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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7/17 (10:26) from 203.252.18.128' of 203.252.18.128' Article Number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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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하나님과 창조성의 관계 연구
안녕하십니까. 불태님. 반갑습니다. 일단 불태님의 질문을 차분히 읽어보았습니다. 님의 질문에 제가 대답할 수 있는 부분과, 대답할수 없는 부분이 있더군요. 가능한 대답 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정답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는 화이트헤드의 사상과 저의 견해, 아니면 저 자신만의 오독이 공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님의 질문에 대해서 가능한 대답을, 님의 질문과 함께 저의 한계 안에서 맞물려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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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궁극적 실재는 '창조성'이다. 그리고 그의 유기체 철학속에는 세계와 신이 등장한다. 즉 창조성내에 신이 설정된다 (이 '내의'라는 것은 창조성에 궁극적 성격이 있음을 단지 의미할 뿐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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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여기에서 궁극적 실재가 틸리히의 Ultimate Reality를 함의하는 개념인지요. 틸리히에서는 존재 그 자체Being itself가 UR입니다. 이러한 틸리히의 전제에서 볼 때 화이트헤드는 UR는 신이 아니라 창조성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볼 때에 화이트헤드 안에서의 UR은 신도 아니고 창조성도 아닙니다. 화이트헤드의 유일한 궁극적 실재, 화이트헤드 자신이 표현한 바를 그대로 인용하면, 궁극적인 실재적 사물은 바로 actual entity입니다.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궁극적인 것은 신이 아니라 actual entity입니다. 그렇기 때무에 신 또한 하나의 actual entity일 뿐입니다. 실은 본인이 볼 때 actual entity 만큼 중요한 개념은 화이트헤드 체계 안에서 없다고 생각할 만큼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논의가 actual entity와 관련해서 과정과 실재에서 진행됩니다. 이 actual entity를 둘러싼 수많은 그물코의 현실세계를 조각조각 분석하고 종합하는 내용이 PR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배후로 물러선다고 하더라도, 즉 actual entity의 궁극성을 배제한다 하더라도, 신과 창조성 양자 사이에 궁극성을 설정하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약간은 회의가 듭니다. 다시 말하자면, 창조성이 더욱 궁극적이냐 신이 더욱 궁극적이냐, 혹은 창조성이 궁극적 존재이냐, 신이 궁극적 존재이냐 하는 물음 자체가 얼마나 유용성을 지니는 것인가 하는 회의입니다.

화이트헤드의 범주는 복잡하기로 유명합니다. 제가 학부 시절에  화이트헤드 세미나에 참여하려는 마음에 연세대학교 오영환 선생님을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PR을 혼자 강독하다가 나의 독해가 얼마나 보편성을 띄는가 하는 물음을 가진 고민 끝에 취한 선택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저에게 확인하시기 위하여 던진 첫 질문은 바로 이 범주의 문제였습니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의 범주에 대해서 아는 대로 대답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답을 한 기억이 아련하게 남아 있습니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의 범주는 4조가 있습니다.
첫째, 궁극자의 범주the Ultimate
둘째, 현존의 범주Existence
셋째, 설명의 범주Explanation
넷째, 범주적 제약Categorical Obligation 이렇게 4조가 있습니다.

그리고 궁극자의 범주는 님이 질문하신 것과 관련한 창조성Creativity, 다자many, 일자one 이 세 개의 개념이 있습니다.
