랑으로 모든 중생들이 해탈을 이룰 때까지 이들을 돕기 위해 열반에 들기를 거부한다.36) 따라서 깨달음을 얻은 보살은 고통스런 세계로부터 물러나 은자의 고적하고 비활동적인 삶을 영위하는 대신 대중속에서 살면서 그들의 구원을 돕는다. 무한한 자비심으로 보살은 기꺼이 자신의 선생의 과보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돌리고, 그들의 행동의 결과를 자신이 받는다. 모든 탐욕과 집착을 극복했기에 보살은 결코 이기심과 탐욕, 개인적 획득으로부터가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으로부터 행동한다. 그러므로 그의 행동은 까르마를 낳지 않는다. 그래서 보살은, 비록 더러운 진흙 가운데 자라지만 그에 오염되지 않고 자라나는 아름다운 연꽃에 비유된다.37) 요컨대 보살은 세상 가운데 살지만 그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다.38)

소승과 대승 사이의 두 번째 차이는 붓다에 대한 견해이다. 소승은 철저히 무신론적이며, 따라서 붓다를 신으로 대우하기를 거부한다.39) 다른 한편, 대승은 고통과 비애에 충만한 삶을 위안과 도움, 자비를 보내주는 어떤 초월적인 원천에 의존치 않고 직면하기에는 대중들이란 너무도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대승은, 열반이 성취에 있어서 자신의 노력이 우선임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초월적 붓다가 모든 고통받는 존재를 알고 돕는다고 대중들에게 확산시킨다. 이런 식으로 대승은 약하고 겁 많은 중생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준다. 그런 만큼 기도와 예경이 대중적인 대승에서는 큰 역할을 한다.40) 그러나 유념해두어야 할 점은 대승에서의 신에 해당되는 초월적 붓다41)를 그것의 화신인 역사적 붓다와 동일시해선 안된다.

소승과 대승 사이의 세 번째 차이는 모든 중생들이 붓다가 될 가능성, 즉 불성, 진여에 대한 사상이다.42) 소승불교에 따르면, 불성은 생사의 윤회를 통한 수련에 의해 적합한 시기에 달성되는 것이지만, 대승은 불성이 언제나 모든 중생 가운데 현존하는 것이며, 다만 그것을 가리고 있는 베일을 거두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대승은 모든 생존체를 잠재적 붓다로 여긴다. 그래서 대승은 윤회 Samsara와 열반 Nirvana이 존재론적으로 다른 두 영역이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본 동일 실재43)라고 가르친다. 속박과 고통의 근원인 무지가 극복될 때 이 동일한 세계가 열반을 체험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자신이 항상 열반 가운데 있었으며, 단지 무지의 베일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44)
이로부터 두 승 사이의 네 번째 차이점에 이른다. 장노부 Theravada의 존재론은 다원적 실재론이다. 실재의 궁극적 구성요소, 즉, 다르마는45) 우리의 경험계를 이루는 것과 동일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실재론이다. 즉, 장노부는 현상 appearance으로서의 세계와 있는 그대로의 세계 사이에 어떤 구분도 거부한다. 장노부에 따르면 우리는 궁극적 실재를 직접 지각한다. 테라와다는 또 궁극적 요소 dharma는 개별적이고 환원불가능하다고 가르치므로 다원론적이다. 이에 대해 대승은 다원론과 실재론을 독단적이고 불합리하다고 거부한다. 대승에 따르면, 이른바 궁극적 구성요소라는 다르마이 수와 성질은, 우리가 세계를 기술하고자 구사하는 지각적, 개념적 도식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 더욱이 그런 도식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이다. 세계의 본성과 구성에 대한 각각의 기술은 특정한 개념적 도식에 의존하기 때문에, 어떠한 기술도 절대적이고 궁극적일 수 없다. 각 기술은 어떤 관점에 상대적이다. 더욱이, 그런 기술은 우리의 감각과 사고를 통해 파악되는 현상으로서의 세계에만 적용되는 것이며, 모든 지각과 개념을 넘어선 궁극적 실재엔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궁극적 실재는 비이원적이고, 이름도 형태도 없고, 만들어지고 생겨난 것이 아니며, 불가언표적이라는 의미에서 공성 sunyata이다. 그것은 비감각적, 비사고적인 직접적 직관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46) 그러므로, 장노부의 다르마는 현상적 영역에서만 타당하다. 그것은 절대적이거나 궁극적인 실재가 아니다.47)

보살이 개념과 관련하여 대승의 어떤 형태에서는 역사적 붓다가 궁극적 실재의 화현으로 생각된다는 것을 위에서 지적했다. 역사적 붓다는 초월적 실재의 현상적 현현이다. 고따마 Gautama는 궁극적 실재의 많은 화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고따마 이전에도 붓다는 있었고, 또 그 후에도 있을 것이다. 이같이 보면, 대승의 초월적 실재는 불이론적 베단따의 무속성적 브라흐만 (Nirguan-Brahman, 이름과 형상을 초월한 브라흐만)에 매우 유사하고, 역사적 붓다들은 불이론적 베단따의 유성성적 브라흐만(Saguna-Brahman, 기술될 수 있는 브라흐만, = I'svara)에 대한 대승적 대응이다.48)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는 세계를 대승에서는 초월적 실재로서의 붓다의 법신 Dharmakaya49)이라고 한다. 초월적 실재의 화현으로서의 붓다는, 신자들의 기도에 자비와 도움으로 응답하는 신과 같이 생각된다. 이런 측면에서의 붓다가 곧 아미타 붓다 Amita Vuddha, 즉 무량광불이다.50)

이상에서 소승과 대승이 두드러진 차이점을 진술했는데, 다음엔 중요한 불교철학파들, 즉, 소승에서는 비파사(유부라고도 부름) Vaivhasika와 경량부 Sautrntika, 대승에서는 유식 Yogacara과 중관 Madhyamika의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와이브하시까 학파 Vaibhasika

장노부의 아비달마 Abhidharma 논서들51)은 철학적 실재론의 기초를 이룬다. 아비달마에 대해서는 수많은 주석서들이 있다. 아이브하시까 Vaibhasika라는 말은 'Abhidharma-mahavaibhasa'라는 논서로부터 차용되었다.52)

와이브하시까는 철저한 과정철학 process philosophy이다. 그것은 또한 다원론, 실재론, 유명론이다.53) 연기설의 참 정신에 입각하여 실재가 부단한 흐름과 변화이며, 내적으로건 외적으로건 어떤 영구적 실체도 없다고 주장한다.54) 와이브화시까에게 있어서 존재란 끊임없이 생멸하는 찰라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와이브하시까의 존재론은 때때로 찰나론 ksanika vada이라고 불리운다. 실체적 존재론 Substance-ontology에 대한 와이브하시까의 주요 논박은 다음과 같다.

