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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7/06/18 (10:44) from 84.173.184.79' of 84.173.184.79' Article Number :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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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왜 술을 마시는가





  
인문산책/ 시인은 왜 술을 마시는가  

진보평론  제5호  
유중하(연세대학교 교수/ 중어중문학)  


“세계는 나의 내부에 그를 영접할 공간을 창조한다.” -쟝 발 Jean Wahl-.

1.

‘미완의 4․19’가 기정의 사실로 고착된 것은 5․16을 거치면서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징후로 떠돌던 것이 부동의 현실로 굳어지면서 김수영은 일종의 시적인 도피처를 마련하는데, 그런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겸하여 여름철을 나기 위한 피서의 시적 공간으로 설정된 것이 바로 <신귀거래>(新歸去來) 연작 아홉수이다. 더위에 대해 유별난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고인이 하안거(夏安居)를 더하여 술이나 마시자고 마련한 의도적인 시의 공간인 셈이다. <신귀거래> 연작의 편편을 읽노라면 4. 19의 좌절이 가져다 준 실의를 술로 달래고자 하는 취태가 어렵지 않게 감지되기도 하는 것이다. 특히 연작 아홉 수 가운데 <모르지?> 같은 시편은 영락없이 “술에 취해서 쓰는 시”, 곧 술잔을 지척에 두고 쓴 일종의 희작(戱作), 말하자면 시의 문법을 고의로 파괴한 작품으로 분류됨직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희작의 시편 속에서도 김수영의 시적 공력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서이다.

五月革命 이전에는 백양을 피우다
그후부터는
아리랑을 피우고
와이샤쓰 윗호주머니에는 한사코 색수건을 꽂아뵈는 理由,
모르지?
아무리 더워도 베와이샤쓰의 에리를
안쪽으로 접어넣지 않는 理由,
모르지?
아무리 혼자 있어도 베와이셔쓰의 에리를
안쪽으로 접어넣지 않는 理由,
모르지?
술이 거나해서 아무리 졸려도
의젓한 포오즈는
의젓한 포오즈는 취하고 있는 理由,
모르지?
모르지?

인용부 첫 구절의 “오월혁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새삼 부연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4․19를 ‘의거’(義擧)라는 표현으로 그 의미를 축소시키면서 군사정변을 혁명이라 추켜올린 것을 조소하거나 혹은 자조적인 심경으로 적은 것이라 보면 그리 틀린 이해는 아니다. 피우던 담배를 백양에서 새로 나온 아리랑으로 격을 올린 것 그리고 와이샤쓰 윗호주머니에 색수건을 꽂음으로써 남들 보기에 외양을 그럴 듯하게 갖춘다는 행위 역시 ‘오월혁명’을 겪음으로 해서 사정이 낳아진 것인 양 위장을 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 보면 대강의 사정 설명이 될 듯하다. 그럼에도 이 시의 본령은 그 뒤로 이어지는 구절, 곧 “아무리 더워도 베와이샤쓰의 에리를 안쪽으로 접어넣지 않는 이유”에 감추어져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시가 씌어진 시점은 1961년 7월 13일.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절기와 맞물려 있다. 갈무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베와이샤쓰’를 좀더 오래 입기 위해서 혼자 있을라치면 “에리”를 안쪽으로 접어 입는 일은 그 무렵으로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을 터, 땀이 쉽사리 배기 마련인 목 부위의 ‘에리’를 접어 입음으로써 한 번 더 입을 수 있는 효과를 노린, 말하자면 사내 대장부라면 필시 시시콜콜하다고 할 법한 행위를 김수영이 문제삼아 시의 소재로 삼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에리’를 접는다는 행위에 이어 ‘에리’를 뒤집어 입는 행위가 뒤따르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하자면 뒤집는다는 동작 동사가 감추어진 그림으로 시편에 숨어 있는 것이다. 뒤집는다는 우리말 동작 동사로부터 쉽사리 연상작용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으나, 그 말을 한자말로 변화시켜 전복으로 바꾸면 한결 이해에 편리해진다. 곧 에리를 접는다는 행위는 에리의 안과 밖을 뒤집는 행위인 셈인데, “베와이샤쓰의 에리를 안쪽으로 접어넣지 않는”다는 시적 언표의 의미는 곧 오월혁명 이후부터는 뒤집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고, 따라서 보면 4․19로 완전한 혁명적 전복(顚覆), 곧 180도 뒤집기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원상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뒤집기의 실패가 미완의 4․19를 암시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작품 가운데 행갈이를 통해 열한 차례나 반복되는 “모르지?”라는 의문형 종결어미도 같은 연장선 위에 있다. 곧 안다라는 말을 모른다고 일단 전도, 곧 뒤집은 다음 그 전도된 모른다를 다시 한 번 “모르지?”로 비틂으로써 4․19가 다시 되뒤집어진 채 왜곡되고 있음을 숨은 그림으로 형용하고 있는 것이다. 시적 언어의 운산치고는 노회함을 극한 대목이 아닐 수 없으며, ‘오월혁명’에 대한 조롱과 더불어 스스로에 대한 자조가 현란한 언어의 놀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간취케 한다.

그럼에도 <모르지?>라는 시에서 정작 중요한 대목은 별도로 있다. <신귀래> 연작에 대한 애초의 기획이랄까 발상이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로부터 발상을 빈 일종의 패러디라는 이야기는 구구한 언설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모르지?>의 머리를 장식하는 다음의 구절만큼은 별도의 대접을 통해 살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李太白이가 술을 마시고야 詩作을 한 理由,
모르지?

중국문학 근처를 배회하는 자 치고 이태백의 음주시를 한 번이라도 읊조려 보지 않은 자가 없을 줄 알고, 또 몇몇 문학사류에서도 중국문학과 음주에 대해 삼배통대도(三盃通大道)니 일두합자연(一斗合自然)이니 하는 문구를 들먹이며 술을 일컬어 자연과의 합일을 위한 비밀스런 통로인 듯이 거론하고 있음은 진부한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부한 상식이 김수영의 <신귀거래> 연작 가운데 하나인 <모르지?>에 들어와 아무렇지 않은 듯이 혹은 일부러 표나게, 행갈이를 통해 열한 차례나 되뇌어진 연유는 따로 있는지도 모른다. 아울러 “모르지?”라는 의문형 언사는 듣기에 따라서는 시를 읽는 독자인 상대방에 대해 너는 결코 알 턱이 없지만, 시적 화자인 김수영 자신만큼은 알고 있다는 뉘앙스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말하자면 김수영 자신만이 알고 있다고 추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김수영은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일까.