현존의 범주는 8가지가 있습니다. 여기에 현실적 존재, 파악, 영원적 객체 등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설명의 범주는 스물 일곱 개가 있고 범주적 제약은 아홉 개가 있습니다. 그의 형이상학은 이러한 4조의 범주과 그 범주 안의 개념들의 논리적 정합적 현실적합적 적용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문제제기를 다시 꺼내보아야 할 것입니다. 창조성과 신의 관계 안에서 창조성과 신의 범주는 각자 무엇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창조성은 궁극자의 범주입니다. 그리고 신은 그 자체로서 어떠한 범주에 속하는 개념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을 하나의 현실적 존재로 보는 화이트헤드의 표현 안에서 신을 현실적 존재의 범주에 속한다고 규정하여도 그리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즉 신은 현존의 범주입니다.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궁극자의 범주가 무엇이냐, 현존의 범주가 무엇이냐 하는 설명을 해야 될 단계에 이른 것 같습니다. 일단 현존의 범주는 존재하는 것들의 범주입니다. 있음의 범주입니다. 오영환 선생님은 이 범주를 현존의 범주로 번역하였지만 어떤 이는 이 범주를 그냥 존재의 범주라고도 번역을 합니다. 현존의 범주에 대한 이해는 그리 어려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자의 범주는 제가 생각해도 이해하기가 참 쉽지 않은 범주입니다.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궁극자의 범주는 현존의 범주, 설명의 범주, 범주적 제약이 전제하는 일반적 원리입니다. 즉 모든 범주는 궁극자의 범주의 특수사례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궁극자의 범주는 존재의 범주가 아니라 그 범주를 넘어서는 것임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궁극자의 범주 가운데 하나인 창조성은 현실적 존재와는 다른 어떤 존재도 아니고, 님이 이해하신 방식, 즉 현실적 존재(신)보다 더 실재적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창조성은 오히려 모든 현실적 존재들이 관여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관계성에 대한 기술일 뿐입니다. 창조성은 존재가 아닙니다.

창조성은 다자와 일자와 맞물려 있는 개념으로서 현실적 계기 속에 있는 어떠한 방식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술어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불태님과 전철은 각각 다자입니다. 하지만 불태님과 전철이 공존하면서 동시에 <대화자>라는 공통의 일자가 등장을 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모니터는 단순한 검은 점과 흰 점의 다자성 가운데에서 글자라고 하는 (물론 이 글자는 컴퓨터의 논리적 레벨에서는 확증할 바 없겠지요) 일자가 등장하고 글자와 글자의 결합속에서 단어가 나오고 단어와 단어의 결합 속에서 의미가 나오고 의미와 의미 속에서 나의 마음 속에서 느낌이 파생되어 나오고 다양한 느낌의 관계속에서 어떠한 의식적인 판단이 나올 것입니다. 그 판단에 의해서 토론하는 자에 대한 적대감이나 애호감 등등 그 이후의 수많은 일자적 통일을 발생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우주는 다자에서 일자로 진입해 들어가는 것이 자명한 이치이고 이 진입을 창조성으로서 표현하는 기술적 표현이 다자 일자 창조성입니다. 다자 일자 창조성은 또한 존재가 아니기에 직관에 호소할 수 밖에 없는 대상입니다.

논의를 정리해 보면 창조성은 궁극자의 범주이고 신이라고 표현한, 현실적 존재는 현존의 범주이기 때문에 창조성과 신 사이의 궁극성을 동등한 레벨 위에서 판단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덧붙이면 님이 말씀하신 궁극적 존재로서 많은 이들이 이해한 신은 화이트헤드 안에서는 하나의 현실적 존재이고, 더욱 궁극적인 것을 따지자면 actual entity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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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자연)와 신의 관계에 대한 질문은 철학사와 함께 시작된 오래된 문제이다. 전통적으로 신학(그리고 철학)에서 창조성은 신의 속성이며, 자연이 부여받은 창조성의 유무에 따라 계시신학과 자연신학으로 두 틀이 존속해 왔다고 본다. 