실체란 정의상 언제나 변치않는 것, 즉 영구적인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 영구적이라면, 인과적 효력이 있을 수 없다. 인과적 효력이 있기 위해서는 다른 실체와 상호 작용할 수 있고 시간 속에서 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주변에서 부단한 변화를 관찰한다. 그러므로 실재는 실체의 성격일 수 없다. 와이브하시까의 존재론적 격언은 '존재한다는 것은 인과적 효력이 있다는 것이고, 인과적 효력이 있다 함은 곧 존재한다는 뜻이다'이다.55) 그러므로 만일 어떤 것이 인과적으로 효력이 없으면, 그것은 존재하지도, 할 수도 없다. 영구적이고 변하지 않는 실체엔 인과적 효력이 없고,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다.

와이브하시까에 따르면, 세계는 우리에게 나타난 그대로 실재한다. 실재의 궁극적 구성요소 dharma들이 바로 우리의 경험계를 이루는 것과 동일하다. 달리 말해서 와이브하시까는 우리에게 나타난 바로서의 세계와 있는 그대로의 세계 사이의 구분을 거부한다.56) 존재의 궁극적 구성요소인 다르마는 절대적이고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이다. 이런 까닭으로 와이브하시까는 실재론이다. 와이브하시까는 다르마들이 개별적 distinct이고 환원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다원론이다. 실재란 와이브하시까에 따르면 다르마를 구성하는 찰나로 이루어진 흐름이며, 각 찰나 poing-instant는 간단없이 연속된다. 존재의 지속성은 연속적인 찰나들 사이의 인과적 연관으로 설명된다. 어느 주어진 찰나는 바로 이전의 것의 결과이고 그것은 바로 뒤따르는 것의 원인이다. 존재의 지속성에 대한 이 설명은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같이 실재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57)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실재하는 현재가 비실재적인 과거로부터 일어나며, 똑같이 비실재적인 미래를 생성시키는가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붉음', '소', '삼각형'과 같은 일반명사와 관련해서 보편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들 명사는 개별적인 여러 붉은 사물, 소들, 그리고 삼각형들이 소유한 공통된 속성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본질론자' essentialist로 불리우는 철학자들은 이런 속성들이 각 사물을 그것답게 하는 본질들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 이 본질적, 속성 property들은 그것을 구현한 특수한 사물과 독립적으로 실재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런 까닭으로 본질주의자들은 또한 '실재론자' realist라고도 불리운다. 그렇게 생각된 본질이 곧 '보편' universal으로서, 이것은 비시간적, 비공간적이고 불변적이라고 한다. 서양철학에서는 플라톤이 보편의 독립적 실재를 주장한 가장 유명한 철인이었다.

반대로, 보편에 독립된 존재론적 지위를 부정하는 철학자들은 유명론자 nominalist라고 한다.58) 유명론자에 따르면, 보편이란 단지 우리가 실제의 사물로부터 그 공통된 속성을 추상하여 형성한 개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유명론자들은 보편이 그들을 구현하고 있는 특수자를 떠나서는 어떠한 존재론적 위상도 갖지 못하는 개념적, 언어적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와이브하시까는 다음과 같이 유명론을 변증한다. 만일 본질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보편이 실재한다면, 시간,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물들에 있는 보편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더욱이 보편을 가진 사물이 변하거나 파괴되면 그 보편은 어떻게 되는가? 예를 들어 산불에 의해 나무가 재로 되었을 때 '목성'이라는 보편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도 또한 '재성'으로 바뀌는가? 아니면, 그것은 영원 불변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신비한 형태로 여전히 재 속에 남아 있는가?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해 그 보편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와이브하시까에 따르면, 동일한 지각으로 보편과 그것을 가진 특수를 알게 된다. 보편의 독립적 실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특수를 드러내는 지각과 보편을 드러내는 지각이라는 두 가지 지각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보편의 독립된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가장 열렬한 옹호자라할지라도 지각이란 언제나 특수에 대한 것이고, 보편이 그 안에 존재하는 특수를 동시에 지각하지 않고는 보편도 지각할 수 없다는 것을 수긍해야 한다. 그러므로 무시간적 무공간적 영역에 머무르는 독립적이고 실재하는 보편의 존재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우리의 실제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그릇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보편은 단지 개념적, 언어적 추상이라고 와이브하시까는 주장한다. 우리가 여러 사물에 그것을 적용할 수 있는 것도, 그들이 독립된 실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런 개념적, 언어적인 추상이기 때문이다. 와이브하시까에게 있어서 실재란 철저한 특수이고, 어떤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다. 와이브하시까의 보편실재론이 부정은 실체 부정론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된다. 왜냐하면 보편을 실체(실체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상호작용이 불가능하고 변화할 수 없다)로 여기는 것은 '존재함은 곧 인과적 효력을 가짐이다'라는 주장에 모순되는 것이며, 따라서 실체로서의 보편은 존재할 수 없다.