2.

수수께끼 혹은 숨은 그림 찾기 놀이 같은 우리의 추리를 위해 술을 먹고서가 아니라 술을 먹고서“야” 비로소 시작을 한 이태백의 시 가운데 다음 작품을 읽는 일은 여러 모로 도움이 적지 않을 것이다.

兩人對酌山花開 두 사람이 술 마시니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一盃一盃復一盃 자네 한 잔, 나 한 잔 그리고 꽃도 한 잔
我醉欲眠君且去 술이 거나해 이젠 졸리니 자넨 돌아가셔도 좋고
明朝有意抱琴來 내일 아침 또 술생각 나면 가야금 끼고 오셔도 좋고

이태백의 허다한 음주시 가운데서 위의 <山中對酌>(산중대작)을 굳이 들먹이는 소이는 김수영이 <모르지?>를 만들면서 필시 위의 시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에 기초하고 있다. 그 증빙이 되는 구절이 바로 위에서 “술이 거나해 이젠 졸리니”라고 옮긴 바 있는 “我醉欲眠”(아취욕면)이라는 네 글자가 아닐까 한다. 술에 취해 잠이 쏟아지는 광경을 그린 이 장면이 앞서 인용한 가운데 등장하는 “술이 거나해서 아무리 졸려도”라는 구절과 겹쳐지는 그림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추정이 억단으로 그칠 공산도 크지만, 앞서 이야기한 <모르지?>에 편재되어 있는 뒤집기, 곧 전복과 관련지어 살필 때 보다 주목해야 할 구절은 다름 아닌 “兩人對酌山花開”(양인대작산화개)라는 일곱 글자가 아닐까 한다.

작품 <山中對酌>의 내용을 이루는 배경을 산문으로 풀자면, 봄산에 꽃이 피니 호시절을 놓칠 수 없어 친구를 불러 술잔을 마주 대한 채 꽃을 완상하노라는 내용으로 이해하면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편의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 보면 사정은 적잖이 달라진다. “兩人對酌山花開”란 두 사람이 술잔 마주 대하여 권커니 잣커니 함으로써 비로소 꽃이 핀다는 내용인 것이다. 예컨대 “兩人對酌山花開”를 뒤집어 만일 “春山開花兩人酌”(춘산개화양인작)이라 하면 어떨까. 후자의 경우는 봄산에 꽃이 피니 그 꽃을 앞에 놓고 술에 취하여 즐긴다는, 말하자면 순리에 맞는 진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순리에 맞는 진행이라 함은 물론 일상의 세계가 부여하는 산문적 질서에 순응함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객관적 세계 가운데 꽃이 피어 있음이 전제되고 이어서 그 꽃을 즐기기 위해 이웃에 사는 벗과 더불어 술잔을 나눈다는 질서가 구축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말하자면 산에 피어난 꽃(A : 객관적 현실) → 술과 더불어 꽃을 즐기면서 꽃에 취하는 행위(A` : 객관세계에 조응하는 주체)까지가 구축하는 질서는 산문적 질서이다. 그러나 술을 마시니 비로소 꽃 B가 핀다는 것은 일상성 속에서 꽃이 피어 그 정경을 즐기기 위해 술 마신다는 전후관계의 전도, 그리고 꽃이 피지도 않은 객관세계에 주체가 개입하여 술을 마심으로써 꽃을 피운다는 주객의 전도에 다름 아니다. 산문적 질서에 기대면 이러한 A로부터 B로의 전도는 가히 주객과 교란이거나 혹은 착란이기 십상이다.

3.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지만, 만일 김수영 생전의 일상과 행동거지에 대한 제대로 된 회고담들이 하나로 묶여진다고 가정한다면 그 가운데 대종을 이루는 부분이 술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아닐까 한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우리는 고인의 술에 관한 평소의 대접이 어떠했는가를 알게 하는 단서를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년 동안은 사회도 대체로 조용했지만 시단도 무척 조용했다고 생각한다. 생각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조용한 것을 좋게도 볼 수 있고 나쁘게도 볼 수 있다.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글쓰는 사람들이 그전같이 자주 만나지 않고 집에 들어앉아서 책을 보고 일을 하게 되었으니 좋다는 것이고,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은, 일반사회는 조용한 것이 좋지만 詩人이나 文人들은 그래도 자주 만나서 술을 마시고 이따금씩 싸움질도 해야지 그 속에 무엇이 나올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나의 결론은 지난 1년간을 돌이켜 볼 때 한국 시인들은 들어앉아서 공부도 안 하고 나와서 술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틈에 조용한 그늘 속에서 편안하게 번성한 것은 만성이 되어버린 사기와 협잡의 舊惡뿐이다.

우선 위의 글이 ꡔ사상계ꡕ라는 지면의 시 월평 형식으로 씌어진 글이며, 더욱이 1963년 12월치의 몫이니만큼 63년의 시단 전반을 아우른, 말하자면 연간평임을 염두에 두자. 김수영은 그 63년을 대체로 조용한 한 해로 평가한다. 위의 글에서 조용하다는 형용사와 대극을 이루는 것이 바로 싸움질이라는 말일 게다. 시인이나 문인이 자주 만나서 술을 마시고 이따금씩 벌이는 싸움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일반사회의 단순한 소요나 분란 혹은 취기 어린 작태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김수영은 대관절 왜 63년의 시인들을 싸잡아 술도 마시지 않았다고 결론짓고 있는가. 위의 문장을 읽노라면 김수영의 육성에서 우리는 그가 단순히 술 예찬론을 넘어서 있음을 감지한다. 곧 술은 문인이나 시인의 필수적인 덕목으로 고양되고 있음을 목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수영의 시작 행위는 들어앉아서 하는 공부와 이따금씩 벌이는 싸움질이라는 난장트기, 따라서 공부와 술이라는 두 개의 기둥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신이 새로이 사람을 세우기(立) 위해 절구질 혹은 다듬이질하듯이 다듬잇돌을 방망이로 두들기듯 소란을 피워대고(搗亂), 전복을 위한 바퀴를 180도 굴려 돌리고(轉), 속박의 굴레를 벗기 위해 두 손으로 온통 몸부림을 치면서(掙扎), 심지어는 스스로를 광인의 형상으로 빚어내면서까지 싸움질을 벌이고 깨뜨리고자(破) 했던 대상이 바로 “적막”(寂寞)과 “태평”(太平)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김수영이 술을 통해 싸움질을 걸고자 했던 조용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새삼 중언부언할 필요조차 없다.