즉 어쨌든 창조성은 신의 속성이며, 자연은 그 속에서 수동적 위치를 차지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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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면에서 위의 님께서 언급하신 바에 대해서 리플렉션을 해 보면, 전통적으로 신학은 창조성을 신의 속성으로 언급하기도 하였고, 또한 창조성과 신을 동등하게 두는 견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창조성과 신을 다른 범주로 설정하고, 신과 인간을 둘러싼 모든 우주의 존재 방식을 창조성이라는 궁극자의 범주로 기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궁극자의 범주를 틸리히의 범주 안에서 궁극적 실재로 이해하면 창조성 자체가 모든 존재의 뿌리라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여기에서의 궁극자의 범주는 모든 형이상학의 범주를 최종적으로 설명해주고 보증해주는 궁극적인 미해결의 난제를 저런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존재를 모두 설명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설명 불가능한 부분이 남아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존재'에 대한 '설명'이라는 표현 자체가 존재에 대해 설명이 불완전한 지경임을 입증해 주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설명으로서 설명되지 않는 존재가 이 안에 남아있는 것이고 형이상학적 설명 또한 궁극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마지너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 부분을 화이트헤드는 '궁극자의 범주'로 설정하고 이 내용을 다자 일자 창조성으로 표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님이 여기에서 창조성과 신의 관계를 배중률의 관계로서 중요성을 따져 본다고 할 때 창조성과 신의 팽팽한 긴장이 예상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개인적인 견해는 이미 이 둘 사이의 범주가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어떻게 창조성과 신이 상호 맞물려 신의 존재방식에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하는 부분에 촛점을 맞추는 것이 더욱 생산적인 문제제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창조성과 신의 관계는 님이 지적하였지만, 과정철학과 과정신학 안에서도 아주 다양하게 논의되는 가장 첨예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과정철학자는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체계 안에서 신 자체가 필요 없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 줄로 압니다. 또 어떤 과정신학자는 창조성과 신의 관계에서 창조성을 신의 속성으로 설정해 버리는 새로운 해석을 전개하기도 합니다. 신의 정체성을 위태롭게 하는 화이트헤드의 창조성과 신의 논의를 신학적으로 반성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아직 이 다양한 견해 가운데 어느 한 견해에 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이 문제제기의 지평이 매우 중요한 것인 것만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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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화이트헤드 철학의 가장 큰 이해의 난점은 '신'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철학의 궁극자, 궁극인으로서의 신은 그의 철학내에서는 창조성이 대신하고 있다. 물론 화이트헤드의 개념들을 이해하자면 매우 복잡한 개념들을 알아야 하고 이해해야 함을 안다. 그러나 전체 구조의 틀로 단순화시키는 작업도 평가작업으로서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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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기에 님의 견해는 어떠한 하나의 과정신학적 입장을 이미 선취하고 있는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님이 그들의 견해를 보지 않았든 보았든 이런 방식의 문제제기는 이미 일정정도의 설득력을 가지고 전개되기에 충분한 논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화이트헤드의 견해에 충실해 본다면, 신의 역할을 창조성으로 무게이동 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신과 창조성의 논의를 전개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워낙 신과 창조성의 문제에 대해서 화이트헤드는 복잡하고 다양하게 자신의 분명한 견해들을 개진하고, 그 논의의 내용 또한 제가 생각하고 이해하는 지평을 훨씬 넘어선 전혀 색다른 지평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저는 끊임없이 고려하고 있습니다. 즉 나의 화이트헤드 이해는 진정 화이트헤드 자신의 내밀한 느낌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오독이라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던져주고 있습니다. 다른 책에서 경험한 절망감은 PR에서 경험한 절망감에 비하면 발톱의 때 보다도 작다고 할 수 있을 만큼, PR의 논의는 매우 예각화 되어 있습니다.