와이브하시까는, 외적 세계가 우리의 지각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세계의 궁극적 구성요소인 다르마가 지각으로 드러난다고 주장하는 실재론자이다. 즉, 우리는 외적 대상과 그들의 궁극적 요소들을 직접적으로 지각한다. 와이브하시까는 우리가 외적 대상을 직접적으로 지각한다는 주장을 어떻게 지지하는가? 첫째 우리의 지각외에는 외계에 대한 다른 인식 원천이 없다. 외계대상의 독립적 실재를 인정하는 외에 어떻게 달리 우리가 지각하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를 와이브하시까는 묻는다. 외적 대상의 실제는 경량부에서 생각하듯이 추리로만 설명될 수 없다. 우리가 한 번이라도 외적 대상을 직접적으로 지각하지 않는 한 추리는 외적 대상의 존재를 수립할 아무런 능력이 없다. 연기의 지각으로부터 불의 존재를 추리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언젠가 과거에 불과 연기를 함께 지각한 적이 없다면, 그는 지금 연기의 지각으로부터 불의 존재를 추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외적 대상이 지각된 적이 전혀 없다면, 추리도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외적 대상에 대한 직접지각이 다른 것의 존재를 추리하는 필수조건이라고 와이브하시까는 결론짓는가.59)

외적 대상의 존재는 우리의 심상으로부터 추리될 수 없다. 우리의 지각이 외적 대상의 모사이라고 하는 경량부의 생각은 그릇된 것이다. 왜냐하면, 외적 대상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지각이 모사나 표상이 아니라 차라리 본래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적 대상을 전혀 지각하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지각으로부터 그 존재를 추리할 수 있다는 것은 부조리하다. 동일한 논점이 역설적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만일 외적 대상을 결코 지각하지 못해도 우리의 지각은 그것들의 모사 copy라는 명제가 참이라면, 그 명제는 반드시 거짓이다. 왜냐하면, 만일 외적 대상을 결코 지각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의 지각이 그것의 모사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명제의 진리성 자체가 바로 그것의 논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 대상을 직접 지각한다고 인정해야 한다고 와이브하시까는 말한다. 와이브하시까는 심적, 물적인 것 모두에 관해 실존자이다. 즉, 와이브하시까는 외적 세계뿐 아니라 의식에 대해서도 실재성을 인정한다.



3) 경량부 Sartrantika

'Sautrantika'라는 학파명60)은 수뜨라(경) sutra의 권위를 특히 강조한다는 사실에서 도출되었다.
와이브하시까와 마찬가지로 심적, 물적인 것 모두에 실재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두 학파의 실재론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와이브하시까는 우리가 외적 대상을 직접 지각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이 학파는 외적 대상이 직접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외적 대상의 표상 혹은 모사인 우리의 지각으로부터 추리된다고 주장한다.61) 이런 까닭으로 경량부의 인식론은 '표상주의' representationism, 혹은 '모사설' copy-therory이라고 불리우는 존 로크 John Locke의 인식론과 유사하다.62) 그러나 경량부의 표상주의는 외적 대상의 독립적 실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경량부는 다음과 같은 논증으로 외적 대상의 독립적 존재를 변호한다. 외적 대상의 독립적 실재에 대한 주장이 거짓이라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어떻게 환상적 경험과 비환상적 경험을 구분해야 하는가라고 경량부는 묻는다. 사막을 여행하고 있는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 멀리서 물을 보고 급히 그곳으로 갔지만, 그것은 물이 아니라 신기루였다는 경험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만일 그 나그네가 물을 본 적이 전혀 없었다면, 자신이 멀리서 보았던 것이 물과 같이 보인다는 생각조차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외적 대상의 독립적 존재에 대한 믿음은 착각의 경험으로부터도 보증된다고 경량부는 결론짓는다. 경량부는, 우리가 외적 대상을 직접적으로는 결코 지각하지 못하나, 우리의 지각으로부터 추리한다고 말한다. 경량부는 또한 외적 대상이 실재가 아니라 단지 우리 자신의 심상, 즉 외적 대상으로 나타난 의식이라는 유가행파 Yogacara의 주장도 불합리한 것으로 거부한다. 만일 유가행파가 주장하듯이63) 우리가 여지껏 지각한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의 심상이라면, 의식이 외적 대상으로 나타난다는 말조차 할 자격이 없다고 경량부는 지적한다. 왜냐하면 '내적'과 '외적'사이의 대립이 허용되지 않는 곳에, '외적'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유가행파는 다음과 같은 논증에 근거하여 외적 대상의 비실재성을 주장한다. 즉 의식과 대상은 동시적이므로 그들은 또한 동일하다. 그리고 의식으로부터 떠나서는 대상의 경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의식만이 실재이고 대상은 실재가 아니다. 경량부는 이 논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박한다. 의식과 대상의 동시성 simultaneity으로부터 그들의 동일성 identity이 도출될 수 없다. 더욱이 동시적인 두 사물 가운데 하나는 실재이고, 다른 하나는 비실재라는 주장도 부당하다. 또 유가행파의 가장 열렬한 추종자일지라고, 가령 그가 돌을 보고서 '나는 돌을 본다'라는 대신 '내가 돌이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가행파도 지각하는 주체와 지각의 대상을 구분하지 않을 수 없다.

경량부와 유부 사이의 두 번째 중요한 차이점은, 후자와 달리 전자는 우리에게 나타난 바로서의 세계 phenomena와 있는 그대로의 세계 noumena를 구분 짓는다는 것이다. 이 구분에 비추어 경량부는, 존재의 궁극적 요소 dharma가 우리의 경험세계를 이루는 것과 동일하다는 와이브하시까의 주장을 거부한다. 그리하여 경량부는 다르마에 대해 절대적이고 궁극적, 독립적인 존재론적 지위를 부정한다.

경량부와 와이브하시까 사이의 더욱 심각한 불일치점은, 존재의 연속적 변화에 관한 견해에 있다. 와이브하시까에겐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똑같이 실재이다. 그 이유는, 실재하는 현재가 비실재적 과거의 결과일 수도 똑같이 비실재적인 미래의 원인일 수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과거나 미래는 어쨋건 현재 가운데 포함되어야 한다고 와이브하시까는 논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 찰나 point-instant가 지속 duration을 가질 때만이 가능하다. 여기서 와이브하시까의 논점은, 지속을 갖지 않는 존재엔 다음 존재를 생성시킬 인과적 효력이 있을 수 없고, 원인과 결과가 동시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와이브하시까는 다르마가 아무리 작을지라도 지속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경량부는 이런 견해에 대해 다르마에 지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것을 영구적 실체로 만드는 것이고, 연기설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논박한다. 다르마의 지속성을 부정하는 견해는 논리적으로, 전찰나와 후찰나 사이의 인과관계의 부정으로 이끈다. 경량부에 따르면, 다르마의 시간적 전후의 관계는 연기의 원리에 따른 대치의 관계이다. 즉, 후자는 전자에 의해 야기된 것이 아니라 전자에 의존하여 대치된 것일 뿐이다.64) 그렇다면 경량부에 있어서 다르마의 생멸이란 두 과정이 아니라 동일한 과정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존재'와 '비존재'는 생성하는 단일 실재의 두 측면이다.65) 이것은 죽음의 과정이 태어남과 성장의 과정과 동일하다는 지적으로 드라마틱하고 생생하게 예시될 수 있다. 보편의 위상에 대해서는 경량부도 유부와 같이 유명론을 옹호한다.