<世代交替의 延手票>(세대교체의 연수표)라는 제목의 이 글과 관련하여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이밖에 또 있다. <世代交替의 延手票>에서 “延手票”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 실제의 발행일 이후의 날짜를 발행일로 하여 적어 놓은 앞수표란 바로 당시의 젊은 시인을 두고 일컫는 표현으로, 연간평을 쓰기 위해 그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느낀 소감은 이렇게 소회되고 있다.

스타일도 현대적이고 말솜씨도 그럴듯한데 가장 중요한 생명이 없다. 그러니까 작품을 읽고나면 우선 불쾌감이 앞선다. 또 사기를 당했구나 하는 불쾌감이다. 한국의 젊은 시단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금년에도 이 사기성의 치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니까 우리나라는 진정한 혁명을 못하고 있고 진정한 혁명을 할 자격이 없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이런 극단적인 생각까지도 든다.

이러한 기만성은 詩뿐만이 아니라 詩評論에도 있다. 나는 李洧植의 잘 정리된 아카데믹한 시론보다는 단도직입적으로 急所를 찌르는 張一宇의 白書를 높이 산다...... 국내의 시 비평가들은 시인과 마찬가지로 그중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고, 우리 시단의 가장 급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핀다로스나 다스케마이네나 알렉산더 포오프를 인용하고 <동위수치>를 운운하면서 멋장이 제목을 붙이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도 몇천배나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을 가려내는 일이다. 한말로 말해서 우리나라 시단은 썩었다.

가히 극언에 가까운 거침없는 발언이다. 이른바 “자기검열을 몰랐던 직선의 산문가, 50이 다 되도록 갓 스물의 청청한 젊음의 소유자”로 일컬어지는 김수영이 시단의 후배 시인들에게 내뱉는 이런 발언은 독설에 다름없다. 시인이란 존재는 모름지기 생명을 빚어내는 존재이며, 평론을 하는 자의 책무는 생명을 가려내는 일이라는 진술은 오늘날의 문학 공부를 일삼는 자들의 뒷통수를 후려치는 발언은 아닌가. 어떻게 생명을 빚어낼 것이며, 어떻게 생명을 가려낼 것인가를 묻는다고 할 때,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는 아마 모르긴 몰라도 더욱 살갑게 다가오지 않을까.

우등상도 타고 학위도 받은 어느 대학원생이 마지막 지시를 받기 위해 아가시 선생을 찾아갔다. 그 위대한 스승은 그에게 작은 물고기를 보이며 그것을 설명해보라고 명하는 것이었다.
대학원생 <이건 단지 개복치라는 물고기가 아닙니까?>
아가시 <그건 다 알고 있네. 그것에 대한 설명서를 작성해보게.>
몇 분 후 학생은 생물학 교과서에 써 있는 대로 헬리익테린쿠스 과(科), 이키투스 헬리오디프로도쿠스라는 설명서 --- 그러니까 일반인의 지식으로부터 이 평범한 물고기를 은폐시키기 위해 학자들이 도입한 용어를 동원한 설명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아가시는 다시 학생에게 그 물고기를 설명하라고 명령했다.
학생은 4페이지에 달하는 리포트를 제출했다. 그러자 아가시는 물고기를 자세히 보라고 명령했다. 3주가 흐르자 학생은 마침내 물고기 든 어항에 손을 집어넣어 만져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물고기를 어항에서 끄집어내 칼로 고기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살을 도려냈다. 마침내 물고기는 그렇게 해서 죽고 말았다. 그러자 그 학생은 물고기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게되었다.

에즈라 파운드의 ꡔ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ꡕ의 첫 머리에 등장하는 일화이다. 파운드는 루이 아가시라는 19세기의 생물학자가 자신의 학생에게 사용한 위의 방법을 통해 현대과학이 발달했다고 이야기한다. 과학은 진공 속에 덜렁 매달린 중세의 논리학이라는 가냘픈 칼날 위에 축조된 것이 아니며, “발견하고 싶은 사물의 수에 상응하는 다소 추상적인 몇 개의 실체를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파운드가 시와 산문문학을 연구하는 옳은 방법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가시와 같은 현대생물학자가 추구하는 방법, 곧 대상을 직접 면밀히 조사하고 하나의 슬라이드, 즉 표본을 다른 표본과 부단히 비교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슬라이드 위에 올려진 것은 다름 아닌 중국의 한자(漢字)였음은 아는 사람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음성 문자의 한계를 표의 문자 특유의 이미지로 극복하기 위해 “人, 木, 日, 東” 따위의 글자가 어떻게 본질적 이미지로 전화하는 가를 타진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고백하지 않으면 안될 사정이 하나 있다. 이실직고하자면 파운드가 제시한 위의 에피소드는 실은 필자가 은근슬쩍 한 대목을 바꿔치기 한 것이다. 인용부에서 “3주가 흐르자 학생은 마침내 물고기 든 어항에 손을 집어넣어 만져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물고기를 어항에서 끄집어내 칼로 고기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살을 도려냈다. 마침내 물고기는 그렇게 해서 죽고 말았다”라는 구절은 “3주간이 지나 물고기의 부패도가 심해졌다.”라는 구절로부터 바꾼 것이다. 남이 예거한 일화를 무단 절취, 도용하여 그 내용을 훼손시켜가면서 왜곡시킨 죄값을 치르기 전에 그 이유를 석명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자리에서 화이트헤드가 ꡔ과학과 시ꡕ에서 인용하고 있는 워즈워스의 영시 가운데 다음의 한 구절을 재인용했으면 싶다.

Our meddling intellect
(우리네 잘난 지성이 끼어들어)
Misshapes the beauteous forms of things
(사물의 아름다운 모습 일그러뜨리나니)
---We murder to dissect
(우리는 해부를 한답시고 죽이는 것.)