일단 화이트헤드 안에서 신을 피조물로 보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신을 원초적인 피조물primordial creature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논의하는 이 지점은 형이상학적인 출발과 관련하고 있습니다. 태초를 논의하는 형이상학적 문제의식입니다. 우리는 많은 문제제기를 여기서 꺼낼 수 있습니다. 태초 이후에 태초를 어떻게 말할 수 있고, 태초 이전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태초 이후의 이해의 지평을 태초 이전에 적용할 수 있는 단서는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여러 가지의 문제제기를 해 볼 수 있습니다. 신을 피조물로 본다면 피조물의 탄생 이전에 다자 일자 창조성은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가장 고도의 형이상학적 추상성을 논의하는 지점이 바로 태초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용옥은 그의 책 기철학 산조에서 이에 대한 여러 입장을 개진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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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의 신은 창조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세계도 창조성을 가진다. 신은 궁극적 실재가 아니며 궁극적 실재는 창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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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표현은 꼭 정확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적확한 표현도 아닌 듯 합니다. 이미 신의 출현 자체가 창조성의 산물로 보는 좌파적인 견해를 수용한다면 신의 능력으로서의 창조성의 역할은 여기에서 폐기되기 때문입니다. 즉 신은 창조성을 가지고 세계가 창조성을 가진다는 것 보다는 신과 세계가 궁극적으로는 다자 일자 창조성의 양식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더 정확한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또 위에서 제가 말씀 드렸듯이 궁극적 실재를 틸리히 식으로 이해하면 궁극자의 범주에 대한 오해가 될 것입니다. 즉 궁극적으로 더 이상 추상화가 불가능한 지점에서 다자와 일자와 창조성 개념이 등장하기 때문에 궁극자의 범주로 창조성을 논의한 것 뿐이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틸리히의 궁극적 실재는 창조성도 아니고 신도 아니고 actual entity라고 이해해야 더욱 올바른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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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는 그의 철학내에서 형이상학적 원리로서 신은 설정되어야만 하고, 체계적 내적 구조가 신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이 신은 궁극적 현실체로서, 비시간적인 현실적 존재이며, 세계속의 모든 사건들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지속적 존재이다. 영속적이며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신은 창조성의 한 구체적 표현이며, 세계속의 모든 사건들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유일한 지속적 존재이다. 그리고 창조성은 본질적으로 신에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은 악과 선을 나누는 한계로서 그리고 무엇이 과연 옳은지를 밝히는 원리로서 규정되어야 하며, 질서를 위한 한정,규정,한계의 원리로>서 설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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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습니다. 어떤 이는 형이상학을 뒷받침해 주는 궁극적인 원리로서 화이트헤드가 신을 요청한 것 뿐이라는 입장도 펼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적 구성 자체가 신을 전제로 한 형이상학에 익숙한 기존의 전통 속에서는 사뭇 다르게 보여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신을 형이상학적 전제로 보지 않고 모든 형이상학적 구성의 예증사례로 보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즉 신은 형이상학의 전제가 아니라 형이상학의 예증사례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는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의 이해가 사뭇 색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제가 보기에는 인간의 삶과 우주의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바라보고 해명하는 가장 궁극적인 설명의 방식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신을 전제로 하여 펼치는 형이상학이 아니라 구체적인 나에서 구체적이지 않은 우주를 기술하는 일종의 기술 방식이고, 또한 그 형이상학적 기술에 다시 나를 편입시켜 나를 설명해 가는 논의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신을 전제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님의 형이상학에 대한 이해가 궁금하기도 합니다. 님께서는 형이상학이 신을 전제해야만 한다고 보는 견해를 갖고 계신지요.

이후 님이 말씀하시는 신에 대한 이해와 설명은 얼핏 옛날에 제가 그냥 스쳐 지나갔던 과정사상에 대한 세컨드리한 저서의 내용인 듯 해서 조금은 익숙하기도 하고 낮설기도 합니다. 즉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쉽게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쓰여진 문장인 듯 하기도 하고, 아니면 단순화 시켜서 압축적으로 설명하려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또한 번역문 같기도 합니다.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신은 primordial nature of God과 consequent nature of God 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오영환 선생님은 신의 원초적 본성과 신의 결과적 본성으로 이를 번역합니다. 아마 님께서 언급하신 신의 비시간성은 전자가 될 터이고, 세계 속의 사건들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신의 성격은 후자가 될 것입니다. 원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의 다양한 논의를 아마 님이 표현한 방식으로 압축한다 하여도 억지춘향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신의 양극성에 대한 논의가 어떠한 맥락에서 출현하였고 이후의 신학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가에 대한 논의가 더욱 보충되면 더할 나위 없는 생생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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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의 맹목적 추종자는 포스트모던 상황속에서 무신론과 유신론은 이러함으로 해서 완전히 극복되었고 조화로운 형이상학이 자리잡게 되었다고까지 말하더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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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언급하신 화이트헤드의 맹목적 추종자는 아마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신론과 무신론이 완전히 극복되었고 조화로운 형이상학이 자리잡게 되었다고 충분히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문장과 주장에는 화이트헤드 자신의 형이상학의 웅혼함과 깊이과 단순소박함이 단지 형이상학적 완전성과 완벽성, 그리고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아우르는 가장 최고의 형이상학적 담론으로 전도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이해하는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퍼펙트한 면이 있기도 하지만 그 끄트머리에는 미래 앞에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새롭게 변화할 수 있고 교정될 수 있다는 열린 시스템의 소박함과 겸손함이 고여 있다고 생각이 드는군요. 이후 화이트헤드를 팔아먹고 그것이 최고라고 강요하는 맹목적 추종자는 얼마든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면이 화이트헤드의 사상에게 있지만, 그러한 이야기를 화이트헤드 자신이 좋아하고, 또 화이트헤드의 사상이 그것을 지향하는 것인가의 문제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이 드는군요.