4) 요가짜라 학파 Yogacara


요가짜라 Yogacara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 두 가지 설명이 있다.66) 한 설명에 따르면 이 학파의 추종자들이 비판적 탐구 yoga와 모범적 수행 acara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운다는 것이다. 또 다른 것에 따르면, 이 학파에선 진리의 실현을 위해 요가를 수행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가짜라의 두드러진 교설을 의식만이 궁극적 실재이고,67) 따라서 외적 대상은 비실재라는 것이다. 요가짜라는 연기설과 그와 더불어 순수한 과정적 존재론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의식은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흐름이며, 내적, 외적인 모든 대상은 마음의 관념에 불과하다. 요가짜라에 따르면 외적 대상의 독립적 실재를 단정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식과 대상이 동시적이므로 따라서 동일하다는 것이 그들의 논법이다. 달리 표현하면, 어떤 대상도 의식으로부터 떨어져 경험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의식과 대상은 동일하다. 앞에서 이미 와이브하시까와 사우뜨란띠가의 논박을 설명했다.

요가짜라는 외계 대상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입장에 대해 또다른 반론을 제시하고 있다.68) 이것은 사우뜨란띠까와 와이브하시까에 대한 요가짜라의 비판이다. 외적 대상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대상은 불가분할적, 무부분적, 원자적이거나 분할가능적, 복합적이어야 한다. 전자의 경우엔, 원자는 너무 미세하므로 지각될 수 없다. 다른 한편, 대상이 복합적이라면, 우리는 결코 대상의 모든 부분과 측면들을 동시에 지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든 외계 대상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은 극복할 수 없는 곤란을 수반한다.69) 그런데 대상과 의식이 동일하다는 위의 주장은 그러한 난점에 부딪치지 않는다고 요가짜라는 말한다. 왜냐하면 의식이 원자적인가 아니면 복합적인라가고는 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외적 대상의 독립적 존재에 반대하는 유가행파의 또 다른 논증은 찰나성의 존재론에 근거한다. 대상은 실체가 아니라 지속이 없는 찰나이기 때문에 그런 찰나적 대상이 의식의 원인이 될 수 없다고 유가행파는 지적한다. 만일 그것이 의식의 원인이라면, 대상의 발생과 그에 대한 우리의 의식 사이에 시간적 경과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적 경과는 다음 두 이유로 불가능하다. (1)찰나적 대상은 지속이 없고, 따라서 인과적 효력이 있을 수 없다. (2)대상과 그에 대한 의식은 우리에게 동시적으로 경험된다. 그러므로 외적 대상이 의식의 원인이 될 수 없으며, 정반대로 대상은 의식과 동시적이기 때문에 의식 이상일 수도 이하일 수도 없다고 유가행파는 결론짓는다.70) 또 대상이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게 된 다음에 대상을 의식한다는 논리도 마찬가지로 불합리하다고 지적한다. 그런 경우 대상에 대한 직접적(현재적) 의식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과 대상이 동일하다면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직접적 지각과 인식의 사실을 설명하는데 아무런 곤란이 없을 것이라고 유가행파는 말한다.

궁극적 실재가 의식 vijnana의 성질을 가진 것이라는 그 중심교설 때문에 유가행파는 식론 vijnana-vada이라고도 불리운다. 유가행파에겐 외적 대상이 마음가운데의 관념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살펴보았다. 이것은 외적 대상이 인식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도 지각하는 마음, 혹은 의식에 의존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유가행파의 입장은 조지 버클리 George Berkeley의 주관적 관념론과 매우 유사하다.71)

유가행파에 대한 주요 논박은 다음과 같다. 만일 외적 대상이 의식(마음)과 동일하다면, 어째서 우리가 보기를 원하는 것을 어느 것이나 볼 수 없는 것인가? 왜 우리는 지각의 대상이 나타나고, 변하고, 사라지는 것에 무력한가? 이 반대에 답변하고자 유가행파는 까르마의 법칙에 호소한다.72) 의식(마음)이란 그 자체내에 전쟁의 까르마의 인상을 포함하고 있는 흐름이다. 그와 같이 어떤 특정한 시간에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어떤 업의 잔재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서, 과거로부터의 업의 잔재가 의식의 흐름 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적합한 환경에서 표출된다는 것이다. 비유를 들면 좀 명료해질 것이다. 마치 우리의 기억을 이루는 무수한 것들 가운데서 특정한 때와 장소에서만 그 기억이 상기되듯이, 의식속에 깊이 놓여 있는 수많은 인상들 가운데서 어떤 것만 특정한 환경하에서 내적, 외적 대상으로 표면에 솟아 오른다. 이런 관점에서 유가행파는 의식을 장식 Alaya-vijnana73)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강조해야 할 것은, 유가행파에 있어서 의식이란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부단한 흐름이라는 것이다.74) 속박과 무지 속에 있는 한 그것은 까르마의 이법에 따라 계속 일어난다. 요가의 수행으로, 외적 대상에의 집착을 낳고 생사의 윤회를 지속시키는 의식의 생기를 지멸시킬 수 있다.75) 그와 같이 집착과 망상을 극복한자는 의식만이 실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유가행파에 따르면, 순수, 평정한 의식의 달성이 곧 열반의 성취이다.


5) 중관학파 Madhyamika


'마드야미까' Madhyamika의 문자적 의미는 '중도를 걷는 자'이다. 중론은 상주 eterbakusm와 단멸 annihilationism, 아와 비아, 물질과 정신, 육체와 영혼, 실체와 과정, 단일과 다수, 긍정과 부정, 동일과 차별 등 모든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이원론을 피하고, 불타의 가르침의 참된 정신인 중도를 밟는다.