화이트헤드가 위에서 워즈워스의 시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이른바 과학이라는 것이 근대세계로 접어들면서 어떻게 자연의 전체상을 파멸시켰는가를 일깨워주기 위해서다. 낭만주의의 대표적 시인인 워즈워스는 언제나 자연의 전체상을 개별적인 사례의 색조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했으며, 바로 그런 까닭에 워즈워스는 “수선화와 더불어 웃고”, 앵초꽃 속에서 “너무나 깊은 눈물의 사상”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등상도 받고 학위도 받은 대학원생은 레포트를 제출하기 위해 관련 서적을 참조한다. 그리고도 해결이 되지 않자, 급기야 물고기를 어항에서 꺼내 해부를 하고 말았다. 물고기는 그렇게 해서 죽었고, 물고기의 생명은 그렇게 해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지금 우리가 평소 한다고 하는 이른바 문학연구라는 것은 물고기를 죽이는 일과 무관한가? 그렇다면 물고기를 살리는 일, 생명을 주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컨대 이런 물고기는 어떨까?

그러나 오늘은 말복도 다 아니 갔으며
밤에는 물고기가 물밖으로
달빛을 때리러 나온다

말복이 채 지나기 전이라면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절, 시내를 흐르는 냇물은 한낮의 태양열로 필시 온도가 높을 터이고, 또 밤이 늦도록까지 그 더운 기운은 가셔지지 않을 것이다. 미물인 물고기 역시 더위를 먹었을 법하다. 달이 뜨면서 밤이 깊어 오자 더위는 한풀 꺾이고 잔양(殘陽)의 기운을 헤치듯 음(陰)의 화신인 달이 서늘한 빛으로 물위를 비추자 물고기도 서늘해져가는 초입에 든 달빛을 보고는 신이 나서 물 위로 솟구쳐 오르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詩>에 이르기를 <魚躍于淵>(어요간연)이라는 구절에 비해 전혀 무색치 않은 것은 바로 “때리러”라는 동사를 주목하기 때문이다. 연못에서 뛰쳐오르는(躍) 물고기의 생동감이 발이 달려(足) 그 발로 물을 차고 올라오는 모습으로 그린 그 생동감도 그럴 듯하지만, 물고기가 서구 근대 문명과는 다른 새로운 문명의 달빛이 그리워 그 달빛을 받으러가 아니라 때리러 나오는 그림은 전자에 비해 결코 손색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이 꿈틀거리며 도약하는 힘이 아닐까. 어찌 “생물학 교과서에 써 있는 대로 헬리익테린쿠스 과(科), 이키투스 헬리오디프로도쿠스라는 설명서 - 그러니까 일반인의 지식으로부터 이 평범한 물고기를 은폐시키기 위해 학자들이 도입한 용어를 동원한 설명서를 가지고 돌아왔다”고 해서 될 일인가. 아니면 베르그송의 이른바 엘랑비탈(elan vital), 곧 “생명의 비약”이라는 용어가 어찌 “달빛을 때리러” 나오는 물고기의 기운 생동을 감당할 손가.

4.

주지하다시피 <시여, 침을 뱉어라>는 고인이 서거하기 직전 부산에서 펜클럽 주최로 행한 문학 세미나에서의 발표 원고이다. 시에 관한 김수영의 소견을 강연 형식을 빌어 발표한, 말하자면 일종의 詩論(시론)인 셈이다. 이 강연에서 김수영의 주된 관심은 시 창작자로서의 시인이라는 아이덴티티와 시를 읽고 평하는 평자 내지 시를 논하는 논자라는 아이덴티티의 길항 관계에 맞추어져 있다. 시를 쓰는 행위와 시를 논하는 행위를 가르면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김수영 자신이기도한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논하는 사람이 아니며,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그는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다”라는 언표에서 보듯이, 시를 쓰는 행위가 전제되고 그 뒤를 이어서 시를 논하되, 시를 논하는 행위도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라 못박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관절 시를 쓰듯이 시를 논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실제로 글을 쓰는 구체적인 과정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그리고 어쩌면 이 문제는 문학을 연구하는 자 일반에게 두루 해당되는, 아니 어쩌면 숙명적인 문제는 아니던가. 아울러 우리의 고민은 여기서 출발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부연하자면 시를 쓰는 행위와 시를 논하는 행위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고 서로가 서로의 글을 이역의 방외인처럼 대한다면? 앞서 거론한 바 있는 에즈라 파운드의 말마따나 “그들 자신이 주목할 만한 작품을 쓰지 못하는 이들의 비평엔 귀를 기울이지 말아라”라는 주문에 귀를 기울인다면 시를 쓰는 일과 시를 비평하는 일은 실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사업일지도 모른다. 파운드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물론 엘리오트의 8백행이 넘는 <황무지>의 초고를 4백여 행으로 과감하게 깎아낸, 말하자면 시인과 비평가라는 두 아이덴티티가 파운드 자신의 몸에 동서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를 쓰는 행위와 시를 평하는 행위를 놓고 김수영은 양자 사이의 모순 내지 갈등 관계를 본원적으로 고민해 들어간다. 그 첫 단추가 이렇게 풀어지고 있음은 주목에 값할 것이다.

나의 시에 대한 사유는 아직도 그것을 공개할만한 명확한 것이 못된다. 그리고 그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나의 모호성은 시작을 위한 나의 정신구조의 상부 중에서도 가장 첨단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없이는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유일한 도구를 상실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교회당의 뾰죽탑을 생각해볼 때, 시의 탐침은 그 끝에 달린 십자가의 십자의 상반부의 창끝이고, 십자가의 하반부에서부터 까마아득한 주춧돌 밑까지의 건축의 실체의 부분이 우리들의 의식에서 아무리 정연하게 정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시작상으로 그러한 명석의 개진은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이다.

위의 인용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김수영의 시편 가운데 적지 않은 수의 작품을 거론하지 않으면 안 될 터이지만, 오늘은 지면을 아끼자. 다만 주의해야 할 대립의 두 축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이른바 모호성과 명석성 사이의 두 축이다. 명석성이 시작 행위에 대해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방해가 된다는 것은, 김수영에게 있어서, 시를 쓰는 일과 시를 논하는 일 사이에 극단적으로는 적대적 모순관계가 가로질러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모순관계는 실로 여러 겹의 동심원적 구도를 통해 제시된다.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그려 보여주는 그 동심원을 이루는 양대 축을 그리자면 아래와 같은 도표가 가능하다.