화이트헤드 자신은 광활한 우주 앞에서의 인간 지성의 그 연약함과 나약함, 그리고 언제든지 사상은 새롭게 직조될 수 있다는 깊은 성찰을 갖고 있었던 고상한 영국의 신사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이 광활한 우주에 대한 성실한 해명이지 미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도깨비방망이를 자처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가 죽고 그의 사상이 아직도 논의되는 이 시점에서 화이트헤드에 대한 다양한 견해는 공존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영미 분석철학의 그 분석과 논리가 답답해서 형이상학으로 자신의 후기에 새로 열어 나아가는 화이트헤드이기에 러셀과도 사상적인 단을 그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흥미롭게 럿셀과 화이트헤드는 수학원리라는 책을 같이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후기에 가면 갈 수록 서로 각방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럿셀의 서양철학사 안에는 화이트헤드에 대한 인상과 그의 철학의 전망을 잠시 언급하는데, 화이트헤드의 언어가 매우 기묘한 측면이 있고, 앞으로는 이 철학이 도대체 정신사 안에서 어떠한 역할과 의미를 지닐 지에 대해서 그 당당한 러셀이 확언을 하지 못하고 두고보아야 할 것이라는 관망의 제사를 취하고 있더군요. 참 흥미로왔습니다.

요는 영미 분석철학의 전통안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을 포함한 형이상학의 전통 자체가 그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난 논의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도 구체적인 것이 없는 듯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허한 말놀음의 조합일 것이라고 싸잡아 비난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미국철학의 핵심 논쟁에 서 있는 로티가 있습니다. 이 로티는 분석철학의 전통 위에 서 있으면서 그것을 넘어서서 새롭게 자신의 형이상학을 짜내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로티의 형이상학이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과 매우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로티 자신의 책에서는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을 매우 고전적인 형이상학이라고 표명한 내용을 얼핏 기억합니다. 이광세 교수는 로티와 화이트헤드의 철학의 유사성에 대한 논의도 전개하고 있는데, 여하간 고전적인 분석철학의 전통 안에서 화이트헤드에 대한 논의는 거의 대화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심지어 분석철학의 답답함을 벗어나 새롭게 자신의 세계를 형성해 나아가는 로티에서도 화이트헤드와의 분기점을 그어 나아가지 말이지요.

하지만 화이트헤드 사상 자체의 전통성을 충실히 계승하고 형이상학을 여전히 계속 논의하고 있는 학파나 사상 또한 만만치 않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리핀이나 존 캅이나 존 힉을 중심으로 한 클레어몬트 학파에서는 가장 고전적인 화이트헤드의 논의를 충실히 계승하는 편이라고 판단됩니다. 올해 세계 화이트헤드 학회가 클레어몬트에서 열렸습니다. 김용옥 선생이 침에 대해서 논문도 발표하고, 오영환, 김상일, 문창옥, 등등 해서 한국에서도 화이트헤드 학회가 성황리에 참여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기는 했습니다. 저도 가보지는 않아서 잘은 모릅니다. 여하간 화이트헤드 슐레는 계속 클레어몬트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전통 안에서는 여전히 화이트헤드의 사상 자체가 아직도 서구 정신사에서 새로운 정신을 틔웠다고 생각하고 매우 적극적으로 화이트헤드를 평가하는 지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동서사상의 경계를 새롭게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버케블러리를 화이트헤드가 간직하고 있기에 동서사상의 융합의 계기로서 화이트헤드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모르겠습니다. 화이트헤드가 대단한 사람인 것만은 사실인데 그를 너무 추종한 나머지 완전히 현대의 모든 문제가 그 안에서 극복되었다고 주장을 하는 부류가 있다면 그것은 별로 기대할 만한 부류들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화이트헤드 자신은 아마 자신을 넘어서는 이들이 진정 화이트헤디안이라고 말하였듯이, 어쩌면 그들은 남의 권위에 빌붙어 사는 2류 학자들에 불과할 것이라는 느낌이 매우 지배적입니다. 