이 학파의 창시자는 나가르주나 Nagarjuna(A.D.2세기)로서, 그의 유명한 <중론, 'Mulamadhyamakarika'76)이 학파의 방법과 교설, 그리고 정신의 토대가 되었다. 그밖에도 아르야데와 Aryadeva, 짠드라끼르띠 Candrakirti, 샨띠에와 Santideva 같은 뛰어난 계승자들이 있다.

(1) 중론의 철학개념

인도건 다른 곳에서건 철학은 두 부로, 즉 실체론 Atmavada과 무실체론 Anatmavada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아뜨만이라는 말은 영혼이라는 일반적 의미가 아니라 불변, 영원한 실체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아뜨마와다란, 그렇다면, 궁극적 실재가 영원, 불변적 실체의 성질을 갖는다는 것을 근본적 교설로 삼는 것이다. 다른 한편, 안아뜨마와다란, 궁극적 실재는 영원,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유동 flux이라고 보는 학파이다. 철학파들 사이의 영구적 갈등은 결국 실체관과 비실체관 사이의 충돌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고대희랍에서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투스77) 사이의 대립은 아뜨만 대 안아뜨만의 갈등에 다름없다.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정통파와 특정의 불교학파들 사이의 논란도 전자의 실체적 존재론과 후자의 과정적 존재론 사이의 근본적 차이로부터 발생된 것이다. 궁극적 실재를 영원, 불변한 것으로 보는 아뜨만 철학은 '동일성의 철학'이라고도 불리울 수 있고, 실재가 지속적 실체가 없는 순수한 변화라는 견해를 변호하는 안아뜨만 철학은 '차별의 철학'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이런 까닭으로 아뜨만과 안아뜨만 철학78)은 각각 일원론과 다원론으로 부를 수도 있다.

나가르주나의 가장 독창적인 통찰중의 하나는 철학의 기원과 본성, 그리고 철학적 갈등에 관련된다.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철학적 교설은 실재, 궁극적 절대자에로 향한 인간이 식힐 수 없는 갈증에 기원한다.79) 자신과 다른 그 무엇으로서의 세계에 직면하여 인간은 비아로서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식이란 언제나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 사이의 관계이다. 인식이란 인간이 자아와 다른 것의 통합을 추구하는 수단이다. 이런 식으로 지식에의 갈망은 그 본질에 있어서 존재에 대한 추구이다. 달리 표현하면, 세계를 알고자 하는 노력 가운데서 인간은 세계를 자신에게 융합시킨다. 그러나 나가르주나는 인식이 정확히 무엇인가 묻는다. 그것은 어떻게 생산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나가르주나의 대답이 중관학파의 중대하고 혁신적인 통찰의 하나이다. 인식이란 표현될 수 있는 한 명제적이고, 명제란 다시 개념과 지각(이것은 중관학파는 이름과 형상이라고 부르는데)으로 구성된다.80) 따라서 철학자가 지식가운데서 만들어 내는 실재란 이름과 형상의 실재이지 실재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러나 실재에 대한 갈구에서 철학자들은 이것을 망각하고, 이름과 형상으로부터 구성된 실재를 실재 자체라고 착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재와 착각 사이의 구분을 모르고, 다만 갈증을 달래고자 신기루를 향해 달리는 사막의 나그네와 같다. 그러나 신기루가 우리의 갈증은 식힐 수 없는 것처럼, 상상적인 실재의 구성은 실재에 대한 인간의 갈증을 풀어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실재에 대한 자신의 상상적 구성 vikalpa의 정글 속에서 방랑자가 된다. 실재 자체와 실재에 대한 이름과 형상을 구분치 못하는 것이 무지이며, 그것이 괴로움 duhkha을 낳는다. 각 학파는 실재에 대한 갈증과 추구에서 실재에 대한 자파의 생각을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하며, 상대방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리하여 철학은 독단적이 되고, 독단주의는 맹목과 비관용, 대립과 갈등을 낳는다.

문제는 우리가 과연 이름과 형태를 통해 실재를 포착할 희망이 있는가이다. 이 질문에 대한 중관학파의 대답은 단호히 '아니다'이다. 어떻게 중관학파가 이 부정적 대답을 지지하는가? 그 열쇠는 사고와 인식의 본질에 대한 중관학파의 분석에서 발견된다. 중론에 따르면 사고란 개념의 양극적 성질에서 기원하고 번성한다. 모든 개념은 다른 개념과의 대립 가운데서 의미를 얻는 양극적인 것이다. 이것은 장.단, 오목. 볼록, 명.암 따위와 같은 뚜렷하게 대극적인 개념의 경우뿐 아니라 모든 개념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책상'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자. 이 개념의 의미는 '비책상'이라는 개념의 의미에 의존한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는 책상이 무엇인가를 남에게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동어반복이며, 그것으론 책상의 지식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책상은---'이라고 말할 때, '책상'에 대한 우리의 설명이 지식생산적이고 정보전달적이 되기 위해서는 '책상'외의 다른 개념으로 완결되어져야 한다. 비책상의 개념이 없는 곳엔 책상이라는 개념도 있을 수 없다. 요점은, 인식과 가지성은 개념의 양극성, 사고 자체의 양극적 본성에 의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언어, 사고, 그리고 인식은 한 개념이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이 없다면, 마비되고 소멸될 것이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 개념이 조합되는 독특한 방식이 있는가? 이에 대한 중론의 답변은 부정적이다. 개념을 서로 관련시키는 독특한 방법은 없다. 사고자가 생산하는 개념들, 그들을 연결시키는 방식,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특정한 지식과 진리의 많은 고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주어진 사고자의 전제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어떤 주어진 실재의 체계(혹은 이론)안에서 그 체계의 전제를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드러냄 자체가 전제에 의해 이미 결정된 개념과 범주를 구사해야 하므로 순환론에 구속되기 때문이다. 중관학파는, 실재를 기술한다고 하는 모든 주장이 독단적일 수밖에 없고, 그 주장의 진리성을 드러내려는 모든 시도가 순환적임을 발견했다.