모호성(무한대의 혼돈)-------------명석성
형식------------------------------내용
예술성----------------------------현실성
온몸------------------------------머리(사변)
모른다----------------------------안다
대지의 은폐-----------------------세계의 개진
음악(노래, 사랑의 유보)-----------의미(모험)
시--------------------------------산문

시를 쓰는 일과 시를 논하는 일의 외연으로부터 위와 같은 중층적인 동심원의 구도가 빚어지며, 그 한 가운데는 시와 산문이라는 두 개의 실체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 물론 이러한 구도를 제대로 보아내자면, 김수영이 만년에 경도해 마지 않았던 하이데거에 대한 주밀한 독서로부터, 엘리오트니 알렌 테이트니 하는 서구의 지혜를 거쳐, 심지어는 <문심조룡>과 <금강삼매경> 혹은 <대승기신론>에 이르는 불교적 상상력, 특히 원효를 매개로 한 화엄의 ‘공부’가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이러한 꼼꼼한 연결고리 및 동서 회통의 구명은 추후의 과제로 넘기자. 다만 한 가지 위의 동심원이 자칫 이분법의 나락으로 떨어질 우려가 있으므로 다음의 구절을 덧붙인다면 오해의 소지를 어느 정도 덜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시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생각할 때, 내용과 형식의 동일성을 공간적으로 상상해서, 내용이 반 형식이 반이라는 식으로 도식화해서는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노래의 유보성,즉 예술성이 무의식적이고 은성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반이 아니다. 예술성의 편에서는 하나의 시작품은 자기의 전부이고, 산문의 편, 즉 현실성의 편에서도 하나의 작품은 자기의 전부이다. 시의 본질은 이러한 개진과 은폐의,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내용과 형식이 시와 산문을 매개로 예술의 공간을 마치 아이들이 땅따먹기 놀이를 하듯 절반씩 점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로 작용하고 있다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서구적 근대 사유의 가장 본질적인 폐해를 이루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단적인 예로 위에서 김수영이 거론하고 있는 개진(開陳) - 실은 국내의 한 번역본의 표현대로 개시(開示)라는 용어가 더욱 적절하겠지만- 이 실은, 하이데거의 설명에 의하면, 단순한 숨음으로서의 은폐의 반대가 아니라 숨어 있지 않음(Unverborgenheit), 곧 이중의 부정을 통한 솟구쳐 오름인 것, 정현종의 표현을 빌면 “떨어져도 튀는 공”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떨어져도 튀는 공”이 그리는 운동의 행정은 수직낙하와 상승의 것이 아니라, ver라는 비분리전철이 “方向的偏離, 錯誤及轉變”(방향적편리, 착오급전변)을 나타내거나 혹은 “合在一起”(합재일기)와 “散開”(산개)라는 모순운동의 합성적 벡터를 뜻하는 것임을 염두에 두면, 그 동심원의 공간이 지니는 운동의 방향성을 알아차릴 수 있을 터이다. 양극의 긴장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이로써 그림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황동규가 굴리고 싶어한 바퀴로 말이다. 그러나 어찌 황동규뿐이겠는가. 노자도 그리고 사마천도 그리고 유협도 그리고 노신도 그렸거늘.

5.

에즈라 파운드는 이미지스트가 해서는 안 될 몇 가지를 제시하는 가운데 “평생에 걸쳐 권수가 많은 저작물들을 생산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단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일이 낫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단 하나의 이미지란 실은 단일한 그 무엇이 아니라 지적이고도 정서적인 복합체인 바, 갑작스런 순간적인 황홀경에 다름 아닌 복합체로서의 이미지야말로 시간적, 공간적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운 해방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문학이란 의미를 충전시킨 언어이며, 위대한 문학 역시 단지 가능한 한 최대로 의미를 충전시킨 언어에 다름 아니었다. 곧, “Dichten(시)= condensare(응축)”라는 파운드의 등식은 시가 지니는 본질적 속성을 더할 나위 없이 잘 드러내는 말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시에 대한 언어의 본질적 성격에 대한 파운드의 이러한 이해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 바로 하이데거의 다음과 같은 언술일 것이다.

모든 시인은 오직 단 하나뿐인 유일한 시로부터만 시작을 한다. 시인의 위대함은 오직 그가 얼마만큼 이 유일한 시에게 자신을 토로해서 자신의 시작적 언어를 그 유일한 것 가운데서 순수하게 보존할 수 있는가에 의해서 측정된다.

한 시인의 유일한 시는 말해질 수 없는 채로 머문다. 개별적인 시들이나 그 시들의 전체 또한 모든 것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비로 개벌적인 시가 이 유일한 시라는 전체로부터 말하고 있고, 또한 언제나 이 유일한 시에 관해 말하고 있을지라도, 유일한 시가 존재하고 잇는 장소에는 파도가 일고 있어서 언제나 시작적인 말함을 언제나 일렁이게 한다. 유일한 시가 존재하고 있는 장소에는 파도가 잘 날이 없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언어의 모든 움직임을 언제나 베일에 싸여 있는 근원에로 역류시키기도 한다. 일렁이는 파도의 진원지로서의 유일한 시가 존재하고 있는 장소는 베일에 싸여 자신의 본질을 감추기 때문에 그것은 형이상학적 혹은 미학적으로 생각하는 사람게는 우선적으로 리듬으로 나타난다.

위에서 “유일한 시”란 하이데거에 의하면 Gedicht를 가리키는 것으로 개별작품으로서의 시가 Dichtung임에 반해 시의 시, 곧 모든 시를 모아서 거두어들인 중심적인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시의 의미를 지닌다. 비분리전철 ge는 집합(集合) 혹은 군거(群居)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 유일한 시란 파문이 일어나는 진원지와 같은 장소이다. 그렇다면 파문은 어떻게 번지는가. 앞서 말한 동심원의 구도를 통해 주위로 번져나간다. 말하자면 시의 시, 유일한 시가 있는 자리로부터 파문이 퍼져나가는 것이다. 유일한 시가 자리잡고 있는 그 장소(das Ort)는 하지만 베일에 싸여 있다. 독일어의 dichten이라는 동사는 앞서 파운드의 설명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긴밀하게 압축한다(condensare)는 의미와 더불어 밀봉(密封)한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그 안에 닫아두어 밀도를 높인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밀도가 높은 그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바로 리듬이다. 리듬이란 그리이스어의 rhuthmos, 영어의 flow, 흐름, 곧 거기 있는 것은 음악으로서의 파동이다. 다시 말하자면 의미론적인 입자는 가리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든 혹은 리듬이든 그것이 그렇게 밀봉되면 그 밀폐된 공간에 갇혀 숨을 쉬지 못하고 결국은 죽게 되는 것은 아닌가. 말하자면 시에서 가.장 중요하다 하는 이른바 “생명”이 거기에서 숨쉬지 못하고 죽은 언어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겨날 수가 있다.