제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도 실례가 될런지를 모르겠으나, 화이트헤드를 처음 접하면 정말 그 언어의 예리함, 그리고 치밀함, 그리고 정합성과 논리적 탄탄함은 어떤 언어와 어떤 사상의 추종을 불어할 정도로 지성을 육박해 들어왔습니다.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매우 커다란, 그리고 다양한 문제의식이 그 안에 녹아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제가 학부 1학년때 화이트헤드를 볼 때 당시의 모 대학원 어떤 선배는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를 "보물섬"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럴만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상에 목매달고, 혹은 화이트헤드 교를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사상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입각점standpoint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이는 화이트헤드건 블랙헤드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가능성마저도 지워버리고 최고의 퍼펙트한 사상이라고 애써 강요하는 것은 올바른 지성의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으로 본다는 것도 우스운 발상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화이트헤드의 PR에서는 플라톤에 대한 씨름부터 당대의 논리학과 형이상학에 대한 씨름으로 들어가는 매우 커다란 논의의 스케일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화이트헤드가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초를 놓았다느니, 신과학의 교주라느니, 혹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합하는 새로운 대안이라느니의 표현은 별로 건강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님의 견해를 저는 존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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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이트헤드의 체계내에서 전통적 신은 권력을 빼앗긴 채 유명무실해져 버린다. 물론 화이트헤드의 신개념은 전통적 신개념이 아닌 줄 안다. 그가 새로이 개념화하여 설정한 신이다. 나의 문제제기는 여기에 있는데, 철학언어의 문제이다.어찌해서 그는 새로이 설정한 이 개념을 (이미 많은 전제를 가진 이름인)신이라고 이름붙여야 했는가 이다. 즉 나의 문제제기는 그의 철학자체내의 합리성의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니라, 언어사용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철학사의 많은 논쟁속에 등장하는 일련의 개념들에는 철학언어로서의 약속이 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신개념을 접하노라면 대화의 길이 막혀 버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네가 심오한 화이트헤드를 이해하지 못해서라고 누군가 반박해 올 수도 있겠지만, 그 경우에도 나의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게 남을 것이라고 본다. 화이트헤드의 신개념은 신이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무관하지 않은가 그의 체계내에서는 사실상 신이라는 용어가 부재하더라도 그 역할을 창조성이 대신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 솔직한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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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신을 권력의 존재로 전제하고 말씀하고 계시는지요. 아마 그러한 전제라고 한다면 화이트헤드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한 권력이 집중된 신에게서 권력을 빼앗아 버린 역할을 일부분 수행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권력이라는 단어가 참 걸리는군요. 오히려 제가 볼 때에는 하나님의 절대성은 결코 애초부터 하나님의 본 모습이 아니라고 화이트헤드는 꼬집는 것 같습니다.