이제 이상의 중관학파의 논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개념 내지 개념적 체계란 상대적이다. 어떠한 개념이나 개념적 체계도 독립적으로 진리를 낳지는 못한다. 한 체계에 의해 생성된 진리는 반드시 다른 것에 의해 생성된 것에 의존한다. 결국, 어떠한 체계도 절대적 진리와 타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 실재에 대한 모든 이론은 개념적 구성 vikalpa이며, 각 구성은 특정한 측면과 관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각 체계의 옹호자는 자신의 체계가 반드시 다른 것에 의존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절대적 진리와 무조건적 타당성을 주장하며, 다른 체계를 그릇되고 잘못된 것으로 거부한다. 그러한 망각의 원인은 실재, 절대자, 궁극자, 무조건자에 대한 인간의 추구이다. 그래서 철학자나 다른 체계 설립자들은 실재에 대한 각자의 견해와 구성에 집착한다. 그러한 집착은 실재에 대한 견해 view of reality와 실재 자체 reality itsel81)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에 기인한다. 이 무지가 괴로움의 원천이다. 다시 바꾸어 말하자면 실재에 대한 견해와 실재 사이의 괴리가 절망, 불안, 불행으로 나타난다. 괴로움과 속박의 극복에 있어서 붓다가 무집착을 강조했던 것을 깊이 성찰하여, 나가르주나는 모든 사고구성의 상대성에 주의를 환기시킴으로써 모든 집착의 근원을 제거하여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시도했다.

중관학파에 따르면, 해탈의 지혜라는 의미에서 참된 철학은 명 nama과 색 rupa에 의한 실재의 구성의 한계에 대한 변증법적 의식이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대한 통찰을 주고자 이성이 자신의 결점과 무력함을 발견하는 것이다.82) 자유란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실재에 대한 개념적 구성에 사로잡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실재에 대한 모든 견해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최고의 지혜인 반야파라밀다 Prajna-paramita는, 한편으론 실재에 대한 모든 사고구성의 한계와 상대성에 대한 깊은 각성이고, 다른 한편으론 실재에 대한 직접적, 비지각적, 비개념적, 직관적 통찰이다.83) 그러므로 반야 prajna는 완전한 자유이자 동시에 완전한 평화이다.

(2) 변증법

중관학파는 모든 견해의 상대성이라는 근본적 교설에 부합되게 지지하고 옹호할 어떤 견해나 이론, 주장을 갖지 않는다.84) 따라서 중관학파의 방법은 철저한 귀류논증 riductio ad absurdum, prasanga이다.85) 중관학파는 주장이나 견해를 그 논자가 말한 그대로 취한 후, 바로 주장을 편 이가 받아들인 원리나 규칙, 명제를 구사하여 그 주장이 자기모순적임을 증명한다. 그리고 명제의 지지자 자신이 무모순을 진리의 필수조건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제 자신의 명제의 진리 주장을 철회해야만 한다. 명제의 주장자는, 실재에 대한 갈증 때문에 실재에 대한 자신의 구성에 포로가 되어 착각과 독단주의의 제물이 되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할지라도, 주장의 자기모순적 성격은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은, 중관학파에겐 어떤 주어진 명제, 예를 들어 T의 오류가 증명할 반대명제인 -T의 진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86) 이 점에서 중론의 쁘라상사 prasanga방법은 다른 철학자들이 구사하는 귀류법 reductio ad absurdum과 다르다. 그러므로 엘레아의 제노는, 실재가 순수한 변화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이 자기 모순적임을 보임으로써, 실재가 단일, 불변, 영원하다는 파르메니데스적 반대주장의 진리를 반증한다. 중관학파는 제노가 이런 주장을 할 자격이 없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파르메니데스의 명제 또한 자기모순적임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관학파가 실재나 절대자, 궁극자에 대한 어떤 주장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인과의 개념에 관해 중관의 변증법을 예시하고자 한다. 인과론에 관련해 인도의 철학파는 인중유과설 satkaryavada과 인중무과설 asatkaryavada의 두 부류로 구분된다. 전자에 따르면, 결과는 원인과 동일하여(혹은 원인 가운데 선재하며), 후자에 따르면 결과는 원인과 다르다. 샹캬, 아드와이따 베단따는 인중유과설이고, 니야야, 와이셰시까 그리고 경량부와 비파사 Vaibhasika와 같은 불교학파는 인중무과설이다.

중관학파는 어떤 개념에 관해 네 가지 가능한 대안을 인정한다.87) '인과'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1)사물은 그 자체로부터 발생한다, (2)사물은 타자로부터 발생한다, (3)사물은 그 자체와 타자 모두로부터 발생한다, (4)사물은 자체로부터도 타자로부터도 발생하지 않는다의 네 가지 대안이 있다.88) 이 대안들 가운데 (1)이 인중유과설이고, (2)가 인중무과설이다. 먼저 이 둘에 대한 중관학파의 논박을 보자. 중관학파는 이같이 지적한다. 만인 인중유과설이 주장하듯이, 결과와 원인이 전자가 후자 가운데 이미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동일하다면, 그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있을 수 없으며, 인과를 논할 수조차 없다. 왜냐하면 인과성 causality이란 두 사물 사이의 관계이고, 그것이 진정한 관계이기 위해서는 원인과 결과 사이에 차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중유과설은 원인과 결과를 동일화함으로써 인과성의 개념을 무의미하게 만든다.89) 중론은 계속해서 원인과 결과는 어떤 면에서는 동일하고 다른 면에서는 다르다는 논리도 부당하다고 지적한다. 만일 원인과 결과가 인과관계에 적합한 면에서만 다르다면,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다는 주장은 분명 오류이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다는 주장은 어느 경우이건 불합리하다. 이 모든 것은 만일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다면, 한편에 대해 긍정되거나 부정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른 편에 대해서도 긍정되거나 부정될 수 있다는 말로 나타낼 수 있다. 만일 나무가 씨앗의 결과이며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다면, 나무가 30피트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씨앗이 30피트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다는 주장은 자기 모순적이고 불합리하다고 중관학파는 결론짓는다.