이런 우려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논자로 우리는 바흐찐을 꼽아야 할 것이다. <장편소설과 민중언어>에서 바흐찐은 시와 산문이라는 두 갈래의 분기를 염두에 두면서 언어적 다양성이라는 주제의식을 통해 접근해 들어간다. 시인의 방식 가운데서 특히 시의 리듬이라는 측면이 지니는 위험성에 관해 이렇게 경계 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리듬은 효과가 매우 직접적인 리듬 통일체를 활용하여 작품 전체의 강조체계가 지닌 모든 측면 사이의 무매개적 연관을 창조함으로써 어떤 말 속에도 잠재되어 있기 마련인 화자 및 발언의 사회적 성격을 그 맹아로부터 파괴한다. 리듬은 최소한 그것에 명확한 제한을 가함으로써 그것의 전개나 구체화를 막는다. 리듬은 시적 문체의 표현과 이 문체가 제시하는 단일한 언어가 지니고 있는 일원론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을 강화하고 더욱 집중시키는 일에 봉사하는 것이다.

바흐찐에 의하면, “시인은 언어란 단일한 것이며 개별 발언 또한 단일한 독백과도 같이 폐쇄적인 것이라는 관념을 받아들이는 한도내에서만 시인이다.” 앞서 하이데거가 유일한 시를 Gedicht라 일컬으면서 그 ge라는 비분리전철이 집결, 혹은 집합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 그리고 dichten이라는 동사가 응축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밀봉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바흐찐의 우려 내지 계고는 실로 시 본연의 속성을 통찰한 발언이라 함직하다. 더구나 시라는 것이 창작 주체인 화자의 개성과 사회적 전형성이 동시적으로 빚어내는 언어의 표정을 운명적으로 차단한다면 시가 지니는 밀폐성이 빚는 폐해는 가히 우려할 만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아니 어쩌면 시라는 갈래의 고유한 속성에 걸맞게, 언어의 모든 측면으로부터 타인의 의도를 제거하고 언어에 내포된 사회적 다양성의 흔적을 모조리 파괴하는 이러한 작업의 결과, 긴장감 넘치는 언어의 통일성이 시 작품 속에 이룩될 수는 있지만, 이같은 통일성은 시가 아직까지 언어와 이념의 분화를 겪은 바 없는 폐쇄적이고 일원론적이며 미분화된 사회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던 매우 드문 시기에만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바흐찐은 덧붙인다. 부연하자면 라블레니 세르반테스 혹은 필딩의 근대적 장편소설이 개방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으로 분화되고 다원화된 사회에 걸맞는 미학적 품격을 지니고 있는 장르라는, 굳이 말하자면 장르 우열론에 바흐찐이 서 있지 않은가 혐의를 면키 어렵다. 결론적으로 시 작품 속에 들어가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언어의 본질상 레테라는 망각에 강물에 몸을 담그고 이전에 다른 맥락에서 그것이 지녔던 의미를 잊어버림으로써 새로워지는 방책을 취하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시적 언어 그리고 산문적 언어로서의 소설라는 이들 양자를 사이에 두고 “다중언어성”(polyglossia)과 “단일언어성”(monoglossia)이라는 잣대로 갈라 선명하게 획분하려는 바흐찐의 시도는 그리 타당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시가 지향하는 언어의 격조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는 차라리 다음과 같은 발언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 한결 숨통을 틔어줄 듯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적 구상물의 인상의 선명성은 다분히 응시력, 또는 통제된 정열의 압력이 가능하게 하는 응시력에 달려 있다. 시의 구상물을 뚜렷이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분석되어 나열되는 사물의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시인의 체험의 깊이, 기억의 깊이에서 건져내지는 사물의 모습이다. 이 모습은 그것이 시인의 체험의 어떤 편향으로 포착되는 사물의 새로운 국면이다. 그러니 만큼 그것은 일반적 타당성을 가지면서도 늘 새롭다. 흔히 이야기되는 바, 시에 있어서 모든 것이 새로워야 한다는 것은 옳은 관찰이다. 그런데 이 새로움은 신기를 좇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사물과 체험이 부딪치는 세계의 원초적인 펼쳐짐에 참여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시인은 그의 창조적 열정으로써 사물의 다양한 국면을 하나로 용접해낸다. 그런데 용접된 것들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에 의하여 용납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응은 시인의 창조적 과정이 어떻게든 사물의 창조적 있음에 맞닿아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시에 있어서의 구상물이 단순히 외적으로 나열되는 속성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사물과 체험이 끊임없이 용해되어가는 창조의 근원에서 주어지며 또 만들어지는 것이다.

김우창의 <시의 언어와 사물의 의미>에서 돋보이는 대목은 대저 시라는 것이 사물의 다양한 국면을 하나로 용접해낸다는 발언이다. 여기서 우선 짚고 넘어갈 것은 용접이라는 표현이 단순히 철공소에서 쇠를 고압산소를 녹여 하나로 잇는다는 의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이데거가 시의 음악성, 곧 리듬을 가리켜 접합(Fuegung)이라고 했을 때 그 의미로 대접해야 할 일이며, 이 접합이라는 말을 동심원에 적용시키면 여러 겹의 원들이 겹쳐지면서 하나가 여럿으로 되고 여럿이 하나로 되는, 화엄의 설법을 빌자면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살아 있는 동심원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바흐찐이 우려했던 폐쇄적 언어로서의 단일언어적 시의 언어(monoglossia)라는 혐의를 벗고 이른바 “다중언어성”(polyglossia)과의 회통의 경로가 발견된다. 원효가 설파한 화쟁회통(和諍會通)이 바로 이런 상호 피드백을 의미할 것이며, 바흐찐이 이야기한 교향화(orchestration)이라는 것도 실은 이런 화쟁회통의 경지에서만 가능한 울림일 터이다. 시적 언어로서의 상징이 단순히 1:1의 단선적 대입구도에 다름 아닌 알레고리와는 다른 차원의 一:多의 구도를 지니고 있음을 바흐찐은 애써 외면하고자 한 것은 아닌가 하는 혐의를 지우기 어려운 것이다.