화이트헤드가 맨날 꼬집는 전통의 신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입니다. 자신은 끄덕하지 않고 남을 이렇게 저렇게 주무르는 것 말입니다. 화이트헤드는 그러한 신을 아주 싫어합니다. 그것은 참 비인간적인 신입니다. 이 문제제기는 제가 예전에도 잠시 언급한 것 같은데 절대와 상대, 추상과 구체, 영원과 시간, 신과 창조성의 문제가 다 맞물려 있습니다. 아마 화이트헤드가 자신보다 이름 숫자가 더 많다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맨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의 신을 비판하는 이유는 오히려 따른 논리적, 형이상학적 입장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의 여성신학에서 논의하고 있는 남성성으로서의 하나님을 넘어서서 여성성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강조가 어떤 면에서는 당위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전개된다고 한다면, 화이트헤드가 폭군으로서의 하나님을 포기하고 어머니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그 강조점의 배후에는 매우 탄탄한 논리적 형이상학적 전제가 감추어져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는 화이트헤드의 신관에 관한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궤델의 불완전성의 문제, 집합론의 문제 등등 감추어진 미로를 다시 추적하는 작업이 동시에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하간 화이트헤드의 하나님은 공감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인간을 향해 나아가지만 인간에 의해 영향을 받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완전히 상대화 되었다고 화이트헤드를 비판하는 입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의 신론을 조각조각 분석해 보면 하나님의 영원성이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보증되는 면이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시간 안의 하나님도 있지만 시간을 넘어서는 영원으로서의 하나님도 그는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히려 바르트의 신론과 화이트헤드의 신론의 유사성에 관심이 많습니다. 화이트헤드의 신을 werden의 신으로 많이 오해하는 것 같은데, 정말 그런 것만 있느냐. 그것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실로 화이트헤드에 대한 저런 오해는 전통신학의 관점에서 많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틸리히와 화이트헤드는 동시대를 공유한 지성인데, 조직신학ST 1에 보면 화이트헤드에 대한 틸리히의 짤막한 비판과 커멘트가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몰트만도 화이트헤드 자체보다 과정신학을 비판하는 입각적을 갖고 있습니다. 이후의 신학자 벨커는 자신의 논문을 화이트헤드에 대해서 썼기때문에 그런지 화이트헤드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인 입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화이트헤드의 Creativity 개념과 유사한 <에메르겐쯔>를 자신의 신학의 주요 핵심으로 삼고 있을 정도이니 말이지요.

그리고 님은 철학 언어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셨습니다. 즉 철학 언어는 이미 약속된 룰이기 때문에 기존의 전통을 무시하고 쓰는 화이트헤드의 개념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느냐, 혹은 언어사용 자체가 얼마나 타당하느냐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게임의 룰이 없으면 게임이 진행이 안되겠지요. 일면 타당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님께서는 화이트헤드의 신 개념이 약속을 파기한 개념이 아닌가 말씀 하셨는데, 제가 볼 때에는 화이트헤드의 신 개념은 오히려 전통적인 신 관념을 충실히 이행하는 요소라고 이해가 됩니다. 성서에 나타난 여성성으로서의 신개념, 그리고 그 이후의 히브리적 사고 속에서의 현실성과 가장 긴밀하게 닿아있는 신개념은 우리의 신이라는 개념의 개념사 안에서도 충분히 발견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이 됩니다. 화이트헤드의 신 개념에 대한 님의 언급은 별로 정확하지는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사용의 문제는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둘러싼 끊임없는 문제제기로 오늘날까지 남아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자면 화이트헤드는 자신이 새로이 구상한 아이디어를 기존의 언어로 표현할 방도가 없어서 신조어를 만들어 내었다고 합니다. 특히 prehension이라는 단어는 아예 사전에 없는 단어이기도 하였는데, 몇 년 전인가? 영국 옥스포드 사전에서인가 단어로 선택해서 당당하게 사전의 일부에 포함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저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이는 화이트헤드의 언어관에 관련된 지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에 의하면 철학은 유한한 언어로 무한한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언어는 세계를 결코 완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일단의 전제를 이런 방식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가 세계를 담아낼 수 없을 때 세계를 언어에 꿰어 맞추어서 바꾸지는 못할 망정 언어를 끊임없이 바꾸어서 가장 올바르게 세계를 기술하는 전략을 선택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 화이트헤드가 어렵다고 주장하는 많은 이들의 근거에는 그 사상 자체의 복잡함도 있지만 언어를 통째로 새로 써버리고 단어를 새로 만들어 버린 전제 위에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전에 학회 강독회에서 어떤 박사 과정에 있는 발제자는 화이트헤드의 언어문제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제시했었습니다. 님과 같은 입장을 개진했었지요.