인중무과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논박한다. 만일 원인과 결과가 전혀 다르다면 그 둘 사이의 관계는 정확히 무엇인가? 그 관계를 인과적이라고 답하는 것은 선결문제 미해결로서 답이 될 수 없다. 어떠한 답변이건 의미가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사물 중에 하나가 원인이고 다른 것은 결과임을 얘기해야 한다. 하나를 원인이고 다른 것을 결과라고 부르는 이유가 제시되지 않는 한, 어떤 것이 다른 것의 원인이라는 이야기가 모두 말장난이 된다. 만일 그와 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떤 것이 단지 그것에 '원인'이라는 이름을 부여했기 때문에 원인이 되고, '결과'라는 이름을 주었기 때문에 결과가 된다는 망상에 빠져 있음을 틀림없다고 중관학파는 공박한다. 만일 그렇다면, 다만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만으로도 한 사물을 다른 사물로 바꿀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만일 결과가 원인과 전혀 관계가 없다면, 아무것도 다른 것을 생성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라도 다른 것으로부터 예를 들어, 돌로부터 우유가, 모래로부터 기름이 생산될 수 있을 것이다.90) 그러나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중론의 논점은, 원인과 결과가 절대적으로 다르다는 견해도, 그들이 전혀 동일하다는 반대명제와 같이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논점을 좀더 일반적으로 표현하면, 인중유과설이건 그 반대인 인중무과설이건, 관계된 두 사물을 결합시키고 분리한다는 두 가지 기능을 갖는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분리가 없으면 결합이 있을 수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91) 관계의 한 측면을 배제하고 한 면만을 독단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관계의 이중적 역할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주장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불합리와 모순으로 이끌 뿐이다.

세 번째 대안은, 첫째 대안에 대한 논박과 두 번째 대안에 대한 논박을 함께 놓으면 자연히 이루어지므로 별 문제가 없다. 다시 말해서, 만일 사물이 자체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이 불합리하고, 그것이 타자로부터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도 비합리적이라면, 사물이 그 자체와 타자, 함께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도 분명 불합리하다.92) 네 번째 대안은 논박의 여지도 없다. 그 자체로 인과성의 포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 사이에 어떤 종류의 관계도 없으며, 따라서 사물이 멋대로(우연히) 일어난다는 견해이다. 이것은 나가르주나가 이 견해를 지지한다는 뜻이 아니다. 정반대로, 사물이 우연히 일어난다는 견해도 실재에 대한 하나의 주장이라는 사실에 그는 주의를 환기시킨다. 더욱이, 그런 견해를 갖은 사람은 '원인'과 '결과'라는 말을 구사할 권리도 없다. 다시 말해서, 만을 사물이 멋대로 일어난다면, '원인'과 '결과'는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한편으론 우연론을 지지하면서 원인과 결과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그러므로 나가르주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인과론의 비판을 맺는다. '어디서나 언제나 사물은 자신으로부터도, 타자로부터도, 양편 모두로부터도, 혹은 원인 없이도 일어날 수 없다.'93)

인과에 대한 이 변증법적 비판의 교훈은, 절대적 의밀 이해된 원인-결과는 모순으로 이끌 따름이라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는 상대적, 의존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을 지시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이 개념들은 모순을 낳고 만다. 다시 말하면, '원인'과 '결과'는 서로 다른 개념적 틀과 인습 속에서 다른 지시대상을 가진 상호의존적 개념이다.94)

나가르주나는 실체 substance와 속성 attribute개념도 유사한 방식으로 분석한다. 혹자는 실체가 아니라 오직 속성만이 실재라고 주장하며, 또 혹자는 속성이 아니라 오직 실체만이 실재라는 반대명제를 주장한다. 그러나 나가르주나는, 속성 없이 실체는 알려질 수 없고, 실체 없이 속성은 존속할 수 없다고 말한다. 속성이 어디에 존재하는가? 실체 안에서인가, 밖에서인가? 실체와 속성은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 여기서도 또한 독단적 변론자는 실재를 상호의존적 두 존재의 어느 하나로 고집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실체 없이는 속성도 없고 또 그 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실체와 속성이 상호의존적 존재라고 말함은 실체와 속성이 모두 절대적, 궁극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다. '상호의존적 존재'란 각각의 실재는 다른 것에 의해 조건지워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중 어느 것도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의존적, 상대적으로 존재한다.95) 따라서 중관학파는 단지 우리가 '실체'와 '속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도 '실체'나 '속성'이라고 불리우는 독립된 사물이 있다는 착각에 희생되지 않도록 경고한다. 나가르주나는, '존재-비존재','자아-비자아','단일-다수','주관-객관','정지-운동' 같은 다른 개념도 마찬가지로 분석하고,96) 이 개념 중의 어느 것도 어떤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실체를 지시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상호의존적 개념으로 보면 그들은 상대적 존재를 지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절대적, 궁극적, 독립적 존재를 지시하는 것으로 여기면, 이들 개념은 모순과 부조리에 떨어진다.

(3) 공성 Sunyata

인과를 부정함으로써 나가르주나는 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허무주의를 허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파괴적 변증법은 상견 etermalism과 단견 nihilism의 위험한 극단을 피하고 중도를 걸으라는 붓다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중론은 허무주의가 아니며, 정반대로 진정한 중도이다. 실재를 참이다 혹은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조리하다고 나가르주나는 가르친다. 실재는 그저 있을 따름이다.98)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인과의 부정은, 실재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전제에서만 실재의 부정이 될 수 있다. 이 전제가 참이라고 증명되지 않는 한, 나가르주나가 실재를 부정한다고 공박할 수 없다. 나가르주나가 인과개념에 대한 변증법적 비판에 의해 현시하는 것은, 바로 실재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정의 부당성이다. 그러므로 중관학파의 비판의 의의는, 실재의 부정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의 개념이 실재 가운데 어떤 절대적 지시대상을 갖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가르주나가 개념은 공하다 sunya라고 말한 까닭이다.99) 강조할 점은, 개념의 공성은 실재의 공성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00) 그러나 때때로 나가르주나가 실재를 공성 sunyata으로 말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실재가 비존재나 환상이라는 것이 아니라, 개념이 지시하는 것이 절대적, 독립적, 무조건적 방식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101) 그러므로 중관학파는 허무주의가 아니다. 오직 개념과 개념적 구성을 실재와 그릇 동일시하는 자만이 전자의 ()성으로부터 후자의 그것에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리하여 허무주의자가 된다.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중론에 따르면, 인간으로 하여금 실재에 대한 그들 자신의 구성을 실재 자체로 착각하도록 유인하는 것은, 실재와 절대에 대한 갈망이다.102)