6.

여기까지 적다가 보니 실로 죽은 글이 되고 말았다. 오늘 이야기의 주제를 벗어나 쓰잘데없는 동네를 헤맬만큼 헤맸으니 이제 본래의 주제인 술로 돌아가기로 하자. 다시 “李太白이가 술을 마시고야 詩作을 한 理由,/모르지?”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보자는 이야기다. 이번에 새삼스럽게 살필 대목은 다음과 구절이다.

老年에 든 로버트 그레브스가 戀愛詩를 쓰는 理由,
모르지?

별스럽다고 할 수 없는 위 인용부에 등장하는 로버트 그레브스라는 작가에 돋보기를 들이대려는 소이는 - 그가 연애시를 쓰는 사정에 대해서 “현대의 고뇌를 여성 혹은 여신과의 밀교적 사랑의 체험 속에서 해소하는 주제를 추구한 작가”라는 수준의 사전적 지식을 일별하는 것에서 그친다 하더라도 - 별도로 있으니 그것은 <시여, 침을 뱉어라> 가운데 다음 구절을 읽기 위한 길잡이로 삼기 위함이다.

이러한 문학의 성립의 사회조건의 중요성을 로버트 그레이브스는 다음과 같은 평범한 말로 강조하고 있다 - <<사회생활이 지나치게 주밀하게 조직되어서, 시인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게 되면, 그때는 이미 중대한 일이 모두 다 종식되는 때다. 개미나 벌이나, 혹은 흰개미들이라도 지구의 지배권을 물려받는 편이 낫다. 국민들이 그들의 과격파를 처형하거나 추방하는 것은 나쁜 일이고, 또한 국민들이 그들의 <보수파>를 처형하거나 추방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나쁜 일이다. 하지만, 사람이 고립된 단독의 자신이 되는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 간극이나 구멍을 사회기구 속에 남겨놓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더 나쁜 일이다 - 설사 그 사람이 다만 기인이나 집시나 범죄자나 바보얼간이에 지나지않는다 하더라도.>> 이 인용문에 나오는 기인이나, 집시나, 바보멍텅구리는 <내용>과 <형식>을 논한 나의 문맥 속에서는 물론 후자 즉 <형식>에 속한다. 그리고 나의 판단으로는 아무리 너그럽게 보아도 우리의 주변에서는 기인이나 바보얼간이들이, 자유당때하고만 비교해보더라도 완전히 소탕되어있다. 부산은 어떤지 모르지만, 서울의 내가 다니는 주점은 문인들이 많이 모이기로 이름난 집인데도 벌써 주정꾼다운 주정꾼 구경을 못한 지가 까마득하게 오래된다. 주정은커녕 막걸리를 먹으러 나오는 글쓰는 친구들의 얼굴이 메콩강변의 진주를 발견하기보다도 더 힘이 든다. 이러한 <근대화>의 해독은 문학주점에만 한한 일이 아니다.

황동규가 근자에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 한 후배 평론가와 나눈 대담을 얼핏 볼 기회가 있었는데, 미국 방문 중 황동규 시인이 행한 강연이 다름 아닌 ‘한국시는 왜 살아 있는가?’라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인 말로 “미국이나 일본은 이미 시가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는 말이 뇌리를 스친 것도 바로 위에서 그레이브스가 이야기한 바가 그대로 적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플라톤의 이른바 시인 망국론을 미국이나 일본이 현대에 이르러서야 관철을 시킨 모양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일순 들었지만, 실은 그게 20세기 후반의 사정이 결코 아니라 실로 서구적 근대화 내지 아니면 근대성 자체에 내장된 그 거대한 괴력이야말로 오랜 동안에 걸쳐 시를 말라죽게 한 뿌리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위의 인용부에 등장하는 흰개미가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김수영에 의해 1956년에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그려진 바 있다.

白蟻는 自動式文明의 天才이었기 때문에 그의 所有主에게는
一言의 約束도 없이 제가 갈 길을 自由自在로 찾아다니었다
그는 나같이 몸이 약하지 않는 점에 主要한 原因이 있겠지만
雷神보다도 더 사나웁게 사람들을 울리고
뮤우즈보다도 더 부드러웁게 사람들의 傷處를 쓰다듬어준다
叱責의 권리를 주면서 叱責의 행동을 주지 않고
어떤 나라의 紙幣보다도 信用은 있으나
身體가 너무 矮小한 까닭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를 않는다

6․25 시절 조선 의용군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끌려간 뒤 국군에게 사로 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미군 군의관의 통역 노릇을 하다가 다시 미군 수송관의 연락관으로 근무한 것이 53년의 일이고, 위의 시가 나온 것은 그로부터 다시 2,3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가공할 만한 먹성으로 주위를 초토화시키다시피 하는 이 흰개미의 모친이 일리노이주에 있다함은 흰개미가 바로 미국을 가리키는 상징적 곤충에 다름 아님을 여실하게 드러낸다. 그곳을 지배하는 자동식문명은 사회생활이 지나치게 주밀하게 조직된 사회를 지칭하는 것이라 보면 틀림없다. 언제 가고 온다는 일언의 약속이나 통보도 없이 자유자재로 찾아다니는 흰개미가 누리는 그 자유가 이른바 자유주의 혹은 오늘날로 치면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횡행하고 있다는 점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흰개미의 모친인 희랍인들이 만들어낸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는 실은 베짱이를 악역으로 내모는 댓가로 개미에게 착하고 건실한 일꾼의 역을 맡긴 근대의 의도가 담긴 신화이기도 한 셈이다. 시인의 존재가치의 말살된 사회란 겨울 강에 뒤덮인 얼음짱 위에 숨구멍 하나 없는 사회이다. 숨구멍이 없는 강물은 숨을 쉬지 못하는 법이다. 숨을 쉬지 못하는 강은 더 이상 생명의 신진대사를 영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흰개미 혹은 개미가 지배하는 사회란 실은 ‘죽은 시인의 사회`가 아니라 시인이 죽은 사회이다. 시인이 죽은 사회란 산문만이 남아 지배하는 사회이다. 그렇다면 산문은 어떻게 근대를 지배하게 되었던가. 대저 산문이라는 것의 본질적 속성은 무엇인가.