저는 화이트헤드의 언어 문제를 이렇게 봅니다. 노드롭의 견해를 동의하는데요, 노드롭은 화이트헤드의 언어를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개념들로 줄줄히 연결이 되어 있는데, 가만히 씹어보고 곰곰히 생각해 보면 어떤 개념과 단어들보다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포착하는 지경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고 합니다. 제가 처음 화이트헤드의 단어를 접했을 때는 꼭 에세이같더군요. 파악, 향유, 만족, 창조성 등 이러한 단어군은 어려운 에세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또 다른 면에서는 꼭 공학책 같기도 했었습니다. 객체화, 사회, 결합체, 초기위상, 후기위상, 물리, 관념, 연장, 연장적 연속체 등등 말이지요. 하지만 화이트헤드의 단어는 에세이나 공학에 쓰이는 단어라고 하기 보다는 언어의 관념적 측면과 감각적 측면을 가장 조화롭게 구사하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이해했던 에세이적인 단어는 지금 제 생각에는 어느 공학 단어보다 탄탄하고 완결된 뜻을 그 안에 담고 있고, 그 역도 가능합니다. 오히려 기존 단어가 가지고 있는 투박성이나 질감의 둔탁성을 넘어서서, 화이트헤드의 언어는 정말 마이크로한 면을 투시할 수 있는 고해상도의 언어라고 하여도 그리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몇 미크론 몇 옹스트럼의 미묘한 차이도 분석해 낼 수 있는 언어의 칼날이 그에게는 탁월하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추상성을 담보하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여하간 그의 언어는 기존의 언어와는 다른 맛이 있습니다. 감각적 측면과 관념적 측면이 동시에 맞물린 언어기획은 끊임없이 세상을 낮설게 하고 우리가 세상에 익숙해 왔던 방식을 순간순간 교란시키는 묘한획책의 묘를 담고 있습니다. 손톱의 때를 가지고 화이트헤드의 언어 안에서는 저것이 현실적 존재이냐, 단지 결합체이냐, 사회냐, 하는 다양한 방식의 분석이 가능하기에 손톱의 때도 그냥 보이지 않습니다. 손톱의 때는 어찌 보면 엄청난 사회입니다. 그 자체의 독자적인 생존력을 간직하고 있는 막강한 사회입니다. 앞으로 개인적으로 화이트헤드의 언어와 사유의 문제, 그리고 형이상학에 있어서의 언어의 문제를 접근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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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성을 궁극적 실재로 본 것은 화이트헤드가 처음이 아니다. 자연과 신의 관계에 대한 철학사의 논쟁속에 이미 그것은 배태되어 있었으며, 화이트헤드에게 직접적 영향을 준 인물로서 베르르송은 궁극적 실재로서 창조성을 이야기하면서 진행과 과정,진화속에서 생성되는 창조성이야말로 궁극적 실재로서 그에게서는(화이트헤드에게서와는 달리) 신과 동일시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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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말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것도 아니라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베르그송은 화이트헤드에 많은 영향을 준 사람입니다. 김경재 교수님은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를 일단의 과정사상가로 분류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주 미묘한 차이를 이 둘 사이에서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의 시간론의 차이를 본격적으로 다룬 저서가 바로 오영환 교수의 <화이트헤드와 인간의 시간경험>이라는 책입니다. 저는 베르그송에 대한 매력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의 시간공간에 대한 분석이라든지, 그 수사학은 참 담백하면서도 예리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화이트헤드가 창조성을 궁극적인 차원으로 본 면은 가까이는 베르그송 뿐만 아니라 멀리는 헬라클레이토스에 이르기까지 정신사적인 지류의 맥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철학박사나 전문가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님의 질문에 대한 저의 솔직한 견해를 부담없이 이렇게 기술하였으니 내용 가운데에서 껄끄러운 면이 있었다면 널리 혜량하여 주시고, 앞으로도 더욱 다양하고 깊은 대화를 전개해 나아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그럼 질문 고마웠고, 저의 대답이 불충분하거나 더욱 더 논의할 바가 있다면 격의없이 대화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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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철학박사나 전문가는 아니다. 그러나 직접 철학을 하는 자 중의 한명이다. 나의 일련의 문제제기 자체에 논리적 맹점이 있다거나 잘못 이해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대화해 나갔으면 한다. 학문을 함에 있어 극장의 우상에 빠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이글을 적었다. 내가 옳다는 심정에서 이 글을 적은 것을 아니다. 나는 단지 궁금할 뿐이며, 나와 같은 feeling이 나 혼자만의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화이트헤드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고 있는 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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