붓다의 진정한 추종자라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불교학파들은 붓다의 중심적 가르침인 연기설 the Doctrine of Dependent Origination을 그 완전한 깊이에 있어 이해하지 못했다고 나가르주나는 지적한다.103) 그들이 무지와 착각, 독단주의의 제물이 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래서 사우뜨란띠가와 와이브하시까는 그들 체계의 다르마 dharma을 절대적, 독립적, 무조건적 실재라고 주장했고, 다른 한편 요가짜라는 의식 vijnana이 유일한 실재라고 주장했다. 이 모든 학파들은 실재와 무조건적 존재에 대한 갈망 때문에, 아무것도 무조건적,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다른 것에 의존하여 존재한다는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을 망각했다. 아무것도 절대적, 독립적, 무조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독존적 실체가 없다는 즉, 모든 존재 dharma는 자성이 없다. svabhavasunya는 말이다. 그러므로 중론의 상대성과 공성 sunyata이란 연기설과 다름 아니며,104) 그 가르침 때문에 나가르주나는 스승에게 예경드렸다.105)

(4) 세속체와 승의체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붓다는 두 가지 진리, 즉 이름과 형태를 통해 파악되는 세계 즉 현상적 세계에 관한 것과, 모든 이름과 형태를 초월한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관한 것을 가르쳤다. 이름과 형상의 세계는 철저하게 연기설에 지배된다. 그러므로 어떤 개념적 체계에 의해 생산된 진리는 모두 다른 진리와 체계에 상대적이고 의존적이다. 현상의 영역내에서는 절대적 진리나 절대적 실재에 대한 진리가 있을 수 없다. 모든 현상적 진리는 상대적, 조건적이며, 우리의 지각-개념적 경험의 특수 영역 안에서만 타당하다. 이런 까닭에 나가르주나는 현상적 진리를 '인습적', '상대적', '저차적', 진리 samvrti-sarya라고 부른다.106)

다른 한편, 지각과 개념을 초월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적, 초세속적, 무조건적 진리가 있다. 나가르주나는 이것을 승의체 paramartha-satya라고 부른다.107) 이것은 반야 prajna, 즉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대한 직접적, 직관적 통찰108)속에서 파악된다. 세계가 영원한가 아닌가, 유한한가, 무한한가, 영혼이 육체와 같은가 다른가, 열반을 성취한 사람은 사후에 존속하는가, 열반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비경험적 질문에 대해 붓다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한 침묵은, 이러한 질문들이 이성과 감각적 경험을 넘어선 것이며, 따라서 이름과 형태를 통해서 이들에 답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사람들에게 혼란과 무지, 독단주의를 일으킴으로써 괴로움을 이기려는 당면 과제를 소홀히 하도록 만든다는 자각에 기인한다. 그러한 의문과 그들이 만드는 당혹은 반야의 빛 안에서 간단히 소멸된다.

나가르주나에 대한 독단적 반대자들은, 고대건 현대건, 그의 변증법을 파괴적이며 상식과 과학, 철학을 잘못되고 무용한 것으로 거부하도록 장려한다고 비난해왔다. 이러한 비난은 심한 오해에 근거한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현상적 영역, 상대적 진리의 영역에서 상식이나 과학, 그리고 철학의 유용성과 타당성을 거부하지 않는다. 정반대로 그는 현상계를 다룸에 있어 그들의 중요성과 효용을 충분히 인정한다. 그는 논리와 이성 없이 인간은 아무것도 알 수 없으나, 그것으로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109) 그렇다면, 나가르주나가 거부한 것은, 논리와 이성의 실용적 가치나 제한된 현상적 타당성이 아니라 실재를 드러낼 수 있다는 그들의 허풍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그러므로 그들이 무지와 고통의 손아귀에 한없이 사로잡혀 있지 않도록, 그 무지와 착각을 일깨우고자 했다.

결론을 맺기 전에 '세속적 존재 samsara와 열반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나가르주나의 가장 난해하고 당혹스러운 발언에 대해 몇 마디 하고자 한다.110) 이 말의 핵심은 세속적 존재와 열반이 두 개의 분리된 존재론적 영역이 아니라 다른 관점으로부터 보여진 동일한 실재라는 것이다. 윤회 samsara로부터 열반 nirvana에로의 운동은 인식론적이며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자신의 무지와 착각, 독단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고구성에의 집착을 제거할 때, 일상적 경험의 세계인 상사라는 니르와나로 변현된다. 그렇게 변형된 세계를 경험하는 힘이자, 그러한 경험이 초래한 지혜이다. 그러므로 반야는 인간에게 치유적 효과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를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인간, 즉 탐욕과 이기심, 부지, 그리고 두려움이 없는 인간으로 바꾼다. 즉, 실재에의 통찰인 반야는 완전한 자유와 평화를 가져온다.

최고의 지혜이자 모든 집착과 망상으로부터의 해방인 반야의 교설에 일관되게 나가르주나는 공성이나 상대성, 열반, 혹은 붓다 자신에조차 집착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111) 모든 견해의 상대성을 포함해서 어떤 것을 무조건적 실재로 집착함은 망상과 고통을 낳는다. 이런 뜻에서 나가르주나는 사람들에게 붓다나 4성제, 열반이라는 개념으로부터도 벗어나라고 가르쳤다. 열반은 존재일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다른 모든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그것도 생사에 종속될 것이다. 또 그것은 비존재일 수도 없다. 만일 그것이 비존재라면, 그것은 반드시 존재에 의존할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도 실재가 아니라 다만 망상일 뿐이다.112) 그러나 주의할 점은, 나가르주나가 열반이 실재가 아니라고 한 말은, 열반이라는 개념에 의해 지시되는, 독립적 실재로의 열반이 비실재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가르주나는 열반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열반의 개념에 대한 집착을 경고하는 것이다.113)

석가모니불의 심오하고 숭고한 가르침은 나가르주나의 변증법에서 명료하게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중관학은 불지혜의 꽃이다. 중학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티베트와 선불교의 위대한 지혜를 고무시키는 원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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