사르트르는 산문을 가리켜 단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기호>가 지배적인 힘을 누리는 영역”이라 정의한다. 반면에 시는 회화나 조각이나 음악의 편이다. 앞서 시와 산문을 대비하면서 의미와 음악이라는 구분으로 산문과 시를 나눈 김수영 - 실은 엘리오트로부터 빌어 온 것임을 스스로 밝힌바 있지만 - 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산문의 의미성은 곧바로 언어에 대한 작용으로 이어진다. 곧 시란 산문과 달리 말을 <사용>하지 않으며, 시인들은 언어를 <이용>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산문이란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며, <이용>하는 글의 갈래를 의미한다. 언어의 도구적 사용이 산문의 본령인 것이다. 산문이 도구로 이용하는 말과 시인이 섬기는 말과의 차이를 싸르트르는 이렇게 요약한다.

사실 시인은 대뜸 <도구로서의 언어>와는 인연을 끊을 것이다. 그는 단호히 말을 기호로서가 아니라 <사물>로서 간주하는 시적 태도를 선택한 것이다. 왜냐하면, 기호라는 것이 본시 애매한 것이어서, 유리처럼 그것을 제멋대로 투시할 수 있으며, 그 말이 의미하는 <사물>을 기호를 거쳐 추구할 수도 있고, 또는 시선을 그 현실로 돌릴 수도 있으며, 그 기호를 대상으로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말하는 사람은 말의 저편, 즉 대상 옆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말의 이편에 있다. 전자에게 있어서 말은 이미 길들어져 있다. 후자에게 있어서는 말은 야성 그대로다. 전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유용한 약속이고, 차츰 소모되어서 마침내 쓸모없이 되어 버렸을 때는 내버리고 마는 연장이다. 후자에게 있어서 말이란 초목과 같이 지상에 자연적으로 자라는 자연물들이다.

이렇게 보자면 이른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탄식조로 언급한 “도구적 이성”이라는 늪에서 독을 피우면서 거품처럼 부글거리고 있는 것은 바로 근대적 산문정신에 다름 아니다. 말이란 산문에서는 도구적인 소모품으로의 경사의 유혹을 본질적으로 뿌리칠 수 없는 글의 종류인 셈이다. 소재화된 말, 그것은 하이데거적 의미에 의하면, “자기수행적 작성행위의 소재”일 따름이다. 그렇게 해서 대지와 대기마저 소재화한다. 산문은 세계를 계획적으로 작성하는 무제한적 자기수행을 인간명령의 상태로 조직함으로써, 흰개미가 구가하는 자동식문명으로 요약되는 기술시대의 감추어진 본질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의 본질은 근대에 이르러 명약관화하게 현상한다. 말하자면 근대 문명은 산문이라는 외피를 입은 채 문화와 문명이라는 포괄적 영역에서 무한한 자기운동을 수행한다. 그 자기운동의 수행방식이 바로 이른바 “자유”라는 이름을 입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하이데거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바로 근대의 한 가운데 자신의 본질을 감춘 채 숨어 있는 산문성의 외연이기도 한 근대의 과학과 기술에 대한 섬찍한 계고장에 다름아니다.

근대과학과 전체국가는 기술의 본질의 필연적 귀결인 동시에 그 부수현상이다. 세계여론이나 인간의 일상적 개념을 조직화하기 위하여 쓰여지는 수단과 형식에 대해서도 같은 것이 해당된다. 생명을 가진 것이 배양과 이용에 있어서 기술적으로 대상화될 뿐 아니라 생명 자체의 현상에 대한 원자물리학의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근본적으로 생 자체의 본질까지도 기술적 작성에 내맡겨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인간이 주체로 되고 세계가 객체로 된다는 것까지도 기술의 자기조직화의 한 결과인 것이다.
...........................<중략>........................... ........
기술의 본질은 서서히 나타난다. 기술의 본질이 나타나는 날은 단순히 기술의 성격을 띤 대낮으로 변모된 세계의 밤의 시대다. 그 날은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그날과 함께 끝모를 유일한 겨울이 가까워 온다...... 건전한 것은 자취를 감춘다. 세계는 불건전하게 된다. 그로 인하여 신성에의 흔적으로서의 성스러운 것이 은폐될 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것에의 흔적, 건전마저도 소멸되는 듯이 보인다. 소수의 가능적 인간들에게 아직도 건전하지 못한 것으로서 위협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들은 어떤 위험이 인간에게 엄습해오는가를 지켜보지 않으면 안되리라. 이 위험은 인간이 존재 자체와 관계할 때 인간의 본질에 닥쳐오는 위협인 것이오. 우연한 개별적 위험이 아니다. 이 위험은 위험 일반이다. 그것은 일체의 존재자에 닥쳐오는 심연 속에 감추어져 있다. 이 위험을 보고 제시하기 위하여 앞장서서 심연에까지 이르는 사람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

앞장서서 심연에까지 이르는 사람을 가리켜 릴케는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그리고 이 가난한 시대에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라고. 횔덜린은 그 말을 받아서 자신의 친구인 하인제의 입을 빌어 수줍게 대답한다.

그러나, 시인들은, 거룩한 밤에, 나라에서 나라로 편력하는 주신의 거룩한 제관과 같은 것이라고 너는 말한다.

시인이란 성심껏 주신을 노래하면서 사라져간 신들의 흔적을 알아차리는 존재, 그 신들은 에테르로서만 존재한다. 에테르가 신들의 신성이요, 존재의 기본조건이다. 그 에테르는 무엇인가. 중국어로 풀면 醚(미)이다. 醚(미)란 醉(취)요, 醚(미)에서 酉(주)를 뺀 迷(미)란 惑亂(혹란)이다. 또다시 醚(미)란 醇(순), 곧 누룩이다. 김수영은 문화의 본질적 근원을 발효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시의 임무라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누룩이란 곧 ‘여직까지 없었던 세계가 펼쳐지는 충격’을 의미한다. 그 충격을 통해 시와 시론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술을 먹고 주정을 부리고 싸움질을 이따금씩 하는 광인, 말을 비이성적으로 하는 시인, “스스로 좌절하도록 처신하는”, “패배의 증언자”인 것이다.

7.

“李太白이가 술을 마시고야 詩作을 한 이유”, 이제야 알겠는가?






http://jbreview.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item=7&